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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퓨터가 언제 한국에 보급되기 시작했을까?
91도에 286을 썼었는데 산업용 컴은 아마 87년쯤에 들어왔을 거구요
컴퓨터 학원에서 처음 286 짜리 거의 2메가 짜리 하드를 배웠던 추억
개인용PC로는 95 쯤 보급이 되었을 것, 윈도우95 라고 첨 윈도우에서 내놓았죠
정말 획기적인 .... 95전엔 도스 모드에서 일일이 명령을 처서
디렉토리을 불러서 실행 시키고 그랬는데 그땐 진짜 컴을 한다는 건 전문지식이 있어야만
가능, 그런데 윈도우95 나오고 윈도우98 버전부터는 거의 클릭만으로 실행되는
세상이 열리고 상상도 못했던 2D 게임에서 3D 게임이 가능해졋습니다
우리나라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스타가 99~20년 사이 보급되기 시작했으니깐
그때도 거의 2D게임이 판을 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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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선 보급과 광랜보급은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나요?
-sihoo2010님의 답변 2011.04.18.
- 1982년 서울대와 KIET(전자통신 연구소의 전신)가 TCP/IP로 SDN시작
- 1983년 미국으로 UUCP 다이얼 업(dial-up) 연결
- 1984년 유럽으로 X.25를 이용한 UUCP연결
- 1987년 교육 연구 전산망 추진 위원회 구성
- 1988년 연구 전산망 기본계획 확정, 교육망이 BITNET과 연결
- 1990년 HANA/SDN 이 인터넷에 56Kbps로 연결
- 1991년 연구 전산망이 인터넷에 56Kbps로 연결
- 1993년 HANA/SDN이 56Kbps에서 256Kbps로 확충
- 1994년 한국통신, 데이콤에서 인터넷 상용 서비스 시작
- 1995년 INET, 나우콤에서 인터넷 상용 서비스 시작
- 1995년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 사업 시작
- 1996년 7천 이상의 호스트 컴퓨터가 연결됨
- 1997년 한국 인터넷 협회 설립
- 1998년 초고속 정보 통신망 구축 사업 1단계 완료
- 2000년 각종 초고속망 구축 기술로 각종 초고속망 서비스가 이루어짐
(하나로, 두루넷, 드림라인, 신비로)
- 2001년 초고속 광 전송망 구축 (155Mbps ~ 40Gbps)
- 2002년 서울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등이 참여하여 IPv6활성화를 위한 프로젝트 시작
- 2004년 한국 인터넷 이용자 수 3천만 명 돌파
- 2005년 한국 IPv6 주소 보유율 세계 3위로 평가
-출처 정보보안 개론과 실습-네트워크 해킹과 보안(한빛 미디어
*window운영체제가 언제부터 보급이 되었나요?
-photo333님의 답변. 채택답 -2002.12.21. 15:26
-빌게이츠의 프로필
워싱턴주(州) 시애틀 출생.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1967년 레이크사이드에 입학하면서부터 컴퓨터와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이 곳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社)의 공동창업자인 P.앨런을 만났다. 1973년 하버드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수학과로 전과하였다.
1974년 P.앨런과 함께 최초의 소형 컴퓨터용 프로그램 언어인 베이직(BASIC)을 개발한 데 이어 1975년 대학을 중퇴하고 뉴멕시코주(州) 앨버커키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설립하였다. 1981년 당시 세계 최대의 컴퓨터 회사인 IBM사(社)로부터 퍼스널컴퓨터에 사용할 운영체제 프로그램(후에 DOS라고 명명됨) 개발을 의뢰받은 것을 계기로 지금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1995년 8월 '윈도우95'를 출시함으로써 퍼스널컴퓨터 운영체제의 획기적 전환을 가져 왔으며, 이는 발매 4일 만에 전 세계적으로 100만 개 이상의 판매실적을 올리는 대기록을 세웠다. 《포브스 Forbes》지에 의하면, 1994 ·1995년 미국 갑부 제1위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현재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사장 겸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래서 윈도우는 1995년 후반기쯤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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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gpsm님의 답변. 2002.12.21. 15:26
윈도우즈의 역사
1981년 10월
새로운 IBM PC를 위한 PC-DOS 1.0 이 발표되다. 곧 Microsoft는 MS-DOS를 발표했고,모든 희망자에게 라이선스를 부여한다.
