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현지사의 애국정신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 본채 세워진 추모각.
안동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청송군 진보면을 지난 영양군 입구로 들어서 석보면으로 가는
911호 지방도로를 5분간 타고 가다보면 석보면 지경리 마을이 보이는데 지경리(地境里)는
석보면과 입암면의 사이가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의 위치에 따라서 상지경과
하지경으로 부른다.
본래 영양군 석보면의 지역으로 예부터 진보군과 경계가 되는 마을이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월동 일부를 합하여 지경리라 불렀으며, 의병대장 이현규(李鉉圭) 장군이
태어난 마을로 5개의 자연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에는 석보장이 이곳에 섰으나 인구가 증가하고 장터가 비좁아지면서 원리의 장터로
옮겨가고 장터만 남아 남아있고 마을의 상징적인 것으로는 독굴과 당나무를 들 수 있는데
독굴이라 함은 도둑의 굴이라는 말인데 노달(老達) 마을에 있는 큰 굴로서 약 5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로, 이곳이 도둑의 소굴이었다고 해진다.
의병대장 이현규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85년 세운 기념비.
마을 당나무는 지경 마을앞에 있는 소나무인데, 지금까지도 해마다 정월 보름에 마을제를 지내며,
독립군의 어머니로 존경받는 남자현 생가는 1999년에 복원한 여성독립운동가의 산실이다.
△ 남자현(南慈賢) 지사(志士)와 생가지(生家址)
남자현(南慈賢, 1872~1933) 지사는 영남의 석학인 남정한의 3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나 19세에
영양군 석보면에 사는 의성 김씨 김영주와 혼인을 하여 단란한 생활을 꾸리게 되었으나 일제의
만행이 점차 극성을 부리자 남편 김씨는 결사보국을 결심하고 영양 의병장 벽산 김도현 의진에서
왜군과 전투 중에 전사했다.
남자현은 나이 46세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에 대항하여 나라를 구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닫고 같은 해 3월 9일,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에 망명해
그곳에서 비밀무장단체인 서로군정서에 가입, 군사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남자현 지사는 북만주 일대에 농촌을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건립했고,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권신장과 자질향상에 주력했으며, 망명생활 6년을 맞은 1925년에 일본 재등실(齋藤實)
총독을 주살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거사를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1927년 봄에 안창호가 길림 조양문 밖에서 정의부 중앙간부와 각 운동단체간부·지방유지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석주 의사 추도회 겸 민족장래에 대한 강연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자, 일제는
안창호·김동삼 등 3백명을 체포하게 되었는데 이에 남자현은 투옥중인 많은 애국지사들이 석방될
때까지 정성껏 옥바라지를 하였다.
1932년 9월에는 국제연맹조사단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 천에다 '조선독립원
(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했다.
1933년 초에 만주국 건국일인 3월 1일에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일본전권 대사 무등신의(武等信義)를
제거하기로 했으나 일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영사관 유치장에 감금되어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식투쟁을 벌였으나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로 사경에 이르게 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본 경찰은 보석으로 석방하였는데,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다시 하얼빈에
있는 어느 여관에서 남자현은 아들 김영달(金英達)에게 중국화폐 2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이 돈을 희사하라고 하며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향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남자현을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하고 하얼빈
남강외인(南崗外人) 묘역에 안장하여 생전의 공로를 되새겨 정부에서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1999년에 생가터에 전통 건축양식과 현대식 양식이 혼재 되어 있는 본채와 부속채를 복원했다.
남자현 생가 입구에 '남자현 지사 항일 순국비'라고 새겨진 비석 1기가 서있고,앞뒤로 본채와 부속채,
추모각이 각각 한 동씩 배치되어 있으며,순국비는 1999년 국문과 한문이 혼용하여 박영석(朴永錫)이
짓고, 유한상(柳漢尙)이 썼다.
