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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 믿는 대신 구원을 믿는 오류>의 줄거리: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믿으면’ 동사를 ‘예수’ 대신 ‘구원’에 갖다 붙이는 오류에 빠져버렸습니다. 구원이 문자에 갇혀서 '내가 구원 얻는다'는 문장을 믿는 겁니다. 구원의 상태 안에 있게 되었다면 구원을 믿을 필요는 없는 거지요. 이제는 구원 얻었음의 증거가 필요한 것입니다. 구원 얻었음의 증거는 안 보이는데 구원 받았다는 확신은 바위 같습니다. 그야말로 구제불능 상태이지요. 믿음과 구원이 대체 무엇인지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대신 구원을 믿는 오류
(시편 135편:1~21)
1.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2.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3.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4.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5.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 믿는 대신 구원을 믿는 오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 믿는 대신 구원을 믿는 오류’
우리가 생각하기에 언뜻 구원을 믿는 것이 왜 오류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었기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얻은 구원에 대해서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증거가 필요합니다. 구원 받았음은 증거와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지 믿거나 확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구원 얻었음을 믿고 있습니다. 이게 구제불능의 상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램프 증후군(과잉근심 증후군)이라는 게 있습니다.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문지르면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타나서 알라딘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줍니다. 요즘 사람들은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에 대한 근심과 걱정을 수시로 불러내서 자기 자신을 괴롭힙니다. 이것이 램프 증후군입니다.
신앙에도 램프 증후군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십자가 증후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불러내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내 마음대로 지시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의 뜻대로 하십니다. ‘믿음’이란 곧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분으로 나타나실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이 믿음의 요체입니다.
믿음은 여러 측면을 통해 묘사될 수 있지만 핵심적인 것은 주님과 함께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성경 말씀 속에서 갇혀 계시던 하나님은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타나듯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백합화에서조차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고, 공중에 나는 새를 보면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믿음은 곧 말씀 속에 갇혀계시던 하나님을 지금 살아계신 분으로 불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현상 속에 갇혀 계시고 교리와 성경지식 속에 갇혀 계시던 하나님을 지금 살아계신 분으로 불러내는 일입니다. 이때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일어나게 되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일어나면 당신의 뜻대로 내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내 삶을 이끄실 때에 나타나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믿음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말씀 속에 갇혀계시고, 자연현상 속에 갇혀 계시고, 내 삶의 사건들 속에 갇혀계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알라딘의 램프를 문지르면 지니가 나타나듯이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게 나타나십니다. 다만 램프의 요정과는 다르게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나의 삶을 마음대로 움직여갈 수는 없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죽은 나대신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내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상태입니다. 이 구원의 상태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로 인해 생겨나는 열매와 증거들이 있습니다. 내 마음과 손끝과 발끝과 입술에서 열매와 증거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구원을 믿음의 증거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구원 자체를 믿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을 마치 돈 버는 것처럼 여깁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서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 검색창에 ‘10억 벌기’라고 쳐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10억 벌기와 관련된 수 없이 많은 책이 나왔습니다. 예를 들면 부동산 투자로 10억 벌기, 쇼핑몰로 10억 벌기, 주식투자로 10억 벌기 등등의 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이렇게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0억 벌기 책을 읽었을 뿐인데 실제로 10억을 벌었다고 믿는 셈입니다. 내 손에는 10억은커녕 1억도 주어져있지 않은데, 10억 벌기 책을 읽고 만족해서 10억을 번 것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이러한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 받았음의 증거에 대해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삶을 살아야만 구원을 받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구원의 열매와 증거는 우리가 수행해야 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이 말씀에 나타난 능력은 특별히 사도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증거입니다. 모든 교인들에게 이러한 표적이 나타났던 것은 아니지만 믿고 구원을 얻었다면 그에 따른 열매가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장 44~47절에서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믿는 사람과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들에게 구원의 증거는 유무상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전 설교에서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설교자들이 구원의 증거인 유무상통에 대해 침묵하고 있을까요? 저는 이것이 두렵고 궁금하고 걱정스럽습니다. 구원의 증거는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육신이 괴로워도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함을 고백하는 것이 구원의 증거일 수 있습니다.
한편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고 구원의 증거가 성령을 통해 나타남을 말하였습니다.
이 모든 말씀이 구원 받았음의 증거가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기존에 구원받았음을 믿고 확신하려 했던 것과는 상이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10억 벌기 책을 읽었을 뿐인데 10억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려는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손에는 1억도 없는데 10억이 있는 것처럼 애써 믿어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기에 믿음과 구원에 대한 정의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판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에서는 이러한 믿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그것을 오늘 본문이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 시는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할렐 시입니다. 예배의식 때에 의도적으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 불린 노래로서 율법서나 선지서들 그리고 시편 중에서 부분적으로 발췌한 내용을 엮어 지어졌습니다. 내용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가 천지를 창조한 분이심을 찬양할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그 분은 여전히 천지의 삼라만상을 지금도 섭리하시며 선민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당신의 위엄을 드러내고 계시니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찬양은 가수들이나 성가대가 부르는 찬양이 아닙니다. 4절에서 말하는 대로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그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알고, 눈앞에 보이는 삼라만상을 섭리하시는 것을 알고, 말씀에 기록된 대로 역사 속의 사건(출애굽 사건이나 가나안 정복사건 등)에 갇혀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셔서 나를 만나 주심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찬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찬양이 구원의 증거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찬양은 구원의 증거 중 하나입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면 입만 열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원은 곧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만나고 있고 이 만남을 지속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시는 하나님과 만남이 지속되는 상태에서는 입만 열면 하나님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찬양의 빗장이 풀리는 것입니다.
