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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산소
히11:8-12...하늘의 유업은 믿음으로..얻습니다.
오늘 말씀은 믿음장에서 세 번째 단락입니다. 여기서는 족장시대의 믿음의 선진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8-12절까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심을 받아 약속의 땅으로 간것부터 시작하여 후사가 없는 중에도 약속을 믿어 이삭, 야곱과 함께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8절을 보면 믿음으로써만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창12: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네가 가겠느냐 하고 물으신 것이 아니라 ‘가라’하고 명령하셨음을 볼수가 있습니다. 이와같은 부르심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을 때에 아브라함은 조건 없는 순종이었습니다. 창12:4절에서 “이에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순종’이란 단어는 ‘휘페쿠센’은 ‘휘파쿠오’의 부정 과거입니다. ‘휘파쿠오’는 ‘~ 아래서’라는 전치사 ‘휘포’와 ‘듣다’라는 의미의 동사‘아쿠오’와 합성어로 ‘~아래서 듣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모습은 어떤 그림을 그릴수 있을까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태도입니다. ‘순종’이란 단어가 부정 과거 능동태로 쓰였는데 능동태는 자발성을, 부정과거는 단호함을 나타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아브라함은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저함 없이 단호하게 행동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칼루메노스’와 ‘순종’이란 부정 과거 ‘휘페쿠센’의 관계에서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헬라어는 부정과거 동사와 현재 분사가 함께 쓰일 경우‘~ 하자마자’ ‘~바로 했다’ 또는 ‘~할 바로 그때에 ~했다’ 라는 즉각성의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 능동적으로 주저함 없 즉각적으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을까? 히브리서를 쓴 저자는 믿음 때문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믿음, 그의 인생길을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으로 자신의 인생을 맡겨도 안전하다는 믿음을 지닌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을 것입니다.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이 말씀은 15:7에서 하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처음에는 모르고 무조건 명령에 순종하여 가보니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장래...받을 땅에’‘에멜렌 람바네인’은 ‘장차 받게 될’의미로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에는 기업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또 ‘기업’ ‘클레로노미안’의 원형 ‘클레로노미아’는 본래 ‘제비뽑기’또는 ‘제비뽑기에 의해 얻는거’ 의미의 ‘클레로스’와 ‘소유하다’의 ‘네모마이’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문자적으로 보면 ‘제비 뽑기의 의해서 받아 자기 소유가 된 것’이란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상속에 의해서 받게 될 유산을 의미하는데(마21:38, 눅12:13)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유산은 가나안 땅이고(창12:7,15:7), 이차적으로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하늘 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수 있습니다. 여기서 땅은 ‘게 헤’‘그 땅’으로 쓰지 않고 장소의 의미인 ‘토폰’을 썼습니다. 왜 그랬을까? ‘토톤’ 은 ‘장소’‘도시’‘도시의 지역’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10절에 성을 바라보았다는 말씀과 연관을 지으면 아브라함은 기나안뿐만 아니라 인간이 최종적으로 머무는 하늘의 도성을 목적지로 삼았음을 알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는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게 되었을까, 아들을 제단에 바치는 행위만 보고 그러 하셨을까? 그러나 이렇게 차분히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에서 우리보다 앞선 믿음의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땅에 일에 매진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처럼 그러나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천국을 이미 바라보고 나아갔다고 하시고 있습니다. 천국의 대한 소망이 분명하게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과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다시 8절에서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이 말씀은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나아갔다’ 라는 말씀입니다. 가고 있는 길이 말씀에 순종하여 가고는 있지만 아무런 정보도 없이 나갔다고 말씀합니다. 그가 들어간 땅이 가나안 땅이었는데 땅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 땅인줄 몰랐다는 것입니다.(창12:7), 때로는 사람들이 무모한 짓을 한다고 비난받을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믿음이라 하십니다. 믿음은 모험을 감행합니다. 단지 이 성경에 말씀으로 주셨으니 하면 복 주실거야, 그러면서 실행에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요한은 말씀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9절입니다.
