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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희 시인의 시조에서 우러나는 맛과 향기
박형동/ 시인, 평론가
1. 들어가며
이명희 시조시인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는 글을 장성문학 연간지에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나는 막막했다. 우선은 내가 감당할 만한 국문학적 식견과 글재주가 빈약한 때문이요, 둘째로는 이미 다른 분들에 대한 글을 많이 썼기 때문에 좀 쑥스러웠다.
이명희는 장성에서 태어났다. 2005년 『시조세계』를 통해 시조시인으로 등단하였고, 후에 『문학춘추』에서 재 등단하였다. 본회 부회장인 이명희는 전국적인 문학단체에서도 활발하게 문단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중견 작가다. 한국여성시조문학회 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호남시조시인협회 감사, 이사,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또한 광주문인협회의 시조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다.
2008년 대한민국 문예창작 우수작가상을 시작으로, 호남시조문예상(2013) 한국여성시조문학상(2017) 소파문학상(2019)을 수상한 것으로 보아 그의 창작활동과 작품성은 널리 인정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2006년 첫 시조집 『느낌표로 웃고 싶다』를 낸 후, 『주머니 속의 그리움』(2012) 『바람의 랩소디』(2021) 등 3권의 시조집을 냈다.
이명희는 순후한 얼굴에 눈가에 지는 미소가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러나 그는 예리하고 원리에 충실한 사고를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도 방정한 모양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그가 빚어내는 글의 솜씨를 살펴보자.
2. 언어 예술의 종갓집 맏며느리
종갓집 맏며느리는 특별하다. 영광이나 나주의 오래된 종갓집 이야기는 답답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준다. 불씨 하나를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종갓집 이야기는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생각, 참으로 쓸데없는 일로 인생을 허비한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그러나 실용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이상적이지도 못한 일을 자기의 생명만큼이나 소중한 사명으로 알고 불씨를 지켜온 이들의 이야기에서 어떤 위대한 정신을 보며, 동시에 내게는 나를 정신적으로 지탱해주는 심지 같은 것이 없음을 알고 문득 부끄러워진다.
종갓집에는 여느 집에서 볼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장맛이나 된장 맛은 더욱 그렇다. 우리는 텁텁하면서도 깊은 된장국을 좋아한다. 간장 맛은 맑고 담백하면서도 달콤함이 짠맛과 어우러지면서 내는 향긋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맛이며, 밥맛과 입맛을 자극한다. 즉 장맛과 된장 맛이 음식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요즘이야 주부들도 김치를 사다 먹는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채소와 양념을 잘 버무려 김치를 담그는 일은 하나의 예술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같은 재료, 같은 양, 같은 조건에서 담가도 담그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그래서 그것을 솜씨라고 말한다. 지금은 남녀평등, 또는 여성 우위의 시대가 되어버렸지만, 여인의 네 가지 향기는 맵시(부용/婦容), 솜씨(부공/婦工), 말씨(부언/婦言), 맘씨(부덕/婦德)라고 명심보감 초략본 부행편(婦行篇)에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세상에는 그중에서 솜씨가 제일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이명희의 시조에 있어서 내가 처음 발견한 것은 오래된 종갓집 며느리가 빚어내는 오래된 장맛과 같은 시어들이었다.
흐득흐득, 다문다문, 난분분한, 갈피갈피, 곤곤한, 눅어진, 산비알, 저녁답, 조붓한, 휘감치는, 에도는, 잘박대는, 얼부푸른, 홧홧하게, 자오록한, 가폴막, 넌출거려도, 뭉텅뭉텅, 가뭇대다 가뭇거리다, 휘적거린, 맵짜한, 사운대는, 헛헛하다, 꽃숭어리......
