(7)기로에 선 미술(5~13세기)
5)신성과욕과 오만이 소환한 인간성 회복 운동(12~13세기)
인트로로 전편에서 장황하게 "스테인드 글라스"를 설명하며 세부 사항을 언급하지 않은 것 같아서~~
*Stained glass
색유리를 이어 붙이거나 유리에 색을 칠하여 무늬나 그림을 나타낸 장식용 판유리. 유리공예의 한 종류로, 색을 넣은 유리를 틀에 부어 평면 형태를 구성하는 것이다. 한국어로 풀어 쓰면 '염색된 유리, 색유리 그림' 정도로 말할 수 있으며, '유리화'라고 순화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복잡한 설명은 링크로 처리합니다.
관심있으면 참조..
https://naver.me/xbtMiQjk
현대에도 여전히 사랑받으며
사진은 대만 까오슝입니다!
12세기는 십자군 원정의 시대였고 의미없었던 이슬람과의 충돌과 광기어린 약탈은 1291년에 종식되었다..
십자군 518년 전쟁
*십자군
십자군 전쟁(영어: Crusades)은 중세 라틴 교회의 공인을 받은 원정대와 이슬람 군대 사이에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종교전쟁(교황의 권력을 찾기 위한 전쟁)이다. 좁은 의미의 십자군이라고 하면 성지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지중해 동해안 지역에서 진행된 전쟁들을 가리키나, 넓은 의미에서 중세의 기독교회에서 주동한 다른 전쟁들을 십자군으로 보는 관점 또한 존재한다. 이교도나 이단의 토벌, 가톨릭 집단 내부의 분쟁, 정치적 이득 등 전쟁의 동기는 매우 다양했다. 십자군 시대에는 '십자군'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1760년경을 전후하여 처음 사용례가 나타난다.
십자군의 원정도..
시민 십자군의 출발
서유럽의 원정대가 아랍으로 군사적 이동뿐만 아니라 접촉을 통한 문화적 교류가 수반되었다.
원정대가 가져온 비잔틴과 이스람의 기술과 장식스타일은 장인으로 전락한 서유럽의 예술가들에게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는 영감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세 암흑기의 도래와 함께 소멸되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 거꾸로 아랍어로 번역되어 유럽으로 재유입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스콜라 철학이 정립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정복전쟁을 통한 동방과의 교류로 베네치아, 피렌체등 아랍을 향하는 길목의 도시들이 전쟁 그리고 상업의 특수를 누리면서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초석이 된 것도 십자군 원정이 당연히 일조~~
전쟁의 주동자는 교회와 교황으로 13세기 원정이 처참한 실패로 종결되기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으며 곰브리치는 지금은 일상화된 "대성당의 시대"라는 신조어로 이 시대를 규정하기도..
프랑스 고딕 성당의 최대 규모로 언급되는 아미앵 성당..
"13세기는 대성당의 시대로 성당을 중심으로 모든 분야의 미술의 각자의 의무를 하고 있었다.
14세기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나 더이상 성당이 구심점이 되지는 못하였다."
제가 전편에서 장황하게 나열하였던 중세 성당 중심의 예술을 곰브리치는 간략하게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중세의 실세였던 주교들이 경쟁적으로 왕족과 백성들을 신앙심으로 닥달하여 자신의 영달과 권위를 위하여 축조하던 "대성당의 시대"..
뮤지컬 "로테르담의 곱추"에서 콰지모도가 "대성당의 시대"라는 레퍼토리를 부르는데 곰브리치가 언급한 신조어인지는 몰랐네요!
지금도 문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들은 장대한 규모의 성당내부에서 인간적이고 사소한 감정은 초라하게 느껴짐을 피부로 느끼면서 "인간이 만들어 낸 과욕"이 현대에도 여전히 진행중임에 쓴 웃음을 짓기도 합니다.
로마네스크에 이어 중세를 대표하는 건축과 미술이 십자군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나 그들의 횡포가 극도에 달했을때 성당의 규모도 정점을 이룬 역사의 아이러니~~
전편에서 샤르뜨르 성당을 일례로 기술한대로 13세기의 대성당은 건축, 조각, 유리화, 회화가 집대성된 종합 예술로 자리잡는다.