저는 입만 열면 하나님 이야기만 하기 때문에, 아내와 대화할 때에 아내가 조금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제가 하는 말에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도 있습니다. 아내가 하나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을 만나면 누구에게든지 하나님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꼭 이렇게 하지는 않더라도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만나고 있다면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께 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항상 이 지속성을 염두에 두셔야만 합니다. 믿음은 지속되어야만 하고 또한 구원도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마음을 채울 기쁨거리와 만족거리를 찾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주님이 승천하신 하늘로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유지될 때에 구원의 증거로서 하나님은 다가오십니다. 자연현상과 성경말씀과 내 삶의 사건 속에 갇혀계시던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분으로써 활동하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 언제 어디서든 이루어질 때에 구원은 지속되며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찬양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와 만나는 구원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3절에서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생각만 해도 입에 담기만 해도 하나님의 이름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합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변화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황홀경에 빠졌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좋아서 산 아래에 있는 가족과 동료들을 잊었고 이루고자 했던 비전과 꿈도 망각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과정이 2절의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라는 부분에서 나타납니다. 글자대로라면 이 구절은 성전 뜰에 있는 사람들에게 찬양을 요청하고 권유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성전에 늘 머물면서 봉사하던 제사장이나 레위인 성가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성전의 존재 목적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깁니다.
4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될 첫 번째 이유로 꼽은 것이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성전을 세우신 목적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성전은 곧 선민 전체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봉사를 하던 이들의 존재 목적도 이와 같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민이 성전과 관계를 맺도록 봉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스라엘 선민 각자가 언제 어디에서든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즉 성전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 뜰에 있는 자’라고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성전 뜰에 서 있는 자들’이라고 했을까요?
그 옛날에 왕이나 귀족들은 말을 타고 다녔을지 모르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발과 다리는 장소 이동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발로 딛고 다리로 ‘서 있다’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은 다리를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다른 장소로부터 성전으로 오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마음이 성전에 와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신 이유는 몸은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마음으로는 항상 성전을 생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성전 뜰에 와 있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제 성전 뜰에 와서 마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성전 뜰에 온 사람은 항상 상번제의 번제단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29장 41~43절에서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리되 아침에 한 것처럼 소제와 전제를 그것과 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 여호와께 화제로 삼을지니 /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이들을 믿음이 표현되는 곳에서 만나십니다. 이 믿음의 표현되는 곳은 상번제가 드려지는 번제단이 있는 성전의 뜰이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 됩니다. 성경의 문자 속에 갇혀계시다가, 자연현상에 갇혀계시다가 우리에게 살아계신 분으로서 오실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연현상을 당연한 자연법칙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연현상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라고 하셨습니다. ‘내 영광’은 곧 무대의 조명이 하나님께만 집중되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이 보이는 상태가 될 때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내 마음이 언제나 성전 뜰에 서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곧 내 마음의 공백이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돈이나 건강 혹은 자녀의 형통 등의 세상의 가치를 채우려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금세 기쁨과 만족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하나님으로 채워진 마음에는 영원한 기쁨과 만족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영생이고 구원입니다.
사랑을 고백할 때에 ‘나의 태양, 나의 희망’이라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나의 구원이시여’라고 찬송하는 동안에 내 몸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는 구원의 증거로서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열매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또한 마음에도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보았던 성령의 여덟 가지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행여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의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는 말씀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믿음의 결과이고 구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장 21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라고 말하고 세례 받으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 세례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라고 했습니다.
‘할례’는 곧 육체를 베어버림입니다. 육체가 만나는 것이 세상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서 마음 채움 거리를 찾지 않음을 뜻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 붙어있지 않는다면 육체는 끈질기게 마음에 붙을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세상에서 마음 채움 거리를 찾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계속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오죽했으면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는 상태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또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버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육신은 계속해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기에 마음은 세상에 대해 죽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으니 하나님이 사셔야 합니다. 이때에 구원의 증거로 열매들은 나타날 것입니다.
가장 큰 열매 중의 하나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내 문제, 내 마음, 내 기쁨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나자 이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타인의 아픔과 필요가 보이기 시작하고, 타인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저의 경험을 보면 이것이 대단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예전에는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제가 잘 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음을 계속하다보니 바뀌는 점이 생깁니다. 제 인격이 나아짐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일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뉴스를 볼 때에 범죄자가 감방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옛날 같으면 그저 박수치면서 시원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감방에 들어가서라도 복음을 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어떤 범죄자일지라도 그 마음에는 아픔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도 구원의 증거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구원 얻었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얻었음을 믿는다는 말은 어패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 강릉에 살고 있으면서 ‘나는 강릉에 사는 것을 믿는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을 얻었으면 그 증거가 나타날 뿐입니다. 강릉에 살고 있으면 강릉에 산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바다가 나오고, 창문을 열면 대관령이 보입니다. 똑같은 의미에서 구원받은 증거가 나타나는 것이지 구원 받았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뿐입니다.
구원의 증거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자 예수님에 대한 믿음 자체도 불확실하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에게서 구원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을 교훈삼아 올바른 믿음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증거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맹목적인 믿음만을 강조하자 엉터리로 믿고,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다고 착각하는 병폐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말씀하셨고 모든 성경의 구절들도 구원 받은 자에게 증거가 있음을 말합니다. 구원 받았음을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믿음은 성전 뜰에 마음이 서 있는 것입니다. 성전 뜰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로 하는 상징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생겨나는 구원의 증거를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죽음이 지속됨으로서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만나고 기업으로 가지게 된 구원의 증거가 하나님이 나를 대신하여 사시는 삶으로 열매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