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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물리학적 관점에서 본 반야심경)
반야심경(물리학적 관점에서 본 반야심경)
- 불교 깨달음통해 진리 꿰뚫는 종교-
- 관찰보다 직관중시 초과학적 세계 -
언젠가 한 종교인이 불교의 윤회설과 연기설에 의문을 품고 “모든 것이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하지만 달 위에 돌맹이가 하나 떨어졌다고 해서 지구에 사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말씀입니까?”라며 “돼지와 사람이 같다는 뜻입니까?”하고 질문을 던진적이 있다. 지진이 크게 나서 수십만이 죽어도 지진의 영향을 받는 곳만 받을 뿐인데, 달에 돌멩이가 하나 떨어졌다고 해서 지구에 사는 우리들에게 무슨 영향이 있겠는가? 분명히 돼지와 사람은 다른 것인데 어떻게 다른 것끼리 서로 바뀔 수 있겠는가? 따라서 윤회설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며 연기설은 적당히 가감해서 해석할 것이지 글자그대로 모든 것이 서로 밀접히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뜻을 이 질문은 담고 있다. 상식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런데 한라산에 사는 나비 한마리의 날개짓이 몇개월 후 서울에 폭우를 몰고 올 수도 있다. 생명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전자(電子)라는 소립자(素粒子)와 생명활동과는 관계도 없고 태양과 지구사이를 납으로 꽉채워 놓아도 텅빈 공간처럼 관통해 버리는 중성미자(中性微子, meutrino)라는 소립자를 한가지 소립자의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면 위의 질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종교는 성자의 깨달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분명한데 종교적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유익한 내용을 찾아 읽으려 해도 쉽게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이 일반논리에 모순되는 경우에 더욱 그렇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을 핵심만 골라 압축하여 놓은 <반야심경>은 온통 일반논리 또는 단순논리와 모순되는 말로 가득차 있다. 반야심경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도 성자의 가르침을 진실이라 믿고 받아들이려는 불교도의 입장에서이지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멧을 윽박지른 아랍인들이라면 반야심경의 내용을 듣자마자 한 칼에 토막을 내버렸을 것이다.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고 신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성자 마호멧이 세상에 내려 왔을 때 아랍인들은 마호멧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단순 명쾌한 증거를 요구하였다.“네가 진정 신의 사도라면 저 달을 둘로 쪼개어 봐라. 전지전능한 창 조주가 너를 위해 저 달을 쪼개면 네 말을 믿겠고 그렇지 않으면 너는 거짓말쟁이 니까 이 칼로 네 목을 치겠다” 이에 절망한 마호멧이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신 이여 어찌 하리이까”하고 괴로움을 호소했을때 마호멧의 손을 따라 밤하늘을 쳐 다보던 사람들은 달이 둘로 갈라진 것을 보았다고 한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 요하겠는가. 마호멧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면 그뿐이지.
종교에 불교 도교 유교와 같은 깨달음의 종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같은 믿음 의 종교가 있듯이 사물을 보고 진리를 찾는 방법에도 두가지가 있다. 깨달음을 통 해 직관으로 진리를 꿰뚫어보는 방법과 세밀한 관찰과 검증을 통해 법칙을 찾아내 고 다시 확인하는 방법이다. 종교적 성자가 대개 전자의 방법을 취한다면 자연과 학자는 주로 후자의 방법을 택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뜻에서 자연과학은 아랍인 의 눈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리학은 날카로운 칼이다. 모든 자연 현상, 천문학적 현상이든 과학적 현상이든 심지어는 생명체 내에서 일어나는 현상마저도 물질적인 것이라면 정확히 물리학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
* <약력>
•1968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 73년 서울대 대학원 물리학과 석사.
•75~79년 와싱턴대 대학원 물리학과 박사 과정이수(소립자 물리학이론)
•79년 충남대학교 교수
•87~88년 독일 훔볼트대 교환교수
•94~95년 미국 비라운대 교환교수- ‘오온개공’ 직관으로 꿰뚫어보아야 확연-
- 경험•지식•사고 넓히려면 큰지혜 필요-
반야심경과 물리학<2>분별지의 한계
반야심경의 첫머리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으로 시작한다. 우리가 일상적 경험의 세계에서 사물을 볼 때는 분명히 공(空)이 아니다. 그런데도 경(經)은 말하기를 반야로 볼 때는 오관으로 본 모든 것이 사실은 공(空)이라고 하였다. 경이 맞다면 우리가 오관으로 본 것이 사실은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면 현대물리학은 ‘오온개공’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많은 물리학자들이 시공간(時空間)과 물질 모두가 무(無)에서 나왔다고 추론하고 있다.
