具本雄(1906-1953)
1906년, 서울에서 유복한 가정에 태어났다. 2세 때 생모가 죽고 유모의 손에서 자랄 때 부주의로 땅에 떨어진 후에 척추를 다쳐서 곱추가 되었다. 경신고보에 다니면서 미술에 눈을 떴다. 1924년에 고려미술원에 다니면서 이종우에게 미술 수업을 받았다. 이때 같이 공부한 친구가 이마동, 김용준 등이었다.
1928년에 日本大學 美學科를 진학하였고, 다시 태평양 미술학교를 거쳐 1933년에 귀국하였다. 1931년에 서울서 개인전을 가졌다. 이때 당시의 서구의 신사조 미술을 선보였다. 33년에 귀국하면서 2회 개인전을 가졌다.
34년에 牧日會에 참여하여 창립회원이 되었다. 소설가 이상과는 아주 가깝게 지냈다. 가업이 인쇄업이었고, 문인과 가까웠으모 월간 문인지를 발간하였다.(동인지로서 시와 소설, 종합문예지-靑色紙)
2차 대전 중에는 화필을 꺾었다. 1953년(47세)에 죽었다.
그의 작품은 야수주의적이고, 표현주의적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당시에는 뛰어난 미술가로 대접받지도 못하였다. 1972년에 그를 재조명하면서 30년대에 자기의 화풍을 견지한 작가로 평가 받았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대부분의 화가들이 외광파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 비하여 구본웅의 표현주의 기법은 미술사에서 높이 평가합니다. 표현주의 미술은 이중섭에게 연결이 됩니다.
*** 이때의 미술은 파리를 중심으로 인상파 미술이 유행하면서 야수파, 입체파로 흘러 갑니다. 1910년 경이 되면 독일에서 표현주의 미술이 나타납니다. 격렬한 감정을 표현하여 거친 붓질로 형태를 왜곡하고, 과장하는 양식입니다. 구본웅은 독일 표현주의를 받아 들였다고 평가합니다.
첫댓글 맨 윗그림은 이상이 맞습니까?
맞을 것입니다. 구본웅은 이상과 친했다고 합니다. 어릴 때의 불행으로 곱추가 되었으므로 여러 면에서 또루즈 로뜨렉과 비교를 많이 합니다.
이번 전시회에서 본 작품이네요.
이상의 염세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성격이 잘 나타나 있어서 작품을 보는 순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이상을 실제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소름끼치도록 강렬한 인상이 뇌리에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