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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어 있는 문화의 보고(寶庫), 스페인(Spain)
스페인(Spain, 에스파냐 Espana)은 유럽대륙 서단의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나라로, 정식명칭은 '에스타도 에스파뇰'(Estado Espanol)이며, 영어로는 '스페인왕국'(Kingdom of Spain)이라 불리운다.
서쪽으로 포르투갈, 북쪽으로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에 접하고, 남쪽으로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의 모로코와 접한다.
이베리아 반도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스페인은 지리적으로 요충지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외침을 겪어야 했다. 기원전에는 로마제국이, 8세기 무렵에는 이슬람 세력이 스페인 땅을 지배했고, 그 후에도 잦은 내부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다사다난한 역사는 풍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로마인의 유물, 이슬람의 사원, 중세의 수도원 등은 스페인의 과거를 반영한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정신이 문화 전반에 뿌리 깊게 스며들어 있는 한편, 수백 년 동안 아랍의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을 중심으로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많다
이베리아 반도에 인류가 정착한 것은 약 32,000년 전으로 알타미라 동굴 등에 그 유적이 남아있다. 신석기시대는 적어도 BC 3,000년대에 시작되었다.
BC 10세기경에 고대 페니키아인이 카디스(cadiz)를 건설하고, BC 6세기에는 그리스인이 동부 해안에 식민시(植民市)인 암뿌리아스(Ampurias)를 건설하여 교역활동을 하였다.
카르타고 세력도 BC 6세기에 진출하여 바르키노(Barcelona), 카르타고노바(Cartagena)를 건설하고 교역을 하였다. 그러나 BC 3세기에 교역보다 무력으로 타호(Tajo)강 이남을 제압하여 아프리카 북해안을 비롯한 지중해에서 세력을 떨치고 로마의 해상활동과 대립하게 되었다. BC 219년 한니발의 카르타고군(軍)이 로마의 동맹시(同盟市)인 사군툼을 공격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BC 201)에 휘말리게 되었다. 로마는 소(小)스키피오의 지휘 하에 BC 209년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내고 스페인의 새 지배자가 되어 스페인은 로마의 지배와 수탈 그리고 도시 생활의 도입에 따라 부족국가의 오랜 정치, 사회 제도가 해체되고 말았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은 스페인에 영향을 미쳤다. 409년의 제1차 침입에 이어 414년에 침입한 서(西)고트족은 5세기 중엽에 이르러 에우리크의 지휘 아래 로마군과 먼저 온 게르만족들을 격파하여 서고트 왕국을 확립, 6세기 아타나길드 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서고트 왕국은 서유럽 봉건제도의 확립을 위한 과도기에 종교, 왕위계승 문제와 관련한 혼란을 극복하지 못한 채 711년 이슬람 옴미아드 왕조의 침입으로 붕괴하였다. 이슬람 세력은 피레네를 넘어 프랑크 왕국도 노렸으나 732년의 푸아티에(Poitiers) 싸움에서 패배하여 이베리아 반도로 물러났으며, 그 이후 8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였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동안 스페인의 산업이 발전하였다. 관개시설이 구축되어 목화, 복숭아, 사탕수수 등의 작물이 재배되었다.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코르도바·세비야는 시장과 수출항으로서 번창하였다. 이슬람의 문화와 기술 수준도 당시의 서유럽을 능가하였다.
스페인의 중세는 이슬람으로부터 실지회복(失地回復)을 꾀하는 그리스도교도의 운동, 즉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으로 비롯되었기 때문에 서유럽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 북단에 있던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등의 기독교 왕국들이 무슬림 타이파를 상대로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여 영토를 확장했다. 1492년에 마지막 이슬람 타이파 국가였던 그라나다 왕국이 함락되고, 국토회복운동이 진전을 보임에 따라 각지에 작은 왕국이 형성되었다.
스페인 왕국은 국토회복운동이 마무리되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를 거부한 무슬림과 유대인을 추방하는 종교 재판을 시작하였다. 한편, 콜럼버스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만들기 시작하여 여기서 나온 막대한 재화를 이용하여 16세기-17세기 중반까지 150년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이자 가장 넓은 해외 영토를 갖는 세계 제국이 되었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는 현재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남미 끝에 있는 파타고니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이 시기에 회화, 건축과 같은 문화가 발전하고, 문학과 철학이 융성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잉글랜드, 스웨덴 등과 전쟁을 벌이고 유럽 각국 정치에 간섭을 벌이는 등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17세기 중반부터 스페인의 경제 사정은 잦은 전쟁으로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왕위 계승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1588년에 영국의 네덜란드 원조를 차단하기 위해 파견된 ‘무적함대(Armada Invincible)’가 영국 해군에 의해 격파되어 스페인의 몰락과 영국의 해상권 지배를 초래하였다.
무적함대(無敵艦隊 Spanish Armada)
16세기경 유럽에서 막대한 세력을 떨치고 세계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던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가 영국과의 전쟁을 위해 편성한 대규모의 함대이다.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여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그 위용을 과시한 것은 무적함대의 대표적 활약이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 발견의 결과 카를로스 1세, 펠리프 2세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펠리프 2세의 후반기에는 해외무역에서 영국이 대두하고, 국내의 정치와 경제도 쇠퇴하였다. 1588년 펠리페 2세는 영국을 원정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함대를 조직하여 영국에 대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으로 출항하였다. 영국을 원정(遠征)하기 위하여 전함 127척, 수병 8,000명, 육군 1만 9,000면, 대포 2,000문을 가진 대함대를 만들고,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588년 5월 28일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출발한 대함대는 네덜란드 육군 1만 8,000명과 합류하여 영국 본토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수적으로는 열세하지만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한 함대를 파견하였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하워드경(卿)을 사령관으로 하고, 호킨스, 드레이크 등의 명장을 배치하여, 전함 80척, 병력 8,000명으로 싸우게 하였다. 영국함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기동력이 뛰어나고 선원들은 잘 훈련되어 있었다. 무적함대는 플리머스 연해에서 영국함대를 잡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8월 7일 칼레 연해에서 영국군의 화공(火攻)에 의한 야습으로 타격을 입었으며, 그라블리느 해전에서 결정적 타격을 받아 54척만 본국으로 돌아갔다. 영국의 전 병사가 혼연일체가 되어 싸운 결과 플리머스 연해와 칼레 연해에서 에스파냐의 함대에 큰 타격을 입혀 승리하였다.
무적 함대가 패배하자 스페인은 해상권을 영국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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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스페인은 여전히 유럽 국가 중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영토를 갖고 있는 강력한 국가였다. 18세기에 들어 부르봉 왕가가 새로운 왕조를 열었고, 지방 행정 구역을 정비하는 등 개혁을 실행하였다. 18세기 후반, 미국 독립 전쟁에서는 신생 미국의 편에 서서 영국을 견제하였으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 뒤이어 일어난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 군대에 대패하였다.
19세기 스페인은 멕시코 독립 전쟁을 기점으로 스페인의 식민지들이 독립하기 시작하였고, 스페인-미국 전쟁에서도 패하여 쿠바와 필리핀을 미국에 할양했다. 국내에서도 공화파와 왕당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19세기 말 스페인 제1공화국이 세워져 왕정이 폐지되었으나 군부쿠데타와 왕정복고가 연달아 일어나 심각한 내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 인민 전선의 승리로 수립된 스페인 제2공화국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에서 패하였고, 1939년 프랑코 정권이 수립되어 이후 프랑코가 사망한 1975년까지 36년간 군부 독재가 지속되었다.
