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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 묵상글 들. ( 주님 만찬 성목요일 ) 서로 섬기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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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 주님 만찬 성목요일 /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성목요일 저녁에 거행되는 주님 만찬 미사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념하는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제1독서로 과월절과 무교절 축제의 기원을 밝히는
탈출기를 봉독하고, 제2독서에서는 성찬례 제정문을 담은 코린토 1서를 봉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중에 행하신
제자들의 발을 씻는 장면을 담은 요한 복음을 봉독합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지상 명령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주님 만찬은 파스카 축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파스카 축제는 하느님께서 조상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지금도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는 시간이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통하여 당신 사랑의 징표를 남겨 주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몸과 피를 성체와 성혈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유다 풍습에 발 씻김은 하인이 주인에게, 부인이 남편에게,
제자가 스승에게 존경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발 씻김 예식은 성체성사의 신비를 밝혀 줍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는 우리가 스승의 모범을
따라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적막한 이 밤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구원의 신비인 파스카 사건과
이를 완성하는 사랑의 성사를 통하여 섬김의 삶을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가슴에 깊이 새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태 26,40-41).
-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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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 주님 만찬 미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 자동차는 움직이는 컴퓨터와 같습니다. 다양한 기능이 있어서 운전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장거리 운전을 하면서 ‘크루즈 기능(자동 속도 조절장치)’을 애용하고 있습니다. 차량이 많지 않은 곳, 직선거리가 많은 곳에서는 크루즈 기능이 운전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운전을 하신 분 중에도 이 기능을 사용하지 않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자동 속도 조절장치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에 그랬습니다. 그러나 한번 알려 드리면 장거리 운전의 피로감이 줄어든다고 좋아하였습니다. 제 차에는 없지만 최근에 나온 차에는 앞차와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속도 조절은 물론 앞차와의 거리까지 일정하게 유지해주기에 좀 더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오늘부터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합니다. 성삼일은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신앙의 크루즈입니다. 성삼일은 하느님과 멀어진 우리를 회개의 길로 이끌어주는 신앙의 크루즈입니다. 성삼일은 어둠 속에 방황하는 우리를 진리의 빛으로 안내하는 신앙의 크루즈입니다. 성삼일은 교회 전례의 정점이며, 신앙의 시작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1년 중에 가장 거룩하고 뜻 깊은 성삼일의 첫날을 시작합니다.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는 오늘 ‘주님의 만찬 미사’를 봉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드셨는데, 그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입니다.
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빵을 들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또한 포도주가 든 잔을 들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신 다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해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의 원형이고 미사의 시작입니다.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바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잊지 않았고,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진정한 이유를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아기에게 하는 일이요, 종이 주인에게 하는 일이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희생과 봉사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남을 지배하고 억누르고, 권위를 내세우고 잘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기꺼이 봉사하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뜻을 따른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만찬미사입니다. 모든 이를 품어주셨고,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주셨으며, 스스로 수난과 고통을 감수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끝까지 믿어주며 하느님께 대한 열정과 확신으로 고난의 길을 묵묵히 가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희생을 우리도 배워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배우며, 우리들 또한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씻어주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내어주신 몸과 피를 받아들이듯이, 우리들 또한 우리의 이웃들에게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 있다면, 우리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이미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성모님께서는 최초의 감실’이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성체의 여인이며, 최초의 감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성체성사 제정 이전에 성체성사의 신앙을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마리아는 영적인 하느님에게 몸을 내어드렸습니다. 성모님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누구의 손을 통해서 사제의 손을 통해서 그렇습니다. 사제는 마리아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성당에서만 태어나길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태어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가난한 이들의 동반자가 된다면 우리의 몸을 빌려 하느님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자비의 하느님이 우리를 통해 탄생하십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협조해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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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 주님 만찬 성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섬기는 사랑 ♣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여기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은, ‘극진히’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은,
당신의 그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주님이며 스승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은,
주님이며 스승으로서 명령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내가 너희에게 한 그대로 너희도 하여라.”입니다.
