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카는 본래 네팔의 한 부락으로, 카트만두 서북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점점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군사를 일으켜 각 부락을 정복했고, 네팔의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구르카의 영토는 티베트의 서남부와 인접해 있었는데, 티베트와는 종교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관계가 깊어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수백명씩 오고 다녔고, 티베트 승려들이 인도로 가는 길에 구르카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 티베트의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니, 당연히 구르카 역시 청나라와 우호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건륭 53년, 즉 1788년 7월, 구르카가 티베트를 공격함으로서 청나라와의 모든 관계가 일시 파기되었습니다.
구르카는 당시 발전을 거듭하면서 군사적인 면에서 상당한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 발전을 이루는 동안 내부의 사회적 갈등 역시 복잡하고 첨예하여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폭발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외 전쟁에 나섰습니다. 어린 왕의 숙부이자 실질적으로 국가의 대권을 행사하던 인물인 파도이살야(巴都爾薩野 - Bahadur Shah of Nepal)는 당시 티베트의 역량이 약한데다, 워낙 멀어 청나라가 감히 이곳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라 여겨 티베트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구르카에서 티베트로 공격을 시도한 일은, 티베트 내부의 분열도 있었습니다. 티베트의 판첸라마 6세의 동생이었던 사마이파라는 인물이 문제였는데, 판첸라마가 각국을 돌아다니며 청나라와 몽골의 여러 부들에서 받은 진기한 보물이 티베트로 돌아오자 판첸 라마의 친형이라는 중파호도극도라는 인물이 다 차지해버린 것입니다. 각 절의 라마와 티베트 병사들은 아무런 대가도받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전혀 보물을 얻지 못한 사마이파가 판첸 라마의 친형이 막대한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구르카 국왕에게 말했습니다.
"티베트는 불교를 믿어 원래 전쟁을 혐오하고, 티베트 병사들은 나약해서 적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게다가, 무역을 하는 도중에 일부 티베트인들이 구르카에서 구입할 식염에 모래흙을 섞어 넣는 일도 발생해 구실도 충분했습니다. 그리하여 구르카군 3천여명이 티베트의 니알람, 제롱, 총카 등으로 진군해왔습니다.
니알람의 위치와 모습.
당시 티베트를 중국은 전장(前藏)·후장(后藏)·객목(喀木)·아리(阿里) 4개 부(部)로 나뉘었는데, 게중 전장에 녹영병 360명, 티베트 병사 800여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후장에는 녹영병 150여명과 티베트 병사 4백여명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 여러 지역에 티베트 병사 200여명이 추가로 주둔하고 있었고, 근방에 녹영병 1300여명이 매년 번갈아 가면서 주둔하여, 티베트 부근에 있는 모든 병력을 합치면 3400명이 되었습니다.
주장대신 경린은 구르카의 침공을 알아차리고 건륭제에게 보고를 올렸고, 티베트에 주둔하고 있는 1200여명의 병사로 우선 적을 막게 했습니다. 건륭은 반드시 니알람등을 방어하라고 명령하면서, 사천 총독과 사천 제독에게 3,4천여명을 추가로 지원할것을 요구했습니다. 또 성도 장군 악휘에게 명령을 내려 티베트를 방어하라고 전했습니다.
성도장군 악휘
문제가 되는것은 역시 군량과 마초의 문제였습니다. 티베트는 너무나 멀었고, 또 너무나 험한 곳으로 베이징이나 남경은 말할것도 없고 사천 성도에서도 머나먼 곳이었습니다. 가까운 군사 주둔로까지도 무려 5천여리의 거리가 있었고, 90개의 역참이 사이에 있었지만 병력을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200개의 역참이 필요했습니다. 병정들의 식량과 노새와 말이 먹을 양초를 모두 중앙에서 보낸다면 그 비용은 어마어마할 것이 자명했고, 그렇다고 티베트 근처에서 양초를 구입할 경우, 수요의 폭중으로 물가가 미쳐올라 엄청난 가격이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건륭은 티베트의 현지 관리들과 적절히 상의하여 달라이라마와 판첸 라마의 창고에 보유하고 있는 양곡 일부를 출고해서 군용으로 충당하기로 하고, 돈을 주고 우선 대금을 지급하되, 전쟁이 모두 끝난 후엔 식량을 구입해서 다시 창고를 채워주기로 약조했습니다. 그리고 티베트인들이 식량을 숨기고 팔지 않은 것을 우려하여 적극적으로 식량을 팔도록 권유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구르카에게도 격문을 보냈습니다.
