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독후감을 올리고 보니, 뒤늦게 생각 난 독후감 하나가 더 있습니다.
'나비'를 읽다 보면 10월 16일자 옥중 편지에 교육감께서 한형조 교수의 '허접한 꽃들의 축제'를 읽고 느낀 바를 서술한 장면이 나옵니다.
생색(?)을 내자면, 그 책은 제가 당시에 제 독후감과 함께 구치소로 보내드렸던 책입니다. 나중에는 독후감에 나오는대로 서툰 붓글씨 한점도 보내드렸지요.
저는 워낙 많은 응원의 글과 옥중에서도 해야할 많은 일들 속에서 교육감님이 과연 읽어보실 수 있을까 싶었는데, '나비'에서 확인하니 참 반갑더군요.... 그래서 용기내서 지난 10월의 글을 여기에 다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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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곽노현 교육감이 애틋했던 두 권의 책
심란한 시절에도 잡념과 동요 없는 아타락시아를 유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능히 성인(聖人)이라 할 수 있다. 나 같은 장삼이사들도 그 경지를 동경한다면 그 진리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까?
눈과 귀를 통해 얻는 온갖 정보는 평온보다는 번뇌를 불러온다. 요즘의 경제상황이 그렇고 정치권의 천태만상이 그렇다. 내가 처한 사학재단과의 갈등 상황이 그렇고, 곽노현 교육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울교육 목장의 쟁투가 그렇다. 민중에게 희망과 대안세력으로 거듭나야 할 진보통합의 여정에서 좌고우면하며 길을 찾지 못하는 윤똑똑이 군상이 또한 그렇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나의 휴식과 평상심을 방해하기 위해 존재한다.
다이나믹 스펙터클 정치 환경과 천방지축 좌충우돌 삶터에서 나를 다치고 나를 잃기 쉽상이다. 이러한 시절에 애써 여유를 부리며 읽은 책 두 권을 소개한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 그리고 ‘허접한 꽃들의 축제’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형조 교수가 ‘금강경’을 해설한 것으로 두 권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한 권이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은 별기(別記) 형식으로 금강경의 중심 사상을 폭넓게 개괄하였으며, ‘허접한 꽃들의 축제’는 이를 바탕으로 각 구절을 해설(疏)하였다.
금강경 해설서라도 불자(佛者)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계와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진실된 눈을 진리라고 한다면 그 프레임이 과학이든 철학이든 또는 그 어떤 종교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하지 않는가? 이 책은 금강경이라는 불교 경전을 통해 우주와 세상을 보는 것을 도와준다. 하여 결국 진실의 눈으로 세상을 접하고, 허망한 것들에 악착하여 마음과 관계와 세상을 헤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메지지를 던져준다. 그렇기에 종교서적이기에 앞서 인문학 서적이며, 폭 넓게 해석하면 사회과학 서적 같기도 하다.
이번 곽노현 사태를 보면서 ‘지혜의 눈’ , ‘진실의 시각’이라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매스 미디어를 통한 선전과 선동, 관습적 사고(思考)의 습기(習氣), 소문과 이미지, 권력과 이데올로기로 등으로 오염되어 휘둘리지 않는 차가운 통찰력은 어떻게 가능할까? 블랙홀 주변의 휘어진 공간처럼 ‘나’라는 자의식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휘어져 보이는 세상살이를 어떻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심하게 휘어진 눈으로 바라보는 자들에 의해 휘둘리는 세상은 어떻게 구제할 수 있을까?
올 1학기에 소규모 수학여행을 갔다. 옆 반 선생님과 2학급(65명)을 인솔하여 충북 단양을 거쳐 경북 영주 일대를 여행하였다. 소규모 수학여행에 들뜬 녀석들은 자기들끼리 반티셔츠를 맞추어 입었는데.... 디자인이 가관이었다. 아무 내용도 없이 가운데 굵은 흰색 고딕체 글씨로 ‘무개념’이라고 큼직하게 쓰여진 검은색 반팔 티셔츠였다. 떼거지로 그 옷을 입고 도담삼봉 강물로 뛰어들고, 여행지나 휴게소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식당에서 뛰어다니고, 아무데나 쓰레기를 던지며 욕설을 내뱉는 그야말로 ‘무개념’ 중딩들의 만행(?)을 상상해 보시라. 인솔교사로서 얼마나 쪽팔리던지. (어떤 때는 인솔교사가 아닌척...)
