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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2 21:04
http://sato721.blog.me/130168689799
고종, 순종, 명성황후 등 대한제국 황실의 진귀한 원본사진 200여점 총망라
앨리스 루즈벨트에게 선물한 고종 원본 사진 107년만의 귀환
근대기 New Media로서의 사진 수용과정 조망
대한제국 황실 사진전<대한제국 황실의 초상 1880-1989展>은 대한제국 시절의 정궁이었던 덕수궁, 덕수궁의 주인이었던 대한제국의 역사를 황실 중심의 사진으로 보여주는 "대한제국 역사의 원형"이다.
우리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황실이 탄생했던 대한제국(1897 - 1910),
대한제국의 정궁이었기에 대한제국의 짧디 짧은 비운의 역사, 그 굴곡진 운명의 황실과 궤를 같이할 수 밖에 없었던 덕수궁에서 21세기 초입에 마련된 대한제국의 황실사진전은 대한제국과 덕수궁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음미하고 그 의미를 되짚는 뜻 깊은 시간이 되기에 그 자체로써 감개무량의 '역사 사진전'이며, 역사를 기록하는 새로운 수단으로서 사진 매체의 수용과정을 보여주는 '사진 역사전'이기도 하다.
이 땅에 사진 매체라는 서양문물이 최초로 유입되어 시각문화의 근대화가 일어났던 시기가 대한제국 시절, 사진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활용한 주체는 대한제국 황실, 황실 사진 속의 주요 배경은(촬영지는) 덕수궁이었다.
말하자면 덕수궁, 대한제국, 사진의 3합三合은 묘하게도 운명처럼 엮여있는 셈이다.
흥선 대원군을 시작으로 고종, 순종을 비롯한 영친왕, 의친왕, 의친왕의 아들 이건, 이우를 비롯한 황실남성들,
명성황후(고종비), 순정효황후(순종비), 순헌황귀비 엄씨(고종 후궁, 영친왕 생모),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 박찬주(이우 아내) 등의 황실여성들 사진들이 망라되어 있고,
사진 외에도 당대에 제작된 사진첩, 사진엽서, 서적 도판, 신문 등 다양한 매체들을 함께 전시한 입체적 구성으로 이들 왕족의 모습과 행적을 통해 제국의 탄생에서 몰락까지, 비극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대한제국의 행로를 총제적으로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아카이브 역할도 아울러 겸한다.
전시회 자체가 교과서 밖으로 튀어나온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며 훌륭한 체험학습의 현장기도 한 이유다.
전시기간도 내년 1월 13일까지 약 2달여간의 넉넉한 스케쥴이어서 겨울방학 시즌의 학생관람 편의도 아울러 배려한 셈이다.
이번 황실사진전이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전시작 대부분이 디지털 파일의 복제 이미지가 아닌 당대에 제작되고 활용된 진귀한 오리지널 빈티지 프린트라는 것.
또한 국립고궁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스미소니언미술관, 보스턴 미술관, 개인소장 등 국내외 여러 기관,사진수집가등에게 흩어져 있던 대한제국 시절의 원본사진과 진본사료를 망라해서 대여받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았음에도 총 200여점 규모의 마련을 성사시킨 노고도 치하받아 마땅하다.
황실인물에 촛점을 맞춘 초상 사진들 위주로 구성된 전시회지만, 사진이 없었다면 그림으로 그렸을 의궤 역할을 대신하는 각 인물들과 관련된 각종 행사 사진, 궁궐안팍 건축사진, 당대의 거리 풍경 및 당대의 복식과 생활상 등, 황실 뿐만이 아닌 민초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이 담긴 사진이기에 사료적 가치 높은 유물이자 진귀한 고증 자료다.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展
PART 1: 대한제국의 탄생에서 한일강제병합까지(1880-1910)
이 섹션은 흥선대원군의 초상으로 시작하여 고종과 명성황후, 순종과 순헌효황후와 관련된 사진을 다룬다. 1880년에서 1910년까지의 30년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는 임오군란에서 비롯된 대원군의 천진 억류와 을미사변이 야기한 아관파천, 대한제국의 탄생, 그리고 한일강제병합까지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담겨 있다. 특히 사진을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하여 구한말의 불안한 정치적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던 고종의 사진과 사진 제작의 주체가 완전히 일본으로 넘어간 이후의 순종의 사진은 대한제국이 쇠락하고 일본의 내정간섭이 본격화되어 한일강제병합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보여준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용상에 오른 적이 없으면서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최고의 권력을 휘두른 인물이다. 그는 고종이 성장한 후에도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며느리 명성황후와 대립관계에 있었으며, 끊임없이 재집권을 시도했다.