이 명령은 뒤의 34절-35절에 나오는 ‘새 계명’에 연결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 라는 말씀과
짝을 이루는 말씀인데, 사실상 ‘같은 가르침’입니다.
서로 발을 씻어 주라는 명령과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하나로 합해서 생각하면,
“서로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여라.” 라는 계명이 됩니다.
이 계명은,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계명이기 때문에
‘주님의 유언’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중요한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섬기는 사랑’을 특별히 강조하셨을까?
1) ‘서로 섬기는 사랑’은 ‘신앙’을 증명하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새 계명’에 관한 말씀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서로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명하는 일이 되고,
그 공동체가 ‘예수님의 신앙 공동체’ 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됩니다.
(‘사랑 없이’ 말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또 사랑 없는 공동체는 신앙 공동체가 아닌, 그냥 세속의 집단입니다.)
2) ‘서로 섬기는 사랑’은 ‘하느님 나라’를 증명하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이 말씀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다.” 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낮춤’은 ‘섬김’과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섬김’ 없이 낮추는 것은 ‘비굴함’이고, ‘낮춤’ 없이 섬기는 것은 ‘위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서로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섬김을 받기만 하고 남을 섬기지는 않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남을 섬기기만 하고 섬김을 받지는 못하는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모두가 다 낮은 사람이고, 모두가 다 높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 참여하는 일은,
죽어서 저쪽 세상에 간 뒤에나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이쪽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섬기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시작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시작된 일이 거기에서 완성됩니다.)
3)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이라는 말은 하느님과 같아진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온전히 갖춘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주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그리고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려면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섬기는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만일에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그저 잘해 주기만 한다면,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완전한 사람’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또 당신을 믿는 신앙인들이 모두 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직접 ‘섬기는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셨고,
그대로 따라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목요일에 세족례를 거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그대로 실천하는 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하기 위해서입니다.
남의 발을 씻어 주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족례 속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기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일 년에 한 번 형식적으로 세족례를 거행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 ‘섬기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구분되어 있는데,
나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앞에서 나를 낮추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낮춤’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인간적인 예의를 지키는 것일 뿐입니다.
나보다 낮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앞에서 나를 낮추는 것,
그것이 진정한 낮춤입니다.
‘섬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나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섬김’이 아니고,
나보다 낮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섬겨야 진정한 섬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예수님께서는 ‘서로’ 낮추고 섬기라고 가르치셨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남이 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실천해야 하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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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 새벽을 열며. 주님 만찬 성목요일. 빠다킹신부님.
많은 사람이 후회합니다. 그렇다면 이 후회는 언제 하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현재에 충실하지 못했을 때 갖게 되는 감정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충실한 사람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떤 청년이 자신의 여자 친구와 헤어지게 되어서 힘들다는 말을 제게 합니다. 당연한 사랑인 줄로만 알고 여자 친구에게 소홀했었음을 그래서 이별 통보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과거로 되돌아간다면 여자 친구에게 충실하게 해 줄 것이라며 후회합니다. 사랑의 관계라는 현재에 충실하지 못했기에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만났던 어떤 자매님도 생각납니다. 이분은 암 말기 판정을 받고서 자기 삶에 대한 후회가 가득했습니다. 병원에서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제까지 사는 것이 바쁘다는 이유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못했고 봉사 한 번 하지 못했다면서 왜 이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후회합니다.
고해성사를 받은 뒤, 자기 생의 마지막을 정말로 열심히 사셨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아픈 환자들에게 말도 건네고 그들의 어려움을 도왔습니다. 본인도 죽을 만큼 아팠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가는 마지막 순간에 아주 편안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했기에 후회가 그만큼 줄어든 것이 아니었을까요?
