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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벧엘의 길(창35:1-7)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수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벧엘로 올라가는 말씀이다.
오늘은 벧엘로 올라가기 위한 야곱의 길, 야곱의 정리 이런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선택하셨는데 이 모든 목표가 결국 마지막에 벧엘로 올라가는 것이다 하는 말씀이다.
창세기는 여덟 사람의 전기다. 아담은 창조된 사람이고 아벨은 제물을 드린 사람, 희생 제물에 대한 상징이다. 에노스는 주의 이름을 맨 처음에 부른 사람, 바로 인생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불렀다는 뜻이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노아는 방주를 지음으로서 구원을 받은 사람, 그리고 아브라함은 부름 받은 사람, 이삭은 아들의 형상, 씨, 그리고 야곱은 변화된 사람, 이렇게 되는데 결국 야곱과 요셉은 한 사람으로 봐서 마지막은 벧엘이다 하는 것이다.
창조에서 시작해서 벧엘로 결론지어 지는 것인데 창세기를 보면 한 사람을 창조한 것으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에 가면 새 예루살렘으로 종결지어진다. 이것이 창조에서 벧엘로 가는 것의 발전이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니까 하나님의 거처를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만물을 지으시고 사람을 지으셨는가? 그것은 자기의 거처를 위해서 지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 표현을 위한 형상으로 지었다 그런 말이 된다.
여호와의 전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전당이다. 다시 말하면 건축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 이것이 점점 발전해서 인격으로 발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전이되는 것이다. 아들이 되었다는 말과 전이되었다는 말은 다 같은 말이다. 몸이 되었다 하는 것도 같은 말이고 마지막에 교회를 보고 너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이렇게 말했는데 이것이 같은 의미다.
전은 결국 몸이고 하나의 사회고 나라가 되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 나라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나라를 가지신 분이다 그럴 때 왕이 되는 것이다. 신부를 얻었을 때 신랑이 되는 것이고 나라를 얻었을 때 왕이 되는 것이다.
이런 목표 아래 선택되었기 때문에 벧엘로 가는 길, 이것은 이 여덟 사람의 인생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은 왜 창조되었는가? 벧엘로 가기 위해서, 아벨은 왜 제물이 되었는가? 벧엘로 가기 위해서, 에노스는 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는가? 역시 벧엘로 가기 위해서, 야곱은 일생동안 왜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쳤는가? 역시 벧엘로 가기 위해서, 그러니까 야곱은 야곱대로 자기 목적을 인해서 분주했지만 사실 하나님의 인도하신 방향은 벧엘을 목표로 해서 인도하신 것이다.
목표 없이 그냥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도 그저 우리 생각대로 가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은 벧엘로 가기 위해서 이러 저러한 과정을 겪는 것이니까 만일 우리 인생의 목표를 벧엘이다, 새 예루살렘이다 이렇게 안다면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분명하게 결정되고, 사람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과정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다.
벧엘로 가는 첫 번째는 꿈속이었다. 꿈에서 이상을 본 것인데 그는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거늘 이렇게 말하면서 베개 했던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 서원을 했다. 내가 객지에서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이 돌이 곧 전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서원을 했다. 그런 이후에도 이십 년 동안 야곱의 본성은 여전히 야곱이었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고 계속해서 탈취자였고 도망하는 자였고 이런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디나가 더럽혀지고 그 사건을 인해서 자기 아들들이 잔인한 행동을 하게 되니까 결국 탈취자, 도망자의 말로가 여기서 종착역이 되게 되었다. 더 이상 탈취자로 살 수 없게 되고 도망하는 사람으로 살 수가 없는 그런 환경이 자기에게 오게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 일깨움을 받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정신이 차려진 것이다. 자기 생긴 대로 최선을 다해 오다가 마지막에 남은 것은 더럽혀진 것과 잔인한 것, 그래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는 그런 자리에 오게 되었다.
사실상 레위와 시므온이 가서 몇 몇 사람을 살육했지만 그 주변 족속들이 만일 그것을 알게 되면 야곱을 그냥 두겠냐는 것이다. 야곱은 무서움을 느끼게 되었고 이때의 충격을 마지막 죽을 때 자식들을 놓고 예언할 때 다시 상기한다. 레위와 시므온에 대해서 말할 때 잔인한 칼이라 하면서 축복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저주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것을 보면 야곱의 그때 충격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인해서 야곱은 완전히 자기 일생을 정리하게 되었다. 사람은 대부분 그런 것 같다. 가능성이 있고 할 수 있고 이럴 때는 자기 인생을 정리하지 않는다. 그런데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결국 갈 곳은 벧엘이다. 환란 날에 나를 도우신 그분에게로 가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여기서 갈 곳이 없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마지막 자기를 정리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다.
