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여름향기최고 / 포토출처 - 드라마 여름향기
제 목 : deathcard님의 다시 쓰는 여름향기 엔딩(7-2회)
고속버스는 어느새 서울 궁내동 톨게이트를 벗어나고 있었다. 혜원은
크리스마스인데다 연말이라 승차권이 없을거라는 생각을 미쳐 못하고
터미널에 왔다가 매진이라는 창구직원의 말에 망연자실했었다. 혜원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대합실에 가득한 인파속을 헤집으며 승차권을 구
걸했다. 하지만 어느누구하나 선뜻 표를 내놓지 않았다. 몇배를 주겠다
고 했지만 표를 팔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포기를 하려고 대합실 의자
에 앉아있는데 중년의 늙수그레한 여인이 다가와 표를 구하냐고 물었다.
그 여인은 노골적으로 세배를 주면 표를 주겠노라고 했다. 혜원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양 기뻤다. 열배 아니라 백배를 달라고 해도 주고 싶었다.
혜원은 버스를 타고서야 중년의 그 여인이 비로소 암표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버스가 출발할 때 차창밖으로 그 여인이
다른 사람들한테 다가가서 말을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혜원은 버스가 원주부근을 지날쯤에 휴대폰을 꺼냈다.
고속도로가 정체를 빚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민우씨..혜원이예요."
"아...잠깐만요."
민우는 대풍과 장미의 눈치를 보며 거실로 나갔다.
"혜원씨, 어디에요."
"민우씨, 저 어디 좀 갔다 올께요. 아마 내일까지 못올 것 같아요.
그래서 내일 마무리 작업하는데 못갈 것 같아서요. 미안해요."
"......"
민우는 한동안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민우씨...."
"그래요 혜원씨, 그런데 정재씨는 어때요?"
"정재오빠...괜찮아요. 그럼 다녀와서 뵐께요."
민우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서 있었다.
"민우씨, 누구예요? 혜원이죠. 혜원이 맞죠?"
장미는 방으로 들어서는 민우를 다그치듯 묻는다.
"철이엄마, 척하면 삼천리지 뭐하러 물어봐. 민우 미안하게..."
대풍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눈을 게스츠레하게 뜨고 코를 후비며
장미를 내려본다.
"대풍씨! 지금 뭐해요! 사람이 지저분하게 왜 그래요! 아이 불결해."
버스가 강릉에 도착하자 이미 도시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혜원은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배가 고팠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저, 속초가는 버스....있어요?"
혜원은 매표창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네, 막차가 있어요 한 오분만 늦었어도 못탈뻔 했군요."
혜원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만원을 내밀고 표를 받자 마자 거스름돈도
받지않고 승차장으로 달려갔다. 혜원은 차에 오르자 비로소 긴장을 풀
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다. 버스안에는 사람들
이 별로 없었다.혜원은 운전기사뒤에 앉았다.
"저... 기사 아저씨 이차..속초에 몇시에 도착해요?"
"예...열시반에 도착합니다."
혜원은 오금이 저려왔다. `오늘 들어갈수 있을까` 혜원은 차창밖의 어
둠속을 응시했다. 차가 한 사십분 달렸을까 갑자기 길이 좁아지기 시
작하는것과 동시에 바람처럼 달리던 차의 속도가 느려졌다.
"아저씨. 아직 멀었어요? 여기 어디예요? 근데 갑자기 차 속도가 왜 이
렇게 줄었어요?"
기사는 참 말많은 아가씨네 하는 표정으로 혜원을 돌아본다.
"여기는 주문진 이고요 고속도로 종점입니다. 지금부턴 편도 일차로 국
도입니다. 아까처럼 달리다간 사고 납니다."
혜원은 버스 앞유리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열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차는 어지러운 국도를 굽이쳐 돌아 열시 사십오분이 되어 속초에 도착
했다. 혜원은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터미널을 나와 택시 승강장으로
갔다. 줄지어 늘어선 택시가 눈에 들어왔다. 몇멏 기사들이 터미널을나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아저씨... 지금 신흥사쪽으로 갈수...있어요?"
"이봐요. 무조건 타면 어떡합니까."
기사는 짜증난다는 듯이 투털거린다.
"지금 못...가요?"
혜원은 초조감으로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그쪽으로 갈 차는 없어요. 길도 얼마나 험한데...."