어떤가? 흔히 쓰고 들은 말들인가? 나는 부끄럽게도 이런 단어를 사용해본 적이 없다. 내 언어의 창고에는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명희 시인의 시조집 『바람의 랩소디』에서 내가 꺼내온 이 언어들은 그가 얼마나 언어 구사에 있어서 농익은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앞서 종갓집 이야기를 한 것은 바로 종갓집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들이 이명희 시인의 글창고에는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내가 1990년대에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카레이스키들을 만났는데, 거기서 놀란 것은 그들이 우리 말을 한국인보다 더 잘 보존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말에서 우리 말의 뿌리와 변천하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들이 무척이나 대견하고 고마웠다.
오늘날 한류가 세계를 쓰나미처럼 덮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큰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지만, 문화적으로 부끄러운 면이 더 많다. 언어만 보더라도 우리의 말과 글을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천대하고 있는가? 한자가 들어온 것은 우리 역사에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얼마나 많은 외국어를 쓰고 있는가? 외국어는 고급스럽고, 유식하게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말을 들을 때, 나는 그 뜻을 정확히 알아듣는 경우보다는 대충 눈치로 그런 뜻이겠거니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내국인만을 상대하는 상호까지도 외국어로 점철되어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살아가며 글을 쓰는 사람들의 언어도 외국어에 병들어 가고 있다.
그런데 이명희의 시조에서는 오히려 예스럽고 고풍스러우며 친정 뜨락에 서 있는 것처럼 정겨운 언어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우리 언어를 얼마나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명희 그는 진정한 우리말 시인인 것이다.
이명희는 이러한 숙성된 우리 언어를 버무리는 데 있어서도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글쓰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언어의 조합이다. 언어에는 궁합이 있다. 서로 어울려 예상을 뛰어넘는 변화를 일으키며 새롭고 오묘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이제 이명희는 앞서 사용한 시어들을 어떻게 다른 시어와 엮어놓았는가를 살펴보자
흐득흐득 떨어지며, 다문다문 꽃 핀 자리, 별빛도 난분분한, 갈피갈피 감춘 불씨, 곤곤한 갈증을 풀어, 어깻죽지 눅어진, 언덕 너머 산비알, 어스름 저녁답에, 조붓한 길을 낸다, 휘감치는 빈 가슴, 에도는 생의 여울목, 우수수 마음 털렸던, 잘박대는 그리움, 얼부푸른 나이테, 양 눈자위 홧홧하게, 꽃향기 자오록한, 가폴막 길, 넌출거려도, 일어서는 빛의 돌기, 뭉텅뭉텅 게워내는, 한참을 가뭇대다 가뭇거리다, 바람이 휘적거린, 맵짜한 바람, 사운대는 가슴으로, 꿈꾸는 듯 헛헛하다, 꽃무늬 얼룩진 속내, 서투른 덧칠을 한다, 바람의 현을 타며, 맥을 짚는 꽃숭어리, 곤곤함 뒤로 한 채
어떤가? 이만하면 언어의 마술이 아닌가? 이것이 이명희의 시조를 읽은 첫 번째 이유이다.
3. 이명희의 시에 벤 그리움의 빛깔과 향(香)
사태로다
사태로다
온천지 사태로다
무르녹아 물집 터진
여린 꽃잎 지천이니
이 일을
어찌할거나
난장 같은 이 봄날을 <낙화 전문>
이명희의 시는 꽃잎이 흐드러지게 흩날리는 봄날의 정경에서 시작한다. 봄날,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가? 인간은 사계절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네 계절은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봄에는 깨어나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데서 시작한다. 여름날은 무더위를 이겨내며 땀 흘려 일한다. 가을에는 땀의 결실을 거두며 겨울을 준비한다. 그리고 겨울엔 추위를 이겨내며 따뜻한 봄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계절은 시작도 끝도 없이 윤회하는 것이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봄은 시작이다. 봄은 모든 시작으로 통한다. 이명희의 시도 온 산과 들에 핀 꽃을 바라보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희의 봄은 너무 찬란해서 ‘사태’로 규정한다. 꽃잎은 바람에 날려 거리를 연분홍빛으로 물들인다. 이명희 같은 시인의 여리고 예리한 감성이 이를 어찌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의 심장은 나대고, 그는 탄성을 쏟아낸다.