물리학자들이 오랜 노력과 많은 논쟁끝에 최근에야 관찰한 바를 경전의 저자는 어떻게 2천년도 넘는 이전에 ‘오온개공’이라는 말을 대담하게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경전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반야로 비추어 볼 때 오온개공이라고 하였다. 반야는 오관으로 경험하고 생각으로 헤아리는 분별지(分別智)가 아니고, 직관으로 꿰뚫어 보는 직관지(直觀智)를 뜻한다. 모든 사물의 진실을 한꺼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반야지(般若智)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인지를 반야지가 없는 사람이 헤아릴 길은 없지만 적어도 분별지가 무엇인지를 말할 수는 있다. 분별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경전이 말하는 바가 왜 그렇게 일상적 경험이나 사고방식과 다른가를 헤아릴 길이 있는데 분별지에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엄밀한 수학적 증명이 있다. 이 증명을 괴델(Kurt F. Godel, 1906~1978)의 ‘불완전성 정리’라고 하는데 이해하기가 의외로 쉽다. 미적분학의 발견을 놓고 공을 다룬 위대한 물리학자 뉴턴(Newton)과 철학자 라이프니츠(Leibnitz)사이에 다음과 같은 두가지 언쟁이 있었다고 하자.
A. 뉴턴: 라이프니츠는 거짓말쟁이다.
라이프니츠: 뉴턴은 거짓말쟁이다.
B. 뉴턴: 라이프니츠는 거짓말쟁이다.
라이프니츠: 뉴턴은 정직한 사람이다.
A의 경우 뉴턴이 정직한 사람이라면 뉴턴의 말은 진실이고 라이프니츠의 말은 거짓일 것이므로 “뉴턴은 정직한 사람이고 라이프니츠는 거짓말쟁이”라는 결론이 쉽게 나온다. 반대로 뉴턴이 거짓말쟁이라고 해도 모순없이 반대의 결론은 얻을 수 있다.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지 A와 같은 언쟁에는 논리적으로 모순없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A와 같은 경우만 있다면 단순논리로 판단한 것이 언제나 옳을 것이다.
B와 같은 언쟁이 있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인간의 논리로는 뉴턴이 정직한 사람이거나 거짓말쟁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가정하더라도 여기에는 모순이 따른다. 뉴턴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가정한다면 아니 그보다 뉴턴이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떤 방법에 의해 밝혔다고 하자. 그러면 뉴턴의 말은 진실이므로 라이프니츠는 거짓말을 했어야 하는데 “뉴턴이 정직한 사람이다”라고 했으니 라이프니츠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따라서 뉴턴이 거짓말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뉴턴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밝혔다는 것은 어떻게 되는가? 뉴턴이 거짓말쟁이라고 가정해도 논리적 모순이 따른다.
인간 지성의 결정체가 수학이고 수학에는 모순이 없어야 한다. 오래전부터 수학의 체계에는 모순이 없음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그만 엉뚱한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이 엉뚱한 결과를 불완전성 정리라고 하는데 풀이하여 설명하자면 “분별지로 시비를 가리려들면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언쟁사례 B와같은 경우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과 “분별지로 판단한 것이 옳다라는 것을 확인하려면 더 큰 지혜가 필요하며 이 큰 지혜가 판단한 것도 또 더 큰 지혜가 있어야하고 이렇게 한없이 큰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경전의 첫머리는 바로 이 분별지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그냥 오온개공이 아니라 반야를 들어 오온개공이라고 설하므로써 분별지의 한계를 지적하고 반야로 비출 때 오온개공이라고 선언하였는데 수학이 이 분별지의 한계를 증명하였고 물리학이 자연현상에서 입자 파동의 이중성을 관찰하므로써 단순논리의 한계를 발견하고 나아가 오온개공을 추론하게 된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3>고전물리학의 우주론
- 결정론적 인과론 전제로 사물본질 분석-
- 양자역학 탄생으로 기계론적 사고 붕괴-
현대 물리학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흑백(黑白)이 분명한 아랍인의 논리가 서양인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랍에 이런 얘기가 있다.
