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의 그릇
이동아
빈손이 먼저 길 안다
쥐지 않는 손에서
처음 물결이 풀리고
끌어올리려던 모든 방향이
한 번에 꺾여 내린 자리
보이지 않던 길들이
발등 가까이
수평으로 열렸다
나는 허기 버린 것이 아니라
허기 쪽으로 한 걸음 더 기울어
길 찾는 몸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흐름이 된다
막힌 담은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 물러서고
흩어진 보폭들이
하나의 강으로 모일 때
기울어지던 몸은 마침내
건너는 자가 아니라
수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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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손의 강
쥐지 않자
길이 보였다
허기 속으로 들어가자
보폭들이 강이 되었고
나는 길이 아니라
수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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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흔히 손에 쥐어야 길이 생긴다고 믿는다. 더 움켜쥐고, 더 높이 끌어올리고, 더 분명한 방향을 먼저 확보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익숙한 해석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가장 비어 있는 손이 오히려 가장 깊은 그릇이 되고, 올리려던 모든 방향이 무너진 자리에서 비로소 보이지 않던 길들이 수평으로 열린다고 말한다.
이 시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더 깊은 반전을 만든다. 허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허기 속으로 들어가는 선택을 통해, 결핍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문이 된다. 그러자 길을 찾던 존재는 어느 순간 길 자체를 넘어선다. ‘나는 길이 아니라 / 흐름이 된다’는 대목에서, 주체는 더 이상 목적지를 향해 걷는 사람이 아니라 움직임 그 자체로 변한다.
이 시의 힘은 상승의 언어를 무너뜨리고 수평의 감각을 끝내 회복하는 데 있다. 담은 깨부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러서고, 흩어졌던 보폭은 하나의 강으로 모이며, 기울어지던 몸은 마침내 균형의 이름을 얻는다. 끝내 이 시는 한 사람이 길을 찾는 이야기로 남지 않는다. 존재 전체가 흐름으로 바뀌고, 흐름이 다시 수평이라는 질서로 안착하는 이동을 완성한다
허기가 존재를 바꾼다
이동아
빈손은
가장 깊은 그릇이다
쥐지 않는 손에서
흐름이 시작되고
올리려던 모든 방향이
무너진 자리
보이지 않던 길들이
수평으로 열린다
허기를 버린 것이 아니라
허기 속으로 들어가
나는
길이 아니라
흐름이 된다
막힌 담이 사라지고
모든 보폭이
하나의 강으로 모여
기울어지던 몸이
비로소
수평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