주님 만찬 성목요일인 오늘, 주님께서는 자신의 자리에서 어떻게 충실해야 하는지 자신이 직접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십니다. 심지어 당신을 팔아넘길 유다의 발까지도 씻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들 사이의 구분과 분열과 불화를 없애는 겸손을 가르치고자 스스로 당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반석으로 세워주신 베드로는 이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의 친교를 위해서는 당연히 정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에 주인의 시중에 깜짝 놀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는 말에 더 강력하게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달라고 청합니다. 이는 겸손의 모습이 아닙니다. 더 많은 것을 받으려는 욕심과 이기심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진정으로 후회하지 않는 삶은 자신을 높이는 삶이 아닙니다. 또 많은 것을 갖는 것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보여 주신 겸손의 삶, 그리고 교만의 올가미를 과감하게 풀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서만 지금을 충실하게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으며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지금 충실할 수 있는 자신의 역할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의 품 안에서 절대로 후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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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것이었다(서머싯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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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어느 자매님께서 사춘기인 딸 때문에 너무나 힘들다는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이제까지 말썽 한 번 친 적 없고, 부모의 말에 순종적인 아이였는데 요즘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화를 낸다는 것입니다.
아마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한두 번은 겪게 될 일일 것입니다. 사실 본인도 자신의 부모에게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자기 자녀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를 직접 경험하게 되니 더 괴롭고 힘든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본 사춘기에 대해 해석을 떠올려 봅니다. 동물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부모 곁을 떠납니다. 왜냐하면 독립을 돕는 호르몬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독립을 돕는 호르몬이 나오고 특히 인체 성장이 끝났음에도 부모 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몸에서는 계속해서 독립하라고 신호를 보내니, 부모 곁에 있으면서 보호와 도움을 거절하는 사춘기를 겪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 자체에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혼란 속에서 부모에게서 독립하려는 성향을 보일 뿐입니다. 따라서 따끔하게 혼내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훈계만으로 절대로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보호와 도움을 줄여가면서 아이의 독립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을 먼저 찾아봐야 합니다. 자기만의 공간을 허용하고 그 안에서의 본인 책임을 부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어른 아이’ 취급보다는, 진정으로 인격 자체를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춘기를 겪게 되면 이제 어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뻐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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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 이영근 신부님 강론. 성목요일에 대체 무슨일이 일어났는가?
-양주 올리베다노
요한 13,1-15(성 목요일); 성 목요일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 “성삼일은 대체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그분 본연의 신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줍니다. 곧 ‘파스카 성삼일’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지만, 이를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가 누구신지, 그리고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드러냅니다. 결국, 당신 참 생명이신 주님임을, 그리고 우리에게 그 참 생명을 건네주셨음을 밝혀줍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파스카의 생명을 입은 자임을 밝혀주고, 그 생명을 건네주는 일이 소명임을 밝혀줍니다.
* 그렇다면, 오늘 성 목요일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동안 함께 살아 온 우리가 이제는 헤어져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가야 한다면, 그 마지막 날 밤에 대체 우리는 무엇을 할까??~~
예수님께서는 이 마지막 날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성찬을 제정하시고(마태 26,16-29),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으며(요한 13,1-15), 올리브 산으로 가시어 겟세마니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마태 26,30-46). 그리고 스스로 붙잡혀 대사제 가야파 집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으셨습니다(마태 26,47-75). 그래서 오늘 우리는 “성유축성미사”를 통해 성찬제정을, “발 씻김 예식”을 통해 발 씻기심을, “성체조배”를 통해 겟세마니에서의 기도하심과 대사제에게 심문받으심을 기념합니다.
성삼일의 전례는 이미 말한 대로,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 신원은 그분이 십자가형을 선고 받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됩니다. 곧 그분의 신원이 당신이 죽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두 가지로 제시됩니다. 곧 신원을 묻는 대사제 가야파와 유다 총독 빌라도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 의해 결정됩니다. 곧 자신의 신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자신의 죽음을 몰고 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신원이 몰고 온 종교적 신성모독죄와 “임금”이라는 신원이 몰고 온 정치적 국가반역죄입니다. 그 중에 목요일 밤에 최고의화 앞에서 대사제 가야파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명령하오.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서 맹세를 하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인지 밝히시오.’” 예수님께서 대사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 26,63-64)
그리고 금요일에 유다 총독 관저 문 앞에서 빌라도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이 유다인의 임금이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마태 27,11)
여기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는 말은 아람어로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구세로서의 자신의 직무와 지신의 본연을 과감하게 밝히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직무와 본연을 어떻게 드러내시는가? 곧 어떤 메시아이고 어떤 임금인지를 드러내시는가?