야곱은 너희 중에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하고 의복을 갈아입어라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최종적인 결정이었다. 철저히 정리하고 벧엘로 올라가자 그런 뜻이다.
이방 신상을 버리라 하는 것이 첫 번째 일인데 우상을 버리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야곱이 제일 사랑하던 라헬이 도망쳐 오면서 드라빔을 훔쳐서 왔다. 이 드라빔은 라반의 집 가신이다. 집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숨겨서 왔다가 하마터면 들켜서 다시 붙잡혀 갈 뻔했는데 그때 꾀를 써서 말안장 밑에 감추고 나귀에 타고 나는 지금 경수가 나니까 내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이래서 드라빔을 숨긴 일이 있다. 이것이 한 사람 라헬을 대표자로 해서 이 사건이 났는데 라헬만 이런 것을 숨겼겠는가? 그렇지 않고 아내들이 다 제각기 우상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라헬이 대표자가 되어 드러난 것이다.
드라빔은 우상이다. 우상은 무엇인가? 현대에 있어서 이런 종류의 우상이란 많지 않다. 물론 요즘에도 부적을 써서 다니는 사람도 있고 수호신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언급할 정도가 아니다. 오늘날은 다른 것이 우상을 대신하고 있는데 우상은 하나님을 대치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내게 하나님으로 되어 있는 것, 그것이 자기의 생각일 수도 있고 자기 의일 수도 있고 자기 야망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때로는 자기 자존심일 수도 있고 재물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대치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다.
사람들은 왜 이 우상을 갖는가? 잘 되기 위해서다. 그것들의 힘을 빌려서 잘 되어 보려고, 또 행복하기 위해서 갖는다. 잘 되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대치하는 모든 것들이 다 우상에 속하는 문제들이다. 이것이 돈이 되기도 하고 지위가 되기도 하고 야심이 되기도 하고 건강이 되기도 하고 모든 것이 다 될 수 있다. 오늘 현대인들은 이런 우상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는데 이런 것들이 사라지게 될 때 자기 하나님이 없어지게 되고 절망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것에 소망이 끊어질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것을 볼 때 이것이 하나님을 대치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야곱에게 있어서 우상은 무엇인가? 야곱은 드라빔 같은 이런 우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탈취하는 자, 그것이 자기 우상이다. 어떻게 하든지 꾀를 내어서 자기가 살아보려고 하는 그것이 자기 우상이다.
인생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우상을 떠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어떤 것으로도 우상을 갖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야곱은 여기서 모든 상황이 끝나고 절대적인 위기에 몰렸을 때 내가 하나님께로 가야겠다, 단을 쌓아야겠다 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위해야 되겠다 이 말이다. 나는 하나님을 위한 존재다 이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인생이 나는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할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을 위할 존재다 하는 것을 깨달으면 우상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내가 하나님의 집을 위한 존재다, 내가 하나님의 표현을 위한 존재다, 그러면 우상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이나 의도나 야망이나 명예나 이런 것이 다 필요가 없어진다. 오로지 그 집을 짓는 것이 자기 인생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 집은 자기의 생각이나 의도나 야망이나 돈이나 명예나 이런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니까 저절로 없어진다.
그러나 만일에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고 신앙심이 좋고 별 것을 다 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행복을 위한 존재라고 생각할 때는 어떤 종류의 우상이 생길지 모른다. 심지어는 신앙이라는 우상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할 때만 우상이 없어지는 것이다.
십계명에 보면 맨 처음이 그런 말이 나온다. 나 이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라 하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라 하는 말이나 나 이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라 하는 말은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말은 무시한다는 말이다. 왜 무시하는가? 우상이 있기 때문에 무시한다. 왜 우상을 섬기는가? 자기 행복을 추구할 자로 알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고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게 된다.
야곱은 숙곳과 세겜을 거치면서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으로 드러났다. 물론 밧단 아람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왔지만 숙곳에 와서 자기를 위해서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해서 우릿간을 지었다 하는 것을 보면 그는 많은 것을 축적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세겜에 왔다는 것은 세겜이 강하다는 뜻이니까 강성해졌다 그런 말이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을 잃게 되었고 그래서 이방신상을 버리게 되었다. 내가 일생동안 이것을 탈취하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하나님을 위할 자구나 그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집이 목표가 된 사람으로 바꿔지게 된 것이다. 우상들을 땅에 묻었다 그렇게 되어 있다.
두 번째는 자신을 정결케 하라 이런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전 존재와 생활과 표현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후서 7:1절에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자’ 이런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벧엘을 위해서 내 인생이 있다면 내 인생은 오로지 그 벧엘에 합당하도록 만드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어떤 나무라도 깎아야 한다. 어떻게 생긴 나무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집을 짓기 위해서 합당하도록 깎아야 한다. 우리 인생이 벧엘이 목표라면 우리는 벧엘을 위해서 재단되고 벧엘을 위해서 다듬어져야 한다. 이것이 자기를 깨끗게 하는 일이다.
