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사진기호와 문자기호의 비동일성과 동일성, 그 패러독스
-지상으로 내려온 달
달
밤마다 둘은
동그랗게 빛난다
■ 미적 거리와 상호텍스트성
피조된 인간은 신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명제가 최근 꽂혔다. 기호학적으로 볼 때 언어만 텍스트가 아니라 세상 만물이 다 텍스트이다. 인간을 텍스트로 인식하는 순간, 인간은 텍스트로서 해석과 분석을 요구하는 메시지가 된다. 신이 우주라는 대서사를 짓는 작가라면, 인간은 그 텍스트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문장, 혹은 단락이다. 아니면 인간 단독으로도 육체와 정신은 신의 미적 의도가 구현된 형상이며, 생은 그 의도가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텍스트이다. 모든 텍스트가 그렇듯, 인간이라는 텍스트 역시 모호성과 다의성을 품고 있다. 신도 인간도 아닌 중간적 존재로서의 애매함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미적 속성이다.
인간의 중간성은 인간에게 가장 고유한 미적 거리를 확보하게 하는 실존적 숙명이다. 인간은 고독하고도 가장 아름다운 텍스트이다. 신의 작품으로서의 숙명과 그 작품을 스스로 비평하고 완성해나가야 하는 실존적 자유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중간적 존재라는 미적 거리의 불완전함 속에서 완전함을 지향하는 눈물겨운 투쟁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론적 위치이다. 삶이라는 텍스트를 스스로 읽고 고뇌하며, 매 순간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독특하고 빛나는 존재로 스스로를 완성해나간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신과의 거리, 짐승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미적 거리다.
아도르노에게 예술은 결코 세계의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화해의 언어도, 위안을 제공하는 매개도 아니다. 오히려 예술은 세계와 불화한 채로 존재하는 형식이며, 그 불화가 유지되는 간극이 바로 미적 거리다. 아도르노의 미학에서 미적 거리는 감상자의 태도 이전에, 작품이 세계를 대하는 존재 방식이다.
칸트에게 미적 거리가 무관심성의 조건이었다면, 아도르노는 순수한 관조를 의심한다. 관조는 너무 쉽게 현실을 잊게 만들고, 예술을 무해한 아름다움으로 길들인다고 본다. 아도르노에게 미적 거리는 오히려 불편함의 유지다. 예술은 이해되기를 거부함으로써만, 이해 가능한 세계에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역설이다. 이 거리는 작품의 형식 안에 존재한다.
테오도어 아도르노
디카시의 상호텍스트성도 사진기호와 문자기호의 미적 거리로도 구명해볼 수 있다. 사진기호와 문자기호가 나란히 놓여 하나의 텍스트를 이루지만, 그 둘은 결코 서로를 설명하거나 보완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미적 거리를 유지하며 미적 텍스트가 된다. 디카시의 미학은 두 기호가 유지하는 거리, 미적 거리에서 발생하는 상호텍스트성에 의해 성립한다. 이 거리는 결핍이 아니라, 디카시가 예술로 존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이 두 기호는 날시에서 유발된 동일한 시적 충동에 의해 거의 동시에 생성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두 기호가 같은 근원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어긋남이 디카시의 상호텍스트성을 작동시킨다.
앞에서 언급하듯 아도르노에게 예술은 세계를 동일화하지 않는다. 개념은 대상을 포획하려 하지만, 예술은 그 포획의 실패를 끝까지 견지한다. 이를 비동일성이라고 명명한다. 대상은 개념과 결코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예술은 바로 그 어긋남, 남아 있는 잔여, 말해지지 않는 것을 통해 진실에 접근한다.
디카시 「달」은 위에서 논의한 사진기호와 문자기호의 미적 거리를 염두에 두고 창작한 것이다. 따라서이 작품은. 비동일성의 동일성 미학을 가장 응축된 방식으로 구현한다. 이 작품에서 사진기호와 문자기호는 서로를 동일화하지 않는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설명하지 않고, 어느 쪽도 의미의 주권을 장악하지 않는다. 오히려 둘은 끝내 일치하지 않는 상태로, 서로를 긴장 속에 놓아둔다. 그 긴장이 바로 이 디카시의 미학적 핵심이다.
고향집 저녁 마당에서 진돗개 어미가 새끼를 품고 있는 장면. 사진기호는 이 장면을 사실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 사실성은 의미의 완결이 아니다. 사진은 무엇인가를 보여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아도르노의 말로 하면, 이 사진기호는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감각적 잔여를 고스란히 간직한다. ‘모성’, ‘보호’, ‘가족’ 같은 개념은 이 장면을 포획하려 하지만, 사진은 그 어떤 개념에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는다. 어미 개의 몸짓, 새끼들의 밀착, 저녁의 기운은 언제나 개념보다 많다.
사진기호는 이렇게 말 없는 방식으로 동일화를 거부한다. 그것은 이미 하나의 완결된 의미가 아니라, 의미 이전의 세계, 즉 날시가 감각적으로 현존하는 장이다.
