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첨(姜民瞻)
현종 경술원년(1010), 송 대중상부3년ㆍ거란 통화28년
○ 11월 갑인일에 숙주(肅州 평남 평원군(平原郡))가 무너졌다.
이날 노이(盧顗)가 향도(鄕導)가 되어 거란사람 유경(劉經)과 더불어 격서를 가지고 서경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부유수(副留守) 원종석(元宗奭)은 부하 관속 최위(崔緯)ㆍ함질(咸質)ㆍ양택(楊澤)ㆍ문안(文晏)등과 이미 항복할 표문을 만들었다.
채문등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서경에 이르니, 성문이 닫혀있었다. 최창이 소리질러 분대어사(分臺御史) 조자기(曹子奇)를 불러 말하기를,
“우리들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걸음을 배로 늘려왔는데 성문을 닫고 들이지 아니함은 무슨 이유이냐?"하니,
자기(子奇)가 노이와 유경이 항복하기를 권유한 사실을 자세히 알리고 드디어 성문을 여니 채문이 들어가서 고궁의 남쪽행랑에 주둔하였다.
최창이 원종석에게 노이등을 구류하고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떠보았는데 종석이 따르지않자, 최창이 은밀히 채문과 모의하여 군사를 성 북쪽에 보내어 노이등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습격하여 죽이고 표문을 빼앗아 불살랐다. 이때 성안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지않으므로 채문이 나가서 성 남쪽에 주둔하니 따라간 자는 대장군 정충절(鄭忠節)뿐이었다.
조금 후에 동북계도순검사 탁사정(卓思政)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러 드디어 함께 군사를 합쳐서 다시 성에 들어갔다.
왕은 삼군(三軍)이 패전하고 주ㆍ군이 모두 함락되었으므로 표문을 올려 조회하기를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드디어 거란군사가 우리나라에서 포로를 사로잡거나 노략질함을 금지하고, 마보우(馬保佑)를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왕팔(王八)을 부유수(副留守)로 삼고는 을름(乙凜)을 보내어 기병 1천명을 거느리고 보우등을 호송하게 하였다.
을묘일에 거란주가 또 한기(韓杞)를 시켜 돌기(突騎) 2백명을 거느리고 서경 성 북문에 이르러 외치기를,
“황제가 어제 유경ㆍ노이등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와서 효유하였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전연 소식이 없느냐? 만약 명령을 거역하지 않는다면 유수와 관료들은 와서 나의 지시를 받으라"하였다.
탁사정이 한기의 말을 듣고 채문과 모의하여 휘하의 정인(鄭仁)등을 시켜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갑자기 나가서 한기등 백여명을 쳐서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로잡아 한 사람도 돌아간 자가 없었다.
사정이 채문을 선봉으로 삼아 나가서 을름과 싸우게 했더니 을름과 보우가 패하여 달아났다. 이에 성안의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으므로 사정은 성으로 들어오고 채문과 이원(李元)은 나가서 자혜사(慈惠寺)에 진을 쳤다.
거란주가 다시 을름을 보내어 공격하니 나졸(邏卒)이 보고하기를,
“적병이 안정역(安定驛 평북 평원군(平原郡))에 와서 진을 쳤는데 그 형세가 매우 강성하다"하였다.
채문이 사정에게 빨리 알리고 병진일에 드디어 사정ㆍ중 법언(法言)과 함께 군사 9천명을 거느리고 임원역(林原驛 평남 대동군(大同郡))에서 적군을 맞아 쳐서 머리 3천여급(級)을 베고 법언은 전사하였다.
그 이튿날 채문이 다시 나가서 싸우니 거란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이에 성안의 장수와 군사들이 성에 올라 이를 바라보고는 앞다투어 나가 추격하여 마탄(馬灘)에 이르자, 거란이 군사를 되돌려 쳐부수고 마침내는 성을 포위하였으며 거란주는 성 서쪽 절에 머물렀다.
사정은 두려워지자 장군 대도수(大道秀)를 속여 말하기를,
“그대는 동문으로 나는 서문으로 나와 앞뒤에서 공격하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다"하고 드디어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도수는 대동문(大東門)을 나와서야 비로소 속임을 당한 줄 알았으나 또한 힘으로 적을 당해낼 수도 없었으므로, 드디어 관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거란에게 항복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무너지고 성안에서는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기미일에 통군녹사 조원(趙元)과 애수진장(隘守鎭將) 강민첨(姜民瞻), 낭장(郞將) 홍협(洪叶)ㆍ방휴(方休)가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이내 함께 신사(神祠)에 빌고 점을 쳐서 길조를 얻었다. 이에 여럿이 조원을 추대하여 병마사로 삼고,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었다.
