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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복을 주시며 / 창 9:1-7
프란스시코 부시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간절한 소망은 훌륭한 외과 의사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의 소원이 이뤄져 스물일곱 살에 성형외과의 레지던트가 되고, 몇 년 뒤 자신의 병원을 개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85년 9월 19일에, 그가 살고 있었던 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이 일어나, 이 사건으로 나흘 만에 극적으로 구사일생 되었으나, 이때 손가락 부상으로 오른 손 엄지손가락만 남기도 모두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외과 의사의 소망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간청으로 자신의 발가락 두 개를 잘라, 손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접안 수술을 했습니다. 그후 그는 피나는 반복 훈련을 거듭함으로, 존경받는 성형외과 전문의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은 언청이 아이들과 화상을 입은 아이들을 위해, 무료 복원시술을 펴며 크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열정에 대하여 이러한 의미 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에서 이런저런 장애물에 부닥칩니다. 하지만 가장 뜨거운 열정을 연료로 사용할 수만 있다면, 결국 꿈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열정은 이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일을 하는데, 모든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여도 힘들어하지 않고, 장애물이 있어도 극복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열정은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꿀 수 있는 원천이 됩니다.
또한 노아에게도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전대 순종하는 열정, 폐허가 된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배하는, 믿음의 열정이 있었기에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엇습니다. 홍수가 끝나고 물이 빠지고 이제 땅은 정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과 모든 동물들로 하여금, 방주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좋았겠습니까? 비도 그치고, 답답했던 방주의 생활도 끝났습니다. 사실 방주는 영원히 머물러 있을 곳도 못되고, 머물러 있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방주에서 나왔을 때의 상황은, 폐허 그 자체였습니다. 한 번 생각을 해 보세요. 무려 1년 동안 물에 잠겨 있었던 세상이니, 남아 있는 것이 제대로 있겠습니까? 쓸 만한 것이, 어디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노아는 그야말로 암담하고 처참한 현실에 부딪힌 것입니다. 이 기막힌 현실과 참혹한 폐허 앞에서, 노아가 첫 번째로 한 일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예배였습니다. 창 8:20절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암담한 상황을 만났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입니다. 기막힌 현실 앞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입니다. 노아는 단순히 짐승 몇 마리 잡아서 제사드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 세상을 보십니까? 이제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앞으로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실 예배는 절박한 심정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가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나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제사를 받으신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에게 복을 선포하십니다. 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생육하는 복, 번성하는 복, 땅에 충만한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최초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의 이름을 지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창 1:27-28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최초로 하신 일은, 복을 주신 일입니다. 이 두 절의 말씀이 참 중요합니다. 인간의 가치를 말해주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말해주고, 남과 여의 구분을 말해주고, 남녀의 평등을 말해주고, 인간의 사명을 말해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저주받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원래 가난하고 불행하도록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며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복을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걷어차 버렸습니다. 아니 걷어차고 보니까, 그게 복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금이 간 관계는, 무엇으로도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방법을 고안해 내셨습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기 1:27-28절 말씀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이미 복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복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각 나라와 족속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먼저 복덩어리로, 복의 출발점으로 삼으셨습니다. 지금의 형편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심지어 사는 형편이 지옥 같을지라도, 우리는 절대로 저주받은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 받기 위해 태어났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기 위해 태어났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나누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출발하는 노아와 그 가족에게,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창조의 복을 주셨습니다. 노아는 인류의 제2의 시조인 셈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했습니다. 한 처음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본문 1절과 창 1:28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 1: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본문 1절에는 없는데, 창 1:28에는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땅을 정복하라”입니다. 축복에서 “땅을 정복하라”를 뺀 것에, 어떤 의도가 있다면, 범죄한 인간에게 땅을 정복할 권한을, 거두어 가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록 현실은 땅이 부단히 정복되고 있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 말이 됩니다. 그렇담 인간에게 피조물에 대한 것을 다시 맡기면서도, 홍수 이전보다는 그 권한을 제한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첫 조상에게는, 모든 환경을 완벽하게 조성해 놓고, 인간을 거기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수고와 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을 붙들고, 열심히 땅을 일구어야 하고, 눈물로 씨앗을 뿌려야 했습니다. 기독교는 우연한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우연히 굴러 들어왔다면, 그것은 먹이가 아니고, 무엇일 가능성이 높습니까? 미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노아가 고생을 많이 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20년 동안 방주 만드는 일 뿐만 아니라, 한동안 방주 안에서 갇혀지내야 하는 일과, 홍수는 끝났지만 폐허가 돼 버린 땅을, 농토로 일구어 내는 일 등, 어느 하나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1장과 9장의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복이 질적으로 차이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2절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분위기가 창세기 1, 2장과는 분명히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을 때에, 인간과 동물 사이는 서로 갈등이 없었습니다. 한없이 평화로웠습니다. 죽이거나 싸움이 없었습니다. 동물들과 가족처럼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창 2:20절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입니까?
그런데 죄가 들어온 후에, 인간과 동물이 갈라졌습니다. 자기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이, 인간들 때문임을 동물들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발견하는 것은, 짐승들이 인간을 해하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이게 별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은 아주 특별한 지역 외에는, 맹수의 위험이 없습니다. 금강산 호랑이 이야기는, 어린이 동화책에서나 읽을 수 있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얘기입니다. 요즘 동물들은 관상용입니다. 맹수를 철조망에 가둬놓고, 사람들에게 구경시켜주고 있습니다. 가끔 사육사들의 사고가 일어나긴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을 봐도, 요즘에는 맹수가 사람을 보고 피해 다닙니다. 코끼리는 상아 빼앗길까봐 피하고, 사슴은 뿔 잘릴까 피하고, 악어는 껍질 벗겨질까봐 피합니다. 하지만 총이 발명되어 나오기 전까지는, 맹수의 위험은 대단했습니다. 맹수를 만나면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짐승들이 인간을 해하지 못하도록, 두려운 마음을 주셨다는 말씀은, 인간에게 주신 복이 틀림없습니다. 보호의 복입니다. 모든 맹수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꼭 맹수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짐승들, 새들, 기는 것들, 바다의 고기들이 다 포함됩니다. 물고기는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여기 나오지 않습니까? 홍수에서 살아남은 것입니다.