"아저씨, 달라는대로 드릴께요 제발 좀 가 주세요. 네?"
기사는 혜원이 말을 마치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혜원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 울다가 웃는 심정이었다. 차는 마치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혜원은 전조등뒤로 빠르게 사라지는 도로를 보면
서 어지럼증을 느꼈다. 말로만 듣던 총알 택시였다. 택시는 이십분정도
를 달리더니 멈춰섰다.
"손님, 다 왔습니다."
"아..저씨, 여기 어디..예요?"
혜원은 어두운 차창밖을 두리번거렸다.
"신흥사 갈려면 여기 내려서 걸어가야 합니다. 저기 간판이 희미하게
보이죠."
기사는 좌측 전조등 불빛에 절반만 보이는 표지판을 가리켰다.
"아니...저 아저씨 그냥 들어..가면 되잖아요. 길이... 충분 하잖아요."
기사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혜원을 돌아본다.
"이봐요. 그건 벌건 대낮에나 가능한 일이지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는
차가 못들어가요. 내릴겁니까 말겁니까."
"아저씨... 이러시면 약속이 틀리...잖아요."
혜원은 두려움과 원망스런 눈으로 기사를 쳐다본다.
"이봐요. 아가씨. 아가씨가 언제 신흥사가자고 했나요? 신흥사쪽으로
가자고 했잖아요. 말이 아다르고 어다른데.... 그리고 신흥사가자고 했으
면 애초에 오지를 않았어요."
기사는 창문을 열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혜원은 한기를 느끼며 두손
으로
양어깨를 감싸쥐었다. 여기서 조금만 걸어 가면 된다. 그런데 어두워서
너무 무섭다. 시내에 가서 자고 내일올까? 혜원은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저씨... 내릴...께요 얼마예요?"
기사는 혜원을 내려놓자 마자 차를 돌려 어둠속으로 쏜살같이 사라졌
다. 혜원은 주위를 둘러봤다. 보이는 거라곤 별이 총총한 하늘과 짙은
어둠뿐이었다. 삼년전 심장이식 수술후 요양한다고 여기에 딱 한번 와
보곤 이번이 첨이다. 혜원은 삼년전의 기억을 되살려 조심스레 왼쪽산
길로 들어섰다. 여기서 한 이킬로미터만 걸어가면 된다. 혜원은 조심스
레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혜원은 얼마안가 곧 눈앞이 캄캄해져왔다.
처음 들어섰을때와는 달리 들어갈수록 어둠이 휘감고 있는 우거진 나
무와 숲 때문에 지척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얼마쯤 더 들어왔을때는
들어온 방향조차 잃어버렸다. 방향감각을 상실해 버린것이다. 한발짝만
움직이면 천길 낭떨어지로 떨어질것만 같았다. 혜원의 몸은 식은땀으
로 흠뻑젖어 있었다. 혜원은 한기를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
겨울의 추위가 그녀의 몸을 빠르게 냉각시키고 있었다. 혜원은 무서운
공포감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것만 같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
백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나 휴대폰을 보는 순간 혜원은 다시한번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설상가상이라고 휴대폰이 죽어있었다.혜원은 입
술이 파래지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하고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전원은 들어오지 않았다. 매서운 칼바람이 혜원
의 콧잔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혜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옥같은 어
둠이 목을 조여오는것 같았다. 그녀는 심장이 얼어붙는것 같은 추위와
공포를 느끼며 죽음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산아래 산사에서 희미한 등불이 빛나고 있었다. 정재는 발코니 창틀에
기대어 굳은 듯이 등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산짐승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정재는 담배를 꺼내려고 바지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오래전에 끊었던 담배지만 올초부터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정재의 손에 잡혀 나온건 휴대폰이었다. 정재는 휴대
폰을 다시 집어넣으려다가 낮에 바닷가에서 확인했던 혜원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정재는 휴대폰을 열어 음성사서함을 누르고 귀에다 댔다.
"오빠..정재오빠 나 혜원이야. 나 오빠 어디 갔는지 알아 나 지금 속초
갈거야."
정재는 한동안 휴대폰을 귀에 댄채 꼼짝을 하지 않았다. 머리가 텅비
는 느낌이 들면서 조금전에 마셨던 술이 확 깨는것같았다. 정재는 메
시지가 찍힌 시간을 확인했다. 메시지가 찍힌 시간이 오후 두시 십오
분이었다. 정재는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강남고속버스터미
널까지 삼십분, 늦어도 네시에 고속버스를 탔을 것이다. 영동고속도로
가 밀린다고 생각하면 늦어도 여덟시에서 아홉시면 강릉에 도착한다.
