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1-3,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받을 수 있나
마태복음 5-7장은 산상보훈이라 말씀을 합니다. 4장에서는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5장에서는 가버나움 근처 어느 산에 올라 예수님의 나라에 영원한 법, 천국시민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설교하신 말씀입니다. 산상보훈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몇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산상보훈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중생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산상보훈은 거듭난자의 윤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의 윤리인 것입니다.
둘째는 산상보훈은 예수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설교는 메시야만이 하실 수 있는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산상보훈에는 성도가 받을 상이 있습니다. 넷째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릴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5장에서의 복은 복의 일부가 아니라 그 복 자체이며 그리고 영적이며 현세에서도 누릴 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했지만 완성되지는 않았고 그럼에도 성도가 현세에 누리고 있는 복이기도 합니다.
이제 1절부터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서 예수님은 많은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무리와 제자들이 그의 앞으로 나아온지라 말씀합니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법을 말씀하실 때 왜 산을 택하셨을까요? ‘산’‘오로스’는 ‘일어나다’의 뜻이 있는 ‘오로’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며 낮은 언덕으로 보여집니다. 마태는 왜 굳이 언덕이라 하지 않고 산으로 언급을 했을까? 아마도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이 시내산임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별된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을 받은 산이 시내산이라면 이제 영원한 하늘나라 백성이 지켜야할 영원한 법도 같은 맥락에서 기록했으라 보여 집니다. 시내산에서는 천사들을 통하여 주셨지만(히2:2)신약시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듣는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이 있는자 들입니다.
그 예수님에게 많은 ‘무리’‘투스 오클루스’그리고 ‘제자’‘마데테스’들이 나왔다고 말씀합니다. 왜 마태는 이렇게 무리와 제자를 분리했을까요? 아마도 기적을 보려고 구경삼아 나온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설교를 하셨습니다. 오늘 수 많은 회중이 모이는 교회에도 진정으로 말씀을 듣고 깨달아 하늘나라 백성으로 살려고 주 앞에 나오기보다 그냥 자신의 다른목적이 있어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보여 집니다. 아무튼 마태는 무리와 제자를 따로이 언급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허락되지 않으나 제자에게는 천국비밀을 풀어 가르칩니다. 무리에게는 구원이 상관이 없으나 제자에게는 영생 구원이 주어집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8:31)우리 모두는 무리가 아니라 제자들속에 속하기를 바랍니다.
3절입니다.
그들을 향해 하신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여기서 ‘심령’은 ‘프뉴마티’로 ‘프뉴마’는 관사가 붙으면 성령을 의미하고 안 붙으면 사람의 ‘영’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관사가 붙은 여격으로 어떤 관계로 보느냐가 해석이 달라집니다. 킹제임스번역은 영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 했습니다. 영어로도 spirit 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것은 영을 살리러 왔다, 육은 무익하다,(요6:63)하셨습니다. 그런데 영이냐, 육이냐나눌것은 없다고 생각이 들어 집니다. 실제로 부자 보다는 가난한 자가 주님께 더 관심이 많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이 주앞에 나왔을 때 너 있는 것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날 따르라 했을 때 그 청년은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야고보 사도의 권고를 보면 더 분명한데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약2:5), 이사야 선지자도 예언한 것을 보면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61:1)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 ‘포토코이’를 보겠습니다. ‘포토코이’는 ‘웅크리다’라는 ‘프톳소’에서 유래 되었는데 이 단어는 궁핍함보다 더 강한 절대 빈곤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말하는 성경은 부자와 나사로에서 나사로를 의미합니다. 또는 두 렙돈이 그의 가진 전부인데 다 집어 넣은 빈털터리의 과부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 단어가 지금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우리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좋아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처음부터 택하신 자녀들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디에 그러합니까? 창1장에서 사람을 만드시고 하신 말씀이 복을 주시는 일이었습니다.(창1:28), 같은 이치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복을 선포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3절은 가르치심이라기보다 선언하심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복하기를 진정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받는데에는 조건이 있다 하십니다. 그 조건이 심령이 가난한자가 되어야 한다 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영적인 일에 무관심하거나 부족한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마음이 부하고 교만한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앞에서 영적으로 파산되어 하나님의 의와 거룩이 무엇인지 알고 자기 자신은 죄악으로 부패하여진 더러워진 존재임을 보고 하나님앞에 나아갈수 없는 존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상속된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얻어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얻는 것을 말씀을 하십니다. 이 일, 예수를 소유하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일입니다.
