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을 찾아서 / 시와 삶의 만남
안선재 (Brother Anthony / 아일랜드 출생,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오늘날 시를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시의 아름다움인가? 그보다는 삶에 충실하다는 점인가? 아니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즐거움과 고통을 철저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인가? 바로 이런 의문 때문에 우리가 시인의 생애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는 것 일뿐 아니라, 한 편의 시가 시인의 이름과 삶으로부터 단절되어서는 결코 완전해 질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시인들 스스로도 이점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시심 / 구상
내가 날마다 이 연작에다가 허접스런 이야기를 골르다시피 하여 시라고 써내니까
젊은 시인 하나가 하도 이상했던지 “그러면 세상에는 시 아닌 것이 하나도 없겠네요” 하였다.
그렇다! 세상에는 시 아닌 것이 정녕, 하나도 없다.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것과 모든 일 속의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은 모두 다가 시다.
아니, 사람 누구에게나 또한 모든 것과 모든 일 속에는 진?선?미가 깃들어 있다. 죄 많은 곳에도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하듯이 말이다.
그것을 찾아내서 마치 어린애처럼 맛보고 누리는 것이 시인이다.
시 / 구상
우리가 평소 이야기를 나눌 때 상대방이 아무리 말을 치장해도 그 말에 진실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느니
하물며 시의 표상(表象)이 아무리 현란한들 그 실재(實在)가 없고서야 어찌 감동을 주랴?
흔히 말과 생각을 다른 것으로 아나 실상 생각과 느낌은 말로써 하느니 그래서 “언어는 존재의 집”* 이렷다.
그리고 이웃집에 핀 장미의 아름다움도 누구나 그 주인보다 더 맛볼 수 있듯이 또한 길섶에 자라난 잡초의 짓밟힘에도 가여워 눈물짓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시는 우주적 감각**과 그 연민(憐憫)에서 태어나고 빚어지고 써지는 것이니 시를 소유나 이해(利害)의 굴레 안에서
찾거나 얻거나 쓰려고 들지 말라!
오오, 말씀의 신령함이여!
*하이데거의 “언어와 사고”에서의 말. **폴 발레이리의 시에 대한 정의
나의 시작의 뜻 / 천상병
나는 생활을 사랑한다. 하잘것없는 일상에서도 무엇을 느끼게 하는 것은 많은 것이다. 이런 일상의 습성에서 나는 용케도 시를 잡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하잘것없는 물건이나 사건에서조차 시를 찾는 나는 풍부한 시적 소재를 잡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나는 많은 테마를 얻는 것이다.
믿음과 생활은 시의 근본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려운 말이 개입될 여지가 나에게는 없는 것이다. 믿음은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다. 이 세계의 본질을 모르고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절대자가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모른 체 살 수 있겠는가? 믿음은 나의 인생의 최고 원리이다. 이 원리원칙을 빼고 어떻게 시를 쓸 수 있단 말인가. 나로 말하면 원리 없이는 너무나 무력한 존재인 것이다.
고은 (제목 없음)
어느 날은 손님인가 하였습니다
어느 날은 주인인가 하였습니다
이런 세월 굴뚝들 피워올릴 연기를 꿈꾸었습니다
오늘도 모르겠습니다 시가 누구인지
[논평]
시인은 불가해한 영감을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사제(司祭)이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현재 위로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들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또한 시인은 스스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언어이며, 전투에 나서도록 고무하는 노래를 만들어내면서도 정작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전쟁의 트럼펫이다. 무엇에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다. 시인은 인정받지 못한 세상의 진정한 입법자이다.
위 인용문은 퍼시 비쉬 셀리가 『시의 옹호』제 1 부를 끝마치며 했던 말이다. 같은 문제에 대해, 셸리는 이 글의 처음 부분에서 과거의 시인들과 관련하여 이미 거론한 바 있다.