만약 2절에 나오는 생물에게서, 인간을 두려워하며 무서워하는 마음을 제하신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혹 그런 일이 한번이라도 있었습니까? 물론 있었습니다. 모세를 통해 애굽에 내린 재앙의 내용을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애굽에 내린 재앙이 몇 가지였습니까? 10가지였습니다. 열 재앙의 종류를 외우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피, 개구리, 이, 파리, 심한 돌림병, 악성 종기, 우박, 메뚜기, 흑암, 장자 재앙입니다. 이 중에 동물 재앙이, 몇 개입니까? 개구리, 이, 파리, 메뚜기, 네 가지나 됩니다. 이것들은 사람을 괴롭게만 했습니다. 실제로 사람의 생명까지는 해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호랑이나 사자나 표범이나 악어 재앙을 내렸다면, 아마 문제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자연이 자연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칙 안에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붙들고 있는 손을, 일분 일초라도 놓는 순간, 이 세상은 혼돈과 무질서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신론(理神論)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기는 했지만, 그 후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고, 세상이 저절로 굴러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시계공이 시계를 만들고서 태엽을 감아놓으면, 시계가 저절로 돌아가는 이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천재들이 만들어낸 신앙 이론 치고 유치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손 떼고 계실까요? 멀리 서서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구경만 하고 계시는 분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야에, 새벽에 잠 안자고 교회 나와서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에 깊이 개입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간섭하시고, 우리 삶을 붙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자연이 자연법칙이란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섭리, 유지, 보존하시는 분입니다.
3절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홍수 후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식생활에 변화가 온 것입니다. 비로소 육식이 허락됩니다. 아마 육식을 좋아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명령이 너무도 당연하며,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원래는 사람과 모든 짐승의 먹거리가 채식이었습니다. 창 1:29-30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29절은 사람의 먹거리에 대해서 말합니다. 몇 가지인가? 두 가지입니다. ① ‘씨 맺는 모든 채소’입니다. 넓은 의미로는 채소 전체를 말하고, 좁은 의미로는 곡식을 말합니다. ②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입니다. 과일을 말합니다. 1:30절은 모든 짐승(걷는 것, 나는 것, 기는 것)의 먹거리에 대해서 말합니다. ‘모든 푸른 풀’이 먹거리입니다. 그런데 본문 3절은 육식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때부터 육식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릅니다. 학자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 클라크 : 홍수로 말미암아 땅이 황폐해진 결과, 식물이 부족하자 비로소 육식이 허용되었다는 견해입니다. ㉡ 루터 : 처음부터 허용되었으나, 인간의 신체구조상 채식이 적합하였으므로 스스로 먹지 않았는데, 홍수 후 연약해진 신체의 변화로 인해 육식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견해입니다. ㉢ 깔뱅 : 타락 전에도 허용되었으나, 여기서 그 허가가 새롭게 갱신되었다는 견해입니다. 어느 것 하나만 옳고, 나머지는 틀렸다는 식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이전에도 제사용이나 의복용으로 동물을 죽여 왔습니다. 제사용으로 잡아서는 하나님께 전체를 다 드렸겠지만, 의복용으로 잡아서 껍질만 벗겨 옷을 해 입고 고기는 버렸을까요? 그렇게 보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육식이 허락된 것이, 인간이 동물을 맘대로 잡아먹을 권한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몸보신을 위해서라면 뭐라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육식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기보다는, 양보조항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양보하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땅이 처음 범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을 뿐 아니라, 홍수로 인해 땅 심을 잃고 있기에 소출이 적어, 생존이 위태롭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육식을 허용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육식이라고 막 해서는 안 됩니다. 산 동물이어야 합니다. 다른 짐승에 의해 찢겨 죽었거나, 이미 죽은 것은 제외되었습니다. 이건 훗날 율법으로 정해 엄격하게 시행되었습니다. 레 22:8절 ‘시체나 찢겨 죽은 짐승을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출 22:31절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 무엇과 관련이 있습니까? 거룩과 관련이 있습니다. 거룩은 정결과 밀접합니다. 그 고기는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부패하여 상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염려해서 일 것입니다. 참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이처럼 세심한 배려를 하셨습니다.
레위기 11장에 가면, 산 동물 가운데서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하셨습니다. 요즘도 안식일교회 성도들은 이걸 문자적으로 지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 먹고 건강하여, 주의 일을 열심히 하면 됩니다. 딤전 4:3-4절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이 말씀은 음식점에서 잘 지키는 것 같습니다. 소를 생각해 볼까요? 버리는 것이 없지않습니까? 살코기는 물론이고, 머리 - 머리고기, 꼬리 - 꼬리곰탕, 뼈 - 사골, 뼈속 관절사이에 있는 물렁뼈 - 도가니탕, 내장 - 내장탕이나 순대, 피 - 선지국 등 버리는 것이 없습니다.
