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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노 나쓰오의 ‘아임 소리 마마’를 읽고
Y가 초래하는 비극
저는 아이코를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이코는 그것이 불우한 성장 환경에 의한 것일지라도 정상참작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큰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이 불우한 성장 환경이라는 것이 실제 살인마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매번 끼어드는 것인 만큼 아이코가 살고 보았던 세계와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반면교사랄지 단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정상적인 생활에 대한 감사나 안도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음습한 실험 환경에서 인간이 가진 결함이 극적으로 증식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바로 그런 현장을 목격하기 위함입니다.
제 생각에 소설 속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문제점, 인류의 치명적인 결함은 남성 성염색체 ‘Y’라고 생각합니다.(이 ‘Y’염색체는 극악무도하고 파렴치 한 것으로서 유전자 수가 ‘X’염색체 1/10밖에 되지 않지만 ‘X’염색체의 일부 유전자의 발현을 막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Y염색체의 악행은 X에 대한 끊임없는 지배의 욕구로 흔히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남자
소설에 등장하는 일그러진 가정의 원인은 대개 남자 때문입니다. 유아기로 퇴화된 미노루 때문에 초로의 미사에는 자신의 연금으로 마흔이 넘은 그를 양육해야 하며, 다카조 할아범은 병석에 누운 아내가 보라는 듯이 여장을 합니다. 게다가 그의 수양아들은 여장을 한 채 장례식장에 나타납니다. 경영도사인 시즈코에게도 외도하는 남편은 골칫덩어리이며 아들 야스시에게 두 명의 엄마를 만들어준 장본인입니다. 라이후 드라이 클리닝의 쌍둥이들은 비슷한 외모를 이용해 사사키를 골탕 먹이고 부려먹습니다. 또 왕엄마를 위시한 여러 명의 언니들이 이루었던 괴상한 가족, 누카루미 하우스에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하룻밤의 오빠들, 남편들이 나옵니다. 여기에 좀 특이한 모습을 보이는 등장인물이 바로 아담입니다. 아담은 노숙자로 정신이 좀 이상해진 인물입니다. 버려진 나무젓가락으로 집을 짓는데 그 집은 형편없이 더럽고 약할 뿐 아니라 겨우 혼자서 웅크리고 잘 만한 공간밖에 없습니다. 왜 나무젓가락으로 집을 만드는지는 그 괴상한 정신세계를 알 길은 없겠으나 그 모습이 자아내는 안타까움은 상징적인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나약하고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남자. 그런 사람이 현대의 아담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더없이 아주 고약한 것으로 때리고 모욕하는 것 이상으로 여자를 힘들게 하며 교묘하게 조종하는 것입니다. 몽둥이를 든 원시의 남자가 여자를 다루는 데 있어서 진화했다고 할까 힘을 덜 들이는 지능적인 모습입니다.
여자
반대로 이런 붕괴 직전의 가정을 지탱하는 사람은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초인적인 인내심과 괴력을 발휘하는 여성들입니다. 아이코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것도 ‘mama’였습니다. 왜 ‘papa’를 찾지 않았을까. 이 소설은 애초에 부성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는데 “남자에게 인생을 맡길 수 없다.”라는 대목까지 오면 강한 대결의지가 느껴지고 남자혐오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남녀관계가 왜 이렇게까지 비틀어져 버린 것일까 의문입니다만 소설 속의 남성상만을 놓고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여성성이고 모성이라는 얘기인데 아이코의 경우도 모성이 결핍되었고 저지른 잔혹한 살인과 폭력은 그 결핍의 결과로서 남성적인 것(왜냐하면 아이코는 태생적으로 범죄자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고 모성으로 치유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연쇄살인범 중에서 여성은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성애, 여성성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운 곳, 모든 것이 시작 된 그 곳이야말로 타락한 세상을 다시 품어 깨끗이 씻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트랜스베스티즘(의상 도착증)과 혼란
여기에 더해 최근(?) X와 Y의 일방적인 관계에 하나의 변화가 일고 있습니다. 남자-남성성, 여자-여성성, 즉 sex와 gender를 여태까지는 마구 섞어 써도 큰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는 이 결합 관계가 느슨해지고 있는 만큼 어떤 것을 남자답다고 할 수 있는가, 그 반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건 쉽게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만 전통적인 남성상과 전통적 여성상이 점차 경계를 허물고 있어서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들(sex)은 무슨 옷(gender)을 입어야 할 지 쉽게 판단이 안서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남자들은 예쁜 옷들을 입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성향의 변화라기 보다는 선택사항의 변화입니다.) 옷을 바꿔 입는 다는 것은 그 옷을 입는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한다고 하면(동화 ‘왕자와 거지’에서도 거지는 왕자와 옷을 바꿔 입고 왕자가 됨) 여장을 한다는 것은 여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심리일 것입니다. 왜일까.