프랑코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집권하자 입헌군주제를 표방하고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스페인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독재정권이 물러난 후 스페인은 고도의 경제 성장과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으며 1986년에는 유럽 연합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가 진정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현재까지 스페인은 금융 위기를 겪고 있다.
스페인은 국토의 약 1/3이 산지이며 평균 해발 고도는 660m이다. 프랑스와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산맥은 해발고도 3,000m를 넘는 험준한 산지이며, 비스케이만(Bay of Biscay)을 따라 동서로 뻗어 있는 칸타브리아(Cordillera Cantabria)산맥은 그보다 낮아 해발고도는 2,000m 전후이다. 메세타의 남쪽 가장자리에는 시에라모레나(Sierra Morena)와 시에라네바다(Sierra Nevada)의 두 산맥이 각각 동서로 나란히 달린다.
좁은 연안 저지를 제외하고 대부분 메세타(Meseta)라고 불리는 대지로 이루어져 있다. 메세타는 서쪽으로 기울어진 대지이기 때문에 두에로강, 타호강, 과달키비르강 등 주요 하천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것이 많다. 예외적으로 비스케이만에 인접한 칸타브리아산맥에서 발원한 에브로강은 피레네산맥 남쪽 기슭의 아라곤 저지(低地)를 남동방향으로 흘러 하구에 커다란 삼각주를 형성한다.
지역마다 다양한 기후가 분포한다.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등 지중해 연안에 자리한 도시는 연중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난다. 마드리드, 세고비아 등 중앙 내륙 지방은 연중 기온이 높고 건조한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이 지역은 한여름 기온이 40℃를 육박한다. 그러나 습도가 높지 않아 불쾌지수는 낮은 편이다. 임야가 많은 북부 해안 지방은 흐리고 비 오는 날이 많다.
농지가 국토의 1/3에 불과하여 곡물생산은 국내 수요를 충족 시키지 못한다. 주요 농산물은 밀, 보리, 귀리, 호밀, 쌀, 옥수수 등이며, 올리브, 오렌지, 포도 등의 상품작물가 수출작물이 있다. 전반적으로 건조한 기후이기 때문에 관개가 농업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세카노’라 불리는 비(非)관개경지에서는 조방적인 밀농사와 방목이 이루어지는데 부재(不在)지주에 의한 대토지 소유제가 대부분이다.
광물자원이 풍부하여 구리, 수은, 철광석, 납, 석탄 등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개발에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외국자본이 많이 투입되었다.
카탈루냐를 중심으로 면포 및 모직물 공업과 시멘트, 제지, 유리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다. 비스케이만(灣) 연안 오비에도와 산세바스티안을 중심으로 한 지방에서는 중화학공업도 발전하였다. 근대공업은 유럽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력, 제철, 시멘트, 비료 등의 기초산업이 확립되기 시작하였으나 1930년대의 세계적 불황과 내란의 진통으로 크게 후퇴하였으며 실질적으로 공업화가 시작된 것은 1940년대부터였다.
스페인의 공업화는 1941년 국가자본에 의하여 설립된 지주회사(持株會社)인 'INI(Instituto Nacional de Industria:산업공사)'가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 산하에 석유, 비료, 조선, 제철, 섬유, 차량, 항공, 전화, 전력, 어업 등 여러 산업분야를 두고 이른바 혼합경제 체제를 운용하고 있다. 스페인 경제의 큰 특색은 외국 자본이 차지하는 높은 비중이다. 외국자본의 절반 이상이 미국 자본으로 전기공업과 군수공업에 집중되어 있다. 영국 자본은 채광, 조선, 야금 공업에, 독일 자본은 채광, 기계 공업에 투자되고 있다. 최근에는 자동차공업이 스페인 경제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연간 생산규모는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에 이어 세계 5위를 차지한다.
1986년 EU 가입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국도뿐이었으나 20년간의 교통 인프라 개선을 통해 전국 주요 도시가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철도의 대부분은 1941년부터 국영화되었고, 프랑스, 포르투갈보다 궤간(軌間)이 넓기 때문에 국경에서 바꾸어 타야 한다. 주요 항구는 아빌레스(Aviles), 바르셀로나(Barcelona), 빌바오(Bilbao), 카디스(Cadiz), 카르타헤나(Cartagena) 등이다
스페인은 인종적, 문화적으로 복합사회이다. 원주민은 지중해 인종에 속하는 이베리아족(族)이지만 기원전에 남해안과 동해안을 따라 들어온 페니키아인, 그리스인에 의하여 식민개척이 이루어졌고, 북부에서 피레네를 넘어 켈트인이 들어왔다. 이베리아족은 BC 3,000년경부터 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반도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북부의 갈리시아 지방 등의 켈트적 요소는 지금도 강하다. 그후 로마인에 이어 반달, 서(西)고트 등의 게르만 민족이 들어왔으며, 이슬람 세력이 확대되자 아랍인과 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이 침입하여 복잡한 혼혈이 이루어졌다.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인 면에서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동양적, 아프리카적 색채를 강하게 띠는 것은 800년간에 걸친 이슬람 지배의 영향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스페인인은 키가 작고 눈동자와 머리칼이 검으며 피부는 백인 치고는 어두운 빛깔이다.
스페인어(語)는 로마 식민지 시대에 들어온 라틴어가 속어화한 것으로, 안달루시아(Andalucia) 지방을 포함한 메세타와 카스티야(Castilla) 지방의 카스티야 방언(方言),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란(Catalan) 방언, 북서부의 갈리시아(Galicia) 방언으로 대별된다. 갈리시아 방언은 포르투갈어에 가깝고 카탈루냐 방언은 프로방스어의 영향이 강하다. 스페인어의 표준어는 정치적 중심인 마드리드의 카스티야 방언이다.
스페인의 카톨릭교는 유럽 국가 중에서도 비교적 보수적인 편이다. 철저한 신봉자가 많고 사회적, 문화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국민의 99%가 국교인 가톨릭의 유아세례를 받는다.
가톨릭교가 스페인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은 국토회복운동이 가톨릭교의 힘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메세타에서 특히 현저하다. 가톨릭교는 정신적인 지배자이며 거대한 부동산 소유자인 동시에 강력한 정치적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교와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격렬한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페인의 가톨릭교회는 가톨릭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며, 정치적으로는 우익 성향이고 사회적으로는 대토지 소유자나 귀족 등 전근대적인 지배계층과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기적으로 미사에 참석하지 않는 인구가 늘고 있다. 한편, 이민자 유입이 지속적으로 늘면서 제2의 종교 그룹으로 이슬람교 신자 수가 증가하는 추세다.
그러나 스페인은 여러 민족의 침입과 국토회복운동 등 역사적 특성으로 인해 지역차가 크다.
북부지역은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화를 막기 위한 기독교도들의 성지 순례 길목이었기 때문에 10세기 전후에 들어선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많이 남아 있다. 갈리시아와 바스크 지방 등이 북부 지역에 속한다. 동부지역은 지리적으로 프랑스와 가까워 유럽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옛 수도원이나 로마 건축물 등 역사적인 유적지가 많다. 역사상 강력한 해상력을 자랑하던 카탈루냐 지방과 바르셀로나가 동부 지역에 속한다.