4절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육식을 허락하셨지만, 제한을 두신 게 있습니다. 고기를 피 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를 먹으면 인간은 잔인해집니다. 아무리 몸에 좋다고 해도, 피를 마시는 행위는 좀 그렇습니다. 물론 피를 마셔야 살 수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피를 보신을 위해서 먹는 것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경은 엄격하게 명합니다.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피는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① 아무리 짐승이라도 함부로 살상해서는 안 된다는, 동물 보호 차원입니다. ② 비록 짐승의 피일망정 피를 자주 보면, 사람의 생명까지도 경시할 수 있다는, 인간 생명 존엄성 차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먹는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먹는 재미로 사는 인생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음식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음식을 맛있게 먹되 낭비하지 않아야 합니다. 음식을 남겨서 버리는 문제를, 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일 년 동안 음식을 남기는 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월드컵 경기장 50개를 건설하고도 남는다고 합니다. 음식은 적당하게 해야 하고, 남으면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특히 음식을 대할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북한이나 아프리카 등 굶주린 이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먹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단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5-6절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법칙을 말씀하십니다. 이건 먹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맡았지만, 생명만은 우리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살인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합법적인 살인이 사형입니다. 흉악한 범죄로 사회로부터 영원한 격리가 필요할 때 사형을 구형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사형 집행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형제도의 존폐 문제는 끝나지 않은 이슈입니다. 과연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사형의 불가피론을 주장하는 찬성론자들과, 무조건 사형은 안 된다고 하는 반대론자들의 공방이 치열합니다. 인권국가라고 하는 미국에도, 사형제도가 있는 주가 있고 없는 주가 있습니다.
시대적으로 차이가 많이 나긴 하지만, 아무튼 본문에서는 사형을 시키라고 합니다. 홍수 전에 이미 살인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살인했다고 해서, 살인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가인의 경우를 보면 그렇습니다. 그렇담 홍수 후에 법이 강화되었다는 말입니다. 5절을 보면,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인간 생명을 헤친 자는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그 피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찾으리라”는 말은 “추적하다, 탐사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헤치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그냥 넘기지 않으시고, 끝까지 추적하여 기어이 징벌하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또한 개인적인 보복을 허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십계명은 분명히 개인적인 살인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이건 합법적인 절차를 통하여 처벌하라는 것입니다. 곧 재판관의 판결을 받아 사형에 처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도, 똑같은 살인자로 취급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도피성이라는 제도를 두어 그 생명을 보호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린 것은 의도적으로 살인한 것을 뜻합니다. 왜 인간의 생명이 존엄한가를, 근원적으로 설명하는 말이 나옵니다. 6절 뒷부분을 보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사람의 잘났고 못났고를 떠나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은 함부로 다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7절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7절을 설명하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원뜻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번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살인이 없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아이들의 노랫말처럼,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버리고, 우리 서로 사랑해”여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3: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사랑하면서 살아도 길지 않은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티베트의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독특한 방법으로 값을 정한다고 합니다. 그 크기에 따라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성질에 따라 값을 정하는데, 양의 성질을 테스트하는 방법이 매우 재미있습니다.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보면서, 양이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몸이 마른 양이라도 값이 오르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살이 쪘더라도 값이 내려갑니다. 왜 이런 방법으로 정할까요? 위로 올라가는 양은 현재는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의 미래를 갖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는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기 때문입니다. 골 3: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우리는 지금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허락하시는 축복 속에서 생활해야겠지요? 보다 쉬운 것들, 그리고 세상 것에 집중하라는 유혹을 받지만, 믿음의 성도는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축복을 개간하는 삶, 이웃을 사랑하는 삶,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어머니보다, 더욱 따스하고 섬세한 관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고 위로하십니다.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베푸시고, 심판 중에서도 구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 멸망에서 구원받은 천국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일평생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올려드리는, 행복한 믿음의 성도와 가정과 일터과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죄를 미워하며,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알게 하옵소서. 사랑과 믿음의 세계로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망을 읽을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가 이 믿음의 자세를 가져, 노아에게 주셨던 그 복을 우리의 복으로 받아 누리게 하옵소서. 노아가 받은 축복처럼 이 세상의 재앙으로부터 구원받는, 축복이 있게 하옵소서. 또한 주님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 모두가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언약의 증거는 이것 / 창 9:8-17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헝가리 군부대에서 파견된 수색 분대가, 알프스산맥에서 조난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폭설과 한파가 겹쳐서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본대는, 수색 분대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4일째 되는 날 수색 분대가 본대를 찾아왔습니다.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모든 대원이 무사 귀환한 겁니다. 깜짝 놀라서 부대장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분대장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온통 눈으로 덮인 산 속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분대원 중 한 명이, 알프스산맥 지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보고 걸으면서, 살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부대장이 분대장의 설명을 듣고, 그 지도를 보자고 했습니다. 지도를 건네받은 부대장은, 또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그 지도는 알프스산맥 지도가 아니라, 피레네산맥 지도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전해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희망의 중요성입니다. 절망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만 있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희망을 강조할 때 흔히 인용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잘 분석해 보면, 허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잘못된 지도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대를 찾아간 것은 요행이었습니다. 희망이 중요하지만, 근거가 없으면 위험천만합니다. 요행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엉뚱한 지도를 갖고 헤매다, 눈 덮인 산속에서 전원 사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희망 고문! 기본적으로 희망을 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불가능한 것을 뻔히 알고도 헛된 희망을 주는 것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희망 고문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불치병에 걸린 환자가 있는데, 100% 사망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위로하겠다며 조금만 기다리면 퇴원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면, 환자는 헛된 희망을 갖고 기다리다, 준비도 없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인데, 죽음 앞에 잘 정리해야 될 텐데,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희망을 갖되, 근거 있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근거도 없는 헛된 희망을 갖고 살면, 오히려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다행히 성경은 우리에게 희망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약속을 해 놓고도, 어기기 일쑤입니다. 의도적으로 어기는 경우도 많고, 꼭 지키려고 했지만 여건이나 능력이 안 돼서, 못 지키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절대로 약속을, 변경하거나 파기하는 경우가 전혀 없습니다.
