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말씀 설교자 / 조한우 목사
아름다운 믿음/벧전 2:19-25
베드로전서는 그 당시에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고 있던 그리스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고 산다는 것은 단순하게 먹고 사는 것만 어렵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적인 어려움은 당연한 것이고 정신적인 피해, 문화적인 피해까지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지배를 당하는 나라에서는 선진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뉴라이트라는 단체가 생겨나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 덕분에 우리나라가 근대화를 이루고 잘 살게 되었다는 이상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배를 당하는 나라에서는 말할 수 없는 인권 유린과 함께 끊임없는 고통과 착취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더욱 더 억울한 것은 육체적인 수탈보다도 정신적인 수탈입니다.
그것이 바로 문화적인 침투예요.
문화라는 것은 인간들의 정신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육체적인 수탈만 당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수탈까지도 당했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방 우상제사와 퇴폐적인 음란 문화 같은 것들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에서 독립을 이룬 것이 벌써 60년이 넘었습니다마는 한민족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는 이제 거의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다 빼앗겨 버렸어요. 우리 스스로 우리 문화를 내다 버리기도 했고 말이죠.
그것이 문화적인 수탈입니다.
종교적으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이 얼마나 훼손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물량주의와 성장 지상주의 때문에 개인의 경건과 영성 훈련 같은 것들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버렸습니다.
세상 문화가 교회 안까지 깊숙이 들어와서는 순결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갉아 먹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당시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뿐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교훈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핍박에서도 꿋꿋하게 이겨내야 하지만 세상문화와 같은 달콤한 유혹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잘 지켜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들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존재들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2장 11절 말씀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옛날 가수 최희준씨였나요? 그 분의 노래에 이런 노래가 있었죠?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가는 길에
정이랑 두지 말자. 미련이랑 두지 말자….’
우리네 인생은 모두가 다 나그네들입니다.
한평생 여행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갈 나그네들이예요.
제가 지난달에 필리핀에 다녀왔는데요, 저희 일행들이 묵었던 숙소가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날씨는 더운데 에어컨은 시원찮아서 소리만 요란하지 하나도 시원하지 않았어요.
건물도 형편없어서 그런 집에서 몇 일을 지내야 한다는 것이 영 맘에 안 내키더라고요.
그런데 말이죠, 누구도 그 집을 뜯어 고치려고 하거나 에어컨을 새로 들여 놓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나 빼고는 모두 다 괜찮게 사시는 분들인데도 누구 하나 우리 숙소를 깨끗하게 수리를 하거나 여러 가지 살림살이를 장만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거기에다가 투자할 이유가 없었던 거겠죠?
우리는 나그네들이었거든요.
그저 며칠 동안 구경만 좀 하다가 다시 돌아갈 건데 뭐하러 비싼 돈 들여서 거기에 투자를 하겠어요? 절대로 그렇게 안 합니다.
며칠 있다가 비행기 타고 대한민국으로 돌아오면 그만이거든요.
우리들이 돌아갈 본향은 저 천국, 하나님 나라인 줄 믿습니다.
뭐 하러 이 세상에서 죽어라 고생하면서 살아요?
그저 며칠 구경하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그만인 걸 말이죠.
이 세상에 욕심 둘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다 나그네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우리들은 ‘행인’이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길을 지나가는 행인들이에요.
길을 지나가다 보면 별꼴을 다 봅니다.
우리 교회에서 출발해서 쭉 가다 보면 저기 강 건너 자양 마을에는 도로 공사가 한창입니다.
교회 앞에는 가게가 하나 있고, 식당이 하나가 있는데 삼거리 가게는 얼마나 장사가 잘 되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식당 집은 별로 장사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어느 날은 길 가다 보면 술 취한 사람들끼리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접촉사고가 나서 서로 삿대질을 하면서 고함을 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나 길가는 행인이 그걸 붙들고서 일일이 참견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무슨 도로공사 직원도 아닌데, 공사장 인부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습니까?
자기가 아무리 장사 수완이 좋다기로 서니 길가다가 말고 남의 가게에 들어가서 장사 좀 제대로 하라고 말해줄 수가 있어요?
길가다 말고 남의 싸움에 끼어들어서 그거 말리고 있겠습니까?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길 가는 행인은 그저 자기 목적지만 바라보고 끝까지 자기 갈길만 가면 그만이에요.
길가다가 무슨 일이 있든지 내 알 바가 아니란 말입니다.
엊그저께 국회의원선거가 있었는데요, 그날따라 비가 주룩 주룩 내리지 않았습니까?
어떤 할머니가 투표하러 가면서 그러시더라고요.
벼슬은 지들이 하는데 왜 우리가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투덜투덜 하시는 걸 보았는데, 선거는 국민의 의무이니까 하는 거죠.
그런데 ‘친박이다 명박이다. 한나라당이다 민주당이다.’
이런 거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잘못하면 다음엔 더 잘 하는 사람이 나와서 하겠죠.