사실, 그리스도 상은 많이 있습니다. 만물과 왕홀을 쥐고 있는 위대하고 웅장한 전능자의 상이 있고, 양을 어깨에 메고 있는 착한 목자 상도 있고,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이나 치유자인 의사의 상도 있고, 동반자인 신랑이나 벗의 상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시는가?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습니다.”(요한 13,3-4)
이는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쟝 바니어의 표현을 빌면, 당혹스런 쇼크요 스캔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노예들, 그것도 이방인 노예나 하는 비천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일은 하필이면 더는 노예살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에 대한 환희로 부풀어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는 이 저녁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는 쇼크요 스캔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섬김을 받아야 할 분이 섬기신 까닭입니다. 영광스럽고 드높으신 분이 권위도 없이 천박하게 겉옷을 벗어 재끼고, 낮아지고 비천해지고, “종”으로 자신의 본연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발 씻김 받기를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의 ‘발 씻김’ 안에는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그 무엇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몫’에 대한 비밀입니다. 여기에, ‘발 씻김’의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발 씻김’은 단지 섬김의 본보기를 넘어서, 무릇 참된 생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성사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섬김’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무한한 행위요, 동시에 죄를 씻어주는 용서와 구원의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반투완 추기경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성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섬김’은 자신을 내어주는 성체가 됩니다. 성체인 이 섬김으로 우리의 죄가 씻겨 지고, 다른 사람의 죄를 씻어주게 됩니다. ‘섬김’은 이렇게 구원의 성체가 됩니다. 곧 ‘섬김’은 성체성사가 현실 속에 실현되는 구체적인 형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이러한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몫’을 나누어 가지게 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유산을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결국, 예수님과 함께 구원사업의 ‘몫’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곧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먼저’ 주님의 섬김을 받은 자라야, 받은 바로 그 섬김, 그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칼 라너가 가리킨 대로, ‘하느님의 자기 전달, 자기 양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결국, ‘섬김’은 예수님을 내어주는 성체가 되고, 동시에 신적인 무한한 사랑의 행위가 됩니다. 동시에 죄를 씻어주는 용서의 행위요, 구원의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성 베르나르도는 말합니다.
“발 씻김의 성사는 단순한 본보기가 아니라, 화해성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신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아니, 당신의 지극한 사랑으로 그들을 이미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요한 13,10)
이토록, 발을 씻는 일은 깨끗함을 완성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그러기에, 발을 씻는 일은 그 깨끗함의 완성을 가리키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곧 용서와 화해를 이루며, 진정한 파스카를 이룹니다.
오늘, 우리는 이 거룩한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히고 압도당합니다. 이 거룩한 섬김, 이 놀라운 ‘발 씻김’으로, ‘당신의 몫’을 건네받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전달하는 이 놀라운 감격의 성체성사요 화해성사인 ‘발 씻김’으로 하여 우리는 당신 생명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마침내 구원의 몫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주님의 ‘발 씻김의 섬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니, 지금도 나를 향한 주님의 섬김과 지지와 떠받들어줌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숨결이 아니면 지금도 나는 숨 쉴 수 없으며, 나를 향한 주님의 헌신과 봉사가 나를 지탱하는 원천이요 힘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이 고귀한 유산을 함께 나누고 전달해야 할 일입니다. 형제의 발을 씻어주며 섬기는 일이 바로 그 일이 될 것입니다. 아멘.
_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주님!
제 영혼을 씻어주소서.
당신 사랑을 입고 생명을 몫을 얻게 하소서.
섬김 받기보다 먼저 섬기게 하소서.
낮아져 높일 줄 알고 작아져 의탁할 줄을 알게 하소서.