현종 임자3년(1012), 송 대중상부5년ㆍ거란 개태(開泰)원년
○ 5월에 동여진이 청하현(淸河縣)ㆍ영일현(迎日縣)ㆍ장기현(長鬐縣)에 침입하자, 도부서(都府署)의 문연(文演)ㆍ강민첨(姜民瞻)ㆍ이인택(李仁澤)ㆍ조자기(曹子奇)를 보내 주ㆍ군의 군사를 독려하여 이를 쳐서 달아나게 하였다.
현종 무오9년(1018), 송 천희2년ㆍ거란 개태7년
○ 12월에 동북 여진 아차(阿次)ㆍ오을불(烏乙弗)등 14명이 와서 말과 병기를 바쳤다.
○ 무술일에 거란의 부마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략하면서 군사 10만명이라고 소리쳤다.
왕은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20만8천3백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 평남 안주(安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흥화진에 이르러 기병 1만2천명을 뽑아 산골속에 매복시키고 또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아두고 적을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막은 물을 터놓고 복병을 내어서 적을 크게 패퇴시켰다.
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서울로 들어오자 민첨이 자주(慈州) 내구산(來口山 평남 순천(順川))까지 뒤쫓아 와서 적을 크게 패퇴시키고, 시랑 조원(趙元)이 또 마탄(馬灘)에서 적을 쳐 머리 1만여급을 베었다.
현종 기미10년(1019), 송 천희3년ㆍ거란 개태8년
○ 12월 초하루 계미일에 왕자 서(緖)가 태어났다.
○ 최사위(崔士威)를 추충좌리동덕공신청하현개국남식읍삼백호(推忠佐理同德功臣淸河縣開國男食邑三百戶)로, 강감찬을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 유방(庾方)을 추성좌리보국공신천승현개국남식읍삼백호(推誠佐理輔國功臣千乘縣開國男食邑三百戶)로, 채충순(蔡忠順)을 추충진절위사공신제양현개국남식읍삼백호(推忠盡節衛社功臣濟陽縣開國男食邑三百戶)로, 강민첨(姜民瞻)을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으로 삼았다.
현종 신유12년(1021), 송 천희5년ㆍ거란 태평(太平)원년
○ 11월에 지중추사 강민첨(姜民瞻)이 졸하였다.
민첨은 진주(晉州) 진강현(晉康縣)사람이다.
서생으로 몸을 일으켜서 활쏘기와 말타기는 그가 잘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의지와 기개가 굳세고 과감하여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현종 을축16년(1025), 송 천성3년ㆍ거란 태평5년
○ 6월에 교하기를,
“하늘을 본받고 시후(時候)에 순응해야만 재앙을 막고 화평을 이루게 될 것이다. 지금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과 모든 관사에서 아뢰어 시행하는 것은 마땅히 각기 마음을 다하여〈월령(月令)〉을 따라 나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하였다.
○ 교하기를,
“강민첨(姜民瞻)과 하공진(河拱辰)의 공로가 모두 현저한데도 포상이 후하지 못하였으니 각기 그 아들에게 벼슬을 올려주라"하였다.
정종 병술12년(1046), 송 경력6년ㆍ거란 중희15년
○ 11월에 제하기를,
“태중상부(太中祥符)3년에 거란군사가 침입하자 서북면도순검사 양규(楊規)와 부지휘(副指揮) 김숙흥(金叔興)등이 앞장서서 싸워 연달아 적을 물리치고 몸에 화살이 고슴도치 털처럼 박혀 모두 전쟁터에서 죽었고, 또 태중상부 11년에 거란군사가 몰려 들어오자 병부상서 지중추원사 강민첨(姜民瞻)이 원수가 되어 북치고 소리지르며 쳐들어가 반령(盤嶺)벌판에서 크게 이기니, 거란군사가 패해 달아나며 창을 던지고 갑옷을 버려 길이 꽉 막혔다.
민첨이 사로잡아 목벤 것이 만급(級)이나 되어 그 공을 거슬러 생각건대 포창하여 장려하여야 마땅하니, 그 형상을 공신각(功臣閣)에 그려 붙여서 훗날의 사람들을 권장해야 한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