강릉에서 속초까지 한시간반. 하지만 택시는 그 어떤 경우에도 밤에는
여기까지는 들어오지 않는다. 정재는 현재 시간을 봤다. 시간을 보자
정재는 하늘이 무너지는것같은 충격을 받는다. 지금이 새벽두시 사십
분이다. 정재는 외투를 걸치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모든 것을 꽁꽁
얼게 만들 것 같은 차가운 산바람이 별장마당의 소나무를 흔들고 있었
다. 솔잎들이 서로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음산하기 이를데 없었다.정재
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정재는 비탈진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
재는 어둠을 헤치며 클락션을 눌러댔다. 그의 눈은 땅에 떨어진 바늘
이라도 찾겠다는 듯이 운전대 창문에 얼굴을 들고 전조등이 비추는 곳
구석구석을 두리번 거렸다. 정재의 온몸에 식은땀이 스며들면서 속옷
이 축축히 젖기 시작했다. 그렇게 잡초로 뒤엉킨 울퉁불퉁한 길을 한
십분쯤 왔을까 정재는 차를 멈췄다. 전조등 불빛의 끄트머리에 시커먼
바위같은 것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것은 소나무에 기댄채 마치 바위같
이 눌러 앉아있는 것 같았다. 정재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정재는
운전대에 머리를 숙이고 제발 사람이 아니길 기도했다. 정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재는 넋이 나간 듯 천천히 차문을 열고 차앞으로 걸
어 갔다. 정재는 자신의 발이 돌덩이를 매달아놓은 것 같이 무거운 느
낌을 받는다. 정재는 다가갈수록 심해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정재는
떨리는 손으로 검은 물체를 만졌다.
`아냐...혜원이는 아냐...절대 아냐...`
정재는 애써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려했다. 정재는 고개를 숙이고 웅크
리고있는 혜원의 얼굴을 떨리는 두손으로 받쳐들었다.
"혜....혜원...아...안돼.."
정재는 아득한 현기증을 느끼며 혜원의 몸을 끌어 안았다. 그녀의 몸
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12)###############
"혜원아! 정신차려! 잠들면 안돼!"
정재는 혜원의 빰을 좌우로 세차게 때렸다. 그러나 그녀는 움직임이
없었다. 정재는 혜원은 겉옷을 살짝 헤치고 가슴에다 손을 얹었다. 미
세한 움직임이 손바닥에 감지되고 있었다. 그는 빠른 동작으로 윗도리를
벗어 혜원의 몸을 덮고 그녀를 두팔로 안고 차로 옮겼다. 그는 운전대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따뜻한 방으로 가야 할것인가, 아니면 병원으
로 가야할것인가를 망설였다.
`자칫 잘못하면 혜원이가 잘못될수도 있다. 어설프게 행동하느니 병원
가는게 낫다. 좀 멀더라도... 어차피 여기서 차를 돌리지도 못한다.`
정재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에 한기를 느끼며 가속패달을 밣
았다. 정재는 산길을 나와 속초시내쪽으로 우회전했다.
`혜원아, 잠들면 안돼... 잠들면 죽어`
"장갑, 신발 겉옷을 다 벗기고 손발을 드레싱해요. 이 간호사 청진기
좀 주고 빨리 체온을 체크해봐요."
의사는 간호사가 건네주는 청진기를 귀에다 꽂고 혜원의 가슴에 댄다.
청진기를 가슴에 대는 의사의 양미간이 일그러진다. 정재는 침대에 죽
은 듯이 축 늘어져 밀랍인형같은 혜원을 보지 못하고 벽에다 머리를
기대고 참담함에 전신에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혜원아, 이바보야. 여긴 왜 왔어`
정재는 벽에다 주먹질을 했다. 쿵하는 소리에 의사와 두명의 간호사의
눈길이 정재쪽으로 향한다.
"김간호사, 저사람 밖으로 내보내요!."
"선생님, 체온이 계속 떨어지고 있어요."
"지금 얼마입니까? 혈압은?"
"현재 체온이 32도 입니다만 계속 떨어지고 있어요. 혈압도 계속 떨어
지고 있어요."
