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인 5월은 어버이와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높고 푸른 하늘을 향해 가슴을 펼치는 희망의 달입니다. 한편 반역을 일으킨 군인들이 자신들의 불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정치인과 민중을 학살했던 잔인한 달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사이비 언론을 앞세운 군사정권의 정치공작에도 불구하고 아세아에서 가장 먼저 유권자의 손으로 정권교체를 이루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위대한 국민이라는 생각에 자부심이 들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국민의 인권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군사독제에 비폭력으로 맞서왔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당한 권력과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던 김대중.. 그의 '행동하는 양심'과 '인동초(忍冬草)정신'은 노벨평화상 수상의 뿌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 차원을 넘어 전쟁광인 미국의 부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세계평화의 전도사로 자리매김 되고 있지요. 그러한 김 전 대통령이 베를린 자유대학의 초청을 받아 이희호 여사와 함께 7박 8일 일정으로 독일을 방문하십니다.
베를린 자유대학이 제정한 ‘제1회 자유상’에 선정된 김 전 대통령은 수상식에 이어 특강도 하실 예정입니다. 대통령님의 '자유상' 수상은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국민에게 자부심을 심어주는 국가적인 이벤트가 될 것입니다.
김 전 대통령의 이번 해외방문은 2005년 4-5월 미국, 일본을 방문한 뒤 2년여만에 이뤄지는 것이며. 하반기에도 노벨평화상 정상회의 참석차 유럽을 방문하는데 이어 미국, 일본도 차례로 순방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따라 올해에는 국내 대학 강연뿐만 아니라 해외 순방 등을 통해 북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의 메시지를 전파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분의 무사 귀국을 빌며 관련 자료를 검색하다보니, 두 분의 처음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호기심이 치솟아 지난 자료들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는, 박정희 소장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이듬해인 1962년 5월10일 서울 종로구 체부동 이희호 여사 외삼촌댁의 넓은 한옥 대청에서 조향록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오늘이 5월 10일이니까, 결혼 45주년이 되는 날이네요.. 두 분의 결혼 45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5년 후면 금혼식(金婚式)이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합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하객에게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가족 기념사진
이희호 여사의 외삼촌은 초대대통령이었던 이승만박사가 하와이에 망명해있던 시절부터 그를 도와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국가의 주요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전국경제인협회 창립 멤버이기도 하지요. 부인은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지낸 이매리여사입니다.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나의 사랑 나의 조국>에도 나와있듯 김대중과 이희호의 인연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스릴이 넘칩니다. 아래는 1951년 처음 만남에서부터 1961년 자연스럽게 사귀기까지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그와의 처음 만남은, 1951년 부산 피난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새로이 결성된 대한여자청년단 외교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청년단 간부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김정례의 소개로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 ‘면우회’ <勉學同志會>가 한달에 한 번씩 모이고 있었는데 그도 그 일원으로 들어 왔다. 면우회는 처음 시작할 때는 33명 회원이었는데 6·25후 흩어지고 줄어서 부산에서는 약 20명이 모이고 있었다. 그 중에는 강영훈 전 총리도 그 일원이었다.”
“내가 유학에서 돌아온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그 동안 우리들은 아무런 연락도 없이 지내던 터였다. 그는 1959년,8월 부인과 사별했고, 나는 그해 9월 멕시코에서 열리는 YWCA 세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한국을 다시 떠났다. 미국에서 3개월 동안 미국 YWCA 두 곳을 연구 관찰하고 세계 각 나라 YWCA 방문후 1960년,2월 귀국했다. 1961년 늦가을이었을까, 초겨울이었을까, 그 때 쯤에 그와의 자연스런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것을 인연이라고 하는 것일까, 신의 섭리라고 하는 것일까.”
추억의 사진 모음
결혼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당시 그는 5·16으로 인하여 낭인으로 지내고 있었다. 한때 그는 해운업으로 경제력 있는 젊은 사업가였으나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출마를 시작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 놓은 후 거듭되는 낙선과 부인과의 사별, 1961년 강원도 인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했으나 5·16으로 인하여 선서 조차 하지 못하고 오히려 감옥행이 되고 말았다. 모친과 앓는 누이동생, 나이 어린 두 아들과 함께 대신동 전세집에서의 생활이었다. 그는 앞길이 보장되지 않은 꿈많은 젊은 정치가일 뿐이었다.”
한 야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시작한 김대중이 21세기 세계 평화의 전도사로 거듭나기까지 이희호라는 여성이 없었어도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저만은 아닐 것입니다.
요즘 결혼하는 신혼부부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는데, '김대중옥중서신'입니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날조된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도, 뜻을 굽히지 않는 옥중의 남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이 여사와, 사형 집행이 언제 될지 모를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부인을 존경하며 사랑하고 위로하는 서신에서 진정한 부부애를 느끼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동지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서로 믿고 의지하며 온갖 핍박과 고초에 응전해온 두 분을 볼 때마다 존경심이 솟습니다. 결혼기념일을 독일의 어느 호텔에서 맞이할 두 분을 보면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입니다"라는 어느 광고문구가 떠오르며 미소가 지어지기도 합니다..
집안과 주변에서도 적극 반대했던 결혼.
“그와의 결혼에 대해서 집안에서는 물론, 주위의 반대도 대단했다. 그런데 나는 여하간 마음이 끌렸다. 그는 그때에도 촌음을 아껴 가며 많은 독서를 하고 있었고, 실천적 의지와 성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신념과, 관용과, 멋에 이끌려 그리고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그와의 결혼을 결심하였다.”는 대목에서는 개인의 작은 인연이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아래는 이 여사가 영부인이 된 뒤 어느 축하 모임에서, 당시 YWCA 대학생부 간사였던 김현자(전 민정당 국회의원)씨가 좌중을 폭소케 했던 결혼이야기 중 일부 입니다.
"하루는 총무님이 오시더니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해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때 그분의 나이가 40이었어요. 상대가 누구냐고 하니까 정치하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YWCA의 이사들이 우리가 한번 만나보아야겠으니 한번 YWCA로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하루는 잘생긴 젊은 청년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습니다. YWCA의 어른들이 둘러앉아 이것저것 물어 보셨지요. 돌아간 다음, YWCA의 어른들은, 사람은 똑똑해 보이나 조건이 너무 안 좋으니 그 결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만류를 하시더군요. 이 마리아선생같은 분은 눈물까지 흘리며 만류하셨어요. 고생길이 너무 훤하다 하시면서요.
그때 이 총무가 하신 말씀을 지금도 똑독히 기억합니다. ‘저 분은 지금은 고생하고 있지만 정치적으로 큰 인물이 될 사람입니다. 저는 저 분을 도와 반드시 훌륭한 정치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 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다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희호 여사가 사람을 보는 눈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그 혜안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김대중옥중서신'에도 기록되어 있듯 남편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던 암흑의 70년대와 80년대의 옥바라지를 그리스도 정신과 굳건한 의지로 헤쳐왔다는 것을 알만한 분들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희호여사는 자서전 <나의 사랑 나의 조국> 끝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남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의지와, 신념과, 관용과, 멋스러움을 사랑하고, 특히 남녘땅 그의 고향 내음이 물씬 묻어나는 그 활짝 웃는 모습을 몹시 사랑하지만, 그 보다도, 내가 그의 동역자로서 나의 인생을 그에게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조국을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사랑, 우리의 사랑은 곧 조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