여기에 놓인 문자기호의 주조는 달이다. 이 언술은 사진기호를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설명을 철저히 배반한다. 사진 속 어디에도 달은 없다. 달은 화면 밖의 존재이며, 우주적이고 추상적인 대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동일성이 발생한다. 문자기호는 사진기호와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작동한다. ‘달’이라는 언술은 사진 속 대상을 개념화하지 않고, 사진과 의미적 불일치를 일으킨다. 이 불일치는 오류가 아니라, 의도된 미적 전략이다.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문자기호는 개념이 대상을 지배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념 스스로의 불충분함을 드러내는 균열로 기능한다. ‘달’이라는 단어는 사진을 규정하지 않고, 사진 앞에서 스스로 흔들린다.
디카시 「달」에서 사진기호와 문자기호 사이에 형성되는 미적 거리는, 아도르노가 말한 비동일성의 미학적 장소다. 사진기호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문자기호는 추상적이고 우주적이다. 이 둘은 만나되 겹치지 않는다. 바로 이 겹치지 않음, 이 거리의 유지가 디카시를 예술로 만든다. 만약 문자기호가 사진기호에 가까워져 ‘어미’, ‘보호’, ‘사랑’ 같은 언술을 택했다면, 둘은 동일화되었을 것이고, 작품은 설명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문자기호는 사진기호와 끝내 동일해지지 않음으로써, 사진기호 안에 잠재된 의미를 더 넓은 차원으로 개방한다. 독자는 사진을 다시 보게 된다. 어미 개의 몸은 달처럼 새끼들을 비추는 존재로 전이되지만, 그 전이는 결코 확정되지 않는다. 의미는 항상 미끄러진다.
이 디카시에서 상호텍스트성은 조화나 상호 보완이 아니다. 그것은 비동일성의 공존이다. 사진기호는 문자기호를 필요로 하지만, 문자기호에 의해 해소되지 않는다. 문자기호 역시 사진기호 없이는 공허하지만, 사진기호에 흡수되지 않는다.
아도르노가 말했듯, 예술의 진리는 화해에 있지 않고 비화해의 지속에 있다. 디카시 「달」은 바로 그 비화해를 한 프레임 안에, 한 호흡 안에, 극순간으로 고정시킨다. 디카시 「달」은 사진기호와 문자기호가 끝내 하나가 되지 않음으로써 완성된다. 이 작품은 말해준다. 디카시의 본질은 결합이 아니라 거리, 통합이 아니라 비동일성에 있음으로 미적 거리를 유지한다. 날시에서 발생한 하나의 시적 충동은 사진기호와 문자기호로 분화되지만, 다시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 대신 둘은 서로를 향해 열려 있으면서도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상태로 공존한다. 그 상태가 바로 디카시라는 새로운 서정양식, 극순간 멀티언어예술의 미학적 정점이다.
둘이 비동일성의 미적 거리를 확보함에도 화학적 결합을 이루며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라는 패러독스 미학을 보이는 것은 달이라는 환유성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카시의 상호텍스트성은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라는 미적 거리의 미학이다. 사진기호와 문자기호는 서로를 낯설게 만드는 타자이면서 한 몸을 이룬다. 이를 오민석 교수는 사진기호와 문자기호의 배타적 동일성이라고 했다.
■ 진돗개 꽃눈이
디카시의 상호텍스트성을 미적 거리의 관계로 규정하며 꼭 사진기호와 문자기호의 관계를 배타성만으로 창작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사진기호와 문자기호의 관계가 밀착돼 어떤 경우에는 거의 동일성을 이룬다고 해서 디카시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사진기호와 문자기호의 거리가 너무 멀어져 미적 거리가 훼손되게 하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다. 이런 경우 그것들을 상쇄할 수 있는 미적 장치가 가해져야 할 것이다. 그 미적 장치는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미적 거리 훼손을 넘어서는 특별한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 아무튼 두 기호 간 미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서도 디카시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는 분명하다. 둘이 너무 가까우면 문자기호가 사진의 설명으로 그칠 수 있다. 또한 너무 멀면 사진기호와 문자기호가 화학적 결합이라는 하나의 텍스성에 균열이 발생할 수도 있다.
나는 목장을 경영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농대를 갔다. 그런데 대학 다니면서 그것이 시인의 꿈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래서 대학원에서 전공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원을 동경해 왔고, 지금 시골의 고향집 서재에 머물며 작은 연못에 펜스를 치고 기러기를 기르고 있다. 이번 디카시의 주인공인 꽃눈이도 내가 기르던 진돗개이다. 2022년 1월에 베트남 메콩대학교 초청으로 고향집을 떠나는 바람에 양도해줄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으로 데려가려고까지 했으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진돗개는 키우지 않기로 했다. 대신 기러기를 키운다.
고향집 작은 연못가에 기러기가 둥지를 만들고 낳은 알
첫댓글 새끼품고 있는 어미를 보며
빛나는 생을 들여다 보고
아마도 어미도 새끼도 그들의
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을
겁니다
보름달처럼
감사히 배움합니다
사실 교수님의 디카시 종종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이 디카시는 너무 가까이 다가왔던 기억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