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에 대한 일화
정순왕후와 동망봉·영도교·자줏골의 유래
▶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후, 궁궐에서 추방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東望峰)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안 왕후는 아침 저녁 이 산봉우리에 소복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리면 온 마을 여인들이 땅 한 번 치고 가슴 한 번 치는 동정곡(同情哭)을 하였다고 한다. '동망봉'이라는 이름도 정순왕후가 동쪽을 향해 통곡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에도 단종과 정순왕후의 사연이 전한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그 다리에서 이별한 후 다시는 못 만났다 하여 사람들이 '영 이별 다리'로 불렀는데, 그 말이 후세에 와서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는 의미로 영도교로 불린 것이다.
▶ 정순왕후는 초막집에서 시녀 셋과 함께 살며, 시녀들이 동냥해오는 것으로 끼니를 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세조가 근처에 영빈전이라는 집과 식량을 내렸으나 정순왕후는 끝내 거부하였다. 그리고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때묻히고 살지 않았다고 해서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고 부른다. 또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영도교 인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송비(宋妃, 정순왕후 송씨)를 동정하여 끼니 때마다 채소를 가져다주려는 한 부녀자들이 많아 긴 행렬을 이룰 정도여서,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게 되었다. 그러자 여인들이 지혜를 모아 송비의 초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채소를 파는 척하고 모여들어 송비에게 가져다준 것이 채소시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같은 이름의 정순왕후 김씨는 영조의 비이며, 한자가 다름!
생각해보면 경혜공주 만큼이나 안타까운 여인인 정순왕후 송씨. 세조 때문에 친정아버지 (송현수)도 잃고 남편 단종도 잃고 평생을 한이 맺인 채 살았다고 함. 사실 세조가 정순왕후의 기구한 살림을 앍고 도와줄려고 했는데 정순왕후가 완강하게 거절해서 괘씸한 마음에 더 곤궁하게 만들고 정순왕후 송씨를 도와주면 반역죄로 몰아버리겠다고 했음. 그래도 인근 주민들이 송씨를 도왔음.
정순왕후는 굉장히 오래 살았는데(82세) 사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것을 모두 지켜봐야 했음. 친정 아버지, 남편 단종, 시누이 경혜공주, 경혜공주의 아들이며 자신을 어머니처럼 모셨던 정미수...,
장수는 복이지만, 그녀에겐 아니었을 듯.
남편 단종과의 부부 금슬이 아주 좋았다고 함. 하기사 서로 의지하고 마음 나눌 사람이 서로 밖에 없었으니..., 부부금슬은 좋았으나 아이는 없음. 너무 짧은 시간동안만 함께 할 수 있어서 였을까...,
정순왕후는 산에 올라 매일 단종의 명복을 빌었고, 단종 역시 영월의 유배지에서 아내를 몹시 그리워했다고 함. 그리움이 사무치는 날이면 돌로 탑을 쌓았다고...,
정순왕후는 평생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았음. 그녀가 지은 시가 전해짐.
원통한 새가 되어 궁궐에서 나오니
짝 잃은 외로운 몸이 깊은 산중에 있구나
밤마다 잠들려도 그럴 겨를이 없으니
수없이 해가 가도 끝남없는 이 한이여
새소리 멎은 새벽 뫼엔 조각달만 밝은데
피눈물 나는 봄 골짜기엔 낙화만 붉었구나
하늘도 귀가 먹어 슬픈 사연 못 듣는데
수심많은 사람의 귀만 홀로 밝게 듣는고
정순왕후가 돌아가시기 전에 지은 애절한
나는 우는 듯 웃으며 죽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당신이 계신 그곳으로 갈 일 밖에 없네요
깊고 어두운 숲을 지나고 안개 자욱한 강을 건너는 머나먼 길이라지만
흔연한 마음에 한달음에라도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다만 삼사에 깃드는 걱정은 헤어진 지 꼬박 예순다섯 해,
이제는 여든 두 살의 백발노인이 되어버린 나를
행여 당신이 알아보지 못할까 하는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