물기 젖은 바람이 홀연히 스쳐 가면
그대도 나처럼 뒤척인 적이 있었을까
불현듯 나를 찾아와 눈부시게 빛나는 너
사운대는 가슴으로 몸살을 앓았었던
떠났던 날을 위한 검붉은 생채기들
먼발치 그리운 사람 꽃으로 와 묻는 안부
터질 듯 툭 터질 듯 뜨거웠던 그 한 시절
잊었다 생각했는데 꽃이 된 사랑이었나
심장아, 나대지 마라 꿈꾸는 듯 헛헛하다 <명자꽃 아래서 전문>
그런데 기실 그 화려한 봄은 작년에도 그 작년에도 있었던 봄이다. 이제는 늙어 칠순을 바라보기까지 수없이 그런 봄을 지나온 것이다. 그래서 봄이 되면 지나온 봄이 그리워지고, 젊었던 시절, 가슴 뜨겁게 사랑하면서 살았던 봄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희의 봄은 명자꽃이다. 명자꽃은 봄에 피는 꽃 중에서 가장 붉은 꽃이다. 가장 붉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가장 사무치게 그립도록 살아온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이명희 시인에게 있어서 명자꽃은 무엇일까? ‘불현듯 나를 찾아와 눈부시게 빛나는 너’가 있다. ‘너’가 떠나던 날 나는 ‘사운대는 가슴으로 몸살을 앓았고 검붉은 생채기를 남겼고 그 생채기는 그리운 사람꽃이 되어. 그의 안부를 묻는’ 것이다. 너를 ‘잊었다,’ ‘잊었다’ 했지만, 어느새 너는 ‘나의 꽃’이 되어 있었다. 꽃 중에서 가장 붉은 명자꽃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의 시들은 이제 그리움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가슴에
꽃으로 남고 싶어
아득해 멀기만 한 사람
기다리고 있는 걸까
가만히
두어도 아프다
고개 숙인 저 묵시 <석류꽃 전문>
시인의 그리움은 끝이 없다. 그래서 누군가의 가슴에 달려가 안기고 싶다. 그러나 그 누군가는 결코 누군가가 아닐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 마음속에 아직도 고고하게 남아있는 그 어떤 이상적 존재일 것이다. 현실에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어떤 존재, 그런 존재이기에 그는 그 그리움을 가만히 두어도 아프다. 석류꽃을 보라. 피를 흘리는 것처럼 붉게 피다가 그 열매의 겉과 속마저 빨갛게 물들어 감당하지 못할 그리움으로 가슴이 미어터지고 만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그리움을 품은 것까지도 불경스럽게 생각한다. 그리움 자체가 부끄러움이 되어 돌아온다. 그래서 그는 가장 기품이 있어 보이는 능소화를 빌려 그 부끄러움을 그려낸다.
하늘을 바라봄도
죄가 될까 두려운
눈뜰 수
없는 아픔
폭양 속 넌출거려도
살아선
지울 수 없어라
가슴에 찍힌 사랑의 화인 <능소화 연정 전문>
이와 같음에도 시인을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리움을 찾아 떠나고자 한다. 목적지도 없다. 딱히 찾아갈 대상도 없다. 가서 할 말도 없다. 그래도 시인은 떠나야만 한다. 지금 이 자리는 그리움으로 견딜 수 없으니 어디론지 가야한 한다. 앉아 있는 밑자리가 너무 뜨거워(사실은 가슴이 뜨거운 것이지만) 역맛살이 낀 사람처럼 이 자리를 떠나야만 한다.
