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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국가권력 명령 거부하고 국민 생명 지켜낸 ‘제주와 전남의 영웅들’
기자명 김찬우 기자 입력 2022.09.14 23:29
[제주4.3유족회-재향경우회 합동 순례]① 제주4.3 문형순-김익렬, 광주5.18 안병하-함평 김철
사진 왼쪽부터 제주4.3 당시 부당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 광주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을 향해 총을 쏘라는 명령을 거부한 안병하 치안감, 제주4.3당시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 평화협상에 나선 김익렬 연대장, 조국을 되찾기 위해 혼을 불태운 독립운동가 김철 선생. ⓒ제주의소리
사진 왼쪽부터 제주4.3 당시 부당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 광주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을 향해 총을 쏘라는 명령을 거부한 안병하 치안감, 제주4.3당시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 평화협상에 나선 김익렬 연대장, 조국을 되찾기 위해 혼을 불태운 독립운동가 김철 선생. ⓒ제주의소리
국민의 부름을 받은 경찰과 군인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위험을 무릅쓴 채 부당한 국가권력의 명령을 거부하고 국민의 생명을 지켜낸, 시대를 뛰어 넘은 제주와 전남의 영웅들이다.
제주4.3 당시 예비 검속자들에 대한 총살 명령을 “부당함으로 불이행”하겠다며 학살을 막아내고, 광주5.18 당시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전두환 신군부의 명령을 거부한 영웅들이다.
이들이 생각한 것은 오직 국민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 있음에도 국민을 사살하라는 부당한 명령을 이행할 수 없다며 항거한 영웅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되찾기 위해 혼을 불태운 전남 함평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철 선생과, 4.3 당시 무고한 제주도민들의 희생을 막아내기 위해 무장대의 무장해제 등을 담은 평화회담을 극적으로 성사시켰던 경남 하동 출신의 김익렬 연대장도 있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는 14일부터 오는 16일까지 ‘화해와 상생을 위한 합동순례’에 나섰다. 전라남도 일대에서 4.3-경찰 관련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정이다. 제주도 4.3지원과도 동행했다.
제주 4·3희생자 유족들과 전직 경찰관 모임인 두 단체는 4.3사건을 두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로 수십 년간 갈등과 반목을 거듭해오다 지난 2013년 8월 화해의 손을 맞잡았다. 당시 두 단체는 이념적 갈등을 버리고,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약속한 뒤 매년 합동 참배 등 진정한 화해와 상생이라는 제주4.3의 정신을 실천해오고 있다.
순례 첫날인 14일은 전남 함평 출신이자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 재무장, 의경대 명예대원 등을 맡아 독립운동에 뛰어든 ‘일강 김철(一江 金澈, 1886~1934)’ 선생 기념관에서 시작됐다.
순례의 첫 출발지로 김철 선생 기념관을 선택한 것은 국민을 지키고 국가를 되찾기 위한 그를 기림으로써 ‘화해와 상생’의 뜻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호남지역 대표 독립운동가인 김철 선생은 1886년 10월 15일 전남 함평군에서 태어나 1917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중국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재무위원 겸 법무위원, 교통차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1920년에는 김구, 손정도, 김순애 선생 등과 함께 항일단체인 의용단을 세워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김구 선생과 함께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주도하고 항주 시기 임시정부를 이끄는 등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김철 선생은 1933년 경찰 조직인 ‘의경대 명예대원’으로 활약한 것으로 기록된다.
순례에 참여한 4.3유족회와 재향경우회 관계자들은 임시정부 당시 분단 없는 온전한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며 경찰 활동을 했던 김철 선생의 헛묘 앞에서 묵념, 그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
그의 묘가 시신 없는 ‘헛묘’인 이유는 당시 일제의 감시와 추격 탓에 제대로 묘비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그 당시 김철 선생의 묘는 무연분묘로 처리, 지금은 선생의 정확한 묘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다.
전남 함평군에 마련된 상해임시정부청사(독립운동역사관)를 둘러보고 있는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 이들 단체는 14일부터 오는 16일까지 진행되는 전라남도 일대 4.3-경찰 관련 ‘화해와 상생을 위한 합동순례’에 나섰다. ⓒ제주의소리
전남 함평군에 마련된 상해임시정부청사(독립운동역사관)를 둘러보고 있는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 이들 단체는 14일부터 오는 16일까지 진행되는 전라남도 일대 4.3-경찰 관련 ‘화해와 상생을 위한 합동순례’에 나섰다. ⓒ제주의소리
전남 무안, 전남도경찰청 앞에 마련된 안병하 치안감 동상. 이 곳에는 민주인권 가치를 수호한 경찰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됐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는 안병하 치안감을 위한 묵념을 진행하고 조화를 올렸다. ⓒ제주의소리
전남 무안, 전남도경찰청 앞에 마련된 안병하 치안감 동상. 이 곳에는 민주인권 가치를 수호한 경찰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됐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는 안병하 치안감을 위한 묵념을 진행하고 조화를 올렸다. ⓒ제주의소리
다음 순례지로는 마찬가지로 경찰 관련, 부당한 국가의 지시를 거부한 광주5.18 영웅, 안병하 치안감(安炳夏, 1928~1988)의 동상이 세워진 전남 무안 ‘안병하 공원’이었다.