요즘은 무지개 보기가 어렵습니다. 주로 실내 생활을 해서 그런지, 어쩌다 한 번 볼 수 있고, 한 해에 한두 번 볼까 말까합니다. 그에 대해 유진 스토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당한 각도에서 보기만 하면, 비가 온 후에는 반드시 무지개를 볼 수 있다.” 보는 사람의 각도에 문제가 있고, 우리의 시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약속인 무지개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계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 역시, 하나님께 무슨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가 문제였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바로 예배하는 이 시간입니다. 우리는 한 주간 동안 교회 밖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시각이 틀어집니다. 이 틀어진 시각을 말씀으로 바로 잡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에서의 설교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잡힌 시각의 설교여야 합니다.
8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들과 계약을 맺기 원하셨습니다. 노아는 홍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세 차례에 걸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말을 걸어오신 것입니다. 이번에는 어떤 말씀을 하시려고 합니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노아와 계약하시기 위함입니다. ‘신과 사람이 계약을 맺는다.’ 이것 참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계약이 왜 생겼을까요? 사람의 마음이 변덕스러워서,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인이 연락을 해 와서 “우리 집에 와서 사세요” 하길래, 마침 잘 되었다 싶어서 “아휴, 감사합니다” 하고, 급히 이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있다가 연락이 와서, “집을 좀 비워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럼 너무 황당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이러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했더니, “내 생각이 바뀌었어요” 하는 것입니다. 계약을 하지 않았으니까,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계약이 필요한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일종의 계약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계약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결혼도 일종의 계약입니다. 처음에는 매일 따라다니면서, “너 없이는 하루도 못 살아” 합니다. 그 말에 속아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급기야 “우리 이제 헤어져” 합니다. 그건 계약 위반입니다. 결혼식할 때 단둘이 하지 않고, 비싼 예식장을 빌려 가지고, 꼭 여러 사람들 앞에서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축의금 받기 위해서인가요? 하객들 식사대접하기 위해서인가요? 멋진 신랑 소개하기 위해서인가요? 예쁜 신부 자랑하기 위해서인가요? 아닙니다. 하객들을 증인으로 세우는 의미입니다. 여러 증인들 앞에서, 부부가 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의미로, 하나님 앞에서의 서약이지만, 증인들 앞에서의 서약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서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끝까지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부부로서 도리를 다하며, 서로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계약 때문에, 좀 싫증이 나도 같이 사는 것입니다. 사고나 질병으로 둘 중에 하나가 드러누워도, 계약 때문에 같이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합니다. 오죽 했으면,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고 했겠습니까? 이건 유독 변덕이 심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계약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구두 계약은 잘 지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뭐라도 한 장 받아 놓아야 합니다. 내가 언제 그랬냐 면서, 오리발을 잘 내밀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사이라고, 영수증을 받지 않았거나,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구두계약보다는 문서계약을 선호합니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명이 들어가야 합니다. 도장을 찍어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경우에는 인감도장을 찍어야 합니다. 인감도장을 찍는 순간부터,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고, 내게 책임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계약에는 반드시 책임 이행의 의무가 따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노아와 계약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아와만 아니라, 그 가족과 그 후손과 모든 생명체와도 하십니다. 계약의 범위가 대단히 넓고, 계약의 기간도 엄청나게 깁니다.
9-10절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우리가 여기서 특별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계약의 성격입니다. 계약은 쌍방 간에 합의하여 서명을 했을 때 이루어집니다. 일방적인 계약은 언제라도 문제가 됩니다. 그렇게 국가 간의 맺은 조약을 불평등조약이라고 합니다. 한일합방 같은 것이 대표적으로 불평등조약입니다. 엄격하게 따져보면, 우리나라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다 보니, 역사적으로 평등조약을 맺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어떤 계약을 맺으셨습니까? 일방 계약입니까, 쌍방 계약입니까? 하나님과 노아가 테이블에서 합의하여 계약을 체결하셨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문건을 작성하고, 노아가 동의하는 절차를 거쳤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방계약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에서,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이거나 강요에 의한 것이라면, 그 계약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병원에 수술을 받으려면, 보호자의 서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읽어보면 일방적입니다. 의사가 실수해도 병원 측에 책임을 묻기 곤란하게 되어 있습니다. 환자 가족은 울며 겨자 먹기로 서명을 하는 것입니다. 서명을 안 하면 수술 자체를 안 해주니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의 경우에는 쌍방계약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계약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방적인 계약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르는가? 은혜입니다. 노아 계약을 다른 말로 하면 ‘은혜 계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은혜란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2천 년 전에, 일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일방적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이 일을 사람들하고 의논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롬 5: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먼저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나중입니다. 내가 믿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앞으로 믿는다는 조건으로, 주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늘 들어도 신명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 15: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사람들의 논리는, ‘네가 사랑하기 때문에 나도 사랑한다.’ ‘당신이 나에게 무엇인가 주었기 때문에 나도 당신에게 준다.’ ‘내가 이것을 당신에게 줄 테니 그 대신에 당신은 저것을 주라.’ 거의 이런 식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이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이 없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사랑할만한 가치가 없어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구원받을만한 가치가 없어도,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십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계약이 있을 수 없겠지만, 만약 있다면 일방적인 계약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사실은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하신 것입니다. 이 걸 기쁨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이 일 저 일로 열심히 봉사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있습니까? 그 공로가 사랑받을 조건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이미 2천년 전에 주님이 먼저 이루셨습니다. 아니, 창세 전에 그분이 우리를 택하셨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셨고, 때가 되니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정말 믿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셔서 가능합니다.
