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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_현재 진행형인 부활
고린도전서 15:19-22
19.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22.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세상, 부활의 세상을 연 날이죠.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연 세상은 하나님나라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을 따라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25일(이하 현지시각)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에 대한 휴전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비상임이사국 10개국이 내놓은 결의안을 15개 전체 이사국 중 14개국 찬성으로 통과시킨 것입니다. 거부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은 기권했습니다. 이-팔 전쟁 발발 171일 만의 일입니다.
결의안에는 라마단 기간동안 지속가능한 휴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즉각적인 휴전 촉구,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인질 석방,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원조 흐름을 "긴급히 확대할 필요성" 등의 내용이 담겼습니다.
안보리에서 통과된 이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을 가집니다. 결의안 통과 후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 결의는 실행되어야 한다. 실패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며 당사자들 및 국제사회의 결의안 이행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결의안 통과 직후 안보리 결의안이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하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반발과 국제사회의 비난 가운데 오락가락하는 모습입니다.
팔레스타인 보건부 측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7일 이후 이날까지 3만 2333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했고 7만 4694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내쫓기고 굶주림과 질병 등 지옥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모여 있는 라파 지역에 대한 군사 공격을 강행하려 하고 있어 국제사회뿐만 아니라 미국 내 여론도 악화되고 있습니다.
잊혀져 가는 또 하나의 전쟁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있습니다. 전쟁 3년째로 접어든 지금 현재 우크라이나는 44만 4,000여 명의 군인이 죽고, 약 1,000만 명의 주민이 해외로 도피한 상태입니다. 미국과 나토 국가의 막대한 원조에도 경제 규모는 30%로 줄어들었으며 350만 개의 일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성과 없는 오랜 전쟁의 피로감은 서방 세계의 지속적인 원조에 빨간불이 되고 있어 우크라이나를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서방의 원조가 끊긴다면 전쟁 수행은커녕 공무원 월급도 줄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두에 오늘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옥의 참상들 중 대표적인 두 전쟁을 이야기 한 것은 이런 모습이 사탄과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의 모습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세상에 대항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 역시 그분이 지신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부활의 삶을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세상과 대립하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대립하는 하나님 나라를 현세 속에서 살아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먼저 왜 부활이 십가가를 통해서 이뤄졌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십자가의 형벌이 없다면 부활도 없다는 것이 핵심인 것이죠. 십자가 희생과 부활은 손등과 바작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하나님에 의한 부활도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부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형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로마의 형벌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창으로 찔러 죽이거나 참수를 하는 형벌도 있고, 고통스럽기로는 채찍형이나 투석형(돌팔매형), 거열형(능지처참)도 있었습니다. 잔인하기로는 팽형(가마솥형)이나 화형도 있었죠.
하지만 예수님은 그 많은 형벌 중 십자가형을 받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고린도전서 1장 23절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절은 당시 십자가 형벌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피해야 할 것, 부정한 것, 불편한 것-이며, 이방인에게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로마 문화권에서 십자가 형벌은 전시형 목적의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 형벌의 대상은 주인에게 거역한 노예, 전쟁에서 도망친 군인, 로마인 또는 로마인에 협조하는 사람(세리 등)을 공격한 사람, 로마에 항거한 전쟁 포로, 부모를 공격한 자식 등이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사회 체계에 대해 순응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죠. 당시 로마라는 거대하고 강한 제국이 통치하는 방식과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전시용 형벌이었기 때문에 잡혀 온 자들에게는 온갖 모욕과 수치스런 일들이 행해졌습니다. 먼저 옷을 벗겨 나체로 만들고, 이에 저항하는 자들에게는 채찍질이 가해집니다. 아침이 되면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지게 하여 사람들이 많은 곳(시장 등)을 끌고 다니죠. 그리고 도시 내 통행량이 많은 곳 또는 성문 앞에 매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십자가 위에서 며칠이고 살아있게 되죠. 십자가형을 받고 일주일도 넘게 살았던 죄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매달려 서서히 죽어가는 죄수를 보며 사람들은 로마에 거역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각인하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린 시체는 당국의 허락 없이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채 시체는 천천히 썩어 악취를 풍기고, 새들이 쪼아먹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썩어 땅에 떨어져도 치울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 시체는 천천히 썩거나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죠. 사람들은 휑하니 비어있는 십자가를 보며, 로마에 저항한 자의 최후를 상기하게 됩니다.
헬라문화권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생각했습니다. 로마에 순응하기만 하면 평화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죠. 로마에 저항하는 사람은 로마가 주는 문화와 안정을 누릴 지성이 부족한 야만적인 사람들이며, 수준이 낮은 자로 인식되었습니다.