우상이 없어지면 사람은 깨끗해진다. 우상 때문에 더러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이기 때문에 깨끗해진다. 너희가 하나님의 전을 우상의 전으로 만들 수 없다 이 말은 하나님의 집에 지저분한 것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내 생각과 의도와 야망과 명예와 이런 잡동사니가 들어있어서는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내 인생을 하나님의 집으로 알면 내 인생은 저절로 정리되고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
성전과 우상 사이에는 일치점이 없다. 우상을 가지고 있는 성전이라는 것은 없다. 교회 생활, 성전의 생활은 곧 교회생활인데 이 생활 안에는 우상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우리가 만일 이런 우상을 가지고 있다면 교회 생활이 안 된다. 형제와 형제 사이에 연합이 안 된다. 우상이 있기 때문에 연합이 안 된다. 내 우상과 저 사람의 우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연합이 안 된다. 나는 이런 우상을 가지고 있는데 저 사람은 저런 우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서로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의 이름이 야곱이지만 이제부터는 야곱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다시 바꿔줬다. 얍복강에서 새로운 이름을 받았지만 여기 와서 확정되게 되었다. 더 이상 야곱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렇게 확정지어지게 되었다.
세 번째는 의복을 바꾸라 이렇게 하는데 의복은 생활 양식을 바꾸라는 것이다. 옛 사람을 새 사람으로 바꾸는 것, 옛 창조를 새 창조로 바꾸는 것, 옛 생활을 새 생활로 바꾸는 것, 이것이 의복을 바꾸는 일이다. 옷을 갈아입는 것이니까 겨울옷을 여름에 입을 수 없고 여름옷을 겨울에 입을 수 없다. 여름이 돌아오면 여름옷을 바꿔 입는다. 그와 같이 벧엘의 생활은 우리의 생활을 갈아입는 것이다. 다른 생활로 갈아입는 것이다. 교회 생활 가운데 있으면서 여전히 세상 생활을 할 수 없다. 교회생활은 새로운 옷을 입고 사는 생활이니까 새 생활을 의미한다.
귀걸이 같은 것을 땅에 묻었다 그러는데 이것은 자기 문화를 의미한다. 우상과 함께 처리되었는데 우상은 자기 야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고 귀걸이는 자기를 미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미화해야 한다. 사람의 모든 문제들이 어디에서 생기는가 하면 자기 야망을 채우려는 것과 자기를 미화시키려는 거기서 생긴다. 모든 변명이 어디서 나는가? 자기를 미화시키려고, 자기를 옳다고 미화시키려니까 변명이 생긴다. 왜 싸움이 생기고 정죄가 생기는가? 전부 이것 때문에 생긴다. 우상 숭배와 귀걸이 하는 것은 이것을 상징한다. 자기의 야망과 자기 미화, 이것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은 장막의 백성이고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백성이다. 그러기에 자기 미화가 필요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고 자기 야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귀걸이를 땅에 묻었다 했다.
이렇게 하고 나니까 주변의 사면 고을 사람들이 두려워해서 아무도 야곱을 추격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우연일 수도 있고 필연일 수도 있지만 우리 삶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우리가 우리 안에서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기 미화를 하는 것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고 나면 세상이 오히려 그런 사람을 두렵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얼른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사는 사람을 보면 사람들이 그 사람을 해하거나 추격하지 못한다.
이삭의 생활을 볼 때 블렛셋 사람들이 와서 친히, 스스로 화친을 청했다. 지금까지는 계속 우물을 뺏던 사람들인데 점점 보니까 이삭의 생활이 무언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찾아와서 우리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 이렇게 화친을 청했던 일이 있다. 우리가 다른 생활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집을 위한 사람으로 살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보게 된다. 이 주변은 결국 사탄과 죄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몰려올 수도 있고 아니면 도망갈 수도 있다. 건강한 사람 같으면 병균이 도망을 간다. 그것과 똑 같다. 꼭 싸워서만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적인 승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야곱은 여기서 추격하는 사람 없이 벧엘로 올라간 것이다.