11절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계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다가올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앞으로 이 세상에 지진이나 홍수나 한발이나 전쟁이나 질병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재앙은 지구상에서 쉼 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는 자연 질서가 깨뜨려지는 일은 없을 것이란 보장입니다. 하늘이 미쳐서 물을 쏟아 붓거나, 땅이 물을 토해내고, 바다가 육지로 기어 올라오는 것과 같은, 창조 질서의 파괴로 인해 인류가 몰살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홍수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핵입니다. 북한에 핵폭탄이 있다면, 남한에는 원자력 발전소가 있습니다. 원자력발전소가 안전하다 하지만,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를 보세요. 또 우리나라는 원자력발전소가 민가에 너무나 가깝게 있습니다. 사고 나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북의 핵폭탄이나 남한의 핵발전소나 둘 다 위험합니다. 인류의 마지막 문제는 핵문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너무 불안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홍수로 멸망하지 않도록 간섭하시는 하나님께서, 인류가 핵폭탄으로 망하도록 방치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붙잡고 계십니다. 어떤 일로 전 인류가 몰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지구가 산산조각이 날 수 있다는 뉴스를 접해도, 불안에 떨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졸거나 주무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나 혼자만 죽는 것도 아닌데 호들갑 떨 필요가 없습니다.
11절 말씀이 노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노아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면,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방주에서 노아와 그 가족들과 짐승들이 나왔을 때, 그들이 목격한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습니까? 폐허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집, 논, 밭,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처참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이 현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집을 짓겠다든지, 농사를 짓겠다든지 하는,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갖는 것이 가능했겠습니까? 그들도 사람이었는데, 좌절과 절망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을 것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에게 복을 주시면서, 이런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동물들을 겁내지 말아라. 너희를 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육식을 공식적으로 허락하겠다. 그리고 약한 자도 맘 놓고 살아라. 살인자를 철저히 다스리겠다. 홍수도 두려워 말아라. 앞으로 다시는 물로 심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홍수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노아와 동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보면, 두렵고 심장이 떨리고 가슴이 턱 막히겠지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걱정 저런 걱정을 해보지만, 대부분은 별 것 아닙니다. 거의가 시간 지나면 해결될 일이고, 걱정해도 소용없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먹는 일, 잠자는 일, 옷을 입는 일, 직업을 갖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평안을 갖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병에 대한 고통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힘들어합니다. 내일 죽더라도 마음의 평안이 있다면 천국의 삶입니다. 사람에게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미래는 어느 누구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다고 안전합니까? 권력이 있다고 안전합니까? 그것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참된 평안이 어디서 옵니까? 믿음에서 옵니다. 무슨 믿음에서 옵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에서 옵니다. 풀 한 포기 없는 광야를 걸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하나님과 멀어졌을 때 그곳이 지옥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깨닫기까지는, 한참 지나고 난 후였습니다. 우리는 노아도 평범한 한 인간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가 완전히 파괴된 현실과 세상을 보면서, 처음부터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괜히 하나님께서 입 아프게, 내가 너와 후손과 모든 생물과 언약을 맺겠다고 반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은 말씀으로 몇 번이고 반복하신 데는, 노아를 거듭거듭 안심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후계자가 여호수아인 것 알 것입니다. 그는 모세의 후계자 수업을 착실히 쌓은 사람입니다. 그는 준비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모세가 죽었을 때, 젊은 여호수아는 떨리는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와 너무 비교되는 현실 앞에, 자기를 컨트롤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합니까? 수 1:9절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지팡이를 주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같은 능력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무엇입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사실 이게 여호수아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 것 같습니까? 모든 인생은 늘 불안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시대를 초월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 41:10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을 붙잡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인생의 힘든 고갯길을 오를 때, 여러분의 심령에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12-1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다시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약속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약속의 증거는 무지개입니다. 하나님은 건망증이 없는 분입니다. 한번 하신 말씀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시는 분입니다. 무지개 같은 것이 없어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계약을 이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계약의 표징으로 삼으셨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일 거 같습니까? ‘무엇이든지 봐야 믿겠다’는, 믿음 없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언약의 표지로 삼으신 것에 대하여, 몇 가지 견해가 있는데, 두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홍수 이전에 아예 무지개라는 현상 자체가 없었고, 노아와 언약을 맺으면서 처음으로 무지개를 만드셨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둘째, 홍수 이전에도 무지개 현상은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 무지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심으로써, 언약의 표지로 삼았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무지개가 홍수 이전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지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물론 무지개가 홍수 이전에 있었느냐, 아니면 노아와 계약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졌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가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 다시는 인류를, 한꺼번에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중요합니다. 무지개라는 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단 말입니다.
13-15절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그럼 무지개가 어디에 있는지 보겠습니다. 무지개가 어디에 있습니까? 구름 속입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심판을, 무지개는 하나님의 자비를 상징합니다. 구름은 인간의 부패를 말하고, 무지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대변합니다. 구름은 아직도 세상에 어둠이 있음을 증언하고, 무지개는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세상에 비추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무지개가 구름 속에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 속에, 하나님의 자비가 감추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자비하게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심판 자체를 즐기시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심판하시는 중에도, 항상 자비의 면을 잃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16절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은 구름 사이에 있는 무지개를 보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보는 무지개입니다. 무지개는 하늘과 땅을 잇고 있습니다. 홍수 때에는 하늘과 땅이 불화했지만, 무지개로 다리가 놓아진 것입니다. 2000년 전 골고다의 언덕에 이상한 무지개가 걸렸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특이한 무지개였습니다. 그것은 피로 채색된 단색 무지개였습니다. 그 무지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 걸어놓으신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끊어진 하늘과 땅을 잇는 하나님의 무지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무지개를 보시고, 죄인들을 긍휼로 용서로 대해주십니다.
