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보는 조간신문도 IT기술 덕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가 잠든사이 세상의 이야기들을 편집하여 전국 인쇄공장에서 찍은후 새벽 4시면 우리집 문밖에 와 있다. 나에게 하루의 세상은 아침신문과 함께 열린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Early bird)는 둥지를 떠나 벌레잡이를 나가는데 그 기회는 일찍 일어난 새한테만 있다. 며칠간 비가 많았던 날씨였는데 인터넷으로 위성화면을 보니 구름이 없다. 나는 여느때와 같이 아침신문 2개를 읽고서 등산화끈을 맸다. 오랜만에 금련산에 오르고 싶었다.
40-50년전에 조성된 산속의 편백나무들은 이제 짙은 숲을 이루고 있다. 관청의 예산이 이곳 산속에 까지 미쳐서 산속도로를 포장하거나 잔돌을 깔고 심지어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은 산길에 보도블록을 깔았다. 계곡이다 싶은곳은 모두 사방공사를 했다. 최근 시내의 인도(人道)에는 보도블록을 교체한다고 온통 난리다. 괜찮은것을 왜 자꾸 바꾸나. 대부분이 불필요한 일인데도 인간의 탐욕이 여기 산속에도 미치는듯 하여 마음이 편치않다. 자연은 가능하면 그대로 둬야 한다.
지금 나는 금련산을 걷고 있지만 비온후 풍부한 수량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깊은 산속의 폭포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온통 물소리뿐인 심곡(深谷)의 청간성(淸澗聲)을 떠올려 본다.
예전에 자주오던 산길이니 모퉁이 길섶의 돌부리,계단조차도 나는 기억할수 있다. 그런데 수년전 어느 작은 물길 가까이에 나무 두그루가 있었다. 거기는 비가 오지 않으면 마른 골짜기였지만 비가 오면 큰 물이 흘렀다. 한그루는 물을 당기기도 어려운 비탈에 서 있었고 한그루는 물속에 있었다. 그후 나는 두 나무의 운명이 바뀐것을 알았다. 물속에 있던 나무는 뿌리채 휩쓸려 갔고 비탈의 나무는 그대로 있었다. 과욕(過慾)과 과욕(寡慾)의 차이일까.
도심에서 가까운 그러나 들어서면 깊은 산속길을 옅은 도심(都心)의 아침안개를 보며 걷는다. 약수터를 지난 모퉁이 골짜기는 비온탓에 제법 물이 흐른다. 물은 넓고도 긴 여정(旅程)을 통해 흐르면서 생명과 땅을 적신다. 그리고 마침내 넓은 바다로 간다. 부산보다는 강원도가 비가 많아야 한다. 왜냐하면 부산의 물은 바로 바다로 가지만 강원도 물은 넓은 땅에게 혜택을 주면서 흘러가기 때문이다. 물은 온갖 시련과 환희를 거쳐서 길고도 긴 여정 끝에 드디어 대해(大海)에 이르러 해활(海豁) 심연(深淵)의 일원이 되는것이다.
지금 걷는 산길은 미답(未踏)의 길이 아니고 이미 구연(舊緣)이 되었기 때문에 가는듯 아니 가는듯이 지나치게 된다. 산속을 걷는 사람,산과 사람의 관계는 태양계의 운행과 같은것,아니 소우주(小宇宙)끼리의 만남이 아닐까.
아침 햇살속에 보이는 시가지 모습,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크지는 기계소리,그것은 산아래 도로를 달리는 차량 엔진소리이다. 구름걸린 장산,햇빛이 반사되어 눈부시는 해운대 앞바다,금문교 같기도 하고 레인보우 브릿지 같은 광안대교,이기대와 신선대,해무(海霧)가 걷혀진 영도섬,엄광산 넘어 낙동강 하구가 수증기 사이로 보일락 말락 한다.
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갈망하는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