녀석들의 만행은 부석사에서도 계속되었다. 미리 예약한 사찰의 가이드 선생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사찰 곳곳을 다니며 각종 설화와 정보를 설명해주시는데... 스님들의 정진 도량(道場)에서조차 중구난방이었다. 순간 정진 도량(道場)의 고요함을 사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탄 나는 호루라기를 불며 뛰어가려는 한 녀석의 대갈통을 멋지게(?) 쥐어박았다. 예상치 못한 뒤통수 침탈에 정신 못 차린 녀석이 숙였던 고개를 드는데, 그 녀석의 가슴에 새겨진 ‘무개념’이라는 글자가 유난히 크게 눈에 들어왔다. ‘아뿔싸!’ 저 녀석들의 ‘무개념’과 대승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가 무슨 차이였던가? 나는 왜 아이들의 검은색 ‘무개념’ 반티가 그토록 쪽팔렸을까? 곽노현 교육감이 체벌을 금지시켰고, 학생인권조례를 추진하는 시절에, 다른 곳도 아닌 절간에서 한 아이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얻은 자각(自覺). 그것은 ‘무개념’의 진리였고, 배흘림 기둥의 절제된 미학보다 강렬했다. ‘무개념’의 눈으로 보면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대로 아이들이었던 것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세상살이에 개념을 세우고,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개념 좀 탑재하라고 다그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무개념’의 눈으로 봐야 더 큰 ‘진실’을 볼 수도 있었던 것을...
대승 경전의 하나인 화엄경의 원래 이름은 잡화경(雜花經)이었다고 한다. 잡화(雜花)-허접한 꽃. 그래서인지 한형조 교수는 금강경 소(疏)의 제목을 ‘허접한 꽃들의 축제’라고 지었다. 예전 윤구병 선생님이 ‘잡초는 없다’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었으리라. 지금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한 혁신학교와 며칠전 출범한 ‘새로운학교네트워크(새학교넷)’의 지향도 결국 ‘허접한 꽃들’이 ‘축제’를 벌이는 학교가 아닌가. 있는 그대로 소중하여 존중받고, 그렇기에 아름다운, 바로 그것이 ‘축제’가 아닌가.
책을 읽는 내내 문득문득 세상과 ‘진실’을 둘러싼 싸움을 벌여야 하는 곽노현 교육감의 처지가 자꾸 떠올랐다. 몸 한바퀴 굴리면 끝나는 작은 공간에서 벽이 주는 압박감보다도 서러울 세상의 비난과 조롱을 견디며 승리를 약속할 수 없는 진실 공방을 벌여야 하는 한 인간의 삶의 무게가 가슴 아팠다. 책은 끊임없이 ‘나’ 또는 ‘우리’라는 허상과 집착에서 벗어나야 ‘반야바라밀’ 즉 위대한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하는데, 삶의 넝쿨은 끊임없이 내 머릿 속을 어지럽힌다. 돈오(頓悟)하더라도 평생의 점수(漸修)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얼마전 서울시교육청의 비서 한 분이 구치소의 곽교육감께서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달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곽교육감께서 이 책을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그 분은 기독교인으로 알고 있다. 허나 어디 문정현 신부님의 생명 사상과 지율 스님의 평등 평화 사상이 서로 다른 것이겠는가. 강정의 평화와 천성산과 새만금 그리고 두물머리의 평화가 어디 다른 평화이겠는가.
得樹攀枝未足奇(득수반지미족기)
懸崖撤手丈夫兒(현애철수장부아)
水寒夜冷魚難覓(수한야냉어난멱)
留得空舡載月歸(류득공강재월귀)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진정한 장부는 아득한 절벽에서 손을 놓는다.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낙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금강경오가해 나오는 야부도천의 선시(禪詩)인데 앞의 두구는 백범의 스승 고석로의 인용으로, 뒤의 두 구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시조 풀이로 더욱 유명한 구절이다. 곽감은 물론 우리 모두의 삶의 자세와 마음 다스림에 큰 울림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을 내서 못 쓰는 붓글씨이지만, 마음을 담아 써서 구치소에 편지 대신 보내볼까 한다. 특별한 능력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갖고 있는 작은 문화적 소양으로 아픈 다리를 서로 위로하는 것, 이것은 곽감이 추구하고자 했던 문,예,체 교육의 정신과도 상통하리라 본다.)
마지막으로 이 책 속에 담긴 글귀 하나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영화 ‘대부’에서 아버지 말론브란도가 아들 알파치노에게 한 말이다.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을 그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