17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무지개는 언약의 증거입니다. 노아와 그 후손들은 무지개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구름이 덮고, 비가 내려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무지개 언약보다 더 귀한 언약이 있습니다. 십자가 언약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특별 은혜의 증표입니다. 십자가는 희망의 약속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죠. 일반 은혜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됩니다. 반면에 특별 은혜는 오직 예수 안에서 있는 성도들에게만 해당됩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합니다. 롬 6: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또 고전 1:18절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먹구름을 뚫고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가 떴습니다. 이 십자가는 영원한, 그리고 완전한 희망입니다.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무지개인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먹구름이 몰려와도, 너무 불안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폭우가 그칠 줄 모르고 쏟아져도,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끊어진 하늘과 땅을 잇는 하나님의 무지개인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을 바라보면 사방팔방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형국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국가적으로도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예수 안에서 기억하게 하옵소서.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 시대와 역사를 향하여, 우리의 이웃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무지개가 되어, 살아가게 하옵소서. 갈보리 교회 청년들이 이 시대의 무지개 되어, 하나님의 영광의 약속이 실현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청년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 놀라운 축복에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초대된 것을 감사하고,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 주앞에 세움을 입는 청년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살면서 고난을 당한다 해도 결코 좌절하지 않게 하옵소서. 고난의 구름 속에 있는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우리 일에 최선을 다 할 때, 필요한 지혜를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도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언약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꼭 지키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아무쪼록 험한 세상에 살지라도 희망의 무지개, 그리고 희망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항상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 창 9:18-29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문제가 전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 중에는 건강의 문제로,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몸은 건강한데 돈이 없어서, 불평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족이 많은 사람들 중에는 가족간에 여러가지 갈등의 문제로, 화목하게 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에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외로움의 문제로 괴로워합니다. 공부 잘하고 돈 많이 버는 자녀들 중에는, 부모를 잘 돌보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고, 반면에 부모에 대한 효성은 깊지만, 많이 못 배우고 돈이 없어서 안타까움을 갖게 하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미국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테러와 자연재해의 안전문제로 항상 긴장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얼마 전부터 화산이 터지고 있고, 후쿠시마의 핵 오염물질은 계속해서 바닷속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또 아시아의 여러나라는 경제적인 문제로 큰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문제가 하나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속에서, 자신을 힘들고 괴롭게하는 모든 문제들이, 다 사라지고 없어지기를 소원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성경본문에 기록된 노아는, 자신의 인생속에 있었던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놀라운 경험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노아와 그의 식구는 전세계가 홍수로 멸망을 당할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홍수가 끝나자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대홍수 심판은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도 받았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안전의 문제도 사라지고 없게 되었습니다. 홍수심판이 있기전에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향락에 빠져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노아는 그렇게 살다가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120년동안 심판을 피할수 있는 큰 배를 만들었습니다. 노아가 비 한방물도 오지않는 날씨에, 엄청나게 큰 배를 만들면서 온갖 조롱을 당하며, 바보취급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노아의 경고대로 홍수심판이 있었고, 노아를 조롱하고 바보취급하던 사람들은, 모두 다 사라지고 없어졌습니다. 이제 노아에게 모든 문제들은 다 사라지고, 그 어떠한 불행도 없이 오직 행복만이 시작된 것같았습니다.
우리들도 우리 삶속에 돈, 건강, 명예, 또는 자녀교육과 관련된 문제가 다 사라지면, 오직 행복만이 내 앞에서 나를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사라지지 않으면, 불평과 원망이 생기고, 하루속히 문제로부터 벗어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속의 모든 문제가 사라졌던 노아와 그의 가족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과연 우리도 인생의 문제가 다 사라지면, 자동으로 참 행복이 저절로 굴러오는지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방주에서 나온 후에, 처음에는 폐허에서 농토를 일구느라 죽을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동안 손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고, 비교적 평안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은, 아들 딸 구별 않고 열심히 낳았습니다. 그렇게 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창 9:18-19절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해진 것입니다.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창 9: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걸 보고 너무 성급하게, ‘야, 이제 드디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죄지은 사람들을 심판하셨지만,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죄성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죄성은 잠깐 숨겨지기는 합니다. 얼마는 자기 모습을 감출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본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20절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노아는 홍수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된 땅을, 땀 흘려 개간하고 일구어, 그 땅에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이마에 땀을 닦는 노아의 모습이, 무척 평온해 보입니다. 요즘에야 농사로 돈을 벌어야 하니까, 힘도 들고, 비료도 주고, 농약도 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의 농사는 처음에 심을 때까지만 고생이지, 그 후엔 요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포도 농사가 잘되었습니다. 알알이 맺혀있는 포도송이를 바라보고, 노아는 세상을 다 얻은 듯 흐뭇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적당한 햇빛과 비와 바람을 주셔서, 이렇게 소담스러운 열매가 맺혔구나!’ 하고 생각하니, 자신과 그 가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여간 고마웠습니다. 노아는 식구들과 포도를 수확하여, 그중에 좋은 것을 골라 포도주를 담궜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별다른 문제될 게 없습니다.
