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제주도 1호 장로 김재원
출생 : 1878. 10. 5
사망 : 1946년
본적 : 제주시 이호리
부친 : 김진철(김해김씨)
모친 : 김인애(경주김씨)
가정 : 넉넉한 편임
어려서는 화북 거로에서 공부하였다. 당시 거로는 유학의 본거지로 문촌으로 소문이 난 선비고을이다. 김재원 장로께서 병을 치료하고 고향에 내려와 평양에 마펫 선교사에게 훈련된 목회자를 제주에 파송해 달라고 전문하여 이기풍 선교사가 파송되게 되었으며 이때가 1908년 2월이다. 홍순홍과 함께 장로로 임지 되었고 70세까지 살았다. 2008년 제주교회 100주년 때 성내교회에 기념비를 세웠다.
제주에서 개신교 역사를 말할 때 두 가지로 해석
첫째 성내교회 세워진 “牧師 李箕豐. 長老 金在元 功績碑”는 해방 후 조시병 장로를 중심으로 제주도 현지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건립한 것인데, 제주도 선교활동 공적이 묻혀버린 김재원 장로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둘째 금성교회 창립일을 1908년이 아닌 1907년으로 수정하겠다는 청원을 제주노회에 제출한 사건이 있었다. 이는 학자들에게 문의하였지만 뚜렷한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그 바탕에는 조봉호라는 인물에 대하여 도출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제주노회역사위원에서는 금성교회 청원건을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제주기독신문. 2007. 4. 28)
김재원 질병 치료
청년기를 경성(현 서울) 서양식 병원 재중원(외국인 선교사 운영. 현 세브란스병원)에서 질병과 사투하였고 그를 계기로 독실학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재원은 재중원 원장 의사 `에비슨` 선교사를 만나서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애비슨(선교사) 의사는 병이 너무 악화되 치료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래도 매달렸고 드디어 조건부 치료를 하게 된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였고 그리한다고 하였다. 목숨이 끊길 판인데 예수를 믿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2년에 걸쳐 7차례 수술을 하고 병이 완쾌되었다.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고향에 내려와 선도하는 데 앞장서고 이기풍 목사를 제주로 파송하게 한 것이다.
가족들이 하는 말
위에 관련된 내용은 가족사에서 언급하였지 한국 교회사 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역사에서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기에 그렇다. 김재원 아들 1980년 당시 목포 제일여자고등학교 교장이며 목포제일교회 장로인 김은식에게서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에 근거하여 아버지 제원이 수술과 세례받기까지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토박이 신앙산맥 2. 1980)
김재원 동생 김재순(목사)의 외손자인 임광원(임기봉 목사와 김희실 사모 아들) 장로가 제주성안교회 역사편찬위원회 앞으로 서신 “제주성내교회 김재원 초대 장로님에 대한 교회사적 입장에서 수정고찰을 건의합니다”(1999. 4. 15)를 보냈다. 이 내용이 제주성안교회 100년사인 『한국교회 첫 선교지, 살리는 공동체 100년』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
에비슨 선교사가 1940년 6월부터 1944년 10월까지 집필한 회고록
김재원 장로에 관한 내용이 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다. 1903년 서울 안의 옛 장소(제중원)에서 병원을 운영 중이었을 때 젊은이가 오른쪽 가슴에 있는 농흉을 치료해 달라며 찾아왔다. 이미 늑골에 침투되어 만성이었다. 치료 불가능했지만 시도해보자고 하여 7차례 수술을 진행하였다. 우측에 모든 늑골을 제거해 흉곽이 함몰되고 가슴 안쪽에 유착돼서야 회복되었는데 약 2년이 걸렸다. 치료를 받는 동안 재원은 종교에 관심 갖게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친구들에게 신자가 되었다고 말했다.(박형구, 『근대한국 42년 1893~1935 하)』, 2010. 309)
위 사실로 보면 가족들이 말한 것은 1900년이고 에비슨 의사 회고록에는 1903년이니 3년 차이가 난다. 이 과정에서 3년 차이는 재원이 입원과 퇴원에 관련하여 고려할 점이다. 재원이 입원하여 치료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재원이 집에서 말한 것이 맞을 수가 있다.