"너희 구르카는 변두리의 작은 부락에 불과하므로, 마땅히 법을 지키고 안거하면서 태평한 복을 누려야 함이 마땅한데도, 이처럼 불손한 행동을 함부로 한다면 대성황제께서 인자하셔서 호생지덕을 구현하신다 하더라도, 이 같이 교활하고 사악한 무리는 절대 가볍게 용납할 수 없으며, 반드시 대군을 보내 토벌하여 제거할 것이다. 네가 이 서신을 받아 읽고 속히 병사를 철수시키고 니알람과 제롱 등의 땅을 전부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군을 보낼 것이고, 너희는 그때 가서 후회해도 늦으리라."
건륭 54년 정월 13일. 청나라 장군 악휘와 성덕 등은 관병을 이끌고 현지에 도착했습니다. 구르카군은 일시 물러났고, 청군은 구르카 침공군을 격퇴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중간에 티베트의 현지귀족들이 먼저 손을 써버렸습니다. 구르카에 금은을 주고 전쟁을 끝내며 땅을 돌려받기로 말입니다. 그들은 티베트 병사들이 약해서 싸워서는 구르카군을 몰아낼수도, 땅을 몰아낼수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숫자가 적어 큰 도움이 안될 것으로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쟁에서 '완전 섬멸' 이라는 목표를 줄기차게 주장하던 건륭은, 티베트가 멋대로 화의를 추진했다면서 장군들을 질책하고, 자신은 강화를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건륭이 염려하는것은, 만약 티베트의 현지 귀족들 ─ 갈륭들 ─ 이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면서, ─ 현시점에선 청조의 장기말인 ─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에 주둔하는 청나라의 주장대신의 영향력이 약해지는것이었습니다. 달라이 라마나 주장대신을 통해 청나라의 입김이 불어가는것이 아닌, 현지 귀족들의 마음대로 일이 처리가 된다면 티베트 내에 청나라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도 약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청나라군은 구르카와 싸우기로 했습니다. 3워이 되자, 현지에서 악휘가 건륭제에게 상주문을 올렸습니다. 승리의 보고 였스빈다.
"구르카가 차지하고 있던 영토를 모두 수복하여 국경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구르카의 우두머리가 눈으로 길이 막혀 못 나오고 있으나, 날이 풀리면 곧바로 머리 숙여 폐하께 알현할 것입니다. 다시 폐하의 위엄과 덕망을 알려 순역의 이치를 깨닫도록 하고, 지성을 다해 복종하며 폐하의 은덕을 영원히 따르기로 맹세한 후 철병하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일은 이렇게 해결되는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전혀 달랐습니다.
건륭의 의지대로라면, 일은 타협의 여지가 없고, 승리를 통한 적의 격멸이나 완전히 기가 질린 적이 강화의 여지가 없는 무조건 항복을 해야만 해결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현지의 장군들은 일이 적당히 마무리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는 구르카군도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청조의 대군이 밀려들면 딱히 좋을 일이 있을리 만무하기에 화의에는 적극적이었고, 이렇게 베이징과 열하에 있는 건륭이 '완전섬멸' 이라고 악을 고래고래 쓰고 있을때, 티베트에서는 구르카와 티베트, 청나라의 관리들이 적절히 합의를 하고 싸움을 그만두어버렸습니다.
현지에서 청나라 군을 이끌던 인물인 파충은, 처음에는 화의에는 반대했지만 생각을 해보니 지형도 어렵고, 고산 증세도 염려스러운데다 군량 공급도 어려우니 교전을 하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강화의 조건은 티베트에서 매년 순은덩어리 300개를 구르카에 바치는것으로 하였는데, 이는 티베트의 일이기 때문에 청나라 정부와는 관계가 없고, 그렇다면 건륭을 속이더라도 진상이 들어날 염려는 적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을 승인했습니다.
이리하여 구르카군은 티베트에서 물러났습니다. 적이 물러난 사실은 맞긴 하지만, 건륭의 생각으로는 "청군이 티베트를 격파하고 완전 복종" 시켜서 구르카가 물러난 반면에, 현지의 실상은 "청과 티베트, 구르카가 적절히 합의를 해서 구르카가 물러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모르던 건륭은 구르카가 조공사절단을 보내겠다고 하자 이를 승인했고, 그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상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구르카 전쟁에 관여하던 장군들도 사천총독, 사천 제독 등으로 승진했습니다.