중부지역은 스페인 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하여 로마 유적지를 비롯한 중세 시대의 저택과 고딕 양식의 대성당,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한 성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남부지역은 이슬람 왕국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지역으로,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 건축물과 문화, 음식 등에 남아 있다. 플라멩코와 투우는 안달루시아 지방을 대표하는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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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유럽, 지중해, 대서양의 문화유산을 모두 가진 나라로서 세계 관광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관광업은 국가 최대 수입원이라 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또한 태양과 바다를 낀 해안의 기후 및 지형적 여건, 전국에 산재한 문화 유적지, 국민들의 친절함 등으로 많은 외국인을 끌어들이고 있다.
역사적으로 로마, 아랍의 지배를 거치면서 다채로운 문화를 융합, 발전시킨 독특한 전통문화를 지녔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정신이 문화 전반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한편, 수백 년 동안 아랍의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많이 나타난다. 프랑스, 이탈리아, 아랍풍의 다양한 양식의 건축술이 발달했고,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di i Cornet) 같은 세계적인 건축가를 배출했다. 지방마다 수 많은 경축일과 축제가 있으며 스페인 사람들은 수시로 파티를 즐기며 특유의 열정을 발산한다.
또한 문화유산이 각지의 박물관과 건축물 속에 많이 남아 있다. 특히 펠리프 2세 때인 16세기 이래 수도로서 스페인의 중심지였던 마드리드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왕궁, 1819년에 창설된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 등이 있다.
마드리드 남서쪽에 있는 톨레도(Toledo)는 타호강(江)에 둘러싸인 요새지로 스페인 가톨릭교의 중심이며, 화가 그레코(El Greco)가 활약한 곳이기도 하다.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은 이슬람교도의 지배가 가장 길었던 지방으로 아랍 문화의 보고이다. 특히 코르도바(Cordoba), 세비야(Sevilla), 그라나다(Granada) 등의 3개 도시는 아랍 지배하에서 번영을 누린 곳이며, 코르도바의 메스가타 대성당, 세비야의 알카사르, 그라나다의 알람브라궁전 등은 옛 문화적 번영을 짐작하게 한다.
스페인의 여름인 6월 말~9월에 여행객이 가장 많다. 혹한의 추위가 오기도 하는 피레네 산맥 일대를 제외하면, 스페인 전역이 일년내내 일조량이 충분해 어느 시기라도 여행하기 좋은 기후를 띤다. 지중해 연안의 해수욕 성수기는 5월 말~9월까지다.
스페인의 치안은 전반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늦은 시각 인적이 드문 곳을 혼자 다니지 않는 등 상식적인 주의사항만 잘 지키면 안전한 여행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도시의 주요 관광지와 공공장소에서는 여행객을 상대로 한 강도와 소매치기 사건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인파가 많은 공공장소에서는 소지품 관리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특히 바르셀로나와 그라나다의 알바이신 지역에서 한국인 여행객 사고가 많다. 바르셀로나의 몬주익 공원 주변, 마드리드 왕궁 주변, 그라나다의 알바이신 지역, 기타 인적이 드문 도로와 공원, 버스터미널 등은 강도 피해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므로 신변 안전에 유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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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문화재의 창고라 할 정도로 도처에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그러나 외국 여행자에게는 시간과 경비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효과적인 여행을 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명소가 집중해 있는 곳으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등을 들 수 있다. 주요 명소를 보면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센터, 마드리드 스페인 광장, 프라도 국립미술관, 마드리드 왕궁, 부엔 레티로 공원,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 푸에르타 델 솔,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성당, 시벨레스 광장, 그란비아, 티센보르네미서 미술관, 산 니콜라스 데 로스세르비타스 교회,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성당, 카사밀라, 카사바트요, 람블라스 거리, 콜론 광장, 구엘 저택, 카탈루냐 광장, 고딕 지구, 바르셀로나 대성당, 바르셀로나 왕의 광장, 바르셀로나 피카소미술관, 카탈라냐 음악당, 산트 파우 병원, 성가족교회, 구엘 별장, 카사 아마트예르, 콜로니아 구엘 성당, 몬주익 언덕, 국립 카탈루냐미술관, 호안 미로 미술관, 구엘 공원, FC바르셀로나 홈구장, 산타마리아 델 마르 성당, 바르셀로네따, 벨 항구, 바르셀로나 현대 미술관, 안토니 타피에스 미술관, 모누멘딸 투우장, 바르셀로나 달리 미술관, 카사 드 레스 뿐세스, 산프란세스크 데 살레스, 알람브라 궁전, 헤네랄리페, 카를로스 5세 궁전, 나사리에스 궁전, 알카사바, 알바이신, 성 니콜라스 전망대, 칼데레리아 누에바 거리, 그라나다 고고학 박물관, 사크로몬테, 그라나다 왕실예배당, 그라나다 대성당 등으로 아주 많다.
그러므로 여행 전에 미리 관광할 명소들을 선정하여, 시간과 경비를 효율적으로 소비하는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마드리드 (Madrid)는 이베리아반도의 중앙부, 해발고도 635m의 메세타 고원에 위치하는 스페인의 정치, 문화, 산업 중심지이자 교통의 요지로 유럽 제4의 대도시이다.
이 도시는 10세기경 톨레도를 방어하기 위해 무어인이 세운 성채에서 비롯되었다. 이 성은 마드리드가 수도로 된 후에는 왕궁이 되었고, 동시에 이 도시의 중심이 되었다. 17세기 초에 일시적으로 궁전이 바야돌리드로 옮겨졌던 때를 제외하면 수도로서의 지위를 지켜왔다.
마드리드는 정치도시로서 궁전이 있었을 뿐 산업은 미미하였으나, 1936-1939년의 스페인내란 후 내전의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주변 농촌으로부터 많은 건설노무자를 받아들인 것이 마드리드의 성격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과 정부의 지원으로 공장이 많이 들어섰고, 전기기계, 항공기, 오토바이 등의 기계공업과 식품가공 ·제지 ·화학 등의 여러 근대공업이 발달하였다.
구(舊)시가는 17∼18세기에 건설되었다. 구시가의 중심은 라푸에르타델솔(태양의 문)이라 부르는 타원형 광장이며, 서쪽으로 왕궁 및 부속 왕립 무기고와 통한다. 남서쪽에는 17세기에 야외극장이었던 마요르 광장이 있고 그 앞쪽의 세바타 광장에서는 아침에 채소와 식료품 시장이 열린다.
구시가를 둘러싼 신시가는 19세기 후반 철도 개통을 전,후로 주택지 ·공장 등이 들어서고 교통시설이 갖춰진 지역이다.
주요 관광명소로는 부엔 레티로 공원,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 그란비아, 마드리드 스페인 광장, 푸에르타 델 솔, 마드리드 왕궁, 시벨레스 광장, 산 니콜라스 데 로스세르비타스 교회,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성당,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성당, 에스큐리알 수도원 유적,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센터, 티센보르네미서 미술관, 프라도 국립미술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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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스페인 광장(Spain Square in Madrid)
그란비아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스페인의 문호인 세르반테스의 기념비와 로시난테를 올라 탄 돈키호테의 모습, 노새를 탄 산초 판사의 동상을 찾아 볼 수 있다. 전망 좋은 카페가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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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란비아(Great Way)
마드리드 구시가 스페인 광장에서 산호세 성당 앞까지 대략 1,300m에 이르는 마드리드의 대표적인 중심거리이다. 1910년에 주변 도로와 건물을 철거하고 조성한 곳으로, '대로(大路)'를 의미한다.
