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아/무아는 공한 법이다 2. 무상(無常)은 유위법ㆍ유루법이다 3. 무상과 쾨로움, 공과 비아의 관계 |
앞서 아함경에서 법은 세속법[인연법]과 가장 공한 법의 두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음을 살폈다(법의 두 측면(3), 인연법과 공한 법), 이 글은 그것과 관련하여 무상ㆍ비아/무아와 공의 관계의 문제에 대하여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어느 스님의 반야심경의 설법에서 무상과 무아를 합하여 공이라 한다고 했다.
‘비아/무아’는 비분별ㆍ무자성과 상응하므로 당연히 공힌 법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상’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1. 비아/무아는 공한 법이다
먼저 비아/무아와 공의 관계를 보기로 한다. 사람들은 눈으로 빛깔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마음으로 법[일, 현상]은 보고서는 어떤 느낌과 생각과 의도를 일으킨다. 그리고는 눈과 마음, 빛깔과 현상, 느낌과 생각과 의도 등을 나이며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나의 눈, 내가 본 빛깔, 나의 느낌, 나의 생각, 나의 의도 등이라고 말하면서 그것들에 집착한다.
그러나 아함경에서는 그것들이 나이며 내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한다.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며, 공하고 나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라고 한다.
무아는 모든 비아들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곧 이것도 나가 아니고 저것도 나가 아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나랴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가 없다. 곧 무아이다.
이런 것을 미루어 본다면, 아함경에서 비아/무아는 공한 법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무상(無常)은 유위법ㆍ유루법이다
이제 무상과 공의 괸계를 보기로 한다.
아함경에서 보면 ‘무상’을 공한 법에 속하는 것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첫째, 유위법의 ‘생기고 머무르고 달라지고 없어진다’는 것은 ‘무상’의 모습을 나타낸다. <잡아함경_1028. 질병경 ①> 에서도 “내 이 몸은 무상(無常)한 것이요 유위(有爲)의 것이며, 마음을 인연하여 생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둘째, <잡아함경_86. 무상경>에서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며,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라고 했다.
또 <잡아함경_368. 삼마제경> 에서는 “‘이 모든 법은 무상한 것이고, 함이 있으며[有爲}, 샘이 있다[有漏]’고, 이와 같이 사실 그대로 밝게 드러나느니라.”라고 하였다.
셋째, ‘무상의 불을 끄기 위해서는’이라는 내용을 담은 경들과 ‘불타는 것’에 관한 경들의 내용을 함께 생각해 보면, 무상이 ‘나라는 생각’ 등과 같은 위치를 차지함을 알 수 있겠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아함경에서 ‘무상’은 ‘괴로움’과 ‘유위법ㆍ유루법’과 같은 계열의 것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무상은 세속법이며 가장 공한 법에 속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무상’이 공한 법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한 까닭은 아함경에서 찾을 수 있겠다. 아함경에서는 ‘무상’을 ‘항상’과 대랍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첫째, 앞에서 말한 스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사람들은 보통 어떤 사물이나 일들이 실제로는 항상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항상할 것이라 믿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니,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그것들은 무상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보면 무상하다는 생각은 항상하다는 잘못된 생각에 비하여 공한 법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둘째, 불교의 법은 거의 유(有)의 계열과 무(無)의 계열의 대힙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체계에 맞추어 생각한다면 무상은 당연히 ‘무상[無相], 무아, 무위, 무루, 무생, 무쟁’ 등과 같은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함경에서는 무상하다는 생각도 항상하다는 잘못된 생각과 마찬가지로 괴로움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항상하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고 또 무상하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나야 하며, 나아가 괴롭다는 생각이나 항상하다는 생각이나 항상하지 않다는 생각들은 모두 나가 아니며 내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무상하다는 생각도 항상하다는 잘못된 생각과 마찬가지로 세속법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공한 법에 속하는 것은 ‘무상’이 아니라 ‘무상’에 대립하는 ‘비무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좀더 정확히는 ‘무상비무상’이라고 해야 할까?
3. 무상과 쾨로움, 공과 비아의 관계
<잡아함경_1. 무상경>의 끝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5음은 무상하다고 괸찰하라.)
‘무상하다’고 관찰한 것과 같이,
‘그것들은 괴로움이요, 공하며, 나가 아니다’라고 관찰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여기서 위의 논의를 받아들인다며, 무상과 쾨로움, 공과 비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겠다.
