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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시인연대 원문보기 글쓴이: 이문영
놀이터에서의 생각
살아 있었던 어느 날 밤의 놀이터 중심(中心) 붉은 나무
울지않고웃지않는,비인간적인 아이들 짓무른 손등 꼬물대는 빛 떨 어 진 다 다음, 묵음(默音)
나 살다간 밤의 놀이터 붉은 나뭇가지 별들 아이들은
낙하한 별을 주워 빛을 털고 있다
나의 몰락(沒落)은
꽃을 봅니다 바람이 천지에 휘돌고 있습니다 병든 꽃은 좋다 싫다 말없이 멸망을 참고 있습니다 베란다에 쭈그려 앉아 눈을 감으면 내부에 또 하나의 눈이 감기면
꽃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꽃이 병든 내 몸에 물을 줍니다 육신의 물관을 타올라오는 수분 때문에 고통이 가라앉지만 나의 몰락(沒落)은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약속입니다
슬픔
해운대역 대합실에서 천상병 시인과 너는 만나고 아주 먼 거리에서 나는 슬픔을 만났다 슬픔은 편안한 음성으로 나를 달래주었고 나는 슬픔을 껴안았다 "요놈 요놈 요 이쁜 놈"하며 시인은 어둑한 대합실 공중으로 날아 올랐고 내 슬픔은 계단을 뛰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가을 밤은 아무 말이 없고 빛과 어둠의 갈림길에서 나는 기차를 탔다
고호는 왜 고호를 살해하였을까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누군가가 부르는 것처럼 그쪽으로 기어간다 다시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간다 새까만 더듬이를 살살 움직여보고 또 한쪽 방향으로 재빠르게 기어간다 가다가 멈춘다 생각에 잠긴 듯 오래 멈추어 있다 그러다가 또 생각난 듯 다른 쪽으로 간다
결국 아무데도 가지 못하는 벌레야 그리운 누군가의 음성을 듣는 것이냐 갈데없는 숙명을 간섭할 수 없어서 조용히 욕실 문을 닫고 불을 끈다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다가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다가 계단식 강의실에서 잠이 들었다 우울한 꿈이 나를 호명하였다 나는 웃으며 도끼를 휘둘렀고 햇빛의 피가 유리를 반짝이게 했다 유리 너머로 철갑의 소떼가 달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쓰러져 있었지만 사라졌다 일요일이 왔다 교회 양철지붕 위의 검은 새들이 울었다 잠 속의 잠을 잔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잠은 죽음 내 도끼의 잠 내 도끼의 죽음 아름다웠던 시절에게 돌아간다면 빨간 눈 빛내며 나는 사랑하고 싶다 말도로르의 절망과 말도로르의 광란을 몸 안에서 부딪히는 뼈들의 사랑을 혹은 멈추지 않는 소떼를
문득 깨어보니 천국이 있다는 말씀, 사무치게 고맙습니다
황폐함을 생각하며
아내와 돼지갈비를 먹는다 나는 황폐함을 생각한다 돼지는 새까맣게 불탄다 누런 간장 종지에 담겨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황폐함이 나를 생각한다 나는 고기덩어리라고 생각하며 아내에게 많이 먹으라는 슬며시 아름다운 말을 한다 떡갈나무 요정이 피노키오에게 하던 말을 아무것도 아닌 돼지고기 한점이 식사 중인 내게 말한다 다시 아내를 향해 많이 먹으라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혹시 아내도 황폐함을 꿈꾸고 있을까 아내가 나에게 용기를 내라고 말한다 신밧드의 모험을 이야기해 준다 피노키오와 신밧드 신밧드와 피노키오가 함께 지글지글 피싯피싯 굽혀진다 아내와 돼지갈비를 먹는 동안 세상은 참 조용하다 내가 황폐함을 생각하는 동안 착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돼지고기들이 몇 시간의 허기를 충족시키는 동안 세상이여 너는 참 조용하다
구두를 본다
구두를 본다 제 속에 나를 끼우고 세상을 배회(徘徊)하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제 생각을 저도 모르는 구두는 생각이 다 떨어져 너덜너덜해지면 나를 뱉아내고는
잠든 척 한다
인터넷 카페지기
나는 인터넷 카페지기지요 근사한 유화(油畵) 액자 걸고 리듬 앤 블루스 잔잔히 흘려놓고 손님, 상처의 숙주들을 기다리지요 주로 야간에 다녀가는 사람들과 술 한 잔 하고 함께 살아냈다는 일과(日課)를 내려놓지요 자욱한 안개 피어 올라 카페는 겨울과 가을을 통행하고 사시사철 눈이 오는 천장 아무도 오르지 못한 지붕에는 이화나무 가지와 눈꽃 덮인 굴뚝 있을까요 나는 행복하지요 이런 것이 죽어가는 것이니 톱밥난로라도 피워두고 톱밥난로라도
아아, 비바람
비바람이 몰려옵니다, 비밀로,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달렸고 속력을 몰라 울지도 못했습니다, 다가갔습니다, 어떤 큰 나무, 아래에서 밀려 올라오는 상처, 파란 별을 만나고 싶습니다, 경주에서 올라오는 길, 파랗게 비추던 별, 갈비탕집 처마 밑에 우글거리던, 나방, 시퍼렇게 타죽던 희망,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문득, 생각합니다, 남아있을 내 인생