이 그란비아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거리들이 연결되며, 스페인 광장부터 왕궁, 비야 광장, 마요르 광장, 푸에르타 델 솔, 시벨레스 광장에 이르기까지 마드리드 구시가 일대의 다양한 매력을 느껴볼 수 있다. 그란비아 동쪽에는 오랜 역사의 유럽풍 건물이 보존되어 있는 반면 서쪽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또한 그란비아 주변에는 많은 고급 상점, 호텔, 레스토랑, 극장, 쇼핑센터 등이 있다.
http://blog.naver.com/our0home/220350741861
푸에르타 델 솔(Gate of the Sun)
마드리드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는 곳이다. 푸에르타 델 솔은 ‘태양의 문’이란 뜻인데, 흔히 ‘솔 광장’이라고 한다. 약속 장소로 많이 이용되어 항상 사람들이 많다. 푸에르타 델 솔의 서쪽에는 마드리드 왕궁이, 동쪽에는 프라도 국립미술관이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 내에 위치한다
http://blog.naver.com/jdtpark/220504906382
마드리드 왕궁(Royal Palace of Madrid)
스페인 건축물의 절정이라고 평가받는 마드리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18세기에 지어진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9세기 이슬람의 알카사르(요새)가 있던 자리에 세워져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기면서 왕궁으로 사용했으나, 1734년 크리스마스 때 화재로 미술품과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루이 14세의 손자였던 펠리페 5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어린 시절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이탈리아 건축가 유바라에게 베르사유 궁전처럼 지으라고 했지만 착공 전에 사망하는 등 다사다난한 역사를 거쳤다. 그후 그의 제자 사케티가 프란시스코 데 사바티니, 벤투라 로드리케스 등과 함께 1764년 왕궁을 완공하여 현재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왕궁의 주된 건축 양식은 고전주의 바로크 양식이다.
왕궁 내부에 3,000여 개의 방 중에 50개의 방을 관람할 수 있다. 사케티가 설계한 왕관의 방은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을 모방해 매우 화려하다. 베네치아 화가 티에폴로가 그린 천장화도 볼 수 있다. 가스파리니 방은 마테오 가스파리니가 설계한 로코코 양식의 드레스룸이다. 도자기 방은 벽면이 도자기로 장식되어 있다. 1880년에 지은 연회장은 알폰소 12세가 왕비를 위해 만든 것으로 164명이 식사할 수 있는 유럽 최대의 연회장이다. 천장 프레스코화는 콜럼버스가 가톨릭 부부왕에게 신대륙을 바치는 모습이다. 2,500여 개에 이르는 태피스트리와 고야, 보슈, 벨라스케스 등 거장들의 회화, 화려함의 극치인 금은 세공품, 샹들리에 등 볼거리가 매우 풍성하다.
왕궁 주변은 귀족의 거주 구역으로 계획된 곳이었기 때문에 녹지 공간이 매우 넓다. 서쪽의 캄포 델 모로에는 45대의 마차와 마부 제복 등을 전시한 마차 박물관, 왕궁의 정문인 남쪽의 아르메리아 광장에는 카를로스 1세의 갑옷이나 영웅 엘 시드의 검 티소나 등이 전시된 무기 박물관이 있다.
현재 국왕 일가는 교외의 사르수엘라 궁에 거처하고 있기 때문에 공식 행사가 있을 때 외에는 일반에게 공개된다. 매월 첫째 수요일 정오에는 왕궁의 위병 교대식이 있다.
http://kongs_rum.blog.me/220500695904
http://blog.naver.com/ejinny3052/220425188965
에스큐리알 수도원 유적(Monastery and Site of the Escurial)
마드리드에서 약 50㎞ 떨어진 엘 에스큐리알 지역에 있는 복합 건축물로, 궁전, 수도원, 성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식 명칭은 산 로렌소 데 엘 에스큐리알 왕실수도원(El Real Monasterio de El Escorial)으로, 그 규모는 남북 207m, 동서 162m에 달한다.
생켕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펠리페 2세가 전쟁 승리를 기념하고 16세기 순교한 산 로렌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축하였다. 1563년 짓기 시작한 수도원은 21년이 지나서야 완성되었다.
입구에 제왕들의 파티오(Patio DE los Reyes)라는 중정과 성당이 위치하며, 성당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수도원, 왼쪽에 왕궁이 있다.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본떠 설계한 성당으로 90m 높이의 원형 지붕을 중심으로 루카 조르다노의 프레스코화와 에라라의 제단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성당의 기둥은 도리아식이다. 수도원의 중심인 대회랑은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궁은 카를로스 1세 이후 스페인 국왕들이 안치된 왕실의 영묘(Panteones)을 비롯하여 호화로운 장식과 가구로 꾸며진 부르봉 왕가 거실, 소박하며 수수하게 꾸며진 펠리페 2세의 거실 등이 자리한다. 왕궁의 방들은 플랑드르에서 제작한 태피스트리(Tapestry)로 장식되어 화려함을 풍긴다.
http://blog.naver.com/rexaquu4/10082343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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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센터(Reina Sofia National Museum and Art Centre)
스페인의 근대, 현대 미술 작품 1만 6천여 점을 소장한 미술관으로. 프라도 국립미술관, 티센보르네미서 미술관과 함께 스페인의 3대 미술관 중 하나이다. 미술관 건물은 역사적 건축물로 문화재 지정을 받은 옛 산 카를로스 병원이다.
상설 전시관은 2층과 4층에 있고 1층과 3층 일부가 기획 전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2층에는 큐비즘, 초현실주의, 사실주의 등 금세기 초반부터 1970년대에 걸친 스페인 미술의 흐름을 보여 주는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스페인 현대미술의 명작들이 모여 있는 미술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피카소의 <게르니카>이다.
<게르니카>는 피카소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아비뇽의 처녀들>과 함께 피카소의 2대 걸작으로 꼽힌다. 1937년 스페인 내란 중 프랑코 세력을 지지한 나치 폭격기가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마을을 무차별적으로 폭격의 참상을 피카소가 격분해 그린 것으로, 정형적인 인물 표현이 아닌 기이한 모습을 흑백 톤으로 처리해 분위기를 더욱 극대화시켰다.
초현실주의의 대가인 살바도르 달리, 바르셀로나 출신의 화가인 호안 미로의 작품들이 독특한 화풍으로 시선을 모은다. 또한 미술관 3층에는 비디오 아트를 포함한 스페인 현대 미술의 최신작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안토니 타피에스나 루이스 고르디요, 안토니오 사우라, 에드워드 아로요 등 다양한 화가들의 작품도 볼 수 있다.
티센보르네미서 미술관(Thyssen-Bornemisza Museum)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에 이어 개인으로는 세계 2위의 예술 수집가로 유명한 티센보르네미서 남작 부자가 1920년대부터 수집한 컬렉션을 바탕으로 전시하는 미술관이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거리를 따라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센터, 프라도 미술관과 함께 삼각형으로 위치하고 있어 '골든 트라이앵글(Golden Triangle)'이라고 부른다. 이 3대 미술관을 둘러보지 않고는 마드리드는 물론 스페인을 제대로 본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프라도 미술관이나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센터에 비해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마드리드를 방문하는 미술 애호가라면 꼭 들러야 할 곳이다. 미술관 건물은 스페인 건축가 라파엘 모네오가 네오클래식 양식의 걸작인 비야 에르모사 궁전을 리모델링한 것으로 1992년에 개관했다.
프라도 미술관과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센터가 스페인 미술 중심의 공간이라면, 티센보르네미서는 유럽 미술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다채로운 컬렉션을 자랑한다.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들은 13~14세기의 이탈리아 회화에서 현대 회화에 이르기까지 약 800점에 이른다. 개인 소장품으로는 그 규모가 매우 방대하다.