자신이 활동했던 시대와 국가라는 처지에 따라, 예전의 시인은 “입법자”라거나 “예언가”로 불려졌다. 시인은 본질적으로 이 두 가지 특성을 포함하고 또 통합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날카롭게 응시하고 현재의 사물들이 따라야 하는 질서의 법칙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현재 속에서 미래를 보는 자이고, 그의 사상(思想)이란 최신의 성취와 결실이 드러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셀리는 시인의 임무가 얼마나 중대하고 심각한 것인지를 보았다. 그러나 그가 보지 못한 사실은 대부분의 구약성경의 예언가들이 겪어야 했던 굴욕과 고통, 외면과 치욕스러운 운명 등이었다. 대(大)작가 오싶 멘델스탬이 언젠가 “소련이야 말로 시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사회”라고 역설적으로 말한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소련에서는 시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지구상 어느 곳에서 보다 바로 이곳[소련]에서 많은 이들이 시를 위해 죽어가”기 때문이었다.
우리 시대 영국의 “예언가적” 시인 크리스토퍼 힐에 따르면, 쉴러에 의해 처음 정형화된 시에 대한 생각, 즉 “올바른 예술, 바로 그것만이 가장 고양된 즐거움을 만든다”라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시의 궁극점에 대한 쉴러의 “미학적 인식”에 의해 설복당한 매튜 아놀드는 자신의 서정적인 희곡 ꡔ에트나 산 위의 엠페도클레스ꡕ를 자신의 ꡔ시집ꡕ 1853년 판에서 제외한 바 있다. 그 희곡작품이 “고통스러움이 행위로 드러날 여지가 없는 그런 상황, 모든 것을 인내해야 하지만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것은 “인간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재현”이 아니므로 재출판되어서는 안된다고 본 것이다. 1936년 ꡔ옥스포드 현대시선집: 1892년부터 1935년까지ꡕ을 편집하였던 W. B. 예이츠는 1차 세계대전 중에 활동한 시인 대부분을 제외하였는데, 아놀드의 앞선 결정을 그 근거로 삼았다. 예이츠 자신의 언어로 상술한 바에 따르자면, “수동적인 고통은 시의 주제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간주할 수 있는 예로서, “예이츠의 축음을 추모하며”라는 오오든의 유명한 만가(輓歌)중에서 두 번째 부분을 살펴보자.
Mad Ireland hurt you into poetry. Now Ireland has her madness and her weather still, For poetry makes nothing happen: it survives In the valley of its making,
오오든의 이 귀절에 대해 힐(Hill)은 "아마도 오오든은 성공적인 예술작품은 그 자체로 충분한 증언행위라는 말을 하고자 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오오든의 뜻이라면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254)고 썼다. 다시 셸리의 "인정받지 못한 입법자 "(unacknowledged legislator)로 되돌아가서, 우리는 세이머스 히니의 1975년판 시선집 『북쪽』 제 2부에 나오는 첫 번째 시 속에서 다소 낯선 방식으로 그것이 묘사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산문시의 제목은 "인정받지 못한 입법자의 꿈"(The Unacknowledged Legislator's Dream)이며, 그것은 시인은 혁명가이자 정치적 수인(囚人)이라는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I sink my crowbar in a chink I know under the masonry of state and statute, I swing on a creeper of secrets into the Bastille. My wronged people cheer from their cages. The guard-dogs are unmuzzled, a soldier pivots a muzzle at the butt of my ear, I am stood blindfolded with my hands above my head until I seem to be swinging from a strappado
문제는 이것이 단지 꿈이라는 점이지만, 그러나 주목할 점은 아주 비슷한 상황이 실제로 수많은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을 때 이 시가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시인 고은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1975년부터 경찰서 구치소와 조사실을 들락거렸다. 죠프리 힐이 말한 것처럼, "20세기 후반의 예술과 문학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고 추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힐 자신의 시가 그런 임무를 추구하였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그런 시적 임무에 거의 편집적인 책임감을 그가 느꼈다. 힐이 아주 빈번하게 기념하는 죽은 자들로는 나치의 학살로 죽어간 유태인들, 히틀러를 암살하려 시도했던 독일인 등이 있다. 심지어 어떤 시에서는 시대를 멀리 거슬러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에 죽은 자들을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제 감옥에 갇힌 시인이라는 주제가 부각되었으니, 힐의 시 중에서 "시인이자 사제였던, 토마소 깜파넬라"를 기억하며 쓴 "인간이란 천사의 조롱거리"를 들여다 보도록하자.