21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실제로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은 것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정당한 농사였습니다. 그럼 그가 포도주를 담근 것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포도로 포도주를 담그는 것은 절차상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럼 노아가 포도주를 마신 것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물 사정이 좋지 않은 그쪽 나라 사정상, 포도주는 음료수 대용이었고, 잔치에서 포도주는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것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포도주를 마시면 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한다면, 되레 그게 문제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노아가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것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벌거벗은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없습니다. 그것도 장막 바깥이 아닌, 장막 안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노아의 진짜 문제는 무엇입니까? 아직도 자기 안에 있는 죄성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성을 잊어버린 것이 노아의 결정적인 실책이었습니다.
그럼 노아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노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창 6:9절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도, 그만은 의인으로 살았고, 당대에 완전한 자로 살았으며,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홍수의 심판으로 모든 인류가 모두 멸망할 때에도,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를 그렇게만 보면 안 됩니다. 노아를 의인으로 당대에 완전한 자로, 하나님께 동행하는 사람이 되게 한 뭐가 있었나를 봐야 합니다. 그게 바로 전 절에 나옵니다. 창 6: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바로 노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노아가 의지가 강해서? 심지가 곧아서? 아니면 인간성이 좋아서? 그게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뒤집어 생각하면,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면, 죄의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무슨 일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포도주에 취해 추태를 범하고 있습니다. 벌거벗고 자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녀가 집에 왔는데, 만취한 아버지가 벌거벗고 자고 있다, 그러면 상당한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더구나 아버지가 믿음이 좋은 분이었고,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분이었다면, 그 충격은 더 클 것입니다.
노아가 어쩌다가 그런 실수를 했습니까? 한마디로 방심한 것입니다. 마음을 턱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약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잡은 손이 느슨해진 것입니다. “포도주 몇 잔 정도야 뭐?” 그는 얼마든지 절제하면서 마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삶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홍수 이후에 아무 문제가 없고, 농사도 잘되고, 자녀들도 잘 자라고, 모든 게 잘 돌아갔습니다. 거기다 하나님이 다시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하셨기 때문에,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방심하게 된 것입니다. 안심하되 방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방심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있는데 교만입니다. 우쭐거리는 마음이 슬그머니 올라옵니다. 물론 자기 자신도 모르게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방심은 금물입니다. 잘 될수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일어섰다고 했을 그때 조심해야 합니다. 성공하였을 그때,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무너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베드로가 괜히 이런 편지를 보냈겠습니까? 벧전 5: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신앙생활에는 휴식이나 방학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가끔 보면, 교인들이 스스로 방학을 선포합니다. 일방적으로 ‘나 교회 나가는 것’ 좀 쉬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방심하면, 언제라도 노아 꼴 날 수 있습니다. 노아처럼 망신당할 것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전쟁상황으로 보아야, 긴장을 늦추지 않게 됩니다. 그래야 자신의 마음을 계속하여 지킬 수 있습니다. 가만 보면 익숙한 것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익숙하지 않으면 긴장하지만, 일단 익숙해지면 방심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 이 찬송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찬양하는데, 정신을 집중하지 않습니다. 대개 아는 노래를 성의 없이 부를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본문으로 처음 설교를 듣는 것처럼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말씀대로 살지도 않으면서, 그 말씀에 대해 조금 아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려고 합니다. “방심하면 넘어집니다.”
22절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아버지의 한 순간의 실수가, 아들의 인생, 더 나아가 자손의 인생에까지,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보고”와 “알리매”라는 동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다”는 ‘지나가다가 슬쩍 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흥미 있게 계속해서 주목했다’는 의미입니다. 곧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는 말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그 광경을 보면서 계속 즐겼다는 말입니다. 함의 태도는 이웃의 실수를 즐기는 자세를 가졌던 것입니다. “알리매”는 ‘고발한다’는 뜻입니다. 함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염려가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함에게서 이웃의 아픔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재미있는 얘기 거리가 하나 생긴 것으로 생각하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떠벌리고 다니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또 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이 맘에 안 들었는데, 확실한 꼬투리 하나 잡고 음흉한 미소를 짓는 거 같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약점이나 실수에 대하여는 관대한 편입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쉽게 용서하면서 삽니다.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일종의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의 실수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투철한 고발정신을 가지고 비판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그런 일이 다시 있어서도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우리는 한 가지 실수로,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한 사람을 전체적으로 평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한 가지 실수로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앉는다는 말입니다. “그거 한 가지만 보면 다 알 수 있다”는 말은,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런 태도는 본문에 나오는 함의 태도입니다. 그런 삶의 자세는 복 받지 못할 태도입니다. 함의 태도와는 사뭇 대조되는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삼하 1:17-18절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괜히 하나님이 다윗을 마음에 들어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도망생활을 끝낼 수 있게 되었다며, 쾌재를 부를 법도 하건마는, 애가를 부릅니다. 우리가 다윗이라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그토록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상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처럼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셈과 야벳은 어떻게 했습니까? 23절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그들 두 사람은 함과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기서 “어깨에 메고”와 “덮었으며”란 동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깨에 메고”는 봉사하는 종의 태도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실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아들들은 아버지 섬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덮었으며”는 가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아들들은 아버지의 잘못을 덮어줍니다. 아버지가 실수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인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벧전 4:8절은 이렇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성경은 이런 비판을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마 7:1-2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주님은 분명하고도 쉽게 말씀하십니다. 거품을 물고 비판을 하는데, 그 비판이 고스란히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말 아닙니까? 주님의 대부분의 말씀은 관계의 측면에서 하셨습니다. 네가 용서해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씀은 대표적입니다.