쪼개지고 부수어져 내어주고 파스카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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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주님 만찬 성목요일, 탈출12,1-8.11-14 1코린11,23-26 요한13,1-1
하느님 참 좋은 사랑의 선물 셋
-예수님, 미사, 섬김-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제가 피정지도 때 가장 많이 신자분들에게 화두처럼 던지는 질문입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다가 선물이라 대답하지만 곧 이어 짐이라고 대답합니다. 사실 이상적으로보면 선물이지만 현실은 짐인 경우가 많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갈수록 삶의 짐은 점차 무거워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반갑고 고마운 구원의 초대 말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매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선물입니다.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 하느님을 사랑하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삶은 선물입니다. 사실 ‘사랑의 눈’만 열리면 모두가 곳곳에서 발견하는 하느님의 선물들입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경축하기 위해 곳곳에서 만개滿開하기 시작한 봄꽃들 역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오래전 막 봄이 시작되던 초봄에 써놓은 ‘봄 햇살 붓으로’란 시가 생각납니다.
-“오, 하느님
바야흐로 그림 그리기 시작하셨네
생명의 화판 대지에 부드러운 봄 햇살 붓으로
연한 초록색 물감 슬며시 칠하니
조용히 솟아나는 무수한 생명의 싹들
오, 하느님
당신의 화판 대지에 그림그리기 시작하셨네”-2007.3
이제 하느님의 봄 그림도 주님 파스카 성삼일과 더불어 거의 절정의 완성단계에 이른 듯 참 아름다운 연초록 배경의 봄꽃들 만개한 하느님의 선물 수도원 주변의 자연 경관입니다. 새벽에 인터넷에서 읽은 어느 시민이 올린 글도 저에겐 고무적인 선물이었습니다.
-“위기의 상황이 되니 어디가 문명국이고
어디가 야만국인지, 또 돈 제일주의 자본주의가
어떤 민낯을 지녔는지 깨우쳤다
대한민국이 전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문명국이자 민주주의 국가이자 선진국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나라, 축복받은 대한민국 또한 감사해야 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부터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됩니다. 일년 전례시기중 절정의 파스카의 성삼일 역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 묵상중 떠오른 강론 주제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참 좋은 사랑의 선물 셋을 꼽고 싶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예수님입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이십니다. 특히 파스카 성삼일을 통해 예수님의 진면목이 환히 드러납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우리 삶의 영원한 모델입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예수님을 사랑하여 따라 살아갈수록 예수님을 닮아 참 나의 실현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삶의 중심이요 의미요 목표요 방향입니다. 우리 삶의 빛이자 희망이요 기쁨이자 행복입니다. 영원한 삶의 열쇠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예수님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오늘 복음 서두에서 잘 드러납니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당대 만찬에 참석했던 제자들이나 오늘 만찬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여기 해당됩니다. 똑같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이 만찬 미사에 초대에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보다 더 좋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은 없습니다.
둘째는 사랑의 미사입니다.
파스카 축제의 미사 또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예수님의 참 좋은 선물이 이 거룩한 파스카의 축제, 미사입니다. 이제 영원히 예수님을 기억할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바로 오늘 제2독서 코린토 1서에 나오는 주님 만찬시 주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미사중 성찬전례시 나오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기억하며 거행하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참으로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탈출기의 파스카 축제는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됨을 봅니다. 가톨릭 교리서(1363)가 이를 명쾌하게 밝혀줍니다.
“성서적 의미의 기념은 과거의 사건들을 기억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을 전례적으로 기념할 때, 그 사건들은 어떤 방식으로 현재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해방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파스카를 기념할 때 마다 이집트 탈출 사건은 믿는 이들의 기억속에 현존하게 되고, 그 사건에 삶을 일치시키도록 한다.”
파스카의 축제를 현재화하여 우리 몸소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예수님을,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평화를 살게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니 얼마나 좋은 선물인지요. 참으로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변모시켜 주는 파스카 축제, 미사의 선물입니다.
