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옛날 이야기 -97-
(조선족이 되신 연변 紛圭고모님을 그리며)
전에 이야기 한데로 나에게는 중국에 조선족으로 남아계신 두 분의 고모님이 계신다.
한분은 지난 호에 이야기한 티에리(鐵力)에 사시는 둘째 할아버지 딸이신 (林銀圭)
고모님이고 또 한분은 넷째 할아버지의 딸인 연변에 사시는 고모님(林紛圭)이신데
2007년 4월4일 노환으로 84세의 나이로 소천하셨다.
소학교때 나보다 한학년 아래였었는데 처녀때 참 미인이셨다. (옛날에는 이렇게 나
이많은 학생이 많았다)이 고모역시 5학년때 이웃 몰산(帽儿山)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선생님께 시집을 가셨다.
신혼때인데도 나는 혼자 몰산(帽儿山)의 고모집에가서 신혼부부의 단칸방에서 눈
치없이 자고 오곤 하였다. 학교선생님 이기에 책이 참으로 많았었다. 그때 밤새워
읽었던 중에는 삼국지와 래미제라불 톨스토이등 수많은 책을 밤을새워가며 읽었던
기억이난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고모부에게 "삥탕훌러"를 사달라고 졸랐던일도 기
억이 난다. 이 고모부는 키는 좀 작았으나 미남에다 무척 지적이고 인자 하셨다.
중국과의 국교가 없어 서신왕래를 전혀 할 수 없었던 것이 1983년경부터 중국에
편지를 송부할 수있게 되어 우리는 중국에 놓아두고 온 두 고모를 찾기 위하여 넷
째 할아버지의 딸의 남편인 고모부가 해방때 아성(阿城)과 상지(尙志)사이에 있는
몰산(帽儿山)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던 학교에 편지를 송부하였다.
그것이 거의 1년 만에 기적적으로 회신이 왔다. 우리 편지가 몰산(帽儿山) 학교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고모부는 이곳에 안계셨으나 그 학교 교장선생님이 편지의 수신
자인 고모부의 이름을 보고 연변에 사시는 고모부에게 보내주어 연락이 닿았던 것
이다. 참으로 기적같은 이야기이다.
고모부는 해방 후 1948년 당시 하얼빈에 주둔하고 있던 주덕해장군의 비서실장으
로 근무하고 있었기에 주덕해가 연변지구 서기장으로 가게 되어 1950년 가족전원
이 연변으로 이사 하였던것이다. 그리고 1956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연변대학 당
위서기로 1961년엔 연변주위서기를 역임하셨는데 문화혁명 때 가택에 강금 하다
싶이 하였고 아들딸들은 뿔뿔이 시골로 쫏겨가야 했기에 무척 심적 고통을 받으셨
다 한다. 그리고 등소평이 등극하기 6개월전에 비관하여 자살을 하셨다한다.
(조곰만 더 참으셨더러면 좋았을텐데....................)
1978년 조남기 서기(후에는 중국 군부 상장(대장)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역임)
의 도움으로 고모부의 명예가 회복되었고 그 후 4남1녀의 자식들은 승승장구 출세
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1985년 큰아들이 연변자치주 문화국장으로 있을 때 연변 예술학교 예술단을 이끌
고 미국 전역을 돌면서 공연을 한 것을 한국 정부에서 알고 중국교포의 초청이 어려
웠던 그 시절인데도 불구하고 특별히 정부에서 협조해 주어서 고모님과 고모님의
큰 아들을 초청 할 수가 있었다.
드디어 1986년 4월 중순에 고모님과 고모의 큰아들이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48년 만에 만나는고모는 그 예뻤던 얼굴은 할머니가 다 되어있었고 회색 바지에
회색 윗도리를 입고 나오시는데 (완전 중국 인민복) 그 감격은 지금도 잊혀지 않는
다.