흥선대원군, 1882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사진을 좋아한 왕, 고종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12세의 나이로 조선 제26대 왕이 됐다.
15세에 명성황후와 결혼했으며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겪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환궁하여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됐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밀사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이ㅡ 방해로 실패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삼은 일본의 협박으로 1907년 순종에게 왕권을 내주고 강제 하야를 당한다. 퇴위 후 이태왕으로 격하되어 덕수궁에서 거처하다 1919년 67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고종은 메이지 천황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초상화에서 초상사진의 시대로 이행되는 시기의 첫 황제였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이 사진찍기를 싫어했던 것과는 달리 고종은 1884년 퍼시벨 로웰이 처음으로 고종 사진을 촬영할 때부터 사진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고종은 사진 뿐만이 아니라 커피, 서양식 건축양식 등 당대 조선으로 유입된 신문물 전반에 걸쳐 많은 호기심을 보였다) 이후 1896년 비숍 여사가 사진기를 들고 입궐했을 때도 사진기에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촬영에 응해주는 등 기회가 될 때마다 사진기 앞에 포즈를 취하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현존하는 고종의 사진은 대부분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촬영한 것으로, 그들이 출판한 조선관련 서적이나 잡지에 실린 경우가 많다. 이는 고종이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외교적,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여 조선이라는 나라와 국왕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언론플레이의 발로였다.
[PS] 최초의 고종 사진을 촬영한 미국인 퍼시벌 로웰은 1883년 조선에 입국하여 조선의 미국 사찰단인 보빙사 일행의 자문역을 맡았고, 1884년에는 고종과 왕세자 순종을 창경궁에서 이틀에 걸쳐 촬영했다. 그는 자신이 찍은 고종의 사진을 그의 기행문 <조선, 고여한 아침의 나라 Choson: The Land of Morning Calm,1886> 속표지 사진으로 실었고, 책 속에는 한성부의 궁궐, 관료, 거리 풍경을 담은 사진 22장을 게재했다. 이번 전시는 1886년에 발행된 책과 그 속에 담긴 사진들을 선보인다.
창덕궁 후원 농수정에서 고종, 1884년 / 퍼시벌 로웰 촬영 / 미국 보스턴미술관 소장
얼굴없는 왕비, 명성황후
퍼시벌 로웰과 더불어 당시 황실 드나들이를 하며 황실 사진을 찍었던 비숍 여사의 회고록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중에 명성황후를 언급한 대목이 있다.
" 왕후는 갸날프고 미인이었다....눈은 차고 날카로워서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녀의 사려깊은 친절, 특출한 지적능력, 통역자가 매개했음에도 느껴지는 놀랄만한 말솜씨 등 모두가 그러했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뿐 아니라 그 외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찰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16세에 왕비가 된 명성황후는 타고난 총명함으로 자신의 정치적 영역을 확대하고,대원군과의 대립관계 속에서 정권을 유지했다.
1894년에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대원군 견제 및 일본 세력 추방을 목적으로 러시아의 도움을 이용하려고 했으나 1985년 새벽에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이끄는 낭인들에 의해 경복궁 내 건청궁 옥호루에서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할정도로 갈기갈기 옥체를 난도질당하며 살해당했다.
사망 2년 후에 고종의 황제 즉위를 계기로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그 해 11월 시신없는 빈 관으로 국장을 치뤘고 홍릉에 안장되었으며 해방 후 지금시대까지도 명성황후가 아닌 '민비'가 더 익숙해져 있을 정도로 줄곧 일제가 '민비'라는 격하된 칭호를 일제강점기 시절 내내 집요하게 강요했다.
명성황후는 현존하는 삽화와 사진이 수많은 진위논란에 휩싸였으며 아직까지 명성황후임이 분명하게 입증된 사진을 발견되지 않았다. 전시에서는 명성황후의 재현 이미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동안의 진위 논쟁들을 전시된 각종 사료 등을 통해 알려준다.
