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갑장터라는 지명 이름이 매우 특이하지 않는가?
본 이름은 개가리 장터이나 일제강점기 때 지명을 한문화하는 과정에서 개갑으로 둔갑했다.
개가리 장터는 안동 김씨 김질과 관련된 효행으로 인하여 생겨났다.
조부모와 부모님 상을 더하여 12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던 그는 매년 12월
아버지의 제삿날이 되면 짚신을 삼아 12km 떨어진 안자시장으로 가서 팔고 꿩을 사서 제사 제물로 쓰곤 하였단다.
어느 해는 눈이 많이 내려 장에 갈 수 없어 애를 태우자 꿩 한마리가 부엌으로 날아와 떨어져 죽었단다.
아버지는 생전에 꿩을 좋아하셔서 제사음식으로 꿩을 올린단다.
무사히 꿩 제사를 잘 차렸는데 다음 해에도 눈이 많이 내렸단다.
하는 수없이 짚신을 등에 지고 시장을 찾아가는데 무장현 현감이 이를 보고 자초지종을 물었단다.
현감은 그의 효성에 감복하여 개가리에 장을 세워주어 고생을 덜게 하였단다.
개갑장터는 2014년 소설가 이성수가 쓴 <구수내와 개갑장터의 들꽃> 이라는 소설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손화중을 중심인물로 다룬 책이다.
이상은 개가리 장터에 대한 유래이다.
조선조 때는 장터다 보니 공간이 넓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저잣거리가 아닌가.
그래서 천주교 4대 박해 때는 신자들을 처형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던 거다.
무장지역 양반 출신인 복자 최여겸 마티아는 충청도 한산으로 장가든 뒤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여 고향으로 돌아와서 무장현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영광의 순교자들 조카 최일안과 이화백은 복자 최여겸 마티아의 선교로 입교하였으며
총 28명을 입교시켰다는 형조의 기록이 남아 있단다.
그에게 내린 사형선고문에는 “만 번 죽여도 아깝지 않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개갑장터 일대를 매입하여 성지로 개발하고 있으나 큰 부지에 비하여 상징조형물이 빈약한 실정이다.
무장지역의 선교역사와 순교자료 등 많은 관련 자료를 발굴하여
복자 최여겸 마티아가 성인품에 올랐을 때를 대비 순교기념관을 건립하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다.
특히 전라도지역 교회사를 전공한 신부님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포도청, 형조, 신록 등의 기록과 <치명일기>등 조선의 순교역사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순교자들의 핏빛 사랑을 현양해야 할 거다.
<2020. 1. 5 개갑장터성지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