비바람은, 달려와 정수리 불꽃을 꺼트리고 막막하게 남아있는, 싸움, 햇빛은 보이지 않고, 절망, 근처에서 삐걱이며 도망가는, 더 살까 말까, 눈을 뜨는,
분향소
사람을 보낸다는 건 그의 손을 놓아주는 거다 분향소에서 우리는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장수하늘소가 성경책에 앉는다 김영승 시인이 어릴 때 놓아주었다는 못에 긁힌 자국이 있다는
그 장수하늘소
뜰 앞에 잣나무
뜰 앞에 잣나무가 없어도 좋은 지리산 화엄사 아래
잣나무가 있어도 그립고 없어도 그리운 너를 건넌다
거짓말은 늘 진실이고 뜰 앞에 잣나무여 세상에 술 한 잔 건넨다
반구대 암각화
겨울은 산길 굽은 양지 작은 햇빛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색종이같은 나뭇잎을 바람에 날리며 청동의 강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골짜기마다 숭숭한 구멍에서 흙으로 빚은 사람이 기어나와 얼어붙은 수면에 몸을 박고 바위에 그림을 그리고 간다 펄떡이는 고래와 죽은 고래 존재하지도 않는 고래와 아무도 모르는 고래 겨울은 빙판 위에서 내 손을 잡고는 붓을 쥐게 한다 아무도 없는 나무가 내 몸이 되고 소리 없는 강물이 나를 데려간다 저 멀리 대양에 수많은 고래들이 물새들과 함께 노래하는 반구대의 초겨울 무렵
일생을 잠깐 쉰다
금빛 해를 안고 있는 바다 햇빛 가루를 손바닥에 올리고 조심 조심 걸어간다 모래시계 멈춘 사이 일생이 잠깐 쉬고 있다 간밤을 기억하지 못하는 술집 앞에 무엇을 알리려고 한 것일까 찢긴 벽보 종이가 꽃잎처럼 흩어져 있다 바다에서 날아온 바람이 쓸쓸한 표정으로 쓸쓸함이란 어떤걸까 생각한다 손바닥을 둥글게 오무린다 손가락 사이가 어두워진다 모래가 빠져나간 시계는 이미 한겨울 스산한 밤에 당도한다 눈이라도 내릴 것인지 종착역이 얼마 남지않은 기차는 거친 입김을 토하고 출발한다 바다 먼 곳에 금빛 눈발이 날린다 진눈깨비 온 세상에 가득하자 수많은 불빛들이 반짝인다 기억난 듯 술집들이 문을 열고 있다
그들의 사랑을 본다
한여름밤 숲속에서 사랑을 나누었지 별들이 잔마다 가지마다 찬란히 빛나고 진주빛 애벌레들은 노래하네 밤별들은 수줍은 길을 만들고 그 길에 때아닌 폭설이 내릴지도 몰라 사슴벌레 한쌍 숲에 아침 빛이 물들 때까지 고요히 죽은 날개를 접고 계절이 떠난 이 나무 저 나무로 서로의 이름을 어루만지며 사랑한다는 말을 새기고 있네 너무도 깊은 상처 사슴벌레는 겨울이 살고 있는 북쪽 하늘을 보며 큰 턱을 마구 벌리고 있네 사랑과 바꾸는 죽음도 어두웠을까 샛별이 부서지는 숲속 순간 발광하는 빛 속에서 잠깐 만난 그들의 사랑
잉어
연못에 잠겨 감은 두 눈 수면에 살짝 띄워둔다 알고 지내는 사람과 한 시간 지나면 잊을 사랑을 한다 생각하면서 자다가 자면서 생각하다가 벌떡 두 발로 숲을 배회하는 당신 연못에 잠긴다 연못에 가라앉는다 더 이상 내려갈 아래가 없는데도 자꾸만 바닥을 긁어대는 갈증 비라도 내릴라치면 슬그머니 싸구려 사랑이 생각나 수면을 빙글빙글 돌아다닌다
사랑하였냐고 묻는다
울산 야음동 농협 뒤에서 오줌을 눈다 문득 왜 사랑하였느냐고 묻는다 사랑을 묻고 대답할 수 있는 자격이란 이 밤이 끝날 때까지는 겨울이 올 때까지는 자유롭기에 야음동 사거리가 젖는다 사랑이 가고 술병들이 저희들끼리 부딪힌다 야음동은 떠나보내는 마을이다 슬픈 기차도 떠난다 편의점에서 언제 해가 뜰거냐고 묻는다 농협 건물이 범람한 슬픔에 잠겨 야음동은 깊은 곳으로 떠내려간다
섬
술잔을 흔들며 그는 말한다 그는 와이셔츠에서 풀어진다 현란한 조명 아래 마이크를 들고 있지만 그는 이미 자신을 끈 상태다 요란하게 침몰하는 선박처럼 그는 편안한 섬 하나 찾지 못하였다 단추 하나 빗금을 따라 떨어진다 그가 술잔을 집어 던지자 세상 한 구석이 박살이 나고 오늘과 내일 사이의 논란은 새롭게 진지해 진다 밤길에는 떠난 사람들 수만큼 벼려진 집들이 남았다 가래침을 뱉으며 당당하게 그가 돌아간다 그가 당도해야 할 단단한 문 그의 섬이 자꾸만 가라앉는다
치통에 대하여
어금니를 뺏습니다 내게 박혀 평생을 수고한 놈을 두고 아주 멀리 걸어갔습니다 놈에 대한 생각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슬픔을 들키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입에 꽉 문 거즈를 밷었습니다
그대가 있었던 그 자리가 텅 비어 있습니다 문득 나는 먼 별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별이라는 말
이별하였다 그런데 이별이라는 말 참 어여쁘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반짝거린다 나는 몇번이고 이별하였다
살아있는 내 생각 그 옛날 손바닥에 있던 땀 구겨진 모자가 떠오른다 그 밤에는 눈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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