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온천역 왼편 호박다방
다방은 커피가 이천오백 원밖에 안 해… 그녀가 담배를 피워 문다
기차는 다섯 시 오십 분에 떠나고
가족탕이라고 해 봐야 방 하나에 욕조 하나가 다야
재떨이에 침을 뱉는 그녀
이월의 바람이 사내를 따라 들어온다
메뉴판 없어요? 여긴 메뉴판 없어요 다방의 명물은 어항
그녀와 나는 플라스틱 수초를 바라본다
우리 여관은 거의 달방으로 나가
대실은 재미가 없어 오래된 집이야
그녀의 엄마는 여관을 넘기고
대실료 이만 원씩 챙기던 그녀는 소일거리가 없어졌다
커피 콜라 주세요
연변말처럼 서울말을 쓰는 아가씨가 커피를 흘리고
콜라엔 얼음이 없다
괜찮은데 커피잔을 닦는 아가씨, 괜찮다는데
공부를 안 하니까 별걸 다 까먹네, 승마 지은 시인이 누구지
승마나 승무나 그게 그거지
어항 너머 금팔찌의 사내를 바라보는 그녀
여기 얼마에요
육천 원만 주세요
가격 미정의 값들
커피 값도 콜라 값도 알 수 없는 호박다방
트윈 베드룸
바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내륙, 미라의 심장
햇살이 나를 무균 처리하는
이상(李箱)의 병실 같은
습도 0의
침실
침이 고이지 않도록 조심
우리는 입술을 감추고 키스하지 않네
서로의 눈물이 사라져 가는 것은
손으로 빨아 널은 속옷이 말라 가는 것처럼
시간의 뼈를 남기고
하얀 종이 슬리퍼 두 켤레
하나는 밤에 신고
하나는 아침에 신고
오후에는
내 손톱보다 길게 자란 당신의 손톱과
곧 바스러져 흩어질 심장을
나의 침대 곁
나의 침대에 누인다
J의 비밀 목록
토요일 정오 시계탑에서 떨어지는 햇살
노래가 끝나기 전에 흘러내린
생일 케이크 위의 촛농
산책로의 가등처럼 어둡다
밝아지는 살구나무 숲에 대한 고백
굽이 높은 하이힐을 벗고 걷는 아스팔트 길
너무 많은 아침을 여는 사람
정일학원이 사라져도 정일학원인
버스 정류소 표지판
허리에서 돌고 있는 두껍고 질긴 지압 훌라후프
호주머니 속 기도문과 마주치는
책 표지 글쓴이의
이름 택시가 많은 오거리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여자 며칠 후의 문자 메시지를 읽는 동안
늙어 버린 나뭇잎
지나치게 바라서 슬픈 목록들 사이사이
― 『당신의 정거장은 내가 손을 흔드는 세계』, 천년의시작, 2013.
첫댓글 말씀드렸던 대학교 1년 위 선배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