옥호루(을미사변당시 명성황후의 시신안치 장소), 19세기말 /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대한제국의 탄생
을미사변 이후 국왕의 권한과 영향력이 위축된 상황에서 고종은 아관파천(1896)과 경운궁 환궁(1897)을 통해 정치적 돌파구를 모색했다. 고종은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다른 나라와 동등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제국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1897년 황제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그가 황제로 즉위한 것은 국가상의 군주상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노력이었으며, 이러한 위상변화는 사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특히 이 시기의 사진에서 고종 황제와 황태자 순종이 대원수 복장을 취한 것은 군통수권자로서의 입지를 확보하고, 근대적 국가의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대원수복과 원수복을 착용한 고종과 순종,1900년경 / 村上天眞(무라카미 텐신) 촬영,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신문 종군사진가로 조선에 왔던 무라카미 텐신은 처음에는 생영관, 우에는 무라카미사진관 혹은 무라카미천진당이라는 간판의 사진관을 경영했다.
그는 대원수복과 원수복을 입은 고종과 황태자 순종의 사진을 찍어 훗날 자신을 '어용'사진사라며 떠벌리고 다녔다.
고종(좌)과 순종(우)의 초상, 1905 /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
황제를 상징하는 황룡포에 서양식 훈장을 달고 옥좌에 앉은 고종의 1905년에 촬영된 이 사진은 대한제국이 근대의 황제국임을 강조하고 있다.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그림의 종이 사진틀에 끼워져 있는 이 사진은 1905년에 미국에서 파견된 아시아 순방단의 일원으로 내한한 루즈벨트 미 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즈벨트에게 고종이 하사한 사진.
고종은 1882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미국의 도움을 기대하고 미국의 '공주'인 앨리스 루즈벨트를 환대했으며 자신과 순종을 사진을 준 것인데,
그러나 루즈벨트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단은 사실상 미국의 필리핀 통치와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인정하는 내용의 비밀협약(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도쿄에서 이미 체결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한국에 들른 것이었다.
순종의 즉위와 한일강제병합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은 폐위를 당하고 덕수궁 이태왕으로 격하되었다.
이미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즉위한 순종은 '한미신협약'을 체결하여 일본에 내정 감독권을 내주었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 순종은 창덕궁에 머무르며 이왕으로 격하된 칭호가 붙여진다.
순종은 사진찍기를 싫어했으나 일본의 주도 하에 기획된 각종 행사 사진 속에 얼굴이 남아 있다.
순종, 1909년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순정효황후, 1909년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순종과 순정효황후, 1907년 /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순종(좌)과 메이지 왕(우) /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황실장례
고종과 명성황후, 순종의 장례 사진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지막 돌파구를 모색하고자 고군분투했던 대한제국 황실 인물들의 노력이 좌절되고, 결국 국권 침탈이라는 결말로 귀결된 시대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종은 1919년 1월 22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애도기간 중인 3월1일에 기미독립선언문이 공포되고, 이틀 뒤에 열린 3월3일 국장을 기점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UPA의 특파원으로 서울에 체류중이던 앨버트 테일러는 3.1 기미독립선언문을 입수해 전세계에 알렸으며 고종 국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의 사진은 고종국장행렬을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어, 당시 고조되던 민중봉기-독립운동의 분위기를 전하려는 시각이 두드러진다.
"마지막 황제가 선조들의 품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침묵하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은 증오와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3.1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어서가 아니라 후계자도 남지기 못한 황제의 죽음과 더불어 자유에 대한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 메리 테일러(앨버트의 부인) <Chain of Amber>중에서
고종 국장 사진, 1919년 / 앨버트 테일러 촬영,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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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 일제 강점기와 그 이후(1910-1989)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강점기를 살아내는 황실후예들의 영욕의 삶을 다룬다.
이들은 일본인과의 정략결혼을 강요받거나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가는 인질의 삶을 살았으며 해방이 된 이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고종의 아들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박 황태자인 영친왕,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의친왕의 아들 이건과 이우 등의 사진들은 비극적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왕족의 마지막 행로를 보여준다.