3절이 주시는 교훈은 우리 자신 스스로가 이룰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깊이 인식한 자들에게 산상보훈은 들려지게 됩니다. 구약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율법을 온전히 다 지킬수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모세가 십계명 받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산 아래서는 금송아지 만들고 춤추며 먹고 마시며 하나님대신 섬기며 노래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되는 십계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온전히 지킬수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 깨달음으로 하나님앞에 겸손히 나아와서 죄를 자복하고 희생의 제물을 바칠 때 용서를 하시고 자신의 의를 내세워 자랑하고 불순종하면 율법의 기준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주의 깊게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종교행위를 향해 위선자라, 회칠한 무덤이라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말씀도 하셨는데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5:20)말씀을 했습니다. 그리고 뒤로 가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하셨습니다. 무엇을 느낄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계명은 다 지킬수 없고 지키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씀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앞에서 의롭다고 인정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것이라고’롬3:19-20. 그러하니 우리는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 율법이 이제 우리를 심판하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땅에 인간들로는 구원을 얻을 육체가 하나도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왜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육체는 오직 한분 예수그리스도 뿐이니까요,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는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그리고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쳐진 이들이율법을 성취한자들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이들에게 예수의 생명이 없는 이들에게 산상보훈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눈멀고 귀먹은 불쌍한 자들로 마치 베어낸 나무가 물을 만나면 더 빨리 썩듯이 더 불행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실상 이 따라다니던 무리들이 빌라도의 재판석에서 예수를 죽이고 바라바는 살려 주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둠은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한번 점검해 봅니다. 말씀이 믿어 지시나요, 믿는 자에게 일어나는 것은 나는 죄인이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주앞에 나와서 죄의 자백을 합니다. 누구처럼, 세리처럼요, 그럴때 예수님의 생명이 그속에 비추어지고 생수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내의로는 하나님을 뵈올수 없다는 사실을요...
두 번째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바로 무엇을 채우기 전에 비우라고 하십니다. 영적인 복을 받으려면 영적으로 가난해져야 합니다. 즉 비워야하는 것입니다. 물병에 물이 가득하면 새 물을 부을 수 없습니다. 다 버리면 새물을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눅2장에서 요셉과 마리아에게 한 말속에도 들어 있는데요,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하며’ 패하고 난 후 흥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얻기 전에 옛 사람의 모든 것을 씻어내는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나올 때 빈 그릇을 준비하고 나오세요, 그 그릇에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채우시고 권능으로 입히실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리스도인이 될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세 번째는 ~ 하나님을 만나야 비우고 채울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안에서 만나야 합니다. 만난 사람은 이사야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화로다 나로 망하게 되었도다’사6:5, 내가하고 있는 믿음 생활로 나의 의가 들어나고 남보다 나를 낫게 여긴다면 그것은 마귀로부터 온것이라 생각하셔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온 생각은 자신은 작고 보잘것 없으며 아니면 자신의 존재는 잊고 내 안에 계시는 예수만 보이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진정으로 복을 누리기 원하신다면 그리스도를 만나자는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무엇을 소유하기 위해 인생을 보내는 것은 짝퉁복입니다. 이 땅에서의 복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복은 내인생이 끝나는 날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하여 투자해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예수의 마음이니”빌2:5, 매일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베풀어 주신 은총을 감사하는 참 된 행복을 누리시는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