남자들이 입었던 남성성이라는 옷은 강하고 독점적이고 따라서 폭력적인 것의 대명사였고(군복처럼) 여자들이 입었던 여성성이라는 옷은 군복을 제외한 나머지 것으로 인식(전쟁시에는 군인과 민간인으로밖에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만. 현대에서는 누가 좋은 옷을 입느냐하는 쟁탈전에서 놀랍게도 여성이 좋은 옷을 입고 권위와 지위를 누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성이 걸친 좋은 옷은 낡은 군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색감이 지독할 만큼 현란하고 최고급 원단으로 재단한 옷일 겁니다. 지금은 전쟁이 벌어지는 전시도 아니어서 옷 시장에는 여유가 생겨 창의성이 발휘됩니다. 따라서 당연히 군복따위는 밀려나고 그 대신 화려하고 멋진 옷들이 쇼윈도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옷들이라면 여성들이 잘 고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소설 속의 나약하고 의존적인 남성상도 일면 이런 맥락에서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즉 그들은 아직까지는 몸에 익숙치 않은 옷을 입고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이죠. 오랫동안 입었던 군복에 대한 향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정말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것이 패션처럼 순환하는 것일까요.
이때 혹시 Y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X의 지극한 헌신과 인내에 보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정말로 그럴까요? 아니면 이것조차 Y의 생존전략일 것일까요.
(트랜스베스티즘은 조금 위화감을 덜어내고 크로스 드레서라고도 하는데 특히 대중문화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미 많은 영화 속에서도 여장 남자가 등장하며 여장남자의 심리를 극대하여 아예 여자로 만들어 버리는 TS물(또는 트랜스물, 주인공의 성이 변하는 특성을 가진 일본 에니메이션)이라고 불리는 애니메이션들이 우리나라에서도 독특한 내용으로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소설 속의 다카조 할아범과 수양아들 야스오는 스스로를 오카마(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하고 화장하는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특히 할머니가 되고 싶은 할아버지라. 이상심리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대중문화 속에서 만연한 모습을 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성애의 현실적 귀결, 모계사회
‘아임 소리 마마’의 남성이란 노숙자, 여장남자, 여성 상사나 여성 부하에게 시달리는 중간 관리직 정도가 고작이어서 얼핏 전통적인 남성상이 부재하거나 굉장히 나약한 것으로 그려지고 그 반대로 여성들이 대단한 것처럼 부각되어 보이지만 여성들의 삶은 그 ‘모성’ 때문에 ‘아들’이라는 족쇄를 차게 됩니다. 현실적 한계로서 여성은 ‘야스시 도련님’의 경우처럼 그에 복속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이런 모계사회는 어머니가 헤게모니를 잡는 사회가 아니라 아버지가 불분명하여 모계로서만 가계도를 그릴 수 있고 홀로 양육의 부담을 떠 앉은 원시 시대의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또한 지하도 등지의 부랑자들 중에서 여자들은 거의 없다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이것은 현대의 남자는 야스시처럼 부양받아야할 존재들이어서 오히려 여성들의 부담과 종속성은 더 커져가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게 바로 현대적인 Y의 생존 전략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에 “모성애는……” 이라고 질문하는 아이코에게 “그런 건 환상에 지나지 않아. 모두가 편해지기 위해서 자신에게 암시를 거는 거야.”라고 말하는 에미 씨(마마)의 대답은 여자에게 굴레로서 지워지는 ‘모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도 생각이 듭니다.
표지에 대한 얘기
왼쪽은 황금가지에서 나온 책 표지이고 중간은 일본 集英社의 책 표지입니다. 첫 인상이라는 것은 묘하게 사람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제 멋대로 구는 경우가 많습니다. 책 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저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이 책을 읽기 전 몇 개월 동안 저 혼자 나름의 이야기를 상상해 보곤 했습니다. 책 내용과는 다른 엉뚱한 얘기가 돼버렸지만.
책을 읽으면서 표지와 관련해서는 표리부동한 느낌에 약간 실망이라고 할까 묘한 긴장이라고 할까 하는 감정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책을 읽다보면 저 핑크 레이디 따위는 금방 잊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맨 오른 쪽은 13계단의 표지입니다. 전 개인적으로 이 표지가 너무 좋아서 교보문고에서 저 표지를 볼 때마다 사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림을 통해 내용이 압축적으로 전해지지 않습니까?)
끝으로 사치코, 아이코와 함께라면...
정말 유래 없이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갔고 사건의 충격 또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올렸던 건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에 나오는 사치코였습니다. 머릿속에는 아주 우스꽝스런 모습 하나가 그려졌습니다. 영화계의 이종격투로 화제를 모았던 영화 ‘에일리언vs프레데터’, ‘제이슨vs프레디’(영화 나이트메어의 살인마)처럼 둘이 세상에서 만난다면? 아이코에게 거액의 생명보험(수취인은 사치코)을 들리고 사치코는 아이코의 범죄를 알고 있다고 설정(아마 사치코 성격상 아이코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섬뜩한 정신력 면에서는 사치코가 우세일 것이고 하지만 완력 면에서는 아이코가 월등할 텐데, 참 사치코가 순발력 면에서는 더 나은 것 같습니다만……
첫댓글 두 권의 책 중 어느 한권을 권한다면... <13계단> 쪽을 추천. 완성도면에서 <아임 소리 마마>는 실패작. 작가의 이름에 걸맞은 작품이길 바랐는데, 결과는 상당히 실망스러웠음. <13계단>은 나름대로 꽤 괜찮았음.
음..저는 아임소리 마마, 이 책이 정교한 추리 소설로는 다소 부족할 지는 몰라도 "소설"로서는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해요. 사회소설적 면모도 갖췄고, 추리소설 팬이 아니어도 좋아할 법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ㅡ 개인적으로 기리노 나쓰오는 너무나 좋아해서 이런 의견을 가진 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추리소설로서는 별 감흥을 못 느꼈습니다. 기억에 남는 거라고는 피하고 고기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