1983년 1월
애플 컴퓨터는 최초의 그래픽 기반 인터페이스를 가진 마이크로컴퓨터의 하나인 Lisa를 개발했다. 신뢰성이 약한 하드웨어와 약 1만 달러에 달하는 가격으로 Lisa는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일년 후 적당한 가격의 Macintosh를 내놓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Lisa와 Mac은 DOS 신봉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WIMP(Windows, Icons, Mice, Pointers)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또한 폴더와 긴 파일 이름도 이 때 나오게 된다. 이것은 Windows 2.0에서야 겨우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또한 몇몇 기능은 윈도95가 나와서야 겨우 구현되었다.
1983년 3월
사실상 다시 제작된 MS-DOS 2.0은 하드 디스크, 큰 프로그램들과 설치 가능한 디바이스 드라이버, Unix를 모방한 계층적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게 된다. 여전히 파일 이름은 8자를 넘을수 없었고, 텍스트 모드의 인터페이스를 갖고 있었다.
1983년 10월
DOS 스프레드시트인 VisiCalc의 개발사에서 떨어져 나온 VisiCrop.는 최초의 PC를 위한 GUI인 "환경 통합적인" VisiOn을 발표했다. VisiOn은 512KB의 램과 하드 디스크를 필요로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것은 최첨단 기술이었다.
1983년 11월 10일
Microsoft는 DOS를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통해 기능을 확장하는 윈도우 환경을 발표했다.
1984년 9월
Digital Research에 의해GEM (Graphics Environment Manager)가 발표되었다. GEM은 DOS 어플리케이션을 실행할 수는 없었고 이로 인해 경쟁력이 없었다. GEM과 VisiOn은 윈도 시장을 공격했지만, 오리지날 윈도우가 그랬듯이 똑같은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 새로운 플랫폼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1985년 2월
IBM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DOS에서 다중 작업을 할 수 있는 TopView를 발표했다. TopView에서는 몇몇 도스 명령만 사용할 수 있었다. TopView는 거의 모든 DOS 인터럽트를 가로채었기 때문에 DOS의 배치 파일이 실행될 수 없었다. IBM은 TopView에 GUI 환경을 덧붙이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엔 그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1985년 7월
Quarterdeck Office Systems이 또 다른 DOS를 위한 다중 작업 도구인 DESQview를 발표했다. 이것은 한동안 일부 사용자들 사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Quarterdeck은 DESQview를 플랫폼으로 만들기 위해 개발자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Windows 3.0이 표준이 되면서 결국 두 손을 두는 수 밖에 없었다.
1985년 11월 20일
Windows 1.0이 발표되었다. 1.0 버전은 사용자들이 한번에 여러개의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개별 어플리케이션을 종료하거나 다시 실행할 필요없이 쉽게 어플리케이션을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윈도우 위에 윈도우를 겹쳐서 배열할 수 없어서 큰 불편함이 있었다. Windows 1.0을 위한 소프트웨어가 충분하지 않았고 시장을 공략하는데는 실패했다.