때문에 십자가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예정된 참혹한 결말이며, 십자가에 달린 자를 믿는다는 것은 그걸 받아들이는 자신도 그와 마찬가지인 어리석은 자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십자가형은 하나님께 저주받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신명기 21장 22-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을 처형하고는 나무에 달아 효시할 경우가 있다. 이렇게 나무에 달린 시체는 하느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니, 그 시체를 나무에 단 채 밤을 보내지 말고 그 날로 묻어라. 그렇게 두어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 유산으로 받은 너희 땅을 더럽히면 안 된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십자가의 달린 자를 볼 때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몇날 며칠을 십자가형을 받아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부정한 존재이며, 하나님과 완전히 끊어진 저주받은 상태라고 보았던 거죠. 더군다나 로마 당국의 허락 없이는 ‘그 시체를 나무에 단 채 밤을 보내지 말고 그 날로 묻으라’는 명령을 이행할 수 없었다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기 때문이죠.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 저주받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었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오면 모든 의로운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게 되지만 저주받은 자는 그 구원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죠. 그렇기에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는 십자가 형벌은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부정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 죽은 자들의 첫 부활이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단지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뇌의 상징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세상에 대한 저항이며, 새 세상의 도래를 위한 투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란 로마의 질서와 권위, 유대 기득권층의 돈과 권력에 대한 저항임과 동시에 새 세상의 시작을 선포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부활을 향해 먼저 십자가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그 십자가의 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에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22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23절)”고 강권하시죠. 부활을 원하고 기다린다면 예수님처럼 제 몫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십자가에 매단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다(고전 15:20)”고 선언하죠. 이 세상의 권력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고전 15:15)"는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부활’이란 기다리던 메시아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죠. 유대인들은 “티끌로 돌아갔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영원히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모욕과 수치를 받을 사람도 있으리라(다니엘 12:2)”는 다니엘서의 말씀을 근거로 의인들의 부활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올 때 의인들이 부활하여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예수님이라는 의인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으며, 역사상 첫 번째로 발생한 의인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됐다는 것을 선포했죠. 하나님이 예수님을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다는 것은 예수의 공생애와 십자가의 죽음이 옳았다는 것을 반증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권력과 이스라엘 기득권에 대항하여 가난한 자들을 대변하며 싸운 것, 모든 차별을 배격하고 자유와 평등, 사랑과 평화의 나라를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하신 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예수님은 스스로 세상 속에서 약자가 되었습니다. 박해를 받고 고난을 당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약자를 대신해 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시죠.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영광, 즉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1-22절은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가 부활에 참여하는 통로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이나 초대교회에서는 몸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이는 죽어도 죽지 않는 그런 새 세상을 지금 이 자리에서 산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하나님나라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나라는 먼 미래에 있는 나라가 아닌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나라, 지배와 압제 대신 나눔과 사랑이 가득한 그런 나라였던 것이죠. 예수의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 가득한 삶을 살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천국의 삶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몸의 부활은 영혼의 구원으로 변질됩니다. 사도행전이나 초대교회에서는 몸의 부활을 믿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살았죠. 그러나 플라톤의 이원론을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는 영혼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는 종교가 됐습니다. 마틴 루터나 칼빈은 무엇을 믿었을까요? 마틴 루터나 칼빈은 물질적인 내세를 믿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모든 것들이 다음 세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거죠. 하지만 칼빈과 루터를 지나면서 물질적인 내세관은 모두 사라지고 천국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하는 곳으로 여겨졌고, 물질적인 천년왕국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부활이 되셨기 때문에, 몸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은 그분과 함께 부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그분이 가져온 하나님나라를 현재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시작됐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으며 마침내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의 삶을 기꺼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고, 그 나라를 확장시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도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참으로 불의한 세상입니다. 온갖 차별과 불평등이 권력과 가진 자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행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았던 로마 식민지 시대와 다를바가 없습니다. 외세에 기대 그들의 이권에 봉사하는 정권, 자기 백성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전쟁을 획책하는 정권, 민생보다는 부자만을 챙기는 정권이 권·언·검·재벌 카르텔을 형성하여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과 싸우자고 합니다. 이런 세상을 향해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려는 우리는 그분이 가셨던 십자가와 부활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창립 38년을 살아가고 있는 한울림교회는 그간 묵묵히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그의 고난에 동참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이 세상과 대적하여 하나님나라의 씨앗을 심으려 했던 것이죠. 그 하나님나라가 이제는 뿌리도 내리고 성장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과 대적하여 한 판 승부를 볼 수 있는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오는 4월 10일 22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지난 2년 동안 우리 국민들이 당해온 모든 고난과 십자가를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는 위대한 날이 될 것입니다. 잠자는 자들을 깨우신 예수님의 첫 부활이 우리 한반도와 세계를 향한 놀라운 축복이 되길 바랍니다.
사탄의 권세에 사로잡힌 이 세상에 대적하여 하나님나라를 세우려는 저와 여러분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과 능력이 넘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