3층에서 1층까지 연대순으로 작품을 전시하고 있어 유럽 미술사의 흐름과 시대별 특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층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르네상스기 작품부터 시작하고, 2층은 17세기의 네덜란드 회화로 시작해 18세기의 영국, 프랑스 회화, 19세기의 유럽 낭만주의 작품이 이어진다. 1층은 미래주의, 입체주의(큐비즘)에서 팝아트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미술 작품이 주를 이룬다.
미술관 지하에는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카페테리아가 자리한다.
http://blog.naver.com/debek_insam/110172281154
프라도 국립미술관(Prado National Museum)
회화, 조각 등 8,000점이 넘는 방대한 미술품을 소장한 대형 미술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프라도 미술관은 1785년 카를로스 3세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했는데 원래는 자연과학 박물관이 될 예정이었으나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인해 공사가 중단되어, 전후에 페르난도 7세에 의해 스페인 왕가의 미술품을 소장하는 미술관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스페인 왕가의 방대한 컬렉션을 기반으로 한 왕실 전용 갤러리가 국립 미술관이 된 뒤에도 귀중한 미술품의 수집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스페인 회화 부문이 충실하고, 스페인 왕실과 관계가 깊었던 네덜란드의 플랑드르파 작품과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인 라파엘로와 보티첼리 등 이탈리아 회화 작품도 충실하다. 그 외에 독일, 프랑스 등 유럽 회화의 걸작, 고대의 조각 작품군도 전시되어 있다.
보안 검색 때문에 입장할 때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관내에서는 촬영을 금지하고 있으며 큰 짐은 보관소에 맡길 수 있다.
http://blog.daum.net/woogun007/11296617
바르셀로나(Barcelona)는 지중해 연안의 천연의 양항(良港)으로 스페인 최대의 산업도시를 이룬다.
마르세유와 마찬가지로 페니키아의 도시를 기원으로 한다. BC 3세기에 이곳을 지배한 카르타고인이 바르시노(Barcino), 즉 바르카가(家)의 도시라고 명명하였다. BC 201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아직도 구(舊)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는 고딕(Gothic)가에는 당시의 성벽 일부가 남아 있다. 8세기에는 무어인이 점령하였으나, 801년에 샤를마뉴(카를대제)가 이를 해방하고 지배하였다.
12세기에는 카탈루냐 백작과 아라곤 여왕의 결혼으로 아라곤 왕국이 이루어졌고, 바르셀로나는 그 수도로서 해운, 수공업, 금융의 중심지로 번영하여 14세기에는 그 절정에 달하였다. 이 당시의 고딕식 대성당(13세기 말)을 비롯하여 역사적 건조물들이 구시가 중앙에 많이 남아 있다.
1469년에 아라곤과 카스틸랴의 통일로 지방도시가 되었다. 고유의 카탈루냐어(語)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1550년에 창립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스페인의 선진지역으로서, 카탈루냐 문화에 대한 긍지와 진보적 시민자치의 전통과 강력한 상공업을 기반으로 번번이 독립을 요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9세기 말부터는 스페인의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어 1936-1939년의 스페인내란 당시에는 공화정부(인민전선정부)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다가 1939년 1월에 프랑코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시가의 중심인 람블라로(路)에는 은행, 상사(商社), 고급상품점이 줄지어 서 있고, 이 거리의 남단의 항구 부근에 있는푸에르타데라파스에는 콜럼버스의 기념상이 있다. 이 거리의 서쪽19세기까지의 건물과 동쪽에 있는 중세까지의 도시지역을 포함하여 구시가라 불리운다.
19세기 후반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방적업의 영향으로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1992년 제25회 하계올림픽대회가 개최되었다.
주요 관광명소로 구엘 공원, 몬주익 언덕, 고딕 지구, 바르셀로나 왕의 광장, 카탈루냐 광장, 콜론 광장, 바르셀로나 현대 미술관, 성가족교회, 바르셀로나 대성당, 산타마리아 델 마르 성당, 산프란세스크 데 살레스, 콜로니아 구엘 성당, 바르셀로네따, FC바르셀로나 홈구장, 구엘 별장, 구엘 저택, 모누멘딸 투우경기장, 바르셀로나 카탈라냐 음악당, 산트 파우 병원, 카사 드 레스 뿐세스, 카사 아마트예르, 카사밀라, 카사바트요, 벨 항구, 국립 카탈루냐미술관, 바르셀로나 달리미술관, 바르셀로나 피카소미술관, 안토니 타피에스 미술관, 호안 미로 미술관 등이 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91&contents_id=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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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엘 공원(Park Guell)
도심에서 떨어진 공원으로 참신하고 재기발랄한 가우디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가우디의 경제적 후원자였던 카탈루냐 실업가 에우세비 구엘이 영국 런던의 정원을 모델 삼아 이상적인 전원도시를 조성하기 위해 가우디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1900년경 지중해가 보이는 바르셀로나 시내의 외곽 언덕에 신주거지 60호를 건설해 분양할 계획이었으나, 재정적 이유로 1914년까지 가우디가 기거하는 집(현재 가우디 박물관)을 포함한 건물 두 채와 중앙광장, 타일 벤치 등만 지은 채 방치되었다. 1922년 바르셀로나 시의회가 이 땅을 사들여, 이듬해 시립 공원으로 꾸미고 일반인에게 공개한 이래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안식처가 되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명소로 거듭났다.
운동장 가장자리를 감싸며 길게 뻗어 있는 벤치에는 늘 많은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빈자리가 거의 없다. 벤치에 앉아 있으면 저 멀리 시가지와 지중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광장에서 다채로운 퍼포먼스와 연주 등을 선보이는 예술가들의 모습도 흥미로운 볼거리다.
보행자통로는 현지 돌을 사용해 아치형으로 만들었는데, 얼핏 보면 나무로 만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또 가우디가 살았던 집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그가 디자인한 가구나 사용했던 침대 등 유품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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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주익 언덕(Montjuic Hill)
바르셀로나 남서부에 위치한 해발 213m에 불과한 구릉이다. 이 구릉 위의 미라마르 전망대에서 바르셀로나 시내는 물론 바다까지 한 눈에 볼 수 있는 뷰 포인트로 인기가 높다. 전망대 내부에는 야외 카페테리아가 자리해 탁 트인 전경을 보며 휴식을 즐길 수 있다. 지하철역과 몬주익 언덕을 잇는 케이블카인 ‘푸니쿨라’에서 바라보는 전망도 훌륭하다. 몬주익 성에서는 바르셀로네타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몬주익 언덕은 올림픽 주경기장, 갤러리, 박물관, 야외극장 등 다양한 문화시설이 마련되어 있는 복합 단지로서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명소다. 이곳이 문화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1929년 만국박람회 이후부터이다. 만국박람회의 전시관이었던 건물을 개조해 1934년에 국립 카탈루냐 미술관이 문을 열었고, 1975년에는 세계적 예술가인 호안 미로가 재단을 설립해 개관한 호안 미로 미술관이 들어서면서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뒤이어 1992년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최로 올림픽 주경기장과 관련 시설이 갖추어졌다.