셋째는 사랑의 섬김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이자 예수님의 선물이, 오늘 복음의 절정인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유언같은 행위입니다. 영원한 감동의 사랑이요 겸손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미천한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는 하느님이 도대체 세상 어느 종교에 있겠는지요. 자기 비움의 절정의 사랑입니다. 영원히 우리 가슴에 새겨질 사랑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랑, 섬김의 사랑의 모습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대로 예수님 섬김의 평생 삶을 요약합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부단한 회개를 일깨워 각성케 하는 겸손한 사랑의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이르시는 말씀은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이자 예수님의 유언같은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이신 내가 너희에게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참 감동적인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겸손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 가슴속에 평생 각인된 예수님의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지만 위의 셋, ‘1.사랑의 예수님, 2.사랑의 미사, 3.사랑의 섬김’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이 세 선물은 기념하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파스카의 신비를 현재화現在化하여 파스카의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니 어제의 일이 생각납니다. 어제 ‘세월의 지혜-교황 프란치스코와 친구들 공저-’라는 주문한 책을 받는 순간, ‘아, 지혜는 사랑이구나!’하는 깨달음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미사를, 섬김의 삶을 사랑할 때 말그대로 천상적 지혜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되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을 닮아 겸손한 섬김의 사랑 실천에 온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주님께 감사 제물 바치며,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시편116,12-13.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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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주님 만찬 성목요일>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13,1)
'사랑이신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당신 외아들 예수를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곧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오늘부터 성주간 중의 성주간인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됩니다.
교회 전례 안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파스카 성삼일의 첫째 날인 오늘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마지막 저녁만찬, 곧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성체성사의 재현인 '주님만찬미사'가 거행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을 본받아 신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발씻김 예식'을 거행하고, 이어서 성체를 수난감실로 옮겨 '밤샘 조배'를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합니다.
코로나19의 방해로 이 거룩한 전례를 신자들과 함께 할 수 없어 많이 아쉽고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먹히는 존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사가 바로 성체성사(미사)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 드려야 할 가장 큰 감사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13,15)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그러니 나도 너를 위해 죽읍시다!
그러니 나도 너에게 먹히는 존재가 됩시다!
그러니 나도 너의 발을 씻겨 줍시다!
그러니 나도 너를 사랑합시다!
이것이 지금,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를 살리는 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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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주님 만찬 성목요일
파스카 성삼일을 여는 주님 만찬 미사의 말씀은 사랑을 향합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더 큰 사랑해 쏟아주십니다. "끝까지!" 이 말씀 안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상에 머무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를 의미하기도 하고, 당신의 모든 사랑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내어 주신다는 의미기도 할 겁니다. 또 구원을 갈망하나 스스로 구원할 능력도 자격도 없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뜻도 될 겁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요한 13,5)
예수님께서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종이나 노예가 하는 일을 기꺼이 자원해서 하시는 겁니다. 발은 직립하는 인간 특성상 가장 아래에 있는 지체이고, 물리적으로 먼지와 흙과 땀으로 더럽혀지기 쉬운 부위기도 하지요. 그곳을 물로 깨끗이 씻고 수건으로 정성껏 닦아주시는 예수님 마음 안에는, "너의 가장 더럽고 약하고 낮은 부분을 내가 손수 닦아 주마" 하시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9).
체면 치레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건, 면목이 없어서건, 아니면 자존심 때문에 불편해서건 어떤 이유로든지 예수님의 정화의 손길을 거부하는 이는 구원의 열매를 나누어 받지 못합니다. 얼핏 "저는 괜찮으니 다른 사람이나..." 하며 예수님의 수고를 덜어드리는 예의로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 존재 안으로 더 깊이 들어오시려는 예수님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더럽고 민망하고 부끄러운 곳을 정화하고 치유하고 자유롭게 해주길 원하시는데 말입니다.
제1독서는 이집트 탈출의 결정적 사건이 될 열 번째 재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탈출 12,13).
하느님의 분부대로 이스라엘 백성 집에 발린 피는 그들을 구원할 표지가 됩니다.
그 피가 묻은 집은 죽음도 어떤 재앙도 비켜가리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시지요.
구약 이스라엘 백성을 살린 어린양의 피는 예수님께서 친히 어린양이 되시어 바치신 완전한 희생제사로 완성됩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얼굴이나 몸, 집에 피를 바르지는 않지만, 그 피의 표지는 지울 수 없을 만큼 확연히 존재에 새겨져 있습니다.
