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4막24장 (6부)
아버님 택시회사는 봉천역에서 낙성대입구로 이사를 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낙성대 입구 삼거리(낙성대역 )이였다.
나는 택시회사에 근무하며 행정업무를 보았다.
군시절 육군본부 행정실에서 서류 발송및 접수 하는 절차를 배워서 회사업무에 요긴하게 쓰였다.
배차일지를 작성하고 택시조합이나 구청,시청에서 오는 서류, 의료보험에 관한 서류, 노동부, 경찰서 교통계의 출석요구서나 사고 처리 결과를 서류로 작성하여야 하였다.
무척 바쁜 일과였다.
그리고 느닷없이 발생되는 교통사고는 마치 소방서 와같이 시도때도 없이 발생하였다.
새벽이건,낮이건, 저녁이건, 전화가 울리면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다.
그당시 나는 사고처리는 안하였지만, 사고처리 상무는 퇴근시간이나 술을 먹을때도 출동하여야 하였다.
자기 시간이 없는것이다.
24시간 비상근무하는 소방서와 같이 항상 대기상태로 있어야 하였다.
직업병에 걸리기 딱 좋은 조건이였다.
택시회사는 새벽5시경 입금을 받고 배차를 진행하고 오후에는 3~4시경 교대를 한다.
그당시는 택시요금이 전부 현금 결재라 입금을 받으면 두둑한 돈다발이 쇼핑백으로 하나였다.
그래서 택시회사에 있으면 은행처럼 돈다발을 원없이 만져볼수 있었다.
또 회사택시는 3년마다 대폐차를 하여야 하였다.
(개인택시는 5년마다)
그것은 운수사업법에 명시되였기 3년마다 한번은 울산의 현대자동차로 가야하였다.
지금은 탁송이 발달하여 울산까지 갈필요가 없었으나 그때는 바람도 쎌겸 울산으로 가는 것이 큰 행사였다.
고속버스타고 5시간을 가는 것도 지루하였다.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울산에서 술을 진창 먹고 기절한다음 다음날 울산현대자동차 출고장에 가서 차를 인도 받고 서울로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운전수들은 신이 나서 아내를 데리고 가기도 하였고, 성가시면 나보고 대신 갔다 오라며 용돈을 두둑이 주었다.
나는 가끔마다 울산 현대자동차에 갔다.
재수 좋을 때는 운전수들이 추가 돈을 지불하여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간적도 있었다.
그날 저녁은 술을 진창 먹고 연료비를 아낄려고 내리막길을 시동을 끄고(?)운전한적도 있었다.
그후 종종 대폐차가 있을시면 나는 울산으로 직행하였다.
울산은 하도많이 가서 태화강, 고래고기, 경주의 불국사,다보탑,석굴암을 수도 없이 가보니 나중에는 울산 가기가 싫어졌다.
나는 그렇게 택시회사에 근무하였다.
그런데 어렴풋이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문산(?)에서 출퇴근하는 기사가 있었다.
"장덕○"이라고 .
문산이며는 낙성대에서 어림잡아 왕복 100km이상 이거늘 1일1교대로 이틀에 한번씩 출퇴근하다 과로로 죽고 말았다.
바싹마른 얼굴에 검은테 안경을 끼고 열심히 살았건만 그는 과로로 40세가 되기도 전에 죽어버린 것이다.
노동부에서는 유권해석을 내리며 회사에 불법행위가 있는지 조사하였으나 무리한 근무지시는 없었고운전자가 먼거리에서 출퇴근하고 본인의 과실로 인한것으로 결론짓고 산재처리하고 매듭된 일이 있었다.
1년에 1명은 택시운전수들이 사망하였다.
교통사고로 즉사한 경우 회사는 완전 초상집이였다.
택시 사업.
만만치 않은 사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