그걸 무슨 ‘노사모’다 ‘박사모’다 해서 나이 한두 살 먹은 어린애들도 아니고 말이죠, 무슨 팬클럽을 만들 듯이 그러는데 그냥 지나가면서 구경이나 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연극할 때 보면 행인1, 행인2…그런 거 있잖아요?
우리들은 행인1, 행인2, 행인3… 그런 거예요.
사도 베드로는 말합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다 너나 할 것 없이 나그네와 행인들이오’
이것저것 참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힘들다고 죽는 소리 할 것도 없고요, 남들 사는 것 보고서 기죽을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다만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 전서 2장 9절 말씀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쩨쩨하게 살지 마세요.
어깨를 활짝 펴고 당당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신분에 걸 맞는 행동을 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잘 읽어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처신법이 나옵니다.
그리고 어떤 신앙이 참된 신앙인지, 어떤 신앙인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어떤 신앙이 아름다운 신앙입니까?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앙이 아름다운 신앙인 줄 믿습니다.
19절과 20절 말씀을 다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옛날 부모님들은 자식을 낳아도 열씩, 열둘씩 낳아서 길렀습니다.
그리고 모진 고생을 다하면서 자식들을 키웠거든요.
어떤 부모님들은 남편을 일찍 보내고 홀어머니가 되어서 어렵게, 어렵게 자식 수발을 하신 분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분들을 보면 옷 한 벌 사 입는 걸 못 봤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 한숨 편하게 자지도 못하고…
그러면서 자식 뒷바라지를 하셨어요.
그분들 말씀을 들어보면 오직 자식 생각밖엔 없습니다.
나 하나 고생하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식만 잘 된다면 눈이라도 뽑아서 주고 싶은 것이 부모님 마음이거든요.
하나님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a)
19절, 20절 말씀을 보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을 수가 있어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슬픈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당할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그것만큼 아름다운 신앙이 없다는 말씀입니다.(할렐루야!)
뉴스를 들어보니까 작년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2만불을 넘어섰다고 그럽니다.
실제로도 보면 우리 시골 같은 데나 그렇지 저 대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 보통 한 달 수입이 최하 300만원에서 웬만한 사람들은 500만원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들 맞벌이를 하잖아요?
물론 그 이상 버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사업하는 사람들이야 한 달에 천만 원도 더 벌겠죠?
그런데 어느 집을 막론하고 쪼들리지 않는 집이 없는 것 같아요.
아이들 학원비 과외비가 몇 백만 원씩 들어간 데요, 글쎄.
한 달 쌀값은 몇 푼 안 되는데, 핸드폰은 식구마다 다 가지고 있어서 핸드폰 요금만도 돈백만원 내는 집도 있답니다.
어떤 사람은 연봉이 일억이 넘는 사람인데 돈을 더 벌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자기가 어울리는 모임이 있는데, 거기서 자기가 제일 가난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죽어라고 일하고, 죽어라고 돈을 벌다가 결국 뭐예요?
그냥 죽는 겁니다.
한 달에 얼마를 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목사님, 목사님은 한 달에 돈 100만원도 안 되는 걸 가지고 아이들 둘 하고 어떻게 살아가세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돈 생각만 하면 돈이 한 달에 천만 원이 있어도 모자랄 겁니다. 저는 돈 생각은 잘 안합니다. 집사님도 그냥 하나님만 생각하세요!”
하나님만 생각하면 돈이 좀 없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만 생각하면 억울한 일을 좀 당해도 괜찮아요.
슬픔을 당해도 좋고 고통을 당해도 좋은 겁니다.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떻합니까?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떻합니까?
세상에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네.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떻합니까?”♬
두 번째, 어떤 신앙이 아름다운 신앙입니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신앙이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첫 번째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 지적(知的)인 모습이라면, 두 번째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은 정적(情的)인 모습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시103:3-5)
고난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은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거예요.
수도 없는 몰매를 맞고서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은 맷집이 좋아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심령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를 당하면서도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났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어떤 고난도 달게 받을 수 있는 거예요.
지난주에 단성 중학교에서 운영위원회가 있었습니다.
옛날 같으면 군의원이라도 나갈라치면 하다못해 학교 운영위원장 경력이라도 있어야 했거든요.
그러니까 학교운영위원장을 놓고서 서로 하려고 해서 보통 몇백만원씩 썼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젠 사람들이 약아져서 웬만하면 그런 짐들은 안 지려고 해요.
덕분에 교장 선생님의 권유로 제가 단성중학교 운영위원장을 맡고 말았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 짐을 지는 것이 좋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라면 달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이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런 고난을 달게 받아야 하는 이유인데요,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 믿기로 작정을 하고 결단을 하고나면 따라나서야 합니다.
의지적(意志的)인 결단이 있어야 되요.
여호수아 장군처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는 의지적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주님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름다운 신앙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신앙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입니다.
지, 정, 의 모든 면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