불현듯
떠나고 싶다
울컥 보고 싶다
아무런 까닭 없는데
할 말도 딱히 없는데
뼛속을
파고드는 그리움
거스를 수가 없다 <있다, 그런 날 전문>
시인의 그리움의 농도는 그렇게 짙었다. 명자꽃처럼 붉었고, 석류꽃이 맺은 열매처럼 가슴까지 쪼개어 그 맑고 붉은 즙은 내보이며 어디론가 떠나야 했다. 그곳이 어떤 곳일까? 도연명이 그리던 무릉도원은 아니다. 거기엔 임이 기다리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어디인가? 모르긴 하지만 나는 그곳을 마음껏 시를 쓸 수 있는 동산이라 생각한다. 그는 그곳에서 목을 터놓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명희 시인이 속울 터놓고 살아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4. 피안의 세계로 넘어가는 고갯길
사람은 몸을 담고 살아가는 세상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정신은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살아간다. 현실과 이상의 세계를 수없이 왔다 가면서 세상이 보다 바람직한 세상으로 바뀌어 가길 바란다. 그러나 세상은 모순 천지이며 바람직한 사회로의 변화에 대한 반동 세력이 눈을 부릅뜨고 칼날을 휘두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순진한 사람들이 투사가 되고 열사가 되어 반동세력에 맞서 싸우게 된다. 그러다가 그들은 5월의 핏빛 꽃잎이 되어 거리에 흩날리게 된다. 시인을 그 장면을 바라보며 피를 토한다.
도대체
어디서 길어 올린 것일까
닿지도 멎지도 못해
돌아가지도 못한
내 미처
거두지 못해
붉게 타는 저 핏빛 <눈물 전문>
한 번쯤 흔들려도
흔들려도 좋으련만
다문다문 꽃 핀 자리
끓어오르는 피에 놀라
안으로 장막을 치는
사람아
사람아 <봄밤 전문>
두 편의 시는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하여 피를 흘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쓴 시가 아닐까 한다. 시인은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면서도 그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부끄러워한다. ‘내가 미처 거두지 못해 붉게 타는 저 핏빛’이라고 안타까워하면서 ‘다문다문 꽃 핀 자리에서 끓어오르는 피에 놀란’다. 그리고 슬프게도 안으로 장막을 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본다.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봄날 밤에......
흠이 많아
슬픈 나를
드러낼 수 없어서
슬픈 척할 수 없어
웃는 척 웃기만 하다
그 꼴이
안쓰러워서
허허 웃는 탈바가지 <각시탈 전문>
결국 시인은 탈을 쓰고 살아야 했다. 시인뿐만이 아니라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약자들은 탈을 쓰고 살아야 했다. 자기 얼굴과 다른 탈을 쓰고 자기와 다른 몸짓을 하며 살아야 했다. 그것이 자기를 보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었다. 역사의 현장에서 역사를 만들어간 우리들이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을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
아뜩한 수렁 같은
깊게 패어 골진 상처
곤두박힌 우렛소리 어르고 달래가며
제 살점
잘게 뜯어서
틈을 메우는 불꽃 <용접 전문>
몇몇 사람들은 제 살점을 잘게 뜯어서 틈을 메우는 불꽃으로 살아갔다. 그리고 시인을 그것을 바라보며 시인은 역사의 증인으로 그 사실을 시로써 남기고 있다. 역사가는 역사를 사서(史書)에 기록하지만, 시인은 시문(詩文)으로 남겨야 하기에.