국립 카탈루냐 미술관은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카탈루냐 미술의 방대한 수집 목록을 자랑하고 있다. 언덕 중턱의 호안 미로 미술관에서는 회화, 조각, 콜라주 등 미로 자신의 기증 작품들 외에 수집가들이 기증한 현대 미술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군사 요새로 지어졌던 몬주익 성은 프랑코 정권이 들어선 19세기에는 공산주의자를 수용하는 감옥으로 쓰이다가 1960년대에 군사무기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여름철에는 야외 필름 페스티벌이 열린다. 야간에는 몬주익 언덕에서 스페인 광장으로 이어지는 마리아크리스티나 거리의 음악분수대에서 레이저와 함께 분수 쇼가 펼쳐져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여름에는 약 3시간, 겨울에는 약 2시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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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지구(Gothic Quarter)
구시가의 중앙에 위치하며, 원형 그대로 보존된 13~15세기 건축물과 카탈루냐 자치 정부 청사, 시 청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역사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바르셀로나 관광의 중심지다. 남서쪽으로는 람블라스 거리, 동쪽으로는 가우디가 만든 분수대가 있는 시우타데야 공원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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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족교회(Expiatory Expiatory Church of La Sagrada Familia)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1882년 프란시스코 P. 비야르가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계획했으나, 1883년 당시 31세였던 젊은 건축가 가우디가 인수받아 1926년 전차에 치어 사망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 반평생을 마친 미완의 작품이다.
네오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현재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들과 건축 및 종교 관련 종사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비록 미완성일지라도 가우디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며 엄청난 규모와 아름다운 곡선, 섬세하게 조각된 내부가 매우 인상적이며 '신이 머물 지상의 유일한 공간'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유럽의 여타 성당 건축물과는 확연히 다른 외관부터 시선을 압도한다.
가우디는 고딕 양식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어했다. 그리고 형식주의적인 건축이 절정을 이루던 시대에 여태껏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사람들의 성당'이라는 독창적인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그는 크게 3개의 파사드(주출입구 정면)에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스도의 수난', '그리스도의 영광'을 표현했다. 그리고 각 파사드에는 각각 4개의 탑을 세워 총 12개의 옥수수 모양 종탑을 세웠다. 종탑에는 4대 복음서의 저자(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를 표현했다. 여기에 예수와 성모마리아에게 바치는 중앙탑 6개를 추가해 모두 18개의 첨탑을 세웠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중앙 종탑의 높이는 약 170m이다.
가우디가 생전에 완성한 것은 지하 성당(Crypt)과 예수의 탄생을 경축하는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파사드 뿐이다. 지하 성당은 비야르의 설계를 바탕으로 한 고딕 양식이지만, '그리스도의 탄생'의 정면 장식은 자연주의적인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지하에는 성가족교회의 건설 초기 사진들과 기록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마리아 상 밑에 가우디의 무덤이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잠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52년에 재개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파사드가 1990년 카탈루냐 조각가 요셉 마리아 수비락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리스도의 영광' 파사드, 4대 복음서의 저자를 표현한 탑, 예수와 성모마리아의 탑 2개는 그의 사후 100주년에 맞춰 2026년에 완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성당의 건설은 천천히 진행되고 있다. 가우디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 작품의 주인인 하느님이 서두르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성가족교회의 건설 초기에는 후원금으로 지어졌으나 지금은 관광객들의 입장료에서 얻은 수익금으로 건설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내려올 때는 마치 달팽이처럼 보이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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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대성당(Barcelona Cathedral)
고딕 지구를 상징하는 랜드마크(landmark)로 이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카테드랄(Cathedra)'이라고 부른다. 1298년 자우메 2세 때 착공해 1448년에 완성된 것으로 건축 양식은 이 지방 특유의 카탈루냐 고딕 양식이다.
본당 안의 성가대석을 에워싼 흰 대리석 묘에는 바르셀로나의 수호 성녀인 산타 에우랄리아(Santa Eulalia)가 처형되는 순교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이 정교한 조각은 스페인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뛰어난 조각가 중 한 사람이었던 바르톨로메 오르도네스가 제작한 것으로, 스페인 르네상스 시대 조각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에우랄리아의 유골은 아름다운 관에 입관되어 지하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본당 오른쪽에는 세례장(세례물통)이 있다. 1493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데려온 6명의 원주민들을 이곳에서 세례 시킨 기록이 남아 있다. 재단에는 두 개의 큰 6세기 서고트족의 왕관 모양 기둥머리의 장엄한 십자가 그림이 있다.
대성당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은 여행자들의 휴식처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19세기의 아름다운 종탑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대성당 앞에 펼쳐진 광장은 고딕 지구의 중심부에 해당하며, 일요일 12-14시에 사람들이 모여 카탈루냐의 민속춤인 사르다나(Sardana)를 추며 이색적인 볼거리를 선사한다. 골동품을 파는 벼룩시장이 열리기도 한다. 광장을 사이에 두고 대성당 맞은편에 있는 카탈루냐 건축가협회 건물에는 사르다나를 추는 사람들을 그린 피카소의 벽화가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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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엘 저택(Guell Palace)
람블라스 거리에서 항구를 가는 도중 골목 안쪽에 있는 저택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가 그의 친구이자 경제적 후원자였던 에우세비 구엘(1846-1918)을 위해 설계한 저택이다. 1885-1890년에 지어진 이 저택은 198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정면 장식은 르네상스 양식, 내부는 네오무데하르 양식으로 마치 궁전과 같은 고전적인 외관을 지녔지만 부서진 타일과 돌을 이용한 옥상의 굴뚝, 별이 박힌 것 같은 2층의 중앙 살롱 등에서 가우디의 독창성이 엿보인다. 저택은 본관과 연결되는 별관으로 지었지만 구엘은 이 건물이 더 마음에 들어 본관으로 사용했다. 중세의 요새 같은 아치형 입구 옆에는 구엘 가문의 문장인 철제 독수리가 있다. 지하 1층은 마구간, 1층은 마차고, 중2층은 서재, 2층은 응접실, 3층은 침실, 4층은 하인들의 방과 주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옥상으로 나가면 고딕 지구의 빽빽하게 들어선 좁은 거리와 항구의 전망이 펼쳐진다. 지붕 테라스에는 가우디 특유의 디테일이 돋보이는 20개의 특이한 굴뚝이 있다. 대리석, 타일, 토기 같은 여러 자재를 사용한 다양한 형태의 트렌카디스(Trencadis, 깨진 세라믹이나 도자기 조각)로 장식되어 있다. 중앙탑 꼭대기에는 철제 풍향계가 있다.
카탈라냐 음악당(Palace of Catalan Music)
1908년 모더니즘(아르누보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도메네크 이 몬타네르(1850-1923)의 걸작으로. 합창, 실내악, 교향악의 환상적인 장소로 카탈루냐의 전통과 역사를 대변하는 성당 건축물이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파사드는 모자이크 타일의 기둥과 바흐, 베토벤, 바그너 등 유명 작곡가들의 흉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실내 공간은 형형색색의 모자이크 타일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마치 동화 속의 왕국과 같다. 내부를 장식한 작품 대부분이 모두 몬타네르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으로 장미, 백합과 같은 꽃무늬를 주제로 한다.
내부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2층의 장엄한 콘서트홀이다. 안토니 리갈트의 작품인 화려한 푸른 황금색의 둥근 스테인드글라스 천공광(천장에 낸 채광창)이 천사들의 합창단을 의미하는 여자 40명의 머리로 둘러싸여 있다. 아치형의 무대 앞에는 작곡가 바그너와 끌라베의 조각상이 있다.