"젖은옷 다 벗기고 담요로 덮어요. 김간호사 빨리 산소 호흡기 이리줘
요."
간호사는 혜원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옷에서 싸늘한 냉기가
확 뿜어나왔다. 그녀의 옷이 벗겨지고 담요가 덮여졌다. 의사가 산소호
흡기를 혜원의 입에다 덮었다. 응급실은 마치 불난것처럼 분주했다.
"병실로 빨리 옮깁시다! 김간호사, 빨리 302호실 히터 가동하라고해
요!"
응급실 문이 열리면서 이동식침대에 누운 혜원이 의사와 간호사에 의
해서 복도로 밀려나오고 있었다. 정재는 문옆 벽에 기대어 멍하니 망
막에 흐리게 맺히며 복도저만치 사라지는 이동식침대를 바라보았다.
정재는 벽에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그의 오른손등에서는 피가 흐
르고 있었다.
희미하게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새 먼동이 되어 창문을
스며들고 있었다. 정재는 혜원이 누운 침대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반쯤 열린 커튼을 열어제쳤다. 곧 아
침햇살이 혜원의 얼굴을 가득 비췄다. 정재는 가만히 다가가 혜원의
얼굴을 살폈다. 어둡고 차가운 세계에서 죽음의 공포와 맏닺뜨렸을 혜
원을 생각하니 정재는 가슴이 예리한 흉기로 찔리는 듯한 통증이 밀려
왔다. 그녀의 얼굴이 좌우로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산소마스크를
쓴 그녀의 얼굴이 땀에 젖어들고 있었다. 정재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재는 인터폰을 눌렀다.
"저. 이봐요. 여기 302호입니다. 환자가 의식이 돌아온 것 같습니다."
잠시후 의사가 눈을 비비며 간호사와 병실을 들어섰다. 의사는 다시
청진기를 혜원의 가슴에 갖다댔다.
"이간호사, 혈압과 체온을 한번 체크해봐요."
의사는 손을 혜원의 이마에 짚어보고는 양손을 가운호주머니에 집어넣
는다.
"선..생님, 어떻습니까?"
의사는 정재를 돌아본다. 정재는 여전히 불안과 초조감에 얼굴이 상기
되어있었다.
"급격한 체온저하로 인한 쇼크입니다. 그래도 천만다행이군요. 조금 늦
었더라면 심폐소생술을 시도해야하는 지경에까지 갈뻔했습니다. 지금
도 맥박이 매우 불규칙합니다."
"선생님 혈압과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어요."
"알았어요. 이간호사, 갑자기 떨어질수 있으니까 한동안 지켜봐요."
"잠깐 좀 나오실까요."
의사는 정재를 돌아보며 복도로 나오라고 한다.
"선생..님 왜 그러...십니까?"
병실을 나오자 의사는 가운을 여미며 도수 높은 안경너머로 정재를 올
려다 본다.
"저 환자분 심장병있죠?"
"예...그걸..어떻게..."
"심부전증이 있는 것 같습니다. 퇴원하는 대로 전문의한테 가봐요."
의사는 정재를 뒤로하고 멀어져간다.
"팀장님, 선배님 벌써 출근하셨네요."
상열은 사무실문을 빼꼼히 열며 들어선다. 상열은 여느때 같으면 대풍
의 도끼같은 눈이 문쪽을 향하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사무실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대풍의 심각한 얼굴에서 읽을수 있었다 대풍은 왼쪽팔로
턱을 괴고 심각한 표정으로 왼쪽벽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민우도
팔장을 끼고 사무실 반대편 창문너머에 시선을 두고 마치 동상처럼 서
있었다. 상열은 슬금슬금 자신의 책상에 가서 앉는다. 상열은 조심스럽
게 외투룰 벗고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사무실 분위기가 마치 움직이
지 않는 무거운 추가 달린 멈춰버린 시계같은 적막감이 돌고 있었다.
"선배..님 커피 타 드릴까요?"
"상열씨!"
"예! 선배...님."
상열은 대풍이 침묵을 깨고 갑자기 돌아서며 자신을 부르자 소스라치
게 놀란다.
"오늘 우리가 할 일이 뭐지?"