제37대 전남경찰청장을 지낸 안병하 치안감은 광주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을 향해 발포하라는 전두환의 명령을 거부, 직위해제 된 뒤 모진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는 신군부의 강경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시위에 온건하게 대처할 것을 일선 경찰들에게 명령했으며, 우발적인 사고를 우려해 경찰의 총기를 회수하기도 했다.
나아가 시위대에 부상자 치료와 음식 등을 제공하며 국민 생명 보호, 치안 질서 유지라는 경찰의 사명감을 다했지만, 무참하게 국민들을 학살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연행돼 고문을 받았다. 후유증을 앓던 그는 1988년, 60세의 나이로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현재 전라남도경찰청 앞에 마련된 안병하 공원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설치됐으며, 순례단이 방문하자 전남경찰청 직원이 나와 직접 안내하기도 했다.
안병하 치안감의 사연을 들은 4.3유족회 관계자들은 “4.3 당시 부당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문형순 서장이 생각난다”며 진심을 다해 두 경찰 영웅을 함께 기렸다.
4.3 당시 성산포경찰서장을 맡고 있던 문형순 서장은 김두찬 해군중령이 보낸 예비검속자 총살 명령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고 맞서 대량학살을 막았다.
6.25 한국전쟁 직후 도내 읍면별로 수백 명씩 예비검속돼 집단으로 목숨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성산포경찰서 관할의 희생자는 단 6명에 불과했다.
문 서장은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광복 이후 1947년 5월 경찰에 투신한 뒤 서울을 거쳐 제주에 내려왔다. 1947년 7월 제주경찰서 기동대장을 거쳐 한림지서장과 모슬포경찰서장, 성산포경찰서장을 지냈다.
1949년 모슬포경찰서장 당시엔 좌익 혐의를 받던 주민 100여 명이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자수시킨 뒤 훈방해 목숨을 살린 바도 있다. 이후 1953년 9월 경찰에서 퇴직하고 1966년 6월 후손 없이 생을 마감했다.
명령을 거부하면 본인도 총살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도민을 살리기 위해 학살을 거부한 그는 2018년 올해의 경찰 영웅에 선정됐으며, 현재 그 뜻을 기리는 동상이 제주경찰청 본관 앞에 세워져 후배 경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1950년 8월30일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이 서귀포경찰서장에게 보낸 예비 구속자 총살 집행 의뢰의 건. 당시 문형순 서장은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고 썼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50년 8월30일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이 서귀포경찰서장에게 보낸 예비 구속자 총살 집행 의뢰의 건. 당시 문형순 서장은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고 썼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전남도경찰청 직원의 설명을 듣고 있는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 ⓒ제주의소리
전남도경찰청 직원의 설명을 듣고 있는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 ⓒ제주의소리
4.3 당시 도민의 무고한 희생을 막으려 했던 영웅은 문 서장을 비롯해 한 명 더 있다. 바로 김익렬 9연대장이다. 이들은 학살을 막아내기 위해 노력한 4.3 영웅으로 꼽힌다. 김 연대장은 ‘선무 토벌’이라는 해법을 제시, 무장대 책임자인 김달삼과 담판을 벌여 희생을 막을 수 있는 ‘평화협상’을 체결했다.
서로 총구를 겨눠 죽이지 않고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었던 해법이었으나, 사흘 뒤 제주시 오라리 마을이 불에 모두 타는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 주도 ‘오라리사건’이 발생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이 비극의 씨앗은 결국 ‘초토화 작전’으로 이어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당시 김 연대장은 “초토작전은 인도적으로 결코 허용될 수 없다”며 “4.3이 공산폭동이라는 것은 발생의 원인과 그 당시의 도민 실정을 전연 모르는 자들이 떠도는 유언(流言)만 갖고 창작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유고록을 남기기도 했다.
또 “나는 제주도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官)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폭동이라고 본다”고 소견을 밝혔다.
문형순 서장, 안병하 서장, 김철 선생, 김익렬 연대장 등 경찰과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은 지휘관들이 목숨을 내놓는 각오로 비극적인 희생을 막고자 노력했으나 부당한 국가권력은 끝내 학살을 자행, 지금까지도 풀어지지 않는 한(恨)의 응어리를 남겼다.
온전히 독립한 나라에서 국민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항일투쟁에 목숨 건 김철 선생과, 광주5.18 당시 민주화를 갈망하던 시민들이 정당한 항쟁을 펼칠 수 있도록 본분을 다한 안 서장의 발자취를 따라간 4.3유족들과 제주 재향 경우들. 그들은 70여년 전 제주섬에서 부당한 국가폭력 앞에 맞섰던 두 사람을 떠올렸다.
제주4.3 당시 도민들의 죄 없는 희생을 막아낸 문형준 서장과 무장대와의 평화협상을 주도, 제주도민 희생을 막기 위해 무장대와의 ‘평화회담’을 이끌었던 김익렬 연대장. 그들의 숭고한 뜻은 4.3희생자와 유족들의 응어리진 한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있었다. 목포의 하늘이 오늘 유난히 파랗다. / 목포=김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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