1987년 1월
Windows 1.0에서 작동하는 Aldus PageMaker 1.0이 발표되었다. PageMaker는 최초의 PC에서 WYSIWYG 방식을 지원하는 출판 도구였다. 데스크탑 출판 어플리케이션의 인기와 레이저 프린터의 발매는 Windows가 데스크탑을 석권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1987년 4월
IBM과 Microsoft는 운영 체제에 대한 원대한 꿈인 OS/2 1.0을 발표했다. Microsoft는 Windows의 개발을 계속했고 차세대 PC의 운영 체제에 대한 방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OS/2 1.0은 GUI를 갖추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엔 부족한 어플리케이션, 하드웨어 지원 미흡, DOS 어플리케이션에 대한 미약한 지원, 이것을 사용하기 위해 PS/2를 사야하는지에 대한 혼동등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1987년 10월 6일
PC에서 GUI 를 지원하는 최초의 스프레드 시트인 Excel for Windwos 2.0이 Lotus 1-2-3의 아성에 도전하며 시장에 나섰다. Excel은 Windows가 정통성을 얻는데 조력했지만, 많은 자원을 요구하고, Windows 디바이스 드라이버에 의존하는 것은 이 새로운 도전자의 약점이 되었다.
1987년 12월 9일
Windows 2.0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이전 버전의 제목창으로 나열되던 윈도우 구성 대신 겹쳐질 수 있는 윈도우 시스템을 사용했다. 또한 80286 시스템이나 그 이상의 보호 모드를 사용할 수 있었고, 프로그램들이 DOS의 640KB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했다. 1988년 6월에 이르러 2.1 버전이 나왔을 때 이것은 Windows 286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87년 12월 9일
Intel의 최신 칩에 최적화된 2.0 버전인 Windows 386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시장성에 취약점이 있었지만 대부분에 있어서 사용자들이 DOS 프로그램들을 386 칩의 "가상 머신"을 통해 다중 작업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Windows 3.0 개발에 상당한 기반을 제공했다.
1988년 6월
Digital Research는 DR-DOS를 발표했는데 언론은 이것의 강력한 유틸리티로 인해 MS-DOS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DR-DOS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왜냐면 Windows와 함께 동작하려면 패치(patch)가 필요했고, DR-DOS는 시장에서 주목할만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1998년 10월 31일
IBM이 프리젠테이션 매니저를 포함한 OS/2 1.1을 발표했다. GUI를 구현한 최초의 OS/2 1.1은 OS/2 1.0에서 크게 업그레이드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중적인 DOS 어플리케이션에 대한 지워니 미약했고 현존하는 하드웨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OS/2의 이러한 문제점은 Microsoft가 Windows를 계속 개발하는데 용기를 주었다.
또한 IBM은 OS/2를 계속 개발해 나갔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IBM은 Microsoft가 Windows에 목적이 있다고 비난했으며 2마리 토끼를 잡으려 한다고 했다.
1988년 12월
최초의 Windows용 워드 프로세서인 Samna Ami가 발표되었다. 사용자들은 출력물의 글꼴과 닮은 글꼴로 편집할 수 있었고, 실제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백을 볼 수 있었다. WordPerfect는 워드 프로세서 가운데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Ami 또한 아주 근소한 차이로 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Microsoft의 Word for Windows는 조만간 나오게 될 것이었다.
1990년 5월 22일
괄목할만한 사용상 편리함이 개선된 Windows 3.0이 발표되었다. 프로그램 관리자와 아이콘으로 작업하는 것은 MS-DOS가 관리하던 구형 Windows 2보다 훨씬 나았다.
파일 관리자도 새롭게 추가되었다. 개발자들은 자극을 받았고, 곧 윈도우 소프트웨어의 붐이 시작되었다. 안정성은 완벽하지 못했지만 Windows 3.0은 광범위한 제 3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지원 그리고 PC 제작사들의 번들로 제공되므로써 즉시 시장을 장악했다.
Microsoft의 Windows 만들기 작업은 끝내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1990년 11월
또다른 DOS를 위한 GUI인 GEOS 1.0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결코 Windows의 경쟁자가 되지는 못했다. PC 매거지과 몇몇 다른 출판물들이 GEOS의 기술상 이점을 떠들어 댔지만, GEOS에서 작동하는 소프트웨어는 없었다. 개발용 소프트웨어조차 OS가 발표된 후 6개월이 지나도록 나오질 않았다.