"예...그러니까..마무리작업이 잘되었나 한번 확인을 하고 공사완공 전반
에 대해서 이곳 대표이사님과 관련부서 팀장님한테 간단한 브리핑만
하면 끝나요. 그저께 관계자 몇분이 둘러보고 흡족한 표정을 지으시며
만족을 느끼시는 것 같았으니까 오늘은 그냥 통과의례로쯤으로 생각하
면 될겁니다. 하자 같은건 없을 겁니다."
"흠...그래..."
대풍은 등을 깊숙히 의자에 묻는다.
"그런...데 선배님. 혜원씨는....출근 안했어..요?"
대풍이 상열을 무표정하게 돌아본다.
"왜..? 혜원씨가 보고 싶어?"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뭐?"
대풍은 턱을 쑥 내밀고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래요..보고 싶..어요. 됐어요!"
상열은 얼굴이 벌개지면서 아침부터 또 웬 시비냐는 듯이 뚱한 표정으
로 언성을 높이며 대꾸한다.
"하긴..뭐, 이제 공사 끝났으니 서로 볼일도 없겠지... 혜원씬 일이 좀
있어서 오늘 못나와."
"왜요 선배님, 혜원씨 어디 아파요?"
"그게 무슨 소리야?"
대풍은 뭘 알고 있느냐는 듯이 되묻는다.
"혜원씨 하고 같이 일할 때 보니까...가끔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고통스
러워 할 때가 있던...대요."
민우가 돌아서며 상열에게 신선을 옮긴다. 민우는 상열의 말에 캄캄한
절망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상열씨, 그게 정말이야?"
대풍은 허리를 세우며 커진눈으로 상열을 본다.
"예...정말입니다. 어디 아프시냐고 물으면 괜찮다고 그러시던데....근데
제가 보기에는 몸이 굉장히 안좋아 보였어요. 호흡하기 힘들어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럴땐 꼭 가슴을 만지며 주저앉으시던데요."
대풍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민우를 쳐다본다. 상열을 바라보는 민
우는 동공이 멈춰버린 듯 움직임이 없다.
"민우...야.. 혜원씨 혹시..."
"선배님...혜원씨 혹시 뭐요?"
민우와 대풍을 번갈아 보는 상열의 눈이 올빼미의 눈처럼 커지고 있었
다.
"자넨 알 것 없네."
대풍은 다시 의자에 몸을 누인다.
"선배님, 정말 너무하시네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는데 선배님과
팀장님, 그리고 혜원씨와 같이 일한게 두달이 되었는데 이젠 서로 흉
금을 터놓고 얘기할 사이쯤은 되지 않았나요. 더군다나 선배님과 전
같은 고등학교 선후배사이인데...정말 너무 매몰차네요."
상열은 섭섭하다는 듯이 입술을 실룩거리며 대풍을 쏘아본다. 대풍은
고개를 들고 상열을 넌지시 쳐다본다.
"혜원씨, 심장병 있어.... 이제 됐어? 오늘 안나온건 그것과 관계없어."
"예..? 혜원씨..가 심장...병이 있어..요?"
"그만들 하고 일들 하지, 나 미래기획에 좀 같다 올게. 형하고 상열씨
는 점검좀해."
민우는 책상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서류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간다.
대풍과 상열의 시선이 사무실을 나가는 민우의 뒤를 쫒는다.
"선배님, 팀장님 표정봤어요? 심장이 내려앉은 사람 같았어요. 근데 전
이해할수 없는 것이 혜원씨가 심장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팀장님
이나 선배님이 제가 그런 얘기를 했다해서 왜 그렇게 놀라는지 이해를
못하겠네요....이건 사태의 심각성을 반증하는 것... 아닙...니까?"
대풍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상열을 바라본다.
사철나무가 추위에 아랑곳없이 접시같은 잎을 뽐내듯이 병실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사철나무뒤로 높고 높은 푸르른 하늘엔 두줄기 희디흰
밀크색 배기가스를 길게 수놓으며 항공기 두대가 나란히 날아가고 있었
다. 그것은 마치 넓고 긴 억새풀을 기어 다니는 달팽이처럼 흔적을 남기
며천천히 기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정재는 창틀에 기대어 무상무념에
잠긴 사람처럼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정재는 갑자기 생각난
듯 바지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여보세요? 이박사님?"
"아...박이사 자넨가?"
"예, 저 정잽니다."
"자네 지금 어딘가? 안 좋은 소식이 들리던데.."