영친왕 이은(1897-1970)
대한제국이 선포됐던 해인 1897년에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1세가 되던 1907년, 후사가 없던 순종의 뒤를 이어 황태자로 책봉됐으나 같은 해 유학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의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졸업했으며 1920년 일본황족의 딸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했고, 8.15광복 후 국내 정치 실세들의 반대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 왕족의 몰락과 더불어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67세가 되던 1963년에 귀국하여 병상생활을 하다가 1970년 7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돈덕전에서 고종과 순종 어린 영친왕,1906년경 / 유리원판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예복을 착용한 영친왕(11세), 1907년 / 고궁박물관(하정웅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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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실내에서 영친왕 일행. 1911년 / 고궁박물관 (하정웅기증)
자동차를 타고 있는 영친왕과 다케히토 왕, 이토 히로부미. 1900년대 / 국립고궁박물관(하정웅기증)
영친왕 결혼식사진. 1920년 /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이방자 여사(1901- 1989)
일본 황족의 딸로 일본이름은 나시모토 마사코. 1920년 20살의 나이로 영친왕과 결혼해 이진(갓난아기 때 사망), 이구, 두 아들을 낳았다.
1963년에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영친왕과 함께 귀국했으며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영친왕비 결혼식 사진. 1920년 /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큰 아들 이진을 안고 바라보는 영친왕 부부. 1921년 / 국립고궁박물관(하정웅기증)
덕혜옹주(1912-1989)
고종과 궁녀인 복녕당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환갑 때 태어난 예순둥이 고명딸로 고종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지만,
고종 승하 후 총독부의 강요로 14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갔다.
19세가 되던 1931년에 일본인 소다케유키와 정략 결혼했으나,
결혼 전부터 앓던 조발성 치매증이 악화로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혼했으며,
외동딸이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는 등 불행한 삶을 살았다.
해방 이후에도 국내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귀국을 거부당하다가,
1962년에 한국으로 돌아오지만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면서 이방자 여사와 함께 낙선재에서 기거했으며,
1989년 낙선재에서 76세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뒤로하고 조용히 별세했다.
대한제국의 황실여인 중 가장 불행했던 삶을 살다간 마지막 황실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측은한 시선으로 덕혜를 바라보는 소설책이 등장할정도로,
그녀의 구비구비 굴곡진 드라마틱한 인생 자체가 대한제국 비운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덕혜옹주(우측에서 2번째,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사진첩)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덕혜옹주 결혼사진. 1931년 / 서울역사박물관소장
(남편인 소 다케유키의 훤칠한 외모가 유독 두드러진다...)
의친왕 이강(1877-1955)
고종과 후궁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명성황후에 의해 귀인 장씨와 함께 궁 밖으로 내침을 당한 후 외갓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7세에 김수덕과 결혼하고 이듬 해에 보빙대사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떠났다. 미국 유학 중이던 24세에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30세에 귀국하여 일제의 감시 속에서 대한제국 육군부장, 적십자사 총재 등에 임명되었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에는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하며 황실인물 중 가장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했던 호탕한 기질의 쾌걸남아였으며, 12남 9녀의 자녀를 둘 정도로 왕성한 스테미너의 다혈질이었던 인물로 78세에 별세했다.
자신을 제치고 자신보다 11살이나 어린 이복형제 이은(영친왕)의 황태자 책봉은 전적으로 일본의 압력으로 이뤄진 것으로 일제가 이러한 기질의 반일 감정을 갖고 있던 이강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의친왕 이강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건(1909-1990)
의친왕의 맏아들로 고종의 장손자이지만 아버지 의친왕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일본식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제국 육군에 입대했다. 23세에 영친왕비 이방자의 외사촌 마쓰다이라 요시코와 결혼했으며 39세에 모모야마 겐이치로 개명하고 몇 년 후 일본일으로 귀화했다. 후에 요시코와 이혼하고 일본에서 살다가 82세에 사망했다.
이건. 연도미상 /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이우(1912-1945)
의친왕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 이강의 외모와 기질(의협심)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강제로 13세에 일본유학길에 올라 18세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마지못해 입학했지만,
학교생활에서도 한국말만 쓸 정도로 주체성이 강했던 탓에 일본인 생도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켰고,
술자리에서도 당시 금지곡이었던 '황성옛터'를 즐겨 부르며 향수를 달래는 등 일본정부 입장에선 결코 고분고분한 인물이 아니었다.
또한 일본 정부가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강요했지만 단호히 거부, 24세가 되던 해에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했다.