뼈마저 덜컥덜컥 녹아내린 몰골들이
되새김할 날 있을까 기다리고 있었네
명료함 추구하였던 지난날의 자화상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팍팍했던 순간들
작고 하얀 소망들 가난해서 접은 꿈들
빛바랜 일기장 속에 문신처럼 새겨 있네
망망대해 표류했던 마음 하나 못 붙잡고
이뤄낸 것 하나 없이 화살처럼 보낸 세월
오늘밤 일기장에는 무엇이라 변명할까 <오래된 일기장 전문>
이제 시인은 자신을 돌아본다. 살아온 길을 돌아볼 때 어찌 떳떳하기만 할까? 더구나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봄에 있어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내밀한 부분의 마음 먹음까지도 살펴볼진대 어찌 후회됨이 없겠는가? 시인은 일기를 빠짐없이 써왔던 모양이다. 그것은 시인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신을 정갈하게 하면서 내일을 바라보는 수단이며 길이었다. 일기는 그의 스승이었고, 그의 좌표였다. 그중에서도 오래된 일기를 들여다봄은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자기 성찰의 방법이라 할 것이다.
온몸에 들이치는 바람벽 너머 한기
삶의 뒤안길을 오점만 가득 남긴 채
어쩌다 이 지점까지 오고야 말았을까
온갖 시련 가슴에 얼룩처럼 새기며
아프다고 울고 불며 원망을 일을 삼아
모가 난 돌멩이처럼 뾰족뾰족 살았을까
은혜하고 사랑하며 온유하게 살고 싶었던
말문을 닫아 놓은 염원은 꿈이었나
일제히 돋아난 가시 온 살갗을 찌른다 <후회 전문>
자신의 일기를 들여다보았을 때 그는 자기의 삶에서 가장 크게 후회되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뾰족함 때문에 아픔을 당했던 이들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자기의 성품 때문에 이웃이 아픔을 당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후회하는 것이다. 세상에 누군들 그러지 않았을까? 그런데 시인이 그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시인의 성격상 뾰족함이 남보다 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여리고 착했음일 터, 우리는 이 시 앞에서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5. 이명희 시조에 대한 평가
문학평론가 김우연은 “이명희 시인은 수준 높은 서정시를 구현하여 높은 시적 성취를 이룩했다. 어떤 소재라도 자신의 체험과 회상과 관련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내어 선명한 이미지로 표현한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특히 관념적인 내용까지도 객관적 상관물을 사용하여 시각적, 청각적, 공감각적 이미지 등을 자유자재로 적절하게 사용하는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시조에 대한 투철한 창작관과 그동안 노력을 해온 결과로 보인다. 파도처럼 움직이는 감정들을 관조하여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고 간결한 형식 속에서 비유와 상징을 통하려 시조의 특징인 절제, 압축, 응축미를 보여주었다. 솔직한 내면세계인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하면서도 종교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끊임없는 기도의 결과로 보인다. 세속적인 사랑과 종교적인 사랑의 본질이 어찌 다르겠는가. 다만 자신의 관점에서 상대를 배려하고 온유하며 용서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영혼임을 여러 편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부끄러운 감정마저 솔직하게 드러내어 더 큰 사랑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큰 감동울 주고 있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어줍잖은 한마디로 공자님 앞에 문자를 쓰고자 한다. 시조는 우리 민족 특유의 문학이다. 우리 말의 단어가 대개 2음절이나 3음절로 되어 있어서 여기에 조사를 붙이면 3음절이나 4음절이 된다, 이것을 바탕으로 3.4.3.4조의 시조 형식이 생겨난 것이다. 초, 중, 종 3장으로 이루어져 45자 정도의 시조가 만들어진다. 문제는 음보다. 음보의 길이는 읽는 시간적 등가성에 의해 음절이 6-8음절까지 길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한시인 5언, 7언은 한 자도 늘이거나 줄일 수 없다. 일본의 하이쿠도 비슷하다. 이에 비해 시조는 종장에서 3.5(~8).4.3의 변용이 가능하다.
사흘 와 계시다가 말없이 돌아가시는
아버님 모시 두루막 빛바랜 흰 자락이
웬일로 제 가슴속에 눈물로만 스밉니까 정완영의 <부자상>
이 시조에서 초 중장이 평이하게 흐르다가 종장인 “웬일로 제 가슴속에”에서 힘이 들어가다가 풀린다. 순간의 긴장과 이완을 주는 시조의 종장이 기막힌 장치가 시조의 맛과 멋을 더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체다.