Geoffrey Hill
In memory of Tommaso Campanella, priest and poet
Some days a shadow through The high window shares my Prison. I watch a slug Scale the glinting pit-side Of its own slime The cries As they come are mine; then God's: my justice, wounds, love, Derisive light, bread, filth. To lie here in my strange Flesh while glutted Torment Sleeps, stained with its prompt food, Is a joy past all care Of the world, for a time. But we are commanded To rise, when, in silence, I would compose my voice.
예언가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예언 속에는 말하는 것의 어어려움이 내재한다. 예언가를 그의 메시지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한 메시지를 그것이 수용되는 것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예언가는 결코 대중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지 않는다. 예언가의 임무는 진실을 말하고,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사회적 차원이 생겨나는데, 왜냐하면예언은 결코 사적인 것이 아닌 반면, 비록 항상 드러내놓고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공동체적이고 또 윤리적이기 때문이다. (아주 소수에 불과한) 예언가적 시인은 카싼드라의 저주를 물려받을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인기많은 예언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아마 우리를 자유롭게 할테지만,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 자유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햇볕 / 고은
어쩔 줄 모르겠구나 침을 삼키고 불행을 삼키자 9사상 반 평짜리 북창 감방에 고귀한 손님이 오신다 과장 순시가 아니라 저녁 무렵 한동안의 햇볕 접고 접은 딱지만하게 햇볕이 오신다 환장하겠다 첫사랑 거기에 손바닥 놓아본다 수줍은 발 벗어 발가락을 쪼인다 그러다가 엎드려 비종교적으로 마른 얼굴 대고 있으면 햇볕 조각은 덧없이 미끄러진다 쇠창살 넘어 손님은 덧없이 떠난 뒤 방안은 몇 곱으로 춥다 어둡다 육군교도소 특감은 암실이다 햇볕 없이 히히 웃었다 하루는 전혀 바다였다 용하도다 거기서 사람들 몇이 살아난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돛단배 하나 없는 바다이기도 하구나
이 경험은 고은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1982년 8월 감옥에서 출소하면서 고은은 『만인보』를 쓰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나왔다. 감옥에서 머지않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직면하였던 그는 스스로가 역사적, 사회적, 민족적 기억의 장소(locus)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고은이 강렬하게 깨달은 바는, 대한민국의 역사가 야만적 독재자와 무능한 행정가들의 연속으로 보아서는 결코 안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였다.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은 국민 전체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름없고 목소리가 없는 민중이 이름과 목소리가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은 오로지 그들을 두려워하는 지배자들에게서 일 뿐이다. 고은이 고독한 감옥 속에서 발견하기 시작하였던 그 기억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이름과 목소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신에게 열려있는 유일한 길이라 할 수 있는 시를 통해 고은은 그 이름과 목소리 하나하나를 기억할 수 있도록 기록해야 한다고 여겼고, 그리하여 시적 성취의 본질이 그러하듯 그들의 삶과 목소리를 단순한 일화(逸話)의 수준을 넘어서 고양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임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결국에는 사랑이라는 기준에 의해 판단할 문제일 것이다. 나는 오늘의 강연을 사랑과 시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지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인용하며 마치고자 한다.
무지개 / 김영무
이 땅에 시인 하나 풀꽃으로 피어나 바람결에 놀다 갔다.
풀무치 새 울음소리 좋아하고 이웃 피붙이 같은 버들치 힘찬 지느러미 짓 더욱 좋아했다.
찬 이슬 색동보석 맺치는 풀섶세상 -- 참 다정도 하다
* 안선재 (Brother Anthony)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프랑스 떼졔(Taize) 공동체 수사(修士). 1942 영국에서 태어나 1980년부터 한국에 살고 서강대학교에서 중세. 르네상스 영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1990년부터 한국의 현대문학 작품을 영역하고 있다. 현제까지 18권 출간 -- 구상, 김광규, 서정주, 김수영, 고은, 신경님, 천상병 등 15권의 시집, 이문열, 이어령, 고은 3권의 소설. 대한민국문학상(번역부분) 대상, 대산문학상 번역상, 한국 펜 번역상 수상. 1994년에 귀화. 수도자로서의 이름은 안토니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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