사기가 만천하에 들어나게 된 것은 1791년이 되어서입니다. 이때 3월, 티베트의 현지 관리였던 단진반주이라는 사람이, 티베트에 주둔하고 있는 청나라의 주장대신 보태에게 공문을 보내 자신이 각각 티베트의 요충지로 가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보태는 이를 허락했습니다.
그리하여 단진반주이는 티베트군이 있는 변경지대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6월 28일 밤, 갑자기 구르카 군사 20여명이 나타나더니 그를 납치해버렸습니다. 30일에는 구르카군 1천여명이 진군을 개시하여, 티베트 군사들을 대파하고 니얄람을 재차 점령했습니다. 보태는 즉시 상황을 건륭에게 보고했고, 건륭은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라, 이것은 상식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고 여겼습니다. ─ 건륭이 알고 있는대로라면 ─ 청군은 구르카군을 완전히 격파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기가 들어나고 구르카군이 움직인 원인은, 티베트가 당초에 주기로 했던 3백여개의 순은 때문입니다. 실상 티베트는 그렇게 막대한 재물을 매년 줄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건륭 54년, 55년 모두 전혀 납부를 하지 않고 오리발을 내밀었고, 건륭 56년에 구르카가 사람을 보내 재촉하자, 300개의 순은을 내놓기는 했지만 이제는 이번 한번만 납부하고 그만두려고 담판을 시도하여 공갈을 쳤습니다. 이에 구르카 당국이 격분하여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온 것입니다.
구르카군은 파죽지세로 니얄람, 제롱등을 점령하고 타시룬포(扎什伦布)를 포위했습니다. 티베트 병사와 각 라마들은 별로 열심히 싸우지도 않고 모두 달아나버렸는데, 일전에 말한 판첸 라마의 형이 모든 재물을 가지고 전혀 나누어주지 않은것 때문에 앙심을 품은 것입니다. 또, 타시룬포 사원의 주지가 적과 싸워야 할지, 싸우지 말아야 할지 점괘를 쳐본 후에, 점괘가 좋지 않아서 라마들과 함께 방어하지 않고 도망을 치기도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맞서 싸워도 어려울 테니 점괘가 나쁘게 나온것은 아닐 것입니다.
타시룬포 사원
구르카군은 타시룬포 사원에 무혈입성하여, 많은 재물을 약탈했습니다. 금은 불상들과 탑 꼭대기의 금장식과 금으로 된 책인들도 모두 가져갔고, 소와 양도 모두 강탈했습니다.
이 무렵에 건륭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구르카의 움직임에 혼란스러워하다가, 당사자인 파충에게, 적이 쳐들어왔다는 보태의 상소문을 보여주었습니다. 파충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신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으므로, 면직되거나 혹은 강직되어 티베트에 가서 속죄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파충으로서는 어떻게든 티베트로 가서 일을 수습해서 진상을 덮고 싶었겠지만, 건륭은 아리송함을 느끼면서도 파충 대신 악휘를 티베트에 보냈습니다. 파충은 지난 일이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다, 결국 그날 밤에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했습니다. 이러자 건륭은 더더욱 놀랐고, 파충이 무언가 술수를 부린것이 분명하다고 여겼습니다.
악휘등이 이끄는 청나라군은 병사 2천여명을 이끌고 진군했지만, 워낙 길이 험해 두달이 되어서야 현지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구르카군은 타시룬포 사원등을 털어버릴 대로 털어버리고 물러난 후였습니다. 청군은 '구르카 군으로부터 티베트를 지켜낸다.' 는 당초의 목표를 이루기는 하였는데, 이미 군대가 도달했을때는 구르카군이 티베트를 털 수 있을 만큼 털어버리고 물러나버렸던 것입니다.
첫댓글 사진만 봐도 대군을 보내도 행군하다 지쳐서 힘도 못쓸것 같네요
확실히 국토가 어느 이상 되면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네요. 현지 공발이 어려운 저런 지역에서는 더더구나..
당나라 때만해도 토번은 상당히 호전적인 아시아의 스파르타라고 하더니, 저 때는 한물 갔나보네요.
저 때는 토번이 당나라 위협하던 때로부터 약 1천년이 지난 후고, 불교가 사회를 지배한 때라서 이미 티벳인들은 양순해진지 오래였죠.
ㅇ.ㅇ 감사합니다~~~
왠지 철인황제가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