내부는 영어, 스페인어, 카탈루냐어로 진행되는 가이드 투어로만 볼 수 있고 관람 시간은 약 50분 소요된다. 현재는 이곳에서 클래식 음악 콘서트가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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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밀라(Mila House)
스페인이 낳은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건축한 고급 맨션으로, 바르셀로나의 중심가인 그라시아 거리에 면해 있다.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카탈루냐 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 레우스(Reus)에서 태어나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한 가우디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기상천외한 건물들을 만들어 냈다. 피카소, 미로, 카잘스 등 동시대를 살았던 유명 예술가들도 바르셀로나 시내 곳곳에 있는 가우디의 건축물을 바라보면서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중 카사 밀라는 가우디가 성가족교회에 몰입하기 전 혼신을 다한 작품으로 1906년에 설계해 1910년에 완공했다. 가우디의 가장 시적이고 기념비적인 작품이며 '라 페드레라(채석장이라는 뜻)'라고도 불린다. 직선과 사각형 등 고정화된 기존 건축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건축 당시에는 혹평을 받았다. 건물 어느 곳도 일직선으로 된 벽이 없고 이 도시에 처음으로 건물 지하에 주차장을 만들었다.
현재 Caixa 카탈루냐 은행에서 운영하고, 맨션의 대부분은 개인 소유물이다. 건물의 3개 부분이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오디오 가이드를 포함한 투어에 참가하면 건물 안을 구석구석 관람할 수 있다. 동굴 같은 출입구로 들어가면 1층에는 고야, 샤갈 같은 유명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한 층에 네 가구가 있고 가장 꼭대기 층에는 가우디의 작품 평면도를 전시하고 슬라이드 비디오 등을 상영하는 에스파이 가우디 박물관(Espai Gaudi)이 있다.
야간에 방문하면 불빛에 반사된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7-9월에는 오후 9시 이후에 재즈와 플라멩코 공연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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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바트요(Batllo House)
건축가 가우디가 직물업자 바트요를 위해 지은 저택으로 그라시아 거리에 카사밀라와 마주보고 있다. 1969년에 스페인의 역사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0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카사밀라의 테마가 '산'이라면 카사바트요는 '바다'를 형상화한 건물이다. 외관은 바르셀로나의 수호성인인 성 조지의 전설(기사 게오르기우스가 악한 용과 싸우는 황금 전설)을 담고 있다. 벽을 덮고 있는 청록색 세라믹은 용의 껍질을, 발코니와 기둥은 시체의 해골과 뼈를 연상시켜 마치 판타지영화 속 무대 같은 느낌을 준다.
1904년~1906년, 이 건물이 건축될 당시에 다채색의 건축이 각광을 받아 가우디는 다채색을 주로 타일로 표현되었다. 카사바트요의 건물 정면은 색유리 파편과 원형 타일로 마감한 트렌카디스(Trencadis) 기법을 활용해 햇빛을 받으면 거대한 보석처럼 가지각색으로 빛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햇살이 강한 정오에는 눈이 부셔서 건축물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렵다고 한다.
아치형 지붕과 타원형 창문, 지중해를 테마로 하여 구불구불한 곡선을 많이 채용한 건물 내부에서도 가우디만의 독특한 색채가 강렬하게 묻어난다. 내부는 옥상과 다락방, 그리고 2층의 노블레 층을 구경할 수 있다. 관내에는 기념품 숍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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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항구(Port Vell)
람블라스 거리 끝에 위치한 항구로 높이가 60m에 달하는 콜럼버스 기념탑(Columbus Monument)이 서 있다. 돌과 철, 청동으로 만든 기념비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기념해 1888년 만국박람회 때 지었다. 서쪽을 가리키는 콜럼버스 동상에서 신대륙 개척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이 기념비는 전망대 역할도 하므로 바르셀로나의 도시 전경을 감상하기에 좋은 장소다. 벨 항구의 갑판 너머에는 쇼핑몰과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 야간에는 항구 주변에 조명을 밝혀 운치를 더한다.
국립 카탈루냐미술관(National Museum of Catalonia Art)
1929년 만국박람회 때 몬주익 언덕에 전시관으로 건설된 건물을 1934년에 개조해서 개관한 미술관이다.
로마네스크 미술품의 보고로, 미술관 개관 직전에 이곳을 방문한 피카소가 "서양 미술의 근원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극히 본질적이고 귀중한 가르침을 준다"고 극찬했을 만큼 전시 내용이 충실하다. 2004년 12월 시우타데야 공원에 있던 현대 미술관의 컬렉션을 이 미술관으로 이전시켜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카탈루냐의 미술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미술관은 중세 카탈루냐 지방에서 발달한 로마네스크 미술의 방대한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이만한 작품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 천정이나 측면에 그려져 있던 벽화가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산 클레멘텐 성당 벽화(Sant Climent de Taul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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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피카소미술관(The Picasso Museum in Barcelona)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술관으로 고딕 지구의 몬카다 거리(Calle de Montcada)의 모퉁이에 위치해 있다. 미술관 건물은 14세기에 건축된 고딕 양식의 귀족 저택 여러 채를 개조한 미술관으로 3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미술관은 1963년 피카소의 친구 하이메 샤바르테스가 기증한 피카소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개관했다. 1968년 샤바르테스가 죽으면서 기증한 작품과 피카소가 소장한 초기 작품을 기증하면서 미술관이 확장되었다. 1층에서는 카페와 레스토랑, 그리고 피카소 관련 상품을 파는 아트숍과 목판화, 석판화, 데생 작품을 볼 수 있다. 2층에는 유명 작품들이, 3층에는 피카소의 유년기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기획 전시실에서는 연중 색다른 기획전이 열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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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Granada)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지방 그라나다주(州)의 주도(州都)로 스페인에서 13대 도시이다. 과달키비르 강의 지류인 베이로(Beiro) 강, 제닐(Genil) 강, 다로(Darro) 강이 합류하는 지점, 해발 738m의 고지대에 위치하는 고대도시이다.
연평균 최고기온은 22도로 온화한 날씨이지만 한여름에는 35도를 오르내리는 더운 날씨를 보인다. 겨울철에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연평균 최저 기온은 약 9도를 나타낸다. 연평균 강수량은 360mm로 비가 적은 건조한 날씨이며 10월부터 4월까지 월평균 약 40mm의 비가 내린다.
도시 주변에는 농업지대를 이루고 있는데 주로 곡물, 채소, 아마(亞麻) 재배와 양잠이 성하고, 포도주와 올리브유 생산이 많다. 피혁제품 등 이슬람 시대부터의 전통적인 수공업도 발달하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으로 남아있던 그라나다는 1492년 아라곤 왕국에 의해 점령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지막 남은 이슬람문명은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그라나다에는 이슬람 왕국의 요새와 궁전, 사원, 대학 등 많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북동부의 다로 강 좌측의 언덕 위에 이슬람 왕조의 왕궁이자 요새였던 알람브라(Alhambra) 궁전 요새가 있다. 그 외에 16세기의 수도원과 대학 및 16-18세기의 대성당 등 역사적인 건물들이 많다. 문화유적이 많아 세계 각국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관광도시이다. 겨울철에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스키리조트에서 세계적인 알파인 스키대회가 열리며 겨울 스포츠를 즐기는 관광객도 많아 1년 내내 관광객이 찾는 도시이다.