"너희는 깨끗하다"(요한 13,10).
복음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을 격려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자신을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부족하고 불결하고 비천한 죄인에 불과한 현실에 풀이 죽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이 깨끗함은 우리 스스로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정화하고 정결케 하며 거룩하게 합니다. 그분의 피는 온갖 죄악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힘이 우리를 거르고 지나가게 하는 표지입니다. 그 피가 곧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입은 이는 그 사랑이 존재에 묻고, 뼛속까지 스며들어 그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제2독서에서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울려퍼집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25).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가 취하도록 내어 주시며 반복해 이르십니다. 기억은 우리를 구원할 또 다른 표지입니다. 사랑의 순간이 영혼 깊숙이 상처처럼 각인된 이는 사랑의 기억이 건드려질 때마다 그 통증으로 나날이 전율하고 벅차오릅니다. 감출 수 없는 이 기억은 행함으로, 참여로, 연대로 물살처럼, 파도처럼 퍼져나갑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결국 이 표지는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사랑으로 구원된 우리는 사랑의 도구가 되도록 이끌립니다. 주님의 순결한 피로 구원되었고 사랑의 기억으로 타오르는 우리는 주님처럼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구원이 절실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주님의 사랑을 묻혀주고 스며들게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남기고 가신 사랑의 순환이고, "끝까지 사랑하신"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영과 진리 안에서 주님의 식탁에 참여해 그 사랑을 먹고 마시는 성목요일 만찬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으로 깨끗해진 우리 모두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이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오늘은 그 봉사자인 사제들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사제 형제들에게 남기는 권고말씀입니다.
"사제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품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거룩하시니 여러분도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 오, 극의 겸손이여. 오 겸손의 극치여! 우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이토록 겸손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시다니!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허분도 겸손해지십시오"(형제회에 보낸 편지, 23-28 참조).
사제들의 축일 함께 축하하며,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하느님의 겸손을 잊지 않고 성무봉사를 겸손을 다해 수행하는 거룩한 목자가 되시도록... 사제들도 출애급의 야훼 하느님처럼, 또 최후만찬의 예수님처럼, 애틋한 사랑으로 자기 양 떼를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어야 하니까요.
여러분에게 꼭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날은 언제인가요? 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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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만찬 성목요일]
탈출기 12,1-8.11-14
코린토1서 11,23-26
요한 13,1-15
우리를 향한 예수님 끝사랑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 세족례!
최후만찬 석상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유명한 세족례(洗足禮)를 거행하십니다.
유다인들의 전통 안에서 세족(洗足)은 종이 주인에게, 부인이 남편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행하던 것이었습니다.
만일 주인이 종의 발을, 남편이 부인의 발을, 아버지가 아들의 발을 씻어주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탄받아 마땅한 몰지각한 행위였습니다.
그런 배경에는 권력을 지닌 사람이나 가진 자들, 윗사람의 허영심과 과시욕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모든 것을 뒤집는 데 명수이신 분이십니다.
껄끄럽고 어색한 것을 못견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직도 허세와 명예욕으로 가득한 제자들과 오늘 우리에게 보란 듯이 강펀치 하나를 날리십니다.
아무리 말씀으로 가르치고 또 가르쳐도 못알아들었던 제자들과 오늘 우리들을 향해
온 몸으로 귀한 가르침을 건네시는 데, 그것이 바로 세족례였습니다.
최후의 만찬 중에 갑자기 식탁에서 일어나신 예수님께서는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허리를 굽혀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으십니다.
한명 한명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이윽고 베드로 사도 차례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뜻밖의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니 베드로 사도는 무척이나 당황했습니다.
머릿속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두번이나 완강히 거절합니다.
“주님,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요한 복음 13장 6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복음 13장 8절)라고 단언하십니다.