9절은 쉽게 번역을 한다면 ‘그는 약속의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다’ 가 됩니다. ‘거류하여’‘파로케센’은 ‘잠시 체류하다’‘나그네로 살다’ 혹은 ‘시민권 없이 살다’ 다시 말하면 일시적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의미는 뭘까요? 본장10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늘에 있는 기업을 바라보았다고 말씀하고 있고 베드로 사도는 벧전1:4절에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 하늘에 있는 것을 바라보라 하시고 다시 벧전2:11,절에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존재임을 기억하라고 하시면서 갈3:9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바라보고 소망할 곳은 이 땅이 아니라 천국이라 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9절에서 ‘이방의 땅’ 이는 남에게 속한 것 같이 혹은 낯선 지역에 있는 것 같이 즉 그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히‘노크리’인데 이스라엘에 이방인들이 살때에 이단어를 썼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약속을 받고 살았음에도 그는 여전히 그땅 사람들에게 ‘노크리’이방인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아브라함이 바라보는 기업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의 도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삭, 야곱으로 더불어 거하였다는 장막은 ‘스케나이스’ 이는 ‘스케네’의 복수형으로 다시 번역을 한다면 ‘천막’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영구히 거할 땅으로 알았다면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집을 짓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임시 거주할 그리고 언제든지 옮기기 쉬운 천막을 치고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마지막 종말에 사는 우리는 집을 좋게 화려하게 가구를 좋은 것으로 꾸미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오실 때 롯의 처, 처럼 집두고 떠나기 아쉬워서 가구나 차가 좋으면 버려두고 아쉬워서 미적거리면 주님을 잃어버릴수가 있다고 그 말씀이 오늘 이 말씀을 대하면서 공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천막과 성'의 차이점이 뭘까요? 천막은 임시 거주하는 것이라면 성은 들어가 편히 쉴 안식처라는 것입니다. 임시 거주하는 곳에 꾸미고 장식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이 땅은 우리의 안식처가 아닌 것이죠, 우리의 안식할 곳은 저 하늘 주님의 품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요일2:17, ‘이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자만 영원히 거하게 된다’고 하시고 사도바울은 골3:1-3,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죽었고 그리스도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하십니다.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 말씀은 ‘이삭과 야곱이 함께 약속의 공동 상속자’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 아브라함의 후사들로서(갈3:9)성도인 우리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함께 받은’‘톤 슁클레로노몬’은 ‘공동 상속자’ ‘동료 후사’‘슁클레로노모스’의 관사를 지닌 소유격 복수로서 ‘공동 상속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이삭과 야곱이 공동 상속자라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들인 것입니다.(롬8:17)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이 일들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이고 또 하나는 믿음으로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외에도 이스마엘도 있고 그두라에게서 난 자식도 여섯명이나 되었는데 오직 택하심을 받은 자는 이삭뿐이라는 것, 이삭도 에서와 야곱이 있는데 그중에 택하심을 받은 자는 야곱이라는 것을, 여기서 선택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된 것 역시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택하심을 입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엡1:4,5)
9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우리 성도는 이 땅에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해서 살아가는 존재는 분명하나 세상과 벗하면 안된다고 하십니다. 세상 안에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 풍습을 좇아 살면 안되는 구별된 존재라고 하십니다. 바울이 고전7:31,절에서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라” 성도는 세상을 등지고 살수는 없지만 그러나 세상일에 집착해서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위엣 것을 찾으며 살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강건해 진다고 했습니다.(고후4:16) 우리가 이 땅에서 이기고 승리하려면 하늘의 영광과 유업으로 얻을 축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 수고와 슬픔과 고통을 이길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우리도 썩어질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곳에 참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10절,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터가 있는’‘데멜리우스 에쿠산’ ‘그 기초들을 가진’ 이 기초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세상에 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이 성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계획하시고’‘테크니테스’는 ‘장인’‘기술자’‘디자이너’ 혹은 설계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바라볼 도성은 하나님이 친히 설계하시고 고안하신 성이라는 것입니다.(고후5:1), 그래서 우리는 그날을 고대하며 기다립니다.(딛2:13), 얼마나 좋은 곳인지 한번 찾아보고 갈까요? 계21:9-27,
11절입니다. 사라이야기입니다. 사라는‘스테이라’ ‘굳은’‘뻣뻣한’‘잉태못하는’불모의 의미를 지닌 스테이로스’의 여성형입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sterile) 불임이 유래하였는데 사라는 젊을 때 아이를 낳다가 단산한 것이 아니라 그는 평생 아이를 낳아 본 일이 없는 불임의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라가 이삭을 낳은 나이는 인생의 황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삭을 낳은 것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태를 여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믿음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창18장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나누는 말씀을 듣고도 그녀는 부정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창18:11, 그럼에도 사라는 믿음으로 이성의 작용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드디어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 자유인이라는 증거를 받았습니다(갈4:22-23), 또한 믿는 자들의 어머니라는 증거를 받았습니다(벧전3:6)
우리에게 무얼 설명하고자 하는 걸까요,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 하는 일에는 회의와 갈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 영원한 하늘의 도성을 유업으로 받기를 원한다면 그 갈등과 회의를 극복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쁨과 감사로서 웃음을 웃을 수 있게 됩니다. 할렐루야!!
12절입니다. ‘죽은 자와 같은 한사람으로’ 여기서 한 사람은 사라가 아니고 아브라함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라는 한사람으로 무수한 사람이 태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많은 후손’은 아브라함이 그렇게 많이 낳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많은 후손의 존재의 근원이 되었다고 의미입니다.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알, 이 말씀은 창22:17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수 많은 후손들이 아브라함에서 나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어 아브라함이 바라보고 있는 도성을 바라보고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아브라함처럼 말씀이라면 무모하리만치 믿는 믿음이 필요하고 그래서 그는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사라는 생산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 모든 회의를 극복하고 믿음의 씨를 받았습니다. 축복이란 그냥 쉽게 받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행동이 수반되어야 함을 보게 하십니다. 머리로만 믿는다고 하고 행함이 없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믿음있는 자를 보겠느냐 하신 말씀을 생각하시면서 믿음있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하늘산소...퍼가실때는 흔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