1992년 3월
OS/2 2.0이 판매를 시작했다. 이 버전은 DOS/Windows 3.x를 잘 지원했다. 그러나, 복잡한 Object- Oriented Workplace 셀과 당시로는 과한 자원이 필요한 것이 부담이었다. OS/2는 여전히 광범위한 드라이버와 제 3의 소프트웨어 지원이 미약했고, Windows가 시장의 선두 주자로 나서고 있었다.
1992년 4월 6일
Windows 3.1이 발표되었다. 여러가지 버그가 수정되었고 보다 안정적이며 몇몇 교체 가능한 트루 타입 폰트들을 포함한 새로운 기능들이 첨부되었다. Windows 3.x는 미국에서 PC들 가운데 가장 많이 인스톨되는 운영체제가 되었고 이것은 1997년까지 계속 되었다.
1992년 7월 4일
Microsoft는 32비트 Windows NT를위한 차세대 API인 Win32를 발표했다. 최초로 "시카고"(윈도95의 코드 네임)에 대한 공개적 언급이 있었다. 또한 NT 제품이 어떻게 현존하는 Windows 아키텍쳐를 대신할 것인지도 얘기 되었다.
1992년 10월 27일
Windows for Workgroups 3.1이 발표되었다. E-메일, 그룹 미팅 스케쥴링, 파일/프린트 공유, 일정 관리, 네트워크와 작업 그룹을 연결시키는 기능을 가지고있었다. 3.1이 소규모 LAN의 붐을 일으킬 조짐을 보였지만 이것은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덕분에 "Windows for Warehouses (정신병자 수용소를 위한 Windows)"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1993년 4월
6.0 버전에 이르러서 IBM은 PC-DOS를 Microsoft와는 별개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PC-DOS 6.0은 1981년 오리지날 IBM PC에서 Microsoft가 라이선스를 갖고 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optimizer와 메모리 관리자를 포함하고 있었다. Novell은 DR-DOS를 사서 fancier 네트워킹과 함께 1993년 12월에 Novell DOS 7.0이라는 이름으로 내 놓았다. 이 두 형태의 노력은 너무 미미했고, 또한 너무 늦었다.
왜냐면 DOS가 그 의미 자체에 도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실제적인 PC 신기술은 Windows에서 발생하고 있엇다. Microsoft의 OS가 아니라 말이다.
1993년 5월 24일
Windows NT (New Technology의 약자지만 일부에선 Not Today, No Thanks, Nice Try의 약자라고도 한다)가 발표되었다. 처음부터 파워 유저와 서버 시장을 겨냥한 최초 버전인 3.1은 실행을 위해 최고의 PC를 요구했고 다소 불안정했다. 그러나 Windows NT는 개발자들의 많은 지원을 받게 된다. 왜냐면 보안, 안정성, Win32 API는 보다 쉽게 강력한 프로그램들을 제작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OS/2 3.0을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지만 코드를 몽땅 다시 쓰는 일이 되었다.
1993년 11월 8일
Windows for Workgroups 3.11이 발매되었다. Netware와 WindowsNT에 대한 개선된 기능을 지원하고, 여러 종류의 아키텍쳐와 호환되며 실행속도와 안정성이 개선되었다. 결국 Windows95가 가야할 길을 여기서 찾게 된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이것은 많은 기업에서 사용되고 있다.
1994년 3월
새로운 다중 사용자 유닉스 운영 체제인 Linux 1.0이 취미삼아 시작한 프로젝트로 선을 보였다. 이것은 소스 코드가 공개되어 있어서 누구라도 이것을 자신에 맞게 개조하거나 그 결과물을 전파할 수 있다. 새로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재빨리 Linux로 포팅되었으며, 자주 Windows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기도 했다. Linux는 큰 시장성을 갖지 못했음에도 계획은 계속 진행되었다( 넷스케이프조차 Windows NT에 대항하기 위해 Linux와 커뮤니케이터와의 결합을 고려한 정도였다). 또한, Linux는 이것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큰 도움으로 인해 PC 시스템에서 선택할 수 있는 Unix가 되었다.