주교들간의 성당 건축 경쟁이 치열하여지면서 장인으로 전락한 예술가들의 개인 창작 개성을 일부 인정 천편 일률적이었던 미술에서 탈피하여 정적인 조각 대신 인물의 표정과 자세에 사실감의 부여가 허용되고, 회화도 성모자상이나 성인의 얼굴에 상세한 묘사와 감정의 표현이 허용되었지만 제가 본 성당의 그림들은 "근엄한 얼굴, 늙은 아기 예수, 무표정한 초상화"가 전부이던데 어디 보관되어 있나요?ㅎ
성당의 변화로 인하여 첫째로 신성시되던 예수의 인간적 면모와 삶, 고난등이 거론되며 교회중심의 신앙이 "신앙의 개인화"로 진행되고, 둘째로 이슬람을 통한 고대철학의 유입으로 "인문주의적인 사고"가 다시 발아하였으며, 셋째로 신앙의 집대성을 위해 장려한 스콜라 철학이 고대철학과 접목하며 신앙과 이성의 조화로 단순히 초월적인것만 강조할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과 결합될수있다는 인식의 확산을 제시했다.
중세가 도래하며 5세기인 그리스 로마 미술가들은 인간적인 표현을 추구했으나, 신성을 추구한 고딕에서는 이들이 제시한 방법과 기교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여 성경 말씀을 감동적이며 신빙성있게 전달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작품에는 의미가 부여되지 않고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여 신자들이 위안과 교화되기 위한 수단이 된것으로 중세 미술의 요약되겠습니다.(우찌 망구 혼자 생각인지 모르지만 "오직 예수"로 귀결되는 현대 교회의 전도 같은 느낌이 들죠?)
중세에는 현재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초상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나 물건등 대상을 모델로 화가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보고 인습적으로 인물을 그리고 왕은 왕관과 홀, 주교는 관이나 홀장등 직함을 나타내는 표식을 묘사하고 이름을 하면등에 넣었다.
종교적 주제와 상징을 표현하는 것으로 한정하여 개인의 특성보다는 경건함을 표하는 것이 목적으로 발달하면서 현시대에 우리가 보면 전혀 사실성없고 표정없는 똑같이 보이는 얼굴에 갑갑하여 호감을 느끼면 오히려 이상한 취급..
*왕홀(王笏), sceptre(영국식), scepter(미국식)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들고 다니는 봉. 성경에는 '철장'이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비유적으로 지배권, 통치권을 뜻하기도 한다.
옛 그리스어의 스켑트론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스켑트론은 원래 노인들의 지팡이를 뜻하는 단어였다. 이것이 옛 로마에서 라틴어에 수용되면서 공직자의 권력의 징표라는 뉘앙스가 추가되었고, 영어에선 아예 왕의 상징이 되었다.
*홀장(Crosier)
주교 지팡이(라틴어: Baculus Pastoralis)는 기독교의 고위 성직자인 주교가 휴대하는 지팡이로, 소유주의 직무를 상징한 것이다. 그외 사용되는 고위 성직자의 상징으로는 주교관과 주교 반지가 있다.
한 손에 홀장을 들고 발치에 주교관을 내려놓은 마이라의 주교 성 니콜라우스가 다른 손에는 자신의 상징인 골든벨이 얹힌 성경을 안고 있다.
중세라도 예외의 사건이 없겠는가?
프랑스 루이9세가 영국왕 헨리3세에게 코끼리를 선물한다..
섬놈 살짝 무시하는 선물아니었는지!
(가쉽으로 삼국지에도 조조에게 조공된 코끼리와 어린 아들의 기지 이야기가 있죠~~)
런던탑에서 전시하게하였고 화가가 그린 엉성한 코끼리 그림에서 곰브리치는 중세의 화가들도 비례를 정확히 알았다고
언급하기도~~
영국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 왕실의 요청으로 대륙의 각국에서 진귀한 동물들이 선물로 도착..
런던탑 동물원이 당대에 생겼다고 하는군요!
*런던탑..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인 1066년에 세워진 요새를 기반으로 건축되었다. 런던탑의 명칭은 1078년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에 새로운 지배자가 들어섰음을 상징하는 건물로서 세운 화이트 타워에서 유래되었다.
13세기에는 종교의 강요로 만들어진 비잔틴 로마네스크 우선 풍토에서 탈피하여 십자군 원정이 종식된 시점에는 고딕의 성당내에 자연적이고 섬세한 묘사의 화풍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곰브리치는
"미술사 서적은 대부분 조토의 등장부터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
이 위대한 화가의 등장으로 새로운 미술이 시작되었다고 모두들 확신하기 때문이다."고 극찬을 하면서 중세를 마감합니다..
저도 그의 의견을 존중하여 피렌체의 화가이자 건축가이며 르네상스시대를 개막한 장본인으로 알려진 피렌체의 "조토 디 본디네(1267~1337)로 엄청 길고 서술하기 힘들었던 중세시대를 마감하고 르네상스시대의 시작을 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