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학에는 없는 병명 중 하나가 ‘급체(急滯)’다. 말 그대로 ‘급하게 체한 증상’인데, 이럴 때 병원에 달려가도 별다른 이상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 구조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라 기능의 이상, 다시 말해 기(氣)순환에 문제가 생긴 것인데, 억지로 병명을 만들어 내면 ‘신경성 위염’이나 ‘급성 위염’ 정도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런 위염 증상과도 일정 부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요새는 양방 내과에서도 이런 환자들에게 아예 “체하셨네요”라고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물론 정식 양방 병명은 아니지만, 딱히 마땅한 진단명을 붙일 수가 없어서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다.
숙종 43년 3월 23일의 ‘왕조실록’ 구절을 보면 ‘신시(申時)에 임금이 한기(寒氣)가 갑자기 들고 다리가 저린 것이 특히 심하고 가슴속이 막히고 어지러운 기도 있어서 신음하는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고 기록돼 있다. 이때 숙종이 앓았던 병증이 급체일 가능성이 높은데, 차가운 기운을 느끼면서 다리가 급하게 경직되고 가슴속이 막히면서 어지러운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급체 증상이 생기면, 이렇게 손발이 싸늘하게 식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가슴 특히 명치 부분이 답답하고 아프면서 숨쉬기 힘들다는 표현을 많이 한다.
또한 이어지는 구절에서 ‘약방(藥房)의 세 제조(提調)가 황급히 입진(入診)하고 자금단(資金丹) 두 알을 달여서 바치니, 한참 만에 먹은 것을 토해 내고 증후가 조금 덜해졌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렇게 먹은 것을 토하고 난 다음에 증상이 호전되는 것은 ‘식체(食滯)’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결국 이때 숙종이 앓았던 급체는 식체일 가능성이 높은데, 실제 임상에서도 식체의 비율이 가장 높다. 이렇게 급체는 때에 따라 어지럼증이나 두통을 호소하기도 하고 복통, 구토, 설사가 동반되기도 하며, 치료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급체 개념이 보편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소화가 안 되거나 속이 답답한 증상이 느껴지면 ‘손을 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실제 손을 따고 나면 트림이 나오면서 속이 편안해진다는 사람도 많다. 손가락 끝의 특정 부분을 침이나 바늘 등으로 찔러 출혈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자락 요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마치 꽉 막힌 논에 물꼬를 내주면 막혔던 물이 빠지면서 순환이 잘 되는 이치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모든 급체가 이렇게 ‘따는’ 요법으로 치료되는 것은 아니며, 더군다나 감염 위험성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응급처치 용도로만 사용돼야 한다.
급체 증상으로 오인되는 질환 중 하나가 심혈관질환이다. 협심증이나 심근경색증도 명치가 조이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등까지 퍼져나가는 통증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물론 숨쉬기도 힘들며 진땀이 흐르고 손발이 싸늘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밥 먹고 체한 것으로 오인할 수 있다. 이럴 때 엉뚱한 치료를 하게 되면, 병증이 심각해질 뿐만 아니라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약하게 체했을 때는 손발을 주물러주거나 배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면서 따듯한 보리차를 마시는 정도만으로도 회복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