육사 졸업 후 야전 포병학교, 육군포공학교 등을 거쳐, 27세에 야전포병학교 교관이 되었으며 교도연대 중대장을 겸임할 정도로 리더쉽도 갖췄던 멋진 청년이었고,
아버지 이강의 뜻을 받들어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계획하기도 했다.
34세에 히로시마 발령을 받았지만 일본에서의 배속을 거부하다 마지못해 근무를 시작하던 첫째 날,
미공군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피폭되어 사망했다.
박찬주(1914-1995)
박영효의 손녀로 22세에 이우와 결혼하여 이청과 이종을 낳았다.
남편을 잃은 후 두 아들과 함게 운현궁에 거처했으며 37세에 추계학원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1992년에 운현궁을 서울시에 매각하고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위치한 추계학원(추계예대,중앙여중고,추계국민학교) 근처의 자택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82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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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 Special Section - 왕 앞에 선 사진가들
조선의 사진술 도입과 정착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사진관을 운영한 사진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한국사진사의 여명을 밝힌 사람들이었고 황실과의 인연으로 혹은 촉탁으로 황실가족의 초상이나 기념사진, 황실 행사들을 촬영했다.
조선에 사진관이 개설된 것은 1882년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인 거류지에서 일본인 사진관이 영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이어 일본이나 중국에서 사진을 배운 화가 출신의 조선인들이 사진관을 개업하기 시작한다. 1883년에 황철과 김용원, 1884년에 고종과 순종을 촬영한 지운영이 각각 사진관을 개업하면서 조선인에 의한 사진 정착의 길을 여는 듯했다. 그러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 당시 사진을 일본의 문물로 본 군중들에 의해 이들의 사진관이 파괴당함으로써 조선인 사진관은 1907년 김규진이 천연당사진관을 개업할 때까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미국인 퍼시벨 로웰 이후, 왕을 촬영한 어진 사진사 중 그 이름이 밝혀진 사람은 총 4명이다. 지운영, 김규진, 일본인 촉탁 사진가 무라카미 텐신, 이와다 카나에가 그들이다.
그들의 모습과 함게 사진 활동의 일부를 스페셜 섹션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EPILOGUE
?사진으로 확인된 대한제국 황실 가족 중에서 이우 왕자는 지금 트렌드 싯점에서도 손색없는 가장 핸섬한 외모와 , 날렵하고 모던한 이미지의 당대 패셔니스타, 쾌걸남아의 매력를 동시에 지닌 인물이었다.
거기에다 왕자라는 신분에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까지 알려지면서 탤런트 박기웅, 해품달에서의 임시완 등과의 비교사진들이 떠돌아 다닐 정도로 요즘세대들에게 때아닌 이우 왕자 열풍이 잠시 불기도했다.
의친왕 이강, 그의 아들 이우처럼 항일운동에 적극적이었던 황실인물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황실 핏줄들도 존재한다.
현재 시대의 일부 황실 후손들이 선친의 토지를 찾겠다며 조선총독부 토지문서를 근거로 국가를 상대로 반환소송을 제기한 개념상실, 어이상실의 작태도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지난 2006년 9월 일부 황손 일가가 모여 대한민국 황족회를 구성하고 문화대한제국이란 칭호를 써가며 이해원 옹주를 여황으로 추대하기까지하면서 '황실복원론' 운운하며 정부가 이들 선친들이 소유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의 토지를 황실 후손들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희대의 코미디를 보면서,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일제 친일의 살아있는 귀신들이 자행하는 되먹지 못한 짓꺼리의 역겨움과 짜증에 치를 떨게 된다.
여하튼,
황실 몰락의 가장 끝자락에 위치했던 비운의 운명 속에서 스러져간 황실 가족의 삶 자체가 각본없는 라이브 드라마였으며, 비극 그 자체였고, 뼈 아픈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다.
대한제국 황실 사진전을 통한 의미있는 시간여행이 매우 뜻깊게 다가오는 이유다.
또한 대한민국 국기 '태극기'의 탄생 배경이 고종 폐위의 결정적 계기였던 헤이그 특사 사건-고종의 밀명으로 파견된 박영효 제작-에서 비롯됐음을 다시한번 자각하게 된다.
국운의 쇠락, 일제강점기의 치욕, 그 가슴시린 통한의 역사를 상징하는 아이콘,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가슴뜨겁게 만드는 아이콘이 그래서 바로 "휘날리는 태극기"다.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 / 이응준 창안, 박영효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