위 단언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세족을 거부한다는 것은 스승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푸시는 교회의 세례를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족례와 세례를 거부하면 스승과의 인연을 끊는 절교인 것입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그 존귀하고 순결한 손으로 하찮은 한 인간 존재의 더러워진 발을 씻어주시는 행위가 곧 세족례라는 것을 생각하니,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세족례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존재의 가치와 품위를 크게 높여주셨기에 깊은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또한 권력이나 권위는 군림이 아니라 섬김을 위한 도구임을 온 몸으로 알려주시니 또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세족례 앞에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지니고 있는 손톱만한 힘이나 권위를 그에 걸맞게 사용하고 있는지요?
혹시라도 일년 내내 섬김을 받다가 목요일 하루만 세족례를 거행하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표현이 또한 감사하고 은혜롭습니다.
당신은 곧 다가올 끔찍한 죽음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우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곧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랑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 끝사랑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 세족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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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 만찬 성 목요일]
탈출기 12,1-8.11-14
코린토1서 11,23-26
요한 13,1-15
진리는 회개의 씻음, 은총은 성사의 씻음을 의미한다
주님 만찬 성 목요일에 주님께서 사제직을 제정하시고 성체성사를 세우셨습니다.
다른 공관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은 성체성사를 발을 씻는 모습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성사를 통해서도 깨끗해지지 못한 제자가 있었는데 가리옷 유다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는데 가리옷 유다는 성사를 영하고도 더 악으로 기울었을까요?
다른 제자들처럼 목욕하지 않고 발만 씻으러 왔기 때문입니다.
「노트르담의 꼽추」, 「레미제라블」 등을 쓴 세계적 대문호인 빅토르 위고는 위기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부모는 각자가 애인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온전한 교육을 받고 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도 성장해서 부모를 따라 방탕하였습니다.
결혼하였지만, 이내 자신도 비밀 연애를 하였고 술도 많이 마셨습니다.
어느 날 세느강에서 딸 레오포르딘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심한 외도와 과음 등에 짓눌려 사는 비참한 엄마를 더 바라볼 수 없어서
삶의 의욕을 잃었다는 딸의 유서도 발견되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4자녀를 두었지만 이렇게 세 자녀가 일찍 죽고 한 자녀는 정신이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딸이 죽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말합니다.
이 사건을 “이것은 나를 향한 하느님의 심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 회개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교육부 장관도 역임하고 프랑스 국기인 ‘3색기’의 유공자로 지정됩니다.
그가 죽었을 때 프랑스는 함께 슬퍼하며 국장을 치렀습니다.
사람이 변하려면 누군가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오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그 물은 바로 당신의 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사는 그리스도의 피로 완성됩니다.
그러나 가리옷 유다는 그 피로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여자 주인공은 자신이 글만 모른다고 말만 하면 징역을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모른다는 것에 대해 창피당하는 것이 싫어서 유태인들을 죽이는 것들을
자신이 다 기록했다고 거짓말을 하여 20년 형을 받습니다.
세례-견진-성체성사는 바로 재판을 받는 자리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만들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마련된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모습이 바로 그 성사의 은총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함을 깨닫는 회개의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런 은총을 받아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가리옷 유다가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피는 지금의 자신을 죽일 준비가 된 이들에게만 효과를 발휘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언제 목욕을 했고, 또 유다는 왜 목욕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들을 목욕시켜 오신 중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셨는데, ‘진리’가 곧 ‘말씀’이고 그 효과는 ‘목욕’입니다.
목욕은 ‘회개의 세례’와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나간 뒤에 다른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고 말씀하셨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으로 제자들을 목욕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진리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신 피인 성령의 은총도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으로 목욕을 하지 않은 채 성사를 영할 때, 이것을 ‘모령성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가 그렇게 성체를 영한 것입니다.
지금 오랜 시간 성체를 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체에 갈급하고 어떤 분들은 영하지 않아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목욕하고 발만 씻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런 일이 계속된다면 왠지 발도 씻고 싶어 져야 정상일 것입니다.
성체에 배고프지 않으면 어쩌면 그동안 목욕도 안 하면서 발만 씻으며 살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성체는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려는 마음 없이 성체를 영하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리옷 유다처럼 자기를 살리려는 마음으로 성체를 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사는 그리스도를 내 안에 사시게 하려고
나를 죽일 준비가 된 이들에게만 유효한 은총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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