1995년 8월 24일
몇번의 지연과 전례에 없는 사전 광고가 끝난 후 Windows 95가 발표되었다. 흥분한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은 컴퓨터도 없으면서 이것을 사기 위해 대열에 끼어들기도 했다. 최초로 미리 DOS를 설치할 필요가 없는 Windows 95는 여전히 가장 친근한 Windows다. 또한 PC의 주요한 흐름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매우 향상된 인터페이스는 Mac 플랫폼과의 격차를 없었으며 마침내, Mac을 주변부로 밀어내게 된다. 또한 Windows 95는 통합된 TCP/IP 스택, 전화 접속 네트워킹, 긴 파일 이름 지원등이 포함되었다.
1996년 7월 31일
Microsoft는 Windows NT 4.0을 내 놓았다. 3.51에 비해 대단히 진보한 이 버전은 Windows95의 인터페이스와 디바이스 지원이 강화되었고, 몇몇 번들 IIS 웹 서버와 같은 서버 프로세서가 포함되었다. NT 4.0은 기업계에서 Microsoft의 입지를 강력히 굳혀 주었다. Unix를 대신할 지위로써 미국 기업체에서 시작은 작았지만 성장 속도는 그야말로 극적이었다. 또한 인트라넷과 인터넷 사이트를 위한 플랫폼으로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1996년 10월October 1996
Windows 95를 위한 OEM Service Release 2 (OSR2)가 새롭게 판매되는 PC에 미리 설치되어 보급되었다. 기능을 향상시키는 Windows95의 제어판 애플릿과 내장된 많은 기능들뿐만 아니라 잠재된 버그를 치료했다. FAT32나 개선된 전화 저속 네트워킹등과 같은 몇몇 "새로운 " 기능들은 윈도98의 기능을 미리 선보인 것이다.
OSR2는 또한 인터넷 익스플로러 3.0을 내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Microsoft에서 개발한 최초의 웹 브라우저다.
1997년 9월 23일
Windows NT 5.0의 최초 베타 버전이 개발자들에게 배포되었다. 새로운 버전은 차세대 하드웨어를 지원하게 되며 관리와 보안 기능이 보다 강화되어 있다. 이 버전은 1999년에 발표될 것으로 예상된다.
1998년 6월 25일
Microsoft는 Windows98을 발표했다. 이것은 DOS위에서 움직이는 오래된 커널에 기반한 마지막 Windows 버전이다. Windows 98은 인터넷 익스플로러 4와 결합되어 있으며 USB에서 ACPI 전원 관리와 같은 새로운 디바이스 타입을 지원한다. 차기 Windows의 소비자판은 NT 커널에 기반하여 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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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인터넷 시대는
-yavi님의 답변 -채택답변 2007.01.04. 11:25
국내에서는 한국전산원의 한국 인터넷 정보 센터(KRNIC)가 IP 주소의 지정 및 도메인 등록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994년 6월 한국통신이 최초로 인터넷 상용 서비스(KORNET service)를 개시한 이래 많은 수의 인터넷 접속 서비스 제공자(ISP)가 생겨나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상용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사업자는 개별적으로 미국이나 기타 국가의 인터넷 접속 사업자와 연결되어 있다.
지금현재 서비스제공업체는 하나로 통신, 두루넷, 온세통신샤크, 한국통신매가패스 등이 있다.
*한국 인터넷의 역사
하나망을 시작으로 한국도 인터넷에 접속합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인터넷에 최초 접속한 것은 1982년이지만 본격 접속은 1990년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몇몇 대학과 연구소가 모여 하나망을 구성한 뒤 미국의 하와이 대학과 인공위성을 통한 56Kbps급 회선을 구성한 것이 본격적인 인터넷 접속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1982년에 서울대학교와 한국과학기술원 사이에 TCP/CP로 SDN(System Development Network)을 사용하여 연결한 것이 네트웍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SDN은 후에 하나(HANA)망으로 통합됩니다. 그 후 1983년에 5대 전산망 구축계획이 세워지자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교육망(KREN)과 과학기술원의 시스템공학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KREONET, 그 뒤에 형성된 하나망이 구축됩니다. 이 세 개의 망이 구성되어 미국의 인터넷에 네트웍으로 접속된 겁니다..
