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격률은 불교인가?
조선 초기 “집권 사대부층은 유학을 지배 권력의 논리로 이용하여 그들의 손으로 사회와 정치를 발전시키고자 하면서도, 유학사상을 자신들의 삶의 격률(格率)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종친과 일부 귀족층은 불교를 통하여 현실세계의 안녕을 기원하고 내세를 보장받으려고 했을 뿐, 불교사상을 누구에게나 개방된 진정한 구원의 종교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시기에 김시습은 인간 존재와 사상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그는 사상과 종교의 본모습을 회복시키려고 했던 ‘위험한 사상가’였다.” - 심경, 김시습평전, 돌베개, 2003, p.4.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매일 불전에 기도하면서 나와 우리들의 재록과 장수를 기원하고 기원해줍니다. 우리 삶은 어떨까요. 불교의 목표인 해탈 열반이나 성불을 위해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 나를 지배하는 사상과 삶은 마음 비우기와 마음 닦기, 나누기를 실천하고 있을까요. 자신과 가족의 안녕과 복록을 기원하는 것을 탓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소망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삶에서 나의 마음을 닦고 있느냐일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봅니다. 그래서 호흡을 바라보라고 했을 것입니다. 엉뚱한 생각으로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는가 돌아봅니다. 불교를 믿고 기도한다면 불교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정치적으로는 진보와 보수가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오로지 부자 되기만을 위해 아파트 투자 열풍 같은 데만 몰두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순리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그립습니다. 탐욕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나 알고 그러한 삶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누구나 수긍합니다. 그러면서도 영원히 살 듯이 욕망을 채우려고 합니다. 안분지족과 자신의 힘에 따라 살아가는 수자신력(隨自信力)의 삶이 필요할 때인 것 같습니다.
바웃다넷 밴드에 오시는 바웃다시여, 오늘 하루도 해탈 열반의 마음을 채웁시다. 함이 없는 마음으로 윤회의 고리를 벗어납시다. 그리고 한편으로 자신을 살피며 공부합시다. 공부의 기쁨을 얻은 분들을 보면 참 고맙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모르고 살아가면 안 될 것입니다. 내 마음을 보면 현실에서 해야 할 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참된 바웃다의 길일 것입니다. 나를 비우고 나를 채우는 중도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불탄일이 다가옵니다. 붓다가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우리 모두 붓다라는 것을 일러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누구나 잘 압니다. 의례적인 불탄일 행사로 하루를 보낸다면야 어찌 복된 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내 삶의 격률은 나의 신앙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삶은 십선(十善)의 길이고 보시하는 길이며, 중도의 길이고 해탈 열반을 이루는 수행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멋진 하루이기를 기원합니다.
빠라미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