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같은 회사’ 말고 직장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 (우석훈, 한겨레출판) 서평
정현철(시흥안산지역지회장)
드라마 D.P.(디피)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던 장면이 있다.
(석봉) “한호열 상병님 차라리 군대가 바뀔 거라고 하십시오”
(호열) “바꿀 수 있잖아. 우리가 바꾸면 되지”
(석봉) “저희 부대에 있는 수통 있지 않습니까. 거기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아십니까. '1953'. 6.25 때 쓰던 거라고... 수통도 안 바뀌는데 무슨...”
변화가 없으니 관행이 답습된다. 바뀔 거라는 기대가 사라진 곳에 악습이 대물림된다. 사병들에게 핸드폰을 쥐어 주고, 머리를 길수 있게 해 준다고 해서 구타와 가혹행위가 없어지지 않는다. 가혹행위가 없어지려면 관계가 수평적이어야 한다. 군대와 민주주의만큼 이질적인 단어 조합이 또 있을까. 하지만 있다. 삼성 민주주의, 병원 내 의사 민주주의. 금방 입에 붙지 않아 소리 내어 읽어 보아야 한다. 21세 기지만, 대한민국의 회사는 봉건제도가 살아 숨 쉰다. 봉건시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사장은 왕이다. 여기에 조폭 형님 문화까지 얹혀 질서 정연한 서열문화를 꽃피웠다. 회사는 견고하게 짜인 서열로 운영된다.
회사원은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산다. 회사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낼 수 있을까. 우리나라 기업에도 민주주의를 탑재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한겨레출판) 저자 우석훈은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목표 타점은 낮게 잡았다. 출근이 덜 괴로운 회사. 이 정도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간혹 아니 생각보다 자주 세상의 변화를 목도한다. 멀리 4.19에서부터 가까이 2016년 촛불항쟁까지. 수많은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는 공간을 넓혀왔다. 시민의식도 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민주주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있다.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곳. 일터. 직장, 회사 혹은 기업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촛불항쟁 승리 뒤의 일상이 공허한 이유다. 2017년 이후 직장 갑질과 미투 운동이 봇물 터지듯 번졌다. 이을 통해 우리는 직장 민주주의가 사회 상식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확인했다.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기업문화를 이식받았다. 당시 일본은 군인이 지배하는 군국주의 시대였다. 기업도 군대처럼 운영됐다. 그게 그대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은 온 사회가 군대로부터 멀어지지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우리는 거꾸로 갔다.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군대문화는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다. 거기에 특유의 공채제도까지 보태져 기업의 선후배 문화를 정착시켰다. 수직적인 조직모델에 수직적인 관계 모델까지 더해진 것이다.
유럽도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기업에서 군대식 문화가 이식되었다. 인류가 만들어놓은 조직 중 가장 효율적인 조직이 군대와 교회다. 많은 기업들이 자연스럽게 군대 모델을 차용했다. 서구는 68혁명을 거치면서 직장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는 공장 문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기사로 유명한 도널드 럼볼 기자는 다음과 같이 직장 민주주의를 정의했다. ‘군대 모델로로부터 벗어나는 것‘. 대부분의 서구 기업들은 현재 직장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 여기에 더 나아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지역사회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 세상은 그렇게 변하는데 우리는 세습 자본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사회 곳곳에서 변화의 기운이 솟았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기업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제일 국정과제는 ‘기업 하기 좋은 나라‘였다. 이 기치 아래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치외법권 영역이 되었다. 직장 민주주의는 터부시 되었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위해 비정규직이 전면 허용되었다. 직장에는 1등 직원과 2등 직원이 생겨났다. 기업만 좋은 나라가 되었다. 민주주의는 더욱 멀어졌다.
저자는 기업에 민주주의 개념을 탑재시키기 위해 ‘직장 민주주의 인증제’ 도입을 주장한다. 많은 기업들이 국제표준화기구(ISO)로 부터 품질, 환경 인증 등을 획득하고 있다. 이 인증제도를 직장 민주주의에 활용하자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개혁이다. 청와대를 비롯한 공기업부터 인증제도를 시행하고,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곳까지 확대한다. 표준화된 매뉴얼과 절차서를 만든다. 팀장들과 임원들에게 정기적으로 직장 민주주의 교육을 시킨다. 비용에 비해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된다. 공기업, 대기업에는 확실한 효과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위에서의 개혁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나라는 나름 촘촘한 안전제도를 갖추고 있다. 안전 관련 인증제도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많은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죽는다. 노동자 참여가 없으면 법과 제도는 현장에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래서 요즘은 노동자 참여를 의무화시키는 방향으로 시스템이 변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위험성 평가 제도다.
아래로부터의 변화는 노조가 가장 강력하다. 노조는 직장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따라서 정부 차원에서 노조 설립을 지원하고, 노조 조직률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회사가 노조 활동을 방해하거나 개입하는 것은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 노조는 효과는 좋으나 시간이 좀 걸린다. 그리고 노조를 만들기 쉽지 않은 곳에는 한계가 있다.
노조만큼 강력하진 않지만 훨씬 빠르고, 쉽게 노동자가 참여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 이미 만들어져 있어서 새롭게 만들 필요도 없다. 몇 가지만 고쳐 쓰면 된다. 1980년도에 전두환 정권이 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제도다. 노사협의회법이다. 지금은 ‘노사협력 및 증진에 관한 법률’로 바뀌었다. 시대에 맞게 고쳐 쓰고 노동자를 위한 민주주의 제도로 역이용하면 된다. 노사협의회는 30인 이상 사업장에서는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노사협의도 정례적으로 해야 한다. 단체행동권은 없다. 이 점은 한계다.
어떻게 하면 노사협의회를 실질적 노동자 대변 기구로 만들 수 있을까. 지금의 노사협의회는 형식적으로 운영되거나 어용화되어 있다. 회사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다. 회사가 개입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법을 개정해 민주적이고 독립적으로 근로자 위원이 선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선출된 근로자 위원 활동을 유급으로 보장하고, 노사협의회 사무실도 제공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모여서 민주주의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회사 내에 있어야 한다. 단체행동권이 없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회사가 노사협의에 불성실하게 나오면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물론 노조가 있으면 노조가 노사협의회의 모든 역할을 흡수하면 된다.
민주주의는 체험이 중요하다. 민주주의를 맛본 사람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자유와 마찬가지다. 이렇게 직장 민주주의 인증제와 노조, 노사협의회가 만나면 좀 더 빨리 우리 기업에도 민주주의를 탑재할 수 있을 것이다.
1968년 도쿄의 한 신문지국에서 일하던 29세 노동자가 사망했다. 당시 일본법에 따르면 이 노동자의 죽음은 기업의 책임이 아니었다. 가족과 동료들은 이 노동자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죽었다고 생각했다.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5년이 넘게 투쟁한 결과 마침내 기업의 책임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 죽음을 나타내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다. Karoshi(과로사). 우리가 아는 과로사라는 말은 이렇게 세상에 등장했다. 영어도 '일하다가 죽다'를 뜻하는 동사 (to work oneself to death)가 있기는 하지만 명사화된 낱말은 따로 없었다. Karoshi(과로사)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처럼 새로운 개념은 지난한 투쟁을 통해 만들어진다.
우리 기업에 민주주의를 탑재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칠 것이다. 그렇지만 가야 할 길이고, 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회사 가는 길이 덜 괴로우면 우리의 행복은 조금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