1983년에 미국과 처음으로 연결됩니다.
해외와의 연결은 1983년 UCCP(Unix to Unix Copy Program)를 이용하여 미국과 연결한 것을 시초로, 1984년에는 X.25를 이용하여 유럽과 연결하였고, 1988년에는 KREN이 BITNET에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해외연결은 1990년에 하나망의 전용선을 이용하여 연결한 시기부터 잡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인터넷이 일반인에게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94년에 한국통신의 인터넷 계정 서비스가 개시되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아이네트와 천리안 등의 기업에서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일반인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나라가 초고속인터넷 가입자가 빠르게 늘어날 수 있었던 이유
정부와 생산자(통신업체), 소비자의 합작으로 가능했습니다.
우선 IT(정보기술) 강국이 되자는 목표를 마련한 정부의 공이 큽니다.
그리고 통신업체들은 그동안 11조원이 넘는 투자를 했고, 서로 경쟁하면서 기술을 개발해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어 냈죠.
가장 큰 공은 소비자.
인터넷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e메일, 채팅, 동호회, 온라인 게임, 전자상거래 그리고 중요한 지식인등 인터넷 관련 서비스를 맘껏 이용한 소비자가 있었거든요.
여기에 전체 인구의 93%가 전화국에서 4km 안 쪽에 살고 있고,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에 60%의 인구가 살고 있어 가까운 거리를 연결할 때 효과가 큰 초고속 통신망이 빠른 시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입니다.
*우리나라가 인터넷 사용 1위가 된 이유
우리나라가 인터넷 사용 1위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인터넷 사용 환경이 가장 좋기 때문입니다.
전세계 어느나라보다 한국은 ADSL, VDSL, 케이블 모뎀 등 초고속 정보통신망이 가장 많이 보급되어 있고 사용료가 저렴합니다.
사실 싱가폴 같은 도시국가가 더욱 빨리 보급되었지만 워낙 작은 국가이니까요.
미국 같은 경우 선진국이지만 땅덩어리가 넓고 이미 기존 전화선이 넓게 퍼져 있는 상태에서 나라 전체에 걸쳐 새로이 광섬유 같은 초고속 정보통신망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가장 먼저 초고속 정보통신망(Information Super Highway)를 주창하고 실행했지만 아직 우리나라 같이 빨리 보급은 안된 것이죠.
그리고 한국의 인터넷 사용료는 매우 저렴합니다. 아직 미국이나 일본은 전화선을 이용한 모뎀을 사용하는 곳이 많습니다. 그만큼 사용료가 비싸다는 것이죠.
일본은 유선 인터넷보다 NTT 도코모사의 imode 같은 무선인터넷이 더욱 많이 활성화 되어 있습니다. 이유인즉슨 무선 인터넷 사용료가 싸기 때문이죠. 지하철을 타면 너도나도 휴대폰으로 인터넷이나 이메일을 사용합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넷 사용을 적극적으로 끌만한 무수히 많은 컨텐츠와 온라인 서비스들의 등장이지요.
예를 들면 포탈, 온라인 쇼핑몰, 뉴스, 인터넷 뱅킹, 온라인 게임 등입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고작 이메일 보내고 뉴스보고 자료 잠깐 검색하는 정도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엔터테인먼트적인 서비스를 하는 곳이 많지 않습니다.
참, PC방의 보급도 한 요인으로 볼 수 있겠네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블리자드사가 내놓은 스타크래프트 게임의 전세게 판매량의 1/3이 우리나라에서 팔렸는데 대부분 PC방에서 구매한 것입니다. 다들 이것 때문에 PC방 많이 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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