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우냐?"
하고 생각할 때에도,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시편 116:10]
시인은
죽음의 올가미가 얽어매고, 소올의 고통이 업습하여서, 고난과 고통이 덮쳐올 때(3)에
주님께 간구(4)하므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다(7).
그리하여 시인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겠다(9)"고 결단한다.
시인이 경험한 하나님은,
하나님은 성도(하시딤)들의 죽음 조차도 소중하게 여기는 분(15)이시며,
우리를 환대하시고,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비틀거리지 않게(8) 하시는 분이시다.
이런 하나님을 어찌 떠나겠는가?
하지만 시인이 경험한 상황들을 이렇다.
죽음의 올가미, 스올의 고통, 믿을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상황.
시인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상황은 누구나 경험하는 상황이다.
이 시간이 길어질 때에도 여전히 믿음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전히 믿음을 지키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변화가 없을 때 어떻게 믿음을 지켜갈 것인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가능한가?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말씀하시는가?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은 이렇게 말한다.
'오래 전에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수수께기를 '1980년 광주사진첩'을 통해서 풀어낸다.
계엄군의 폭력을 통해서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질문하고,
시민들의 행동을 보면서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질문한다.
그리고 그 의문을 꿰뚫고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질문한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답한다.
'과거는 현재를 도울 수 있고,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다.'
나는 여기에 덧붙인다.
'산 자는 죽은 자와 산 자를 구할 수 있고,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도울 수 있다고.'
시편 시인은 하나님의 부재를 수없이 경험하면서도 성도(하시딤)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이 지점이 하시딤의 지점이 아닐까?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을 오랜 시간 견디어내다보면 부정적인 생각이 마음을 지배한다.
그런데 이 부정적인 생각이라는 것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도 오랫동안 한강 작가가 고민했던 지점-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릴 수록 나 스스로 소외된 삶으로 기어들어갔다.
기어들어가기 싫으면서도 기어들어갔다.
사실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를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버리고자했을 때 내 삶은 퇴보했다.
여전히 힘들지만,
인간에 대해 근본적인 신뢰를 갖기 시작했을때 내 삶은 평온함을 되찾았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재, 침묵도 다 받아들이자 비로소 그 분이 입을 열어 말씀하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긍정하는 것,
어둠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것,
악한 현실에서도 선한 구석을 보는 것,
마음의 밝음과 명랑함을 지켜가는 것이 하나님 부재의 시대, 침묵의 시대를 살아가는 동력이다.
그 동력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온다.
그리하여 수수께끼와 같은 모든 결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사람이 '성도(하시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