"예..박사님..일이 좀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더 이상 묻지는 않겠네. 근데..."
"저 박사님, 실은 혜원이 때문인데요. 혜원이 요즘 병원에 옵니까?"
"아...! 혜원씨, 내가 요즘 대학에 강의 다니느라고 병원에 붙어 있는날
이 별로 없어. 다른 의사가 아마 진료를 했을지 몰라. 잠깐만..."
"민간호사! 심혜원씨 진료차트 좀 갖고 와요!"
전화기너머로 이박사가 간호사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흠...차트를 보니 최근에 혜원씨가 병원에 오지 않았어. 십
일월 이십이일날 일주일치 약을 한번 타가고 한번도 오지를 않았구만..
근 한달이 넘게 병원에 한번도 오지를 않았어 면역억제제를 계속먹어
줘야 하는데 진료도 받지 않고 약도 안타갔으니.. 이보게, 빨리 혜원씨
를 병원에 보내게 나도 괜히 미안하구먼.."
"아...아닙니다. 박사님.."
정재는 끝없는 나락으로 함몰되는 참담함이 가슴 밑바닥에서 솟구쳐
올랐다.
"오..빠.."
정재는 신음소리같은 나즈막한 소리에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혜원..아.."
혜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창문쪽을 보고 있었다.
"박사님 알겠습니다 그만 끊겠습니다."
정재는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넣고 침대로 갔다.
"오..빠..여기 어디..야?"
정재는 혜원이 말을 하자 콧날이 시큰해져오며 눈앞이 흐려졌다.
"응...여긴 말이...야..."
정재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의자에 앉았다. 눈앞이 자꾸
만 침침해졌다.
"오빠...지금..울..어? 정재 오빠가...울..때도 있어?"
혜원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정재를 쳐다본다. 그녀는 숨쉬기가
힘든지 입에서 나오는 말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혜원은 힘들게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돌린다. 그녀의 시선이 침대옆에 걸린 링겔병에 머물더니
테이블위에 놓인 가습기로 옮겨간다. 가습기에서 증기가 힘차게 뿜어
져 나오고 있었다.
"오..빠, 나 어떻게 된...거..지? 여기 병원이야?"
"그래 이 바보야. 여기 병원이야. 이렇게 될려구 여기.... 온거야?"
정재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킨다.
"오..빠 나 괜...찮아.. 좀 있으면 괜찮아 질거..야. 오..빠, 여기..이러..구
있..으면 어떡...해 사람들이 얼...마나 기...다린다구."
"......."
"오..빠 어서 돌아..가 이런다구 뭐가.. 달라져.."
"너부터 돌아가."
정재는 혜원의 얼굴을 외면하며 단호하게 말한다.
"오빠 여기서 뭐할건데? 언제까지 이러구 있을... 거냐구. 어찌됐건..돌
아가야할거 아냐...이렇게 숨어있는다구 해결이 돼? 난..오빠가 돌..아가
지 않으..면 나도 가지 않을..거야."
"이 바보야... 너 지금 몸이 어떤지나 알어?"
"........"
"너 요즘 병원다니는거니?"
정재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그..럼 다니..지. 오빠..그건..왜?"
"너..."
정재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혜원을 내려다 본다.
"너...너 한달전에 병원다녀가고 한번도 안갔다며!"
".........."
혜원은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벽쪽으로 돌린다.
"말해봐! 왜 병원을 안간거야. 바빠서 안간거야? 대체 뭐 때문에 병원
을 안 다니는 거야? 넌 아직 환자라는 것을 잊은거야?"
정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일어나서 등을 돌리고 고개를 젓는다.
"오..빠..오빠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잖..아, 내 병은 영원히 낫지 않는
병이란것을...나도 이제 지쳤..어...약먹는게 죽기보다 싫어...날마다 한
움큼씩 약을 입에다 털어넣어야 하는 것도 이젠 너무나 힘든 고통...이야..
싫어...이제 약을 안먹을거야....난 꼭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유지하는 뇌
사상태의 중환자 같은 느낌이야. 계속 약물을 투여해야만 생명을 유
지할수 있는 나의 육체가 너무나 원망스러워... 미국에서 심장을 이식받
고 한동안 삶의 희망을 가졌지만 이젠 오랜 병마에 지쳤어...."
