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로 부임해 한 달쯤 지났을 때, 하루는 남서쪽으로 말을 달려 이영산까지 갔다. 이영산은 전라 좌수영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이다. 거기서 바닷가로 이동해 배에 올랐다. 처음부터 배를 띄워 발포성으로 갈 수도 있는 일이고, 어디를 가든 수사는 군선을 타고 뱃길로 오가는 것이 응당한 이치이지만, 말을 더 달리기 위해 이순신은 그 길을 택했었다.
배는 조발도와 둔병도 북쪽을 거쳐 바닷길 15리를 나아갔다. 적금도를 남쪽으로 바라보는데 벌써 우각산 기슭에 닿았다. 이순신은 이곳에 시종들을 대기시킨 후 단기필마로 다시 25리를 더 달렸다. 그 후 길두마을 인근 해변에서 바닷바람을 쐬며 잠시 쉬고 있었다.
꽃샘추위에 질세라 가장 먼저 피어났던 매화는 이미 진 지 오래, 지금은 산에 들에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 있는 시점이었다. 응달의 잔설을 모두 녹여서 흘려보낸 춘삼월 봄바람은 온기가 느껴질 만큼 훈훈했고, 논밭에는 객토를 하느라 남정네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논두렁 밭두렁에는 봄나물을 캐는 아낙들이 오순도순 모였고, 아이들도 햇살 밝은 담장 아래에서 떼 지어 놀고 있었다.
날씨가 화창하고 따스해진 덕분인지 길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이곳에서 가까운 발포성 성주로 18개월 근무했던 이순신을 알아보는 백성도 한둘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사또, 나리, 장군님, 성주님 등 각양각색 호칭을 부르면서 달려와 이순신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반갑다는 표시였다. 그러는 중 이순신은 낯익은 한 여인이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광경을 우연히 보았다.
“유 부인 아니신가?”
먼저 알아본 이순신이 여인에 앞서 말을 건넸다. 발포 만호로 있을 때 그녀의 시를 천에 적어 벽에 걸어두었었다.
“9년 전에 발포성을 떠나신 장군을 이곳에서 조우하다니… 너무나 놀라운 일이군요. 이곳에는 어인 행차이신지요?”
여인은 언뜻 반색을 하는 듯한 표정이더니 이내 어두운 낯빛으로 돌아간다.
“좌수사로 온 지 거의 한 달가량 되었소.”
친정에 간다는 여인과 보조를 맞추느라 이순신도 말에서 내려 걷는다. 친정에 간다면서 어찌 얼굴색이 이토록 어둡나 싶지만 그런 것까지 알겠다고 하기에는 조금 지나치다. 만약 이순신이 이날 그에 대해 물었다면 오동나무 사건 때 심부름을 갔던 그녀의 오빠, 즉 늙은 병사가 작년에 비명횡사했다는 슬픈 소식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지금도 그녀의 시 가운데 ‘地養木木呼子女’라는 구절을 기억하고 있다. 지양목목호자녀地養木木呼子女는 ‘나무를 키운 지구地는 한 그루木 한 그루木 모두를 “아들子딸女”이라 부른다呼’는 뜻이다. 이순신이 그 시를 떠올리면서,
“우리 인간들은 어째서 제 부모와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 바치지 않는지 모르겠소.”
라고 말하지만, 사정을 알 리 없는 유지은으로서는 뜬금없는 화답을 보낼 도리뿐이다.
“이제 장군께서 이 땅에 수사로 오셨으니 백성들은 격양가擊壤歌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무슨 걱정이신지요?”
이순신은 본디 말과 웃음이 적고爲人寡言笑 용모단정한데다 조심스러워 근엄한 선비 같은如修謹之士 사람이다. 근자 들어 줄곧 바위처럼 둔중하고 어두운 마음으로 지내오던 터라 속이 아주 터져버리고 말 것 같은 심사이지만, 그렇다고 저간의 사정을 유지은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래도 무슨 무거운 근심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장군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합니다.”
“…민망하지만, 그렇소.”
혹 좋은 수가 없겠소?
차마 이순신은 그 말을 토로하지는 못했다. 문장 해독력이 뛰어나고 시문 창작에도 특출한 능력을 가진 여인이지만 그래도 여염집 아낙이다. 그런 여인에게 군사 관련 자문을 구한다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유지은이 먼저 말을 꺼낸다.
“일개 아낙네에 지나지 않아 장군께 도움 말씀을 드릴 만한 존재는 못 되지만 … 가만 생각해보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교훈으로 삼을 때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전라 좌수영을 이끌어가는 데 큰 도움을 줄 인물이 인근에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발포 쪽으로 조금 더 가면 길두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 계시는 어옹漁翁을 찾아뵙는 것이 상책 중에서도 최상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길두마을이라면 바로 저기 뵈는 고개 너머 아니오? 어옹이라면 낚시하는 어른이란 뜻인데…?”
“그렇습니다. 늘 낚시를 하시기 때문에 그런 별명을 얻으셨습니다.”
잔뜩 호기심이 솟구친 터라 이순신의 말이 바로 이어진다.
“어떤 어른이신지 어서 말해주시오.”
이름은 정걸로, 여러 차례 수사를 역임한 무장 출신이다. 은퇴 후 고향에 돌아와 낚시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전라도 일대의 현직 첨사와 만호 등은 모두 그를 모셨던 후배들이다 …!
이순신은 순간 말채찍을 놓쳐버릴 뻔했다. 무릎을 탁 치려했기 때문이다. 유지은의 말을 듣는 찰나 이순신은 더할 나위 없이 명쾌한 정답을 찾아내었다는 판단이 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