본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이다. 가구는 오량이고 홑처마로 사방에 토석담장을 두른
독립적인 건물로, 입구에 5칸 솟을대문을 세워 출입하게 했으며,솟을대문은 좌측에 문칸방을 들여 놓았고,
우측에는 헛간과 비슷한 2칸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 지경리가 낳은 의병대장 이현규
이현규(李鉉圭 1874~1917) 장군의 본관은 재령으로 석보면 지경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적부터 기품이 늠름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투철했으며,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주변의동지들과 협의해 각지로 연락을 취해 11월 하순경에 청송의 주왕사
(周王寺)에서 동지 수십명과 더불어 회합해 적을 토벌할 것을 결의하고 여러 군과 읍에 격문을 보내
거의(擧義) 뜻을 전했다.
그 해 12월 중순에는 울진의 불영사(佛影寺)에서 안동, 진보, 청송, 영양 등의 지역에서 모여든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중의(衆議)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 무기, 군자금 등을
모으니 500여명이 의병에 투신해 왔으므로 이들을 청량산과 주왕산에서 훈련을 시킨 뒤 이듬해인
1906년 2월에 의진(義陳)을 편성하였다.
아울러 유시윤 중군장(中軍將)에, 신형일을 소모장(召慕將)에, 김대규를 도포장(都砲將)에, 권대성을
집사(執事)에 각각 임명하여 전투 태세를 갖추어 진격해 일본군과 수 차례 걸쳐 교전(交戰)을 했으며,
그 해 4월 진보 근처 '오누지(池)'가에서 강원, 경상도 의병의 소탕 책임자인 일본 헌병 오장(伍長)
무등(武藤) 이끄는 헌병 부대와 교전해 치열한 전투끝에 일본군이 패하여 달아나니 의병진을 이끌고
파천면 의천까지 추격해서 대장 이하 적군 수 명을 사살했다.
이 전투에서 의병장인 이현규는 심한 상처를 입고도 다시 의병을 정비한 후 5월에는 죽변에 있는
왜관(倭館)을 격파하고 이어 영양의 북쪽에 있는 적군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이 증원부대를 이끌고
대대적 공격을 하여 악전고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도포장을 비롯한 많은 의병들을 상실해,
의병진을 수습하여 후퇴해 재기를 약속하고 해산했다.
이 처럼 독립 의진으로서 활약을 하는 한편 신돌석 의진과 연합해 돌격장으로 선봉장을 맡은 이현규
서문을 파괴하고 불을 질러 영해성을 함락하는 크나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 후에는 포항시 청하면 모진리에 피신하여 상처를 치료하면서 글방에서 2세 교육에 주력하는 한편
항일구국사상을 고취시키며 재기를 도모했지만 총상으로 인한 여독으로 1917년 2월 사망했으며,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정형기기자
jeonghk@kyongbuk.co.kr">
△나라를 가슴에 품고 만주를 누빈 여걸 남자현 독립운동가
1962년 3월 1일, 정부는 모두 58명의 독립유공자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했다. 신채호 선생이나
이봉창 의사 등 걸출한 독립운동가들이 수상자로 포함됐는데, 이들과 함께 최고 훈장을 받는 여성이
한명 있었다.
그녀가 바로 만주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는 남자현 지사였다. 그녀는 46세의 나이에 아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한 후, 의열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독립운동사의 열혈투쟁가였다.
◆운명에 맞서 만주로 망명하다
1873년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통정대부 남정한과 이씨부인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난
남자현은 일곱 살에 이미 한글과 한문을 터득하고, 14세에는 사서를 독파할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1891년 19세에 같은 마을의 김영주와 혼인을 했지만 남자현의 결혼생활은 길게 가지 못했다.
을미의병에 나섰던 남편이 1896년 오십천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07년에는 대한제국 황제가 강제로 퇴위되고, 군대마저 해산되는 상황은 유복자를 기르며 시어머니를
봉양하던 남자현에게 전환점이 된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남자현은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무너진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태고자 하게 된다.
한 자료에 따르면 1913년부터 최영호, 채찬, 이하진, 남성노, 서석진, 권모 등과 연락하며 활동을
시작했고, 그 뒤 5년간 국내조직에 참가한다.