벽쪽으로 고개를 돌린체 입술을 깨무는 혜원의 입술사이로 눈물이 스
며든다. 혜원의 얘기를 듣고 있던 정재가 돌아서 혜원의 침대에 두손
을 집고 허리를 숙인다.
"그래..서 어쩔건데...생명을 연장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면역억제제
투여등 약물치료밖에 없는데 그걸 마다 하겠다는 거니? 응? 대답해봐!
지금 와서 삶을 포기라도 하겠다는 거니? 심장이식수술후 5년 생존율
이 90프로야. 넌 지금 3년째야 한 2년만 넘기면 고비를 넘긴단 말이야
그때까지 힘들지만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할거 아냐. 니가 이런식으로
치료를 소홀히해서 건강이 악화되면 널 살릴려고 했던 우리 가족의 여
태껏 노력이 물거품이 되잖니. 니가 원하는게 이런거니? 혜원이 넌
우리 부모님과 나, 그리고 정아를 봐서라도 이러면 안되잖니?"
정재는 말을 마치자 알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걸 억누르려고 등을
돌린다.혜원이 천천히 정재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눈이 눈물로
반짝였다.
"오빠...미안해..너무 힘들어서 그래.. 오빠 그럼 나도 병원계속 다닐테
니 오빠도 그만 돌아가... 나랑같이 서울가."
혜원의 목소리가 울렁거리듯 떨리고 있었다.정재는 반대편 침대에 팔
꿈치를 짚고 얼굴을 감싼다.
"오빠 그만 가. 나 내릴게."
혜원은 차가 병원앞에 서자 차 문을 연다. 정재도 따라 내린다.
"오빠하고 같이 가자. 너 몸 그래갖고 제대로 걷기라도 하겠니?"
"오빠 안돼! 오빤 지금 이러구 있을 여유가 없어. 빨리 집에가봐, 자존
심 버리고 아저씨한테 도움을 요청해. 내일 어음결제를 해야 한다는거
알고 있어. 일단 부도는 막아야 할거 아냐."
혜원은 말을 마차지 돌아서 병원안으로 걸어들어간다. 그녀의 걸음이
불안하다. 정재는 갸날프고 여린 그녀의 뒷모습이 한없이 안스럽고 애
처로워 보인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병원안으로 사라지는 혜원의 뒷
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차에 오른다.
"심혜원씨 들어오세요."
혜원이 진료실복도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간호사가 부른다.
"박사님 안녕...하셨어요?"
혜원이 진료실을 들어서며 고개를 숙여 이박사한테 인사를 한다.
"그래요. 좀 앉아요."
이박사는 진료카드를 한번보고는 혜원을 돌아본다.
"그동안 왜 병원에 안왔어요? 근데 얼굴은 왜그렇게 핼쓱해요? 몸이
많이 안좋아요?"
이박사는 혜원의 창백한 안면을 이리저리 살핀다. 그의 이마에 주름이
잡힌다.
"아녜요. 박사님..."
혜원이 고개를 푹 숙인다.
"몇가지 질문을 할테니 사실대로 얘기하세요."
"녜..."
"최근 호흡곤란이나 가슴에 통증을 느낀적이 있어요?"
"......녜....몇달전..부터...가끔...그랬어요."
"누워 있을때는 어때요?"
"누워 있을때는 호흡하기가 더... 힘들어요."
이박사는 차트에다 볼펜을 끄적인다.
"그런 증상이 시작되면 얼마동안 계속됩니까?"
"녜...길때는 5분정도 지속됩니다."
"현기증 증상이 있습니까?"
"녜...가끔..앉았다 일어나면 중심을 못잡을 정도로 어지러울때가 있어..
요."
이박사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볼펜을 끄적인다.
"구역질이 나거나 토할때가 있어요?"
"아뇨..그런건 없는 것 같은데요. 박사님."
"됐어요. 심전도, CT, MRI등. 몇가지 검사를 다시좀 해 봅시다."
"박사님, 그걸 또 해야...해요?"
혜원이 이마를 찡그리자 이박사가 혜원을 지긋히 쳐다본다.
"혜원씨, 혜원씨는 누구보다도 자기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요. 검사
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있는건 아니겠죠?"
이박사는 혜원의 뒤에 서있는 간호사를 올려다 본다.
"민간호사, 혜원씨 데려가서 우선 혈압, 등 간단한 검사부터 좀해요. 체
혈도 좀하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