노아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성경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아, 결정적으로 알 수 없지만, 노아가 지금까지 살았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노아는 누구보다도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심판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서 살아난 사람입니다. 이런 그가 오랜 세월이 흐르고, 모든 환경이 평안했을 때,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아무리 성자처럼 살고 존경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역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그냥 해본 말이 아닙니다. 롬 3:10-12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윤리 도덕적으로 훌륭해 보이고, 인격적으로 탁월해 보이고, 신앙적으로 든든해 보여도, 사람이라면 언제나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존경받던 학자도,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던 목회자도, 어느 순간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항상 열려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너무 믿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지나치게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주변에 있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동안 존경하던 사람이 무너지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묵묵히 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다윗 같은 사람을 보세요. 그렇게 훌륭하고, 하나님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다윗도,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서 방심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러,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고난을 겪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야속하지만 현실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죄성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노아의 노아 됨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노아도 실수할 기회가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감싸주었고 보호해 주셔서,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이지, 노아가 잘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하나님께서 들추어내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 앞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들고 밖에 나다닐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율법의 시각보다는 은혜의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야벳과 셈은 함을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셈이 동생인 함에게 한 마디 할 법도 한데, 전혀 말이 없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기를 좋아합니다. 크게 앞서 있지도 않으면서, 자꾸 남을 지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야벳과 셈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각을 갖고 있으니까, 아버지의 도덕적 타락이 함에게는 굉장히 큰 문제였지만, 셈과 야벳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게 문제가 없는 사람은 만사가 문제가 되지 않고, 내게 문제가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문제가 됩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그저 지나가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건드리면 문제가 되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용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자식은 부모를 용납해야 합니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가 완전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부모도 연약한 인간인 이상 완전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고, 살아계신 분도 계시겠지만, 셈과 야벳처럼 부모님의 허물을 덮어주기 바랍니다. 또한 부모는 자식을 용납해야 합니다. 친자식이든 양자든, 며느리든 사위든 용납해야 합니다.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교한다고 나아질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비교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치고 행복한 사람은, 단 1%도 없습니다. 또한 남편을 용납하기 바랍니다.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너무 구박하지 말고, 제대로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자신을 책하고, 그를 위해 더 기도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허물을 돌리기 바랍니다. 또한 아내를 용납하기 바랍니다. 몸이 약해 약봉지를 달고 산다고 해도, 내조하는 것이 크게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부족함을 덮어주고 용납하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난해합니다. 24절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노아가 술이 깨어 사건의 이야기를 듣고, 함이 괘씸하게 생각되어, 그를 저주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도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우리는 노아의 예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시기적으로 예언의 말씀을 하필 그때 해서, 함에게 보복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은, 노아의 실수라고 보아야 합니다. 노아 자신에게도 불행이고, 함의 아들들에게도 불행입니다. 노아는 이중 불행을 겪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자와 회중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의 관계가 좋을 때는, 설교에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틀어져 있을 때는, 설교에 시험들 수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설교자와 설교자의 가족도 용납해 주기 바랍니다.
노아의 예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5-27절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가나안은 저주의 예언을 받고 셈과 야벳은 축복의 예언을 받습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한 것은, 셈은 존귀한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 후손도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는 말은 야벳의 지경을 넓히신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가장 넓은 지역으로 퍼진 사람들이 야벳의 후손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복 받은 것은 셈의 장막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샘의 장막에 거하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28-29절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28-29절 말씀으로 노아의 이야기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노아의 삼백 오십년은 크게 행복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자식들 앞에서도 한번 추락한 권위를 되찾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인생의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는 훨씬 못했습니다. 우리의 지금까지 삶은, 인생의 전반부였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인생의 후반부가 남아 있습니다. 인생의 전반부보다 후반부가 더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전반부보다 후반부가 자손들 앞에서 더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전반부보다 후반부가 공동체 내에서 더 존귀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목회를 하면서 느낀 것은,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그리고 가장 무의식적으로 짓는 죄가, 입술의 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무너뜨릴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총과 칼이 아니라, 바로 입술의 말이라는 사실도 절감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 입술로 짓는 죄는, 나 한 사람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저주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저주의 통로로 쓰임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인생에, 문제가 있든 없든 변함없이,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적으로 늘 깨어 긴장함으로, 죄의 유혹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또한 혹시 남의 허물을 발견하면, 나도 허물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허물이 용서받았음을, 먼저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남의 허물을 전함으로 저주의 통로가 아니라, 허물을 덮어줌으로 축복의 통로로 귀하게 쓰임받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노아는 사람들의 조롱과 박해를 받을 때에는,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죄와 싸워 승리했지만, 자신을 힘들게 하던 사람들이 모두 심판을 받고 사라지자, 영적으로 잠들고 긴장이 풀어지고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결국 대홍수 심판을 받았던 사람들처럼, 술 취하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저희들 역시 문제가 있다고 불평하고, 문제가 없어지기만을 원하기 보다는,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과 기도와 봉사의 삶을 통해서 깨어있게 하옵소서. 또한 아버지의 허물을 보고, 그 허물을 덮어주기 보다는, 남에게 허물을 거듭거듭 전하여, 자신의 아들이 저주를 받았던 함처럼 살지 않게 하옵소서. 남의 허물을 볼 때마다, 먼저 나의 허물을 보며, 나의 허물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기억하고, 형제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그래서 특별히 입술로 짓는 죄를 짓지 않게 하옵소서. 나의 입술로 짓는 죄는 나만 더럽힐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저주의 통로로 쓰일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허물을 덮어준 셈과 야벳처럼,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는 귀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