그 뒤 47세가 되던 1919년 2월말 남자현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한다. 연희전문학교 근처의
한 교회에서 교회신자들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했다. 열흘 남짓 서울에서 활동하다 마침내 3월9일
만주로 향하게 된다.
만주 서간도인 통화현에 도착한 남자현은 지인의 집에 아들을 맡긴 후 독립군 부대인 서로군정서에
가담한다. 청산리 전투에 참여해 독립군을 간호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 뒤 활동무대를 북간도로 옮겨,
주로 교회를 중심으로 여성교육에 나섰다.
50세가 되던 1920년대 중반까지 교회 설립과 여자교육회 조직, 그리고 순회강연 등을 통해 여성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데 힘을 쏟았다.
◆의열투쟁으로 만주를 울리다
이러던 중 남자현의 이름이 만주 독립운동가 사이에 널리 떨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1927년에
일어난 ‘길림사건’이다. 길림사건은 독립운동계의 대동단결을 위해 길림성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도산 안창호 선생 등 지도자 300여 명이 중국 관헌에 붙잡힌 일이다.
이들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계가 구명운동에 나선다.
남자현도 이들을 옥바라지하며, 이 일을 여러 곳에 알리고, 비상대책반을 꾸리는 등 독립운동가들의
석방을 위해 절치부심 밤낮으로 노력한다.
그런데 길림사건 이후 계몽교육에 치중하던 남자현은 의열투쟁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다. 의열투쟁이란
적의 주요기관이나 주요인물을 직접 공격하는 투쟁방법으로 불특정 다수를 공격하는 테러와는 근본적
으로 다른 방략이다.
자료에 따르면 1933년 남자현은 사이토오 총독을 처단하려 나선다. 4월 권총 한 자루와 탄환 8발을 챙겨
직접 서울로 숨어든 남자현은 혜화동의 한 지인 집에 머물며, 교회신자로 변장하고 총독 암살을 준비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자현은 다시 만주로 발길을 돌린다.
1931년 10월, 만주지역 독립운동계의 최고 지도자 김동삼 선생이 일제 경찰에 붙잡혀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 갇히자 남자현은 친척으로 가장해 김동삼을 면회하고, 안팎으로 소식을 알리는 등
활약을 하게 된다.
심지어 신의주 이송 직전 구출작전을 세우기도 했지만 날짜가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일제의 만주 침략 직후인 1932년 남자현의 드높은 기개가 드러나는 일이 생긴다. 국제연맹이 만주에
대표단을 파견한다는 소식을 접한 남자현은 민족의 독립의지를 담은 혈서를 써서 전달하기로 한다.
그녀는 하얼빈 남강에 있던 한 중국인 음식점에서 왼쪽 무명지 두 마디를 자른 후 ‘韓國獨立願’이란
다섯 글자를 쓴다.
독립을 원하는 우리 민족의 뜻을 붉은 피로 쓴 것이다. 삼엄한 경계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남자현의
용기는 남자들도 감히 따르기 힘들 정도다.
이후 남자현은 만주에 파견된 일본 전권대사를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거사 직전 일제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마지막 뜻“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남자현은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여섯 달 동안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다. 61세의 남자현
죽음으로 항거하자는 결단을 내리고, 단식투쟁을 시작한다. 음식을 끊은 지 9일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
나지만 가혹한 고문과 단식으로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혼수상태로 풀려난 지 닷새만인 1933년 8월 22일
남자현은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 진다”라는 말을 남기고 61세로 순국한다.
그녀는 ‘조선이 독립되는 날 자신의 돈 200원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라’는 것과 ‘손자에게 교육을 시켜
내 뜻을 알게 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남자현은 여성운동사에서는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 받기에 충분
하다.
남자현은 전통적인 규범 속에서 성장한 ‘구여성’이었다. 그러나 당당히 그 껍질을 벗고, 46세의 나이에
외아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뒤 14년 동안 만주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녀는
독립운동사에서 보기 드문 열혈투쟁가였다. 나라에서는 그 뜻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홍석천기자>
[출처] 나라를 가슴에 품고 만주를 누빈 여걸 남자현|작성자 나쁜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