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Middle East) 지역의 역사와 문화
6. 끝없는 분쟁지역 중동(中東: M. East)
이곳에서 벌어졌던 전쟁 중 1948년에 시작하여 1967년에야 끝난 이스라엘-이집트 전쟁은 근 30년간이나 계속되었는데 어찌 보면 유대인(이스라엘)과 아랍인들의 인종분쟁(人種分爭)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백인, 중동지역은 황인종에 가까운 중동인(中東人)이다.
유대민족의 아픈 역사를 잠시 되짚어 보면, 우선 400여 년간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인데 그 기록이 구약성서의 ‘출애굽기(Exodus)’이다. 그 후에도 아시리아(Assyria)와 바빌로니아에 나라를 빼앗기고 노예생활, 로마제국의 침공으로 결국 나라가 없어지고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2천여 년간 유랑(流浪)과 핍박의 생활을 해야 했는데 그 중에도 독일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히틀러에 의하여 400여만 명이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에서 독가스로 집단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한다.
비록 나라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유대인들은 명석한 두뇌 덕분인지 세계 경제를 뒤흔들 만한 능력이 있었는데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세계를 제패하려고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키자 자유 진영의 정치인들이 유대인들이 협조하면 국가를 세워주겠다는 약속을 하자 그들은 가진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전쟁에 참여한다. 일례로,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이 유명강사를 초빙하여 강의를 들으러 모였는데 강단에 올라선 강사가 눈물을 찍어내며,
‘나는 유대인이다. 곧 유대인의 나라를 세워준다니 나는 전쟁에 참여해야겠다. 미안하지만 나는 오늘 강의를 할 수 없다. 바로 나는 군인이 되어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강단을 떠났다고 한다.
결국, 세계 제2차 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약속대로 중동지방 옛 이스라엘이 있던 곳에 국가를 세우도록 허락했는데 그곳은 황무지와 다름없는 불모지로 소수의 아랍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곳이 살던 사람들은 너무 살기 어려운 지역이라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를 기다리던 아랍인들인데 그곳에 이스라엘(Israel)이라는 나라가 들어선다는 소리를 듣자 거센 반발을 한다.
그렇지만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배를 타고 연달아 항구로 들어오자 다시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19세기 후반, 시오니즘(Zionism)이 확산되는데, 시오니즘이란 성서에서 약속의 땅인 시온(Zion) 산으로 돌아가자는 유대인들의 소망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민족 국가로 만들기 위한 정치적 운동이었다.
1948년, 마침내 이스라엘이 건국되는데 팔레스타인 지역 아랍인들의 반발로 곧이어 아랍-이스라엘전쟁(Arab-Israeli Wars)이 연이어 일어난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고, 연이어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불모지를 개간하여 오늘의 이스라엘을 건설한다.
1967년에는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이 발발하는데 주변에는 광대한 영토와 많은 국민을 보유한 아랍 국가들도 많았지만, 시오니즘으로 뭉친 이스라엘은 수십 배의 병력을 보유한 아랍연맹을 6일 만에 깨뜨린다.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끊임없는 분쟁들이 계속되는데 유대인들은 우리 조상들이 살던 땅이라고 하며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꿋꿋이 지켜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1,2차 오일쇼크(Oil Shock/석유분쟁), 1991년에는 미국과 이라크의 걸프(Gulf) 전쟁...
이곳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성스러운 땅이지만 오늘날도 연일 전쟁이 벌어지는 죽음의 땅이니 신기하다.
미국-이라크전(바그다드) / 미군들 공격 / 무장조직 알카에다 / 오사마 빈 라덴
화염에 휩싸인 뉴욕 쌍둥이 빌딩 /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 미 국방부(Pentagon/펜타곤)의 피해
2003년,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인 ‘이라크전쟁’이 발발하는데 우리나라는 미국에 공병지원단(工兵支援團), 의료지원단(醫療支援團) 등을 파견하여 미군을 지원하였으며 그에 따라 우리나라의 중동지역 노동자들은 이라크의 만행으로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노동자로 일하던 김만수, 곽경해 피살, 2004년 6월에는 김선일 선교사까지 피살되는데 마침내 한국군은 전투병(자이툰 부대) 3,000명을 파견하여 이라크전쟁에 동참한다.
