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코피아의 주목할 만한 지속 가능한 경제는 어떻게, 그리고 언제 생겨났을까?
패트릴 커치와 더글러스 옌(Douglas Yenn)을 통한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이는 갑자기 발명된 것이 아니라 거의 3,000년에 걸쳐 천천히 개발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2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재 폴리네시아인의 조상에 해당하는 라피타 사람들이
최초의 정착민으로 기원전 900년 경 이 섬에 들어왔다.
최초의 정착민들은 섬으 호나경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숯의 흔적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불로 숲을 태워 없앴으며,
바다새, 육지새, 과일박쥐, 물고기, 조개, 바다거북 등을 마음껏 사냥하며 먹어치웠다.
1,000년이 지나기도 전에 피코피아에 사는 새 다섯 종이 사라졌으며, (애봇부비, 오드본쉬어워터, 밴디드레일, 카먼매거포드, 수티테른)
이어 '레드푸티드부비(Red-footed Booby)'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같은 기간 동안 과일박쥐도 사실상 멸종했으며,
물고기와 새는 3분의 1,조개는 10분의 1, 대현 대합조개 및 대형 소라는 배 이상 감소했다.
(사람들이 ㅋ큰 개체를 선호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원전 100년 경, 최초의 식량 자원이 사라지거나 거의 고갈되자 경제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즉 다음 100년 동안에는 숯의 흔적이 증가세를 멈추었고,
이곳이 원산지인 아몬드 나무(카나리움 하르베이)가 나타났으며,
고고학 유적지에서는 이제 티코피아인들이 화전 농법을 버리고
견과류 나무를 재배하는 등 과수원 경작에 나셨을을 증명해주는 흔적들이 보인다.
조류와 해산물의 급격한 감소를 보충하기 위해 사람들은 돼지를 집중적으로 사육했고,
돼지를 통해 단백질의 거의 절반을 섭취했다.
1200년경의 유물과 경제의 갑작스런 변화에서
폴리네시아인들이 동쪽에서 이 섬에 도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독특한 문화 티코피아까지 처음 식민지화했던 라피타 이주민의 후손들이 살고 있던
피지, 사모아, 통가 등에서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구덜이를 파고 빵나무를 발효시켜 저장하는 기법을 소개한 사람들도 이 폴리네시아인들이었다.
1600년경 티코피아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즉 생선, 조개, 거북 등의 소비 증가로 단백질 공급원으로서의 대체 역할을 했던 돼지를 섬에서 모두 죽이기로 한 것이다.
이는 구전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티코피아 사람들의 설명에 따르면 돼지들이 마구 밭에 난입하여 작물을 망치고 식량을 많이 소비했기 때문데
(단 450그램의 돼지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약 4.5킬로그램의 식용 채소가 필요했다.)
또 돼지가 족장들의 일종의 사치품으로 전락했기때문에 자신들의 조상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돼지가 사라지고 같은 시기에 티코피아 만이 염수호로 변하고 난 후,
비로소 티코피아 경제는 1800년대 유럽인들이 최초로 거주하기 시작하던 당시의 경제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므로 식민 정부아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중요하게 등장한 20세기 이전에
티코피아는 사실상 거의 3,000년 동안 섬의 매우 작은 외딴 지역까지 세세히 관리하며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오늘날 피코피아에는 네 부족이 있으며 세습적인 지위의 족장이 각부족을 이끌고 있는데
자리가 세습되지 않는 뉴기니 고원지대의 '큰사람'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코피아 경제가 진화해온 모습을 보면
이를 상의 하달 방식이 아니라 하의상달 방식으로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반나절이면 섬의 모든 해안을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섬이 작기 때문에
모든 티코피아 사람들이 섬에 익숙하다.
섬의 인구도 매우 적어서 티코피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서로 개인적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모든 땅에 이름이 붙어 있고 부계 중심의 부족들이 소유하고 잇지만
각 가구는 섬의 서로 다른 곳에 조금씩 자신의 땅을 갖고 있다.
만약 어느 때라도 경작되지않고 놀고 있는 땅이 있다면
주인의 허락 없이도 누구나 그곳에서 일시적으로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
또 누구 집앞에 있든 어느 암초에서나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사이클론이나 가뭄이 닥치면 섬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비록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족이 소유한 땅의 크기도 달랐지만 결국 같은 문제, 같은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티코피아는 고립된 지리적 조건과 좁은 면적으로 인해
최초 정착시부터 집단 의사결정 방식이 채택될 수밖에 없었다.
인류학자 에리먼드 퍼스는 자신의 책에 『우리 티코피아 사람들 We, the Tikopia』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티코피아 사람들이 그에게 자신들의 사회를 설명해줄 때마다
'마투 은가 티코피아(Matou nga Tikopia; '우리 티코피아 사람들' 이라는 뚯) 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다.
티코피아의 족장들은 각 부족이 소유한 땅과 카누의 지배자였으며 자원을 재분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폴리네시아인의 기준에 따르면 가장 약한 권위를 지닌 족장이 있는 티코피아는
계층의 분화 정도가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족장 및 그의 가족은 자신이 먹을 음식을 얻기 위해 일반 평민과 마찬가지로 밭을 갈아야 하고 과수원을 가꿔야 한다.
퍼스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생산 양식은 사회 전통에 따라 고유한 형태를 띠었고
이 속에서 족장은 단지 주요 행위자와 해석자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했다.
그와 그의 부족은 혈연 관계라는 이데올로기, 의식,
그리고 전설과 신화를 통해 강화된 도덕이라는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족장은 상당한 수준까지 이런 전통의 관리자로 기능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혼자가 아니다.
부하, 동료 족장, 부족민, 심지어 가족들조차 모두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기에
족장에 조언하거나 비판을 가한다."
그러므로 티코피아 족장들은 이제 마지막으로 논의하게될 사회의 지도자에 비하면
결코 상의 하달 방식을 사용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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