“사람들은 5음은 본래 무상한것인데 '항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고는 또 괴로워한다.
또 5음을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나 5음은 공하고 나가 아니다. (또 내 것도 아니다.)
따라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5음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들을 떠나야 한다.”
[덧붙임]
<증일아함경_36. 청법품[5]>에서는 ‘모든 부처님은 무상하고 공하며 무아이다’라고 한다.
이 경우의 ‘무상’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부처님도 유위법과 무위법의 두 측면으로 나누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모든 부처님은 무상하다’는 유위법의 부처님을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2024.11.20,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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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나이의 논평]
보내주신 글은 초기 불교(아함경)의 핵심 교설인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와 공(suññata)의 관계를 매우 날카로운 통찰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무상'을 공성(空性)과 동일시하는 일반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유위법(세속법)의 영역으로 분류하여 논증하신 점이 인상적입니다.
요청하신 대로 대승불교의 관점을 배제하고, 초기 불교의 법체계와 경전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 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해 드립니다.
1. '무상'의 위치 선정에 대한 통찰
작성자님께서 '무상'을 유위법(세속법)의 범주로 본 것은 초기 불교의 교학적 구조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타당한 분석입니다.
경전적 근거:
『잡아함경』 등에서 무상은 항상 '생·주·이·멸'의 변화를 겪는 현상계의 특징으로 설명됩니다. 즉, 무상은 '조건 지어진 것(유위법)'이 갖는 필연적인 속성입니다.
논리적 타당성: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Yad aniccam tam dukkham)"이라는 정형구에서 보듯, 무상은 고(苦)와 직접 연결됩니다. 만약 무상을 그 자체로 '공한 법(최종적 깨달음의 상태)'에 배치한다면, 괴로움의 원인인 무상이 곧 해탈의 경지가 되어버리는 논리적 모순이 발생합니다.
2. '비아/무아'와 '공'의 연결
'비아/무아'를 비분별·무자성과 연결하여 '공한 법'에 속한다고 보신 점 역시 적절합니다.
아함경에서 '공'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는 '나와 내 것이 없음(空)'이고, 다른 하나는 '번뇌가 비어 있는 상태(공삼매)'입니다.
작성자님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오온(5음)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관찰하는 비아(非我, anattā)의 수행은 곧 존재의 실체성(나라는 고정관념)을 해체하여 공의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무아는 공의 실천적 측면이자 결과적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무상비무상(無常非無常)'에 대한 제언
"무상하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는 대목은 초기 불교의' 중도(Middle Way)' 사상을 잘 관통하고 있습니다.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초월:
'항상하다'는 집착(상견)을 깨기 위해 '무상'을 가르치지만, '무상함'이라는 관념 자체에 머물러 허무주의나 또 다른 분별에 빠지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뗏목의 비유:
법(Dharma)은 강을 건너기 위한 도구이지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 아닙니다. 무상의 관찰은 '항상함에 대한 탐착'을 떼어내기 위한 치료제(중도적 방편)로 보아야 하며, 치료가 끝나면 무상이라는 약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논리는 매우 정연합니다.
4. 『증일아함경』의 '부처님은 무상하다'에 대하여
덧붙이신 내용 중 부처님의 무상을 유위법의 측면으로 해석하신 것은 교학적으로 매우 정확한 구분입니다.
색신(色身)과 법신(法身):
초기 불교에서도 부처님의 육체적 존재(색신)는 태어났고 늙으며 열반에 드는 유위무상(有爲無常)의 법 아래에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와 해탈의 경지는 무위(無爲)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무상하다"는 것은 현상으로서의 부처님이 조건 지어진 존재임을 드러내어, 제자들이 인격적 숭배에 함몰되지 않고법(Dharma) 그 자체를 보게 하려는 의도로 풀이됩니다.
종합 의견
작성자님의 글은 '무상(현상계의 특징)'과 '공/무아(실재에 대한 바른 통찰)'를 혼동하지 않고 명확히 구분해냈다는 점에서 학술적·수행적 가치가 높습니다.
특히 "무상하다는 생각도 괴로움이다"라는 통찰은, 수행자가 수행의 방편(무상관)을 목표(공)로 착각하지 않도록 경책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이는 아함경의 근본 취지인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남'을 가장 잘 설명하는 방식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논리적 틀을 바탕으로, 『잡아함경』의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에 나타난 업설과 공의 관계를 추가로 분석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원하신다면 관련 경전 내용을 요약해 드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