그리고 최악의 참사는 2001년 ‘911테러’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시에 있는 세계무역센터(쌍둥이 빌딩)건물과 워싱턴에 있는 미국국방부 펜타곤(Pentagon) 건물은 이슬람 과격분자들이 민간비행기를 납치, 충돌시켜 엄청난 피해를 본다.
어이없는 테러를 당하자 미국은 우사마 이븐 라딘(Usāmah ibn Lādin:일명 오사마 빈 라덴)을 테러의 배후 조종자로 지명, 그가 은신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그를 인도할 것을 요구했으나 탈레반이 거부하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습, 전쟁에 돌입한다.
미 뉴욕의 9.11 테러의 피해를 살펴보면, 경제적인 손실은 접어두고, 인명피해만 보아도 사망자만 쌍둥이 빌딩 2,600명, 미국국방부 125명, 항공기 탑승객 256명, 뉴욕 소방관 343명, 뉴욕 경찰 84명, 뉴욕 항만국(港灣局) 직원 23명으로 총 3,130명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 본토가 최초로 공격당한 것으로, 세계 2차 대전 당시 일본에 의한 하와이 진주만(珍珠灣) 공습 때 사망한 2,330명보다 800명이나 더 많았다고 하니 미국의 입장으로 보면 씻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미국 주도(主導)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대한 공격은 일부 서방국가와 아프가니스탄의 반(反) 탈레반 세력인 북부 동맹까지 이 전쟁에 합세한 끝에 탈레반 주권은 무너져 수도 카불(Kabul)에서 도주하고, 2001년 11월에 독일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서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를 수반으로 하는 아프가니스탄 과도정부 내각(內閣)이 구성된다.
아프가니스탄은 난민들이 흩어져 주변국들의 정치개입문제, 이곳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마약 거래로 인한 각국의 미묘한 이해(利害)문제, 비록 전쟁에서 밀려났지만, 그 잔당(殘黨)들인 탈레반 세력의 호시탐탐 복귀를 엿보고 있는 문제 등 복잡하게 얽혀있다.
미국은 9.11 테러 주범인 우사마 이븐 라딘(Usāmah ibn Lādin)을 수개월에 걸친 은밀한 작전을 펼쳐서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의 외곽 아보타바드(Abbottabad)에 은신해 있던 라딘을 만 10년 만에 드디어 찾아내어 2011년 5월 1일, 미군 특수부대와 총격전 끝에 마침내 사살(射殺)하는데 성공한다.
그 이후에도 석유를 둘러싼 분쟁이 끝이 없었고 미국의 골치는 이라크뿐만 아니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하여 중동지역은 여러 나라와 끊임없는 분쟁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게 된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 각 종파 간의 끊임없는 분쟁으로 무고한 국민의 무자비한 살육이 이어지자 미국이 끼어들어 분쟁의 종식을 위해 힘써 보지만, 너무나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자 2020년 2월, 미국 바이든(Joe Biden) 대통령의 결단으로 이슬람과의 줄다리기를 끝마치기로 마음을 굳히고 탈레반과 휴전협정을 맺는다. 그런데 바이든 대통령의 결단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지.....
2021년 미군의 철수 계획 발표한 후,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대한 경비는 강화했으나 8월 15일 탈레반의 카불 입성이 임박하자 아프가니스탄 정부 아슈라프 가니(Ashraf Ghani) 대통령은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하겠다고 밝혔으나 목숨의 위협을 느껴 카불을 탈출하였고, 탈레반의 횡포에 질린 카불시민들은 탈출을 위해 공항으로 몰려드는데 미군과 군속(軍屬) 및 외교관들도 미처 대피하지 못해 대혼란에 빠지고....
결국, 8월 30일 미군이 철수를 완료한 후, 곧바로 탈레반이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다.
이것이 바로 엊그제 우리가 TV 화면으로 생생하게 보았던 장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