이처럼 시조에는 보이지 않는 기승전결이 있다. 초장(기) 중장(승) 종장(전, 결)으로 되어 있는데, 눈에 보이는 형식은 3장이나 종장에 전과 결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초, 중장이 평이하게 흘러오다가 종장의 첫 음보에서 물굽이가 구비치는 것처럼 한 바퀴 감았다가 다시 풀어져 흐름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거둔다. 마치 민자 부채가 아닌 합죽선처럼 접었다 펴는 시원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장금철의 「옛 시조와 현대시조의 비교」 참조)
이명희의 시조에서도 그런 멋을 볼 수 있다면 그의 시조는 완벽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다.
여기까지 이명희 시인의 작품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행여 아둔한 눈으로 살피지 못했거나, 어리석은 말로 중언부언했는지 염려되지만, 이명희 시인의 넓은 헤아림에 기대어 용기를 내서 이 글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의 시와 삶이 지금의 연장선상에서 계속되면서 더 좋은 글을 산출해내리라 생각하며 ‘말없음표를 찍’는 한 편의 시를 펴놓는다.
세월 속 벌어진 틈
그리움에 사무친 날
마지막 파문 하나 고요를 건너뛴다
마침표
차마 못 찍고
말없음표 찍으며
<물수제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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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형동 선생님의 평론을 잘 읽었습니다. "이명희 그는 진정한 우리말 시인인 것이다"란 말부터가 공감이 갑니다. 작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니 작품이 더욱 살아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순간의 긴장과 이완을 주는 시조의 종장이 기막힌 장치가 시조의 맛과 멋을 더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체다."라는 말씀은 모든 시조시인들의 영원한 숙제일 것입니다.
좋은 시조에 좋은 평 잘 읽었습니다. 이명희 시인이 끊임없이 창작하시고, 시조 발전을 위해 애쓰신 노고를 돌아볼 때 '장성문학상'을 축하드리며, 더욱 큰 상을 수상하시리라 기다합니다.
이기철 교수가 주창하신 "인간주의 비평"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박형동 선생의 평이 널리 읽혀지기 기대합니다.
김우연 선생님도 좋은 평론을 해주셔서 저의 시조집 [바람의 랩소디]가 대박을 쳤지요.
지금도 달라는 사람들이 많은데 책이 없어 나눔을 못함이 못내 서운하답니다.
박형동선생님은 이곳에서 교직에서 퇴직하시고 교회장로님으로 덕망이 높으신 분이시랍니다.
어줍잖은 글을 두분 선생님께서 많이 빛내주심 감사함 입니다.~
박형동 선생님의 평론은 구체적으로 하여서 작품이 더욱 빛났습니다. 저와 박선생님이 언급하지 못한 작품들을 또 누군가
언급하기를 기대합니다.. <바람의 랩소디> 제목이 좋습니다...<나무 날다>도 원래 <나무의 꿈>이라고 했는데..김종 교수님이 '나무 날다'가 좋겠다고 하여제목을 바꾸었다고 합니다...제목은 얼굴입니다...<바람의 랩소디>는 신비한 힘이 있는 제목입니다. 출판사들에서도 알아줬으면...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한 것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녹아 있는 시집입니다. "똑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진다."라고 합니다. 이명희 선생께서 쓰신 <바람의 랩소디>는 온 정열과 영혼을 바쳐 쓴 시조집이라 느껴집니다.
이명희 시인이 제13회 장성문학상을 타셨나요? 축하합니다.
박동형 평론가의 비평 잘 감상합니다.
이명희 시인님, 제13회 장성문학상을
다시한번 축하 축하드립니다
박동형 평론가의 비평 잘 감상하였고요
김우현 평론가님의 바람의 랩소디 평론도 잘 감상하였습니다
축하드리고 덤성듬성 일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