벧엘로 올라가는 길은 아무도 우리를 추격할 자가 없는 것이다. 바로 인생이 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가니까 같이 나눠먹자고 하는 것이지 내가 벧엘로 올라가면 그럴 일이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벧엘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벧엘로 올라가는 길을 방해하지 않는다. 종교와 종교가 싸울 때도 세상 때문에 싸우는 것이지 하나님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벧엘로 올라가는 사람은 아무도 추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다는 말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리브가의 유모는 어머니를 대신하는 사람이었다. 야곱이 가족들과 생이별하고 객지에 사는 동안에 어머니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머니의 유모만 따라 왔으니까 그 유모가 자기 어머니를 대신 한 셈이다. 이것은 육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어머니니까. 육신을 의지했던 모든 것이 유모 드보라에게 달려 있었다. 여기서 이 말을 기록한 이유는 야곱의 일생이 이제 완전하게 정리되었다는 것을 말하려고 이것을 썼다. 마지막인 육신, 육친의 문제, 정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벧엘은 교회 생활이고 교회 생활은 육신의 생활이 아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들이다, 그러니까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에게는 더 이상 유모가 필요 없는 것이다. 육신의 어떠함에 의지하고 살았던 그런 것이 필요 없는 삶이 바로 교회 생활이다. 교회 생활은 부활로부터 시작했다. 육신으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죽었다가 다시 산 것으로 시작되었다. 교회 안에는 더 이상 드보라가 필요하지 않다. 드보라의 죽음을 여기에 삽입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더 이상 유모가 필요 없다.
벧엘로 올라가는 길에는 우상도 버려야 하고 귀걸이를 벗어야 되고 유모도 떠나야 된다. 그래서 모두 다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다 그렇게 되어 있다. 상수리나무는 번성하는 나무다. 강한 나무다. 세겜 상수리나무 이렇게 말하는데 우리 같으면 느티나무 같은 것, 이런 것이다. 오래 살고 강하고 그런 것들인데 이 아래에 묻고 이것을 ‘곡함의 상수리나무다’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한다. 슬픔의 상수리나무다 이런 뜻인데 야곱의 일생이 여기서 완전히 묻혀진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강함, 왕성함, 이런 것이 전부 땅 속에 완전히 묻혀지고 하나님의 전을 위한 야곱만 남아서 벧엘로 올라간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갈 때, 벧엘로 올라갈 때, 우리 자신은 이렇게 정결하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벧엘이 없는 사람들이 자기를 정결케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기를 정결케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다른 우상이 생기게 된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면 아주 의롭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깨끗하다고 하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어떤 것이 더 강하다. 자기의 의가 더 강해서 자기 의가 또 다른 우상이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벧엘로 올라 간 사람은 그것이 자기 의가 아니다. 벧엘에 필요한 것이 아니어서 버리고 간 것이니까 마땅히 버리고 갈 것을 버린 것이지만 세상에서 만일 우리가 이런 것을 버린다면 어떤 다른 목적을 가지고 버린 것이다.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버리니까 자기 의로 다시 채워지게 된다. 벧엘로 가는 길만이 우리 인생을 정결케 하는 것이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면 내가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내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단을 쌓고, 이 단은 성전의 맨 입구에 있는 것인데 거기는 제물을 드리는 곳이다. 여기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이니까 나는 이제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의 소유로, 하나님의 것으로 드립니다 이런 뜻이다.
성막의 생활은 제단으로부터 시작한다. 불도 여기서 가져가서 불을 피우게 된다. 그리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그 피도 제단에서 받아서 지성소에 들어가게 된다. 모든 성전의 생활은 제단으로부터 시작한다. 단을 쌓는다는 말이 늘 나오는데 이 말은 결국 성전의 삶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니까 우리 인생이 결국 하나님께 단을 쌓게 되면 우리에게서 철저하게 우상이 정리되고 또 자신이 정결케 되고 그리고 우리의 삶이 바뀌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 있던 다른 여러 가지 것들, 이런 것들이 부수적으로 다 정리되어서 우리는 맑은 사람이 되게 되고 깨끗한 사람이 되게 된다. 한 가지만을 위한 사람이 되게 되고 유일한 것만을 위한 사람이 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사람은 반대로 권세가 있게 된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에서도 항상 부끄럽다. 자신들도 그 짓을 하면서도 부끄럽다. 그런데 우리가 정결케 될 때는 부끄러움이 없어지게 된다. 바위 밑이나 이런 곳에 촛불을 켜 놓은 곳이 많다. 앞산에 가면 골짜기마다 시커멓게 타 있다. 아무도 몰래 와서 한다. 남이 보는 데서는 부끄러워서 못 한다. 왜냐하면 자기 욕심을 비는 것이니까 부끄러워서 못 한다.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는 길은 부끄러운 길이 아니고 너무나 깨끗한 길이고 당연한 길이니까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우리가 진행해도 그들이 우리를 추격할 수 없는 그런 길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야곱이 이 길을 갈 때 아무도 그를 추격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인생을 벧엘을 목표로 해서 창조하시고 또 벧엘을 목표로 해서 구원하시고 부르시고 택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벧엘이 없었더라면 갈 곳이 없고 벧엘이 없었더라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었을텐데 벧엘이 있기 때문에 야곱 같은 인생이지만 소망을 가지고 주 앞으로 갈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하고 우리 인생이 정결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벧엘 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주님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는 길에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고 벧엘을 위해서, 주의 전을 위해서, 하나님의 몸을 위해서, 그의 표현을 위해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