고모는 한국에 두 달을 체류하시면서 고향도 가보시고 모든 친척들을 만나시고 6월
에 중국으로가시는데 마침 그때 우리나라에서 그 해 가을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
림픽이 열리는 것을 그 당시 수교전이 였기에 중국과 한국 간에 정부나 민간인의 교
류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중국 정부에 보해달라며 한국 올림픽준비위원회에서 각종
홍보자료와 호 돌이, 영화 필름, 녹화테잎 등 10여 상자를 고모와 그 큰아들에게 주
면서 중국정부의 유관기관에 전달해달고 부탁해 왔었다.
비행장에 도착하여 짐을 부치는데 KBS 에서 연변 TV방속국에 기증한 짐과 정부에
서 준 짐들이 너무많아 운임이 수십만 원이 나왔다. KBS의 실무자와 정부 실무자
가 짐을 싣고 공항까지 따라 나왔으나 운임까지는 책임 못진다 하여 결국 그 운임은
내가 카드로 결제할수밖에 없었다. ㅎ
그리고 한국정부가 중국정부에 홍보해달라며 한국올림픽준비위원회에서 각종 홍보
자료와 호돌이, 영화 필름, 녹화테잎 등이 자료는 고모의 아들이 북경의 유관 기관
에 전달 한 후 1개월만에 중국중앙방송에서 중국체육대표단이 한국 아시안게임에
참가한다고 발표 하였다.
그때의 민간외교의 일익을 담당했던 고모의 큰아들은 그 후 연변TV 방송국장을 역
임하였다. 그리고 KBS와 MBC등에서 중국진출을 위하여 즉 연변방속국 국장인
고모의 큰아들 김희관을 자주 한국에 초청하였다. 덕택에 나도 방송국 구경을 자주
하게 되었다.
1991년 10월17일~20일까지, 고모의 큰아들인 연변TV 방송국 김희관 국장의
초청으로 MBC 가 인솔하는 한국예술단이 사상 처음으로 연변을 방문하여 공연하
였는데 이덕화씨가 사회를 보고 주현미, 최진희, 이선희, 김완선, 이상은 등 유명
가수들이 연변예술극장 무대에서 동포들을 위해 새벽 4시까지 공연을 했고 극장
안팎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니 그 당시 한국 연예인이 연변조선족에게 얼마
나 인기가 많았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았었다.
고모의 둘째 아들은 도문시장을 역임한 후 주위선전부장을 거쳐 현재 연변대학
당위서기로(40년 전에 아버지가 하셨던) 재직 중이고 셋째 아들은 연변 교통국에
서 처장으로 근무하다 퇴직하였고, 넷째 아들은 미국유학 후 다시 일본 동경대학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일본문제연구소 부소장에 재직
중이며 미국, 일본, 한국에 관한 중국의 외교정책 연구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한
다. 그리고 딸은 의사이며 사위는 현재 연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금 손자손녀들은 한국, 일본, 영국, 싱가포르와 북경과 진황도에서 열심히 공부
하며 살고 있다. 연변고모는 이렇게 노후를 자식들의 출세를 지켜보며 84세까지
행복하게 사시다가 2007년4월4일 노환으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고모님의 명복을 빈다.
그 후 나는 고모의 큰아들이 추천하는 중국조선족들의 고국방문 초청을 중국에 발
송하기 시작하여 수많은 조선족들이 나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내가
중국 조선족들을 너무 많이 초청을 하였더니 중부경찰서 에서 나의 사무실로 찾아
와 돈을 얼마니 받고 초청해 주었냐고물어볼 정도였다. (돈받고 초청장을 보넸더
라면 떼돈을 벌었을테데...)
지금 중국의 조선족은 한국기업이 중국에 진출함으로 많은 조선족 젊은이들은 한국
기업에 취직 하거나 같이 사업을 하여 성공한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앞으로는 중국
의 조선족은 한국사람들보다 중국을 잘 알고 또 언어도 문제없으며 중국인들 보다
한국을 잘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조선족은 타 민족에 비하여 중국내서 성공할 수 있
는 기회가 많으리라 확신한다.
아마도 중국은 앞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나라임에 중국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조선족중에는 반드시 한국 현대의 정주영 회장과 삼성의 이병철 회장 같은 사
람이 나올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나는 조선족이 타 민족에 비해 우수하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기에 조
선족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성공하는 조선족이 많이 나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林紛圭 고모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