에비슨 선교사(의사)
국적 : 캐나다
학력 : 토론트 의대졸 후 모교에서 외과교수로 봉직
한국 : 모교 외과교수로 봉직
외과의사로 봉직 중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선교사로 오지 않겠느냐고 권유를 받고 1893년 한국에 도착하고 제중원에 책임을 맡고 진료를 시작했다. 강철회사 사장 `세브란스` 도움으로 1904년 세브란스병원을 신축하게 되었다. 신축병원이 들어서기 전에 재원을 만났고 재원을 치료했으니 가족들이 이야기 하는 1900년이 맞을 것이라는 이유다. 한국교회 연합을 위하여 열정을 기울였고 종파를 거론하지 않았다.
교장직 사퇴
동료들 반발에도 불구하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직에 물러났다. 한국 사람 오긍선을 후임 교장으로 발탁했다. 이는 선교의 목적을 한국인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3.1운동 때에는 학생들에게 조국이 풍전등화에 있는데 자기 안일만을 추구 하는 것은 진리를 구하는 태도가 될 수 없다는 요지의 글을 칠판에 적어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호리 신앙공동체
김재원의 고향으로 그의전도 힘으로 지역 신앙공동체가 싹텄다고 하겠다. 재원이 세례를 받고 1903년경에 제주도착 후다. 부친이 사망(1904)하고 본격적으로 예배공동체를 이끌었다. 당시 제주문화는 야수교(예수교)에 대한 인식이 아주 안 좋은 상테로 1901년 천주교 사건이 문제가 심각했다. 아버지 장례 때 괸당으로 하여금 질타를 받았고 상심이 컸는데 어머니 후원이 큰힘이 되었다. 어머니는 괸당들을 향해 소리친다. "내 아들 무당 귀신은 살리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살렸다. 나는 누가 뮈라해도 예수를 믿는다. 그로부터 괸당들도 수긍을 하는 편이고 어머는 밭에서나 길을 가도 오로지 복음전도에 열심히 했다. 재원 역시 죽음에 살았으니 그 당시를 회고하며 전도에 열성을 다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공동체도 발걸음을 띈다. 재원 친구도 합류했다. 에비슨 이야기(박형우. 311)
병으로 죽음에 이른 사람들을 양의학으로 고치면서 사람들은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됐다. 치료를 받으며 종교적 가름 침도 받은 것이다. 에비슨은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지프라기도 잡는 다는 한국 속담을 비유했다. 이호리 신앙공동체는 어머니 김인애. 재원. 홍순흥, 김행권이다. 동생 재선도 신앙으로 자랐고 후일 숭실학교에서 공부하고 또 평양신학교를 졸업한다. 1928년 목사로 임직 된다. 1930년 제주노회 설립 시 부회장으로 선출된다. 재선 목사는 6.25동란 때 목포형무소 교무과장으로 재직하던 중 순직했다.
김재선 목사(김목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출생 : 이호리
생년 : 1884.9. 10
순교 : 150. 8. 4
학력 : 평양 숭실학교
신학교 : 1927년 졸업
순교지 : 목포형무소 뒷산
목사임직 : 목포노회에서 안수받음.
제주 첫 장로 재원의 동생이다. 형 재원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 들였으며 재원은 1916년 성내교회에서 순흥과 함께 첫 세례자가 된다. 재선은 제주농업학교를 다녔고 목포에서 영흥학교,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내려와 오도. 조수교회에서 첫 사역을 시작했다. 신학공부를 한 신학도가 아니라서 고향을 떠나서 거문도로 나가 부인 홍마대 여사와 푸부교사로서 교회사역을 담당했다.홍여사는 홍순흥의 딸이다.
홍순흥
재선과 함께 1917년 장로 임직을 맡았으며 딸은 재선의 처가 되었고 동부교회 목사였던 홍성봉은 영흥학교 교사였던 홍익표.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홍군표는, 광주양림교회 장로였던 홍천표. 모두 재선의 처남이다. 정명학교 교사를 지낸 홍마리아는 재선의 부인이다. 제주도 최초 세례교인으로 알려진 홍순흥은 32세에 이기풍 목사를 만났고 틈나면 이목사를 찾아가 인생 상담까지 했다. 1917년 4월 5일에 재원과 함께 장로 장립을 받고 헌신했으며 성내교회 영흥학교 교장을 역임한다.
김행권
힘이 세고 의협심도 많고 교회 종치기, 예배당 청소, 교인들 돕는 일에 앞장서고 이기풍 목사 중인문 곁에 예배당 처소 마련할 때 행권 집터로 알려졌다.
참고서적 : 제주교회 인물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역사편찬위원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