주요 관광명소로는 헤네랄리페, 알람브라 궁전, 카를로스 5세 궁전, 그라나다 고고학 박물관, 나스르 궁전, 그라나다 대성당, 그라나다 왕실예배당, 성 니콜라스 전망대, 사크로몬테, 알바이신, 알카사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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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브라 궁전(Alhambra Palace) /나스르 궁전(Nasrid Palace)/알카사바(Alcazaba)
아라비아어로 '붉은 성'을 뜻하는 알람브라 궁전은 유럽에 현존하는 아랍 건축물 중 가장 뛰어난 궁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알함브라 궁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쫓겨 그라나다에 최후의 거점도시를 삼은 이슬람교도들은 1238년 나스르 왕조 때부터 궁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 이전부터 있던 성채(알카사바)를 보수, 확장하면서 착수하게 된 알람브라 궁전의 조영은 역대 그라나다 왕들에게 계승되어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그러나 1492년 레콘키스타(국토회복운동)으로 가톨릭 부부왕인 페르디난드 왕과 이사벨라 여왕에 의해 정복당한 후, 1526년까지 계속 확장하다가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1832년 미국의 외교관인 워싱턴 어빙이 <알람브라 이야기>를 출판하면서 국제적으로 알려져 궁전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가 재발견되었다. 스페인의 기타 연주가 및 작곡가인 프란시스코 타레가가 애절한 선율의 트레몰로로 발표한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은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리며 알람브라 궁전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알람브라 궁전은 알카사바, 헤네랄리페, 카를로스 5세 궁전, 나스르 궁전 등 4개 부분으로 구분되며, 그 외에 여러 채의 궁전과 탑, 연못과 정원 등이 있다. 궁전 관람의 출발은 그라나다 문에서 시작한다.
나스르 궁전(Nasrid Palace) 은 왕의 집무실이자 생활 공간이었다. 14세기 중후반 유수프 1세와 무하마드 5세 부자 시대에 건설했으며, 이후 수차례 증개축을 반복해 완공된 복합형 궁전이다. 194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왕이 집무를 보던 메수아르의 방(Sala del Mexuar)방은 벽면이나 천장을 장식한 아라비아 문양의 타일과 석회 세공의 아름다움이 감탄을 자아낸다. 이 장식은 모두 나중에 그리스도교 시대에 바꾼 것들이다.
왕궁에서 가장 넓은 대사의 방(Salon de Embajadores)은 각국 사절들의 알현 등 공식 행사가 있었던 곳이다. 천장의 상감 세공, 벽의 석회 세공, 벽면을 장식한 아술레호(그림 타일)는 물론 바닥에 이르기까지 정교한 아라베스크 문양의 일대 파노라마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탑의 동, 북, 서쪽에는 발코니가 있어 사크로몬테 언덕과 알바이신 지구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왕궁 관람의 하이라이트는 사자의 중정(Patio de los Leones)이다. 이 중정과 중정을 에워싸는 몇 개의 방과 시설은 왕의 사적 공간, 즉 왕 이외의 남자들은 출입이 금지된 할렘이다. 이곳을 통틀어 ‘사자의 궁전’이라고 부른다. 중정은 124개의 가느다란 대리석 기둥으로 에워싸여 있으며, 기둥 머리를 아치로 연결한 모든 벽면에는 정교하고 유려한 석회 세공이 빈틈없이 입혀져 있다. 중앙에는 정원 이름의 유래가 된 '사자의 샘'이 자리 잡고 있다. 12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커다란 원형 분수다.
중정 남쪽에 있는 아벤세라헤스의 방(Sala de Abencerrajes)과 북쪽에 있는 두 자매의 방(Sala de las Dos Hermanas)은 각각 둥근 천장을 뒤덮은 무수한 종유성 모양의 복잡한 장식을 보이고 있다. . 정원의 동쪽은 천장에 10명의 왕이 묘사된 왕의 방(Sala de los Reyes)이다. 내부는 몇 개의 작은 방으로 나뉘며 역대 왕들의 침실이었다고 한다. 나스르 궁전에서 나오면 파르탈 정원(Jarddines del Partal)이 보인다. 꽃과 나무로 둘러싸인 연못에 비치는 귀부인의 탑(Torre de las Damas)이 매우 아름답다.
알카사바(Alcazaba)는 알람브라 궁전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9-13세기에 만들어진 요새이다. 전성기 때는 24개 망루와 군인 숙사, 창고, 목욕탕까지 갖추었지만 현재는 그 자취만 남아 있다. 요새 중앙에 있는 벨라의 탑(Torre de la Vela)에 오르면 알람브라 궁전 내부와 알바이신 지구, 그라나다 중심부 일대의 수려한 경관을 만끽할 수 있다.
규모가 크고 볼거리가 많은 궁전인 만큼 입장권 예매 및 관람 시 주의해야 한다. 각 구역을 입장할 때마다 입장권을 계속 확인하기 때문에 모두 둘러보고 나올 때까지 잘 보관해 두어야 한다. 또한 1일 입장객 수에 제한이 있으므로 성수기에는 전날까지 전화나 홈페이지에서 미리 예약한 후 방문하는 것이 좋다. 현장에서 당일권을 매표하려면 궁전 입구 근처에 있는 티켓 판매소의 영업이 시작되는 시간에 일찌감치 줄을 서는 것이 좋다. 평일 오전의 이른 시간대면 대부분 입장이 가능하며, 입장권은 14시를 기준으로 오전과 오후 입장으로 구분된다. 알카사바, 헤네랄리페, 카를로스 5세 궁전은 시간제한 없이 입장이 가능하지만, 나스르 궁전은 입장객이 워낙 많다 보니 하루 입장객 수를 제한하고 30분 간격으로 시간을 정해서 입장시킨다.
알바이신(Albaicin) /성 니콜라스 전망대(Viewpoint of Saint Nicholas)
알바이신(Albaicin)은 이슬람교도들이 처음 요새를 쌓은 성채 도시로, 다로 강을 끼고 알람브라 궁전 북쪽 언덕에 위치해 있다. 그라나다에서 무어인의 자취를 가장 잘 느껴볼 수 있는 곳 이다.
그라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지구로 알람브라 궁전이 생기기 이전에는 이 언덕 위에 그라나다 왕의 궁전이 있었다. 그라나다가 점령당하고 무어인들이 아프리카로 물러가자 추방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무어인이 살던 그라나다의 옛 건물이 상당수 남아 있다. 안달루시아의 전통 건축과 무어인 특유의 건축물이 조화를 이룬다. 성채 도시로 지어져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비탈지고 꼬불꼬불한 L자형 길이 이어져 있고,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이슬람교도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온다.
언덕 위에서부터 여러 갈래의 좁은 돌길이 가파른 언덕 아래로 뻗어 있으며, 누에바 광장 근처에 최신 유행의 동굴 바르, 아랍 찻집, 도자기 상점 등이 있다. 그라나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아브딜의 모후가 거처했다는 다르알호라 궁(Placio Dar-al Horra)은 여행안내소로 이용되고 있다. 저수조, 분수, 광장, 흰 집 등에는 허물어져 가는 문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흰 벽에 붙어 있는 도자기들, 특히 그라나다(석류)를 그려 넣은 흰 바탕의 푸른 도자기가 흥미롭다.
알바이신 일대는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엉켜 있고 관광객을 대상으로 소매치기와 강도 사건이 빈발하니 밤늦게 혼자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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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1994년 지정 범위가 확대되어 복구가 이뤄지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알바이신의 정상 부근에 위치한 성 니콜라스 전망대(Mirador de San Nicolas)에서 바라보는 알람브라 궁전과 시에라네바다 산의 전경이 일품이다. 밤에 플라멩코를 관람하고 나면 이곳에 들러 야경을 감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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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고고학 박물관(Archaeological Museum of Granada)
페네키안, 로마 등 그라나다와 주변 지방을 거쳐 간 다양한 문화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디에고 데 실로에의 작품인 화려한 플래터레스크 양식의 파사드(출입구)가 감탄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