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신인문학상 응모작품
명왕성 외 4편
-134310-
강수정
2006년, 나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
작고 희미한 존재
뻥 터진 팝콘 무리에서 갇혀버린 부스러기 한 톨
지옥의 세계가 이렇게 어둡고 외로울까
친구가 필요해
카론, 나와 함께 궤도에 오르자
함께 밤하늘을 꿰뚫어 보자
러시안 블루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
그 수평선 너머 침묵하는 작은 나를 찾아 주세요
134310
보홀의 바닷속에 숨겨둔 안경원숭이를 찾아가세요
심장보다 더 큰 눈으로 태양을 찾아 줄게요
스틱스, 하이드라, 케르베로스
두 손 가득 달빛을 모아 내 검은 얼굴을 닦아내고
반딧불이 되어 당신을 향해 다가갑니다
궤도는 불균형, 혹독한 겨울의 땅
이탈된 낙오자는 우주를 떠돌고
어츨해진 심장은 유성우로 쏟아집니다
당신은 나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매년 여름이면 수만 그루의 꽃을 피울 겁니다
키 작은 해바라기로
밤하늘은 샛노랗게 물들겠지요
어린이날
아이가 우네
꽃무늬 실크 블라우스에 멜빵 치마를 입은 삐삐처럼
마른 여자아이가 소리 없이 울음을 삼키네
칭얼대는 고양이 마냥 앵앵거리는 TV 소리는 들리지 않고
어린 조카가 갖고 노는 커다란 코끼리 인형에 시선을 맞추고 있네
흰 페인트를 가득 묻힌 아버지의 기름진 머리에는 초라한
홀애비의 고독이 떨어지네
암으로 유배 갔던 엄마가 돌아오던 날
개마고원보다 먼 그곳
시든 감자처럼 말라버린, 푸른 싹조차 나지 않는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국제시장에서 구해온 뽀글이 가발을 꺼내놓으시네
돼지털보다 굵고 억센 머릿결
흐느적거리는 마른 손가락을 넣어 매무새를 가다듬었지
힘겹게 찾아온 엄마의 마음도 모른 채 설운 마음에 쏟아지는 아이의 푸념, 원망, 그리움
기념사진 속 아이의 꽉 쥔 주먹과
흐릿한 엄마의 미소가 물먹은 별처럼 반짝였던
어린이날 오후
그해 5월
현관문을 열자 집안은 온통 사막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사라졌다
문을 열면 함박꽃처럼 웃어주던 그녀의 얼굴
함박꽃은 작약의 꽃이라는데
그 때문인지 그녀는 5월을 닮았다
이른 더위에 낮에는 얼음으로 심장을 녹였고
밤에는 거위털 이불을 꺼내 몸을 데웠다
5월은 그녀의 변덕을 닮았다
수만 번 사랑을 확인하고
또 수천 번 그 사랑에 힘겨워했다
냉장실엔 짓무른 야채들이 줄줄이 울기 시작했고
먹다 남은 생일 케이크가 냉동실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주인을 잃은 고양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고
묵언수행을 떠나듯 모래 위를 배회했다
한 움큼씩 흩뿌려지는 모래 알갱이들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우주 속으로 흩어져 버린
수억 광년의 어느 별빛처럼
어느새 가시 돋친 선인장이 내 몸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귀뚜라미
가을이 문을 두드린다
한 쌍의 겹눈과 세 개의 홑눈으로
누구를 찾아왔을까
거무튀튀한 몸뚱이에 더듬이마저 길게 뻗은 모습이
음습한 지하실 좁은 벽 틈 냄새가 난다
콘크리트로 탑을 세운 최고층 이곳
통창 가득 해바라기에 나른해진 20평 남짓
거실에 걸치고 간 달맞이꽃 옷고름을 풀어 헤친다
국화 꽃잎 두어 장도 함께
한 발 한발 계단을 밟아 온 것처럼
차오른 달의 기운에 밤하늘이 푸르러지면
달맞이꽃 속 숨죽여 울던 가을의 노래
귀뚜르르 뚜르르르 귀뚜르르르
달밤에 취했나, 꽃술이 뿜어낸 이슬에 취했나
힘껏 날개를 비벼댄다
불면의 전도사 골드베르크였을까
아리아를 시작으로 황홀했던 연주가 끝나갈 즈음
어디선가 나타난 포식자의 발톱
짓이겨진 날개는 하루살이처럼 흩어지고
찢어진 폐부는 송곳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음습한 지하실 좁은 벽 틈에 갇힌 채
모차르트의 레퀴엠, 입당송이 울려 퍼진다
영원한 안식을 내게 주소서
봄, 소란
조용하던 동네가 소란하다
몰래 사랑이라도 나누었나
무더기 봄을 작은 연못에 쏟아부었네
개굴개굴 요란한 산통에
솜털 가시 외투마저 벗어 던지고픈
하이얀 목련, 목련
강수정 당선소감
당선 소감
강수정
어릴 적 별이 너무 좋아 밖에서 잠을 잔 적이 있습니다. 자다가 눈을 뜨면 밤하늘 의 은하수를 볼 수 있다는 게 어린 마음에도 꽤 낭만적이라 생각한 것일까요? 저 멀리 바다가 슬쩍슬쩍 보였던 언니의 3층 옥탑방. 10살 터울 언니의 방에 꽂혀 있었던 수많은 책이 뿜어낸 알싸한 냄새들... 김종삼의 「성탄제」, 황동규의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월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 등등 책 제목을 읽고 외우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짧았던 아이의 추억들이 유성우가 되어 떠다닙니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나무 침대를 밖으로 끌어내어 잠을 청했던 두 자매. 물론 모기 때문에 끝까지 잤는지 어땠는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그 시절 별을 동경했었던 그 순수함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요?
저의 전공은 일문학입니다. 근대문학 소설전공으로 작품을 통해 작가와의 연결고리를 찾고 분석하는 연구를 했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학문으로서의 문학이 아닌 예술로서 시를 창작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감히 신성한 시의 제단에 작은 발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문장임에도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기회를 주신 애지의 반경환 주간님을 비롯한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막연히 시를 좋아하는 독자로만 있던 저에게 창작의 용기를 일깨워주신 나태주 시인님, 그리고 함께 문학활동을 하는 ‘풀꽃시문학’와 ‘금강여성문학’의 문우님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지금도 저의 머리맡에서 잠을 청하며 무궁무진한 시적 영감을 주는 12살 도도, 소심쟁이 라떼, 막내 양갱이와도 이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남산길에서 저의 구두끈을 등 구부려 매어주던 따뜻한 사람, 지금은 인생과 문학의 동반자로 함께 하는 남편에게도 사랑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제 어릴 적 잃어버렸던 별을, 은하수를 다시 찾아볼 요량입니다.
강수정
약력
경남 삼천포 출생
전 동국대, 경기대 등 시간강사(일문학전공)
풀꽃시문학회 및 금강여성문학회 회원
첫댓글 강수정 선생님 신인 등단을 축하합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시로 애지를 빛내주시고
한국문단을 이끌어주실 것을 믿어요.
시가 단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