바그다드의 한 노예가 주인의 심부름으로 시내에 물건을 사러 가는 길에 죽음의 신을 만났다. 너무 놀란 나머지 노예는 심부름을 팽개치고 주인에게로 되돌아와 까닭을 말하였다. 노예의 말을 들은 주인은 크게 노했다. “신이 약속을 어기다니! 내 노예를 적어도 바그다드에서는 잡아가지 않기로 했는데 바그다드에서 너를 잡아가려고 하다니! 너는 지금 바로 사가랴로 떠나거라. 오늘 저녁 해질 무렵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꺼야.” 말을 끝내고서 주인은 즉시 천상으로 올라가 죽음의 신을 만났다. 주인이 따지자 이번엔 신이 크게 외쳤다. “무슨 소리야 놀란 건 내 쪽이야. 나는 오늘 해가 지면 그를 사가랴에서 잡기로 되어 있었는데 낮에 바그다드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놀랐겠어.”
삼라만상 모두가 결정론적 인과론에 따라 이미 결정되었다는 생각이 인도의 서쪽지방 사람들의 머리를 사로잡고 있었다. 칼빈(John Calvin)은 신의 구원마저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그리고 고전물리학이 이 결정론적 인과율은 뒷바침해 주었다. 과거 5천년동안 별들의 운행을 관찰하고 물체의 운동을 관찰한 끝에 뉴턴에 의해 정리된 고전역학의 법칙은 아랍인식의 단순논리에 꼭 들어 맞았다.
물리학자들은 지난 19세기말까지 모든 자연현상이 뉴턴의 고전역학적 법칙을 따라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았다.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고전역학이 자연현상을 너무나 잘 설명하였기에 라플라스(Laplacie)같은 학자는 우주에 있는 모든 입자들의 속도와 위치를 어느 순간 알기만 하면 우주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알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말에 의심을 품는 학자는 없었다.
고전역학은 절대 시공간(絶對 視空間)의 존재를 전제로한다. 절대시공간이란 물질이 있건 없건 텅빈 시공간이 펼쳐져 있는 것을 뜻한다. 누가 측정해도 물체의 길이는 꼭 같고 시간의 길이도 꼭 같다. 이 시공간에 객관적 실체인 물질이 있어 인상적 경험세계에서 보는 물체와 별들을 이루는 것이다. 객관적 실체란 누가보든 또는 보지 않든 거기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뜻인데 현대물리학 이나 반야심경의 내용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이점이다. 이렇게 객관적 실 체를 인정하고 모든 물체는 뉴턴의 역학적 법칙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는 것이 고전역학이 갖는 물질•우주관이다. 운동방정식의 답은 수학적으로 구할 수 있고 측정할 필요가 있는 것은 어느 순간에 물체가 갖는 속도와 위치인데 속도와 위치는 원리적으로 한없이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으니 물체의 운동에 따라 나타나 는 자연의 변화에 관하여 모를 것이 없었다. 즉 우주는 거대하고 정교한 기계에 불과하였다.
고전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실체와 허상, 유(有)와 무(無)등 이원론적이고 대립되 는 개념들을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므로 실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알고 보니 허상에 불과하다거나 무에서 유가 나온다는 식의 발상은 생각도 할 수 없었 다. 고전역학적 관점에서 보면 선(善)과 악(惡) 신과 악마 물질과 정신은 모두 선 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기에 모든 것을 물질로 설명하려는 유물론의 등장도 필연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명이 탄생하기 이전 태초의 성운(星雲)속에 이미 섹스피어(William Shakespere)의 문학이 들어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실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면 그래야 옳을 것이다.
한치의 빈틈도 없어 보이던 이 기계론적 우주관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였다. 빛의 속도는 누가 관측해도 일정하다는 사실이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의 상대성 이론을 낳게 하였고 입자-파동의 이중성(二重性)을 관 찰하므로써 과학에 혁명을 가져오는 양자역학(量子力學)이 탄생하게 된다.
양자역학을 통해서야 비로서 반야심경을 물리학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김성구<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4>이중성 발견과 고전역학
- 고전역학 절대불변의 인과세계 실체 인정 -
- 입자 파동 이중성 발견후 보는시각 달라져 -
고전역학적 우주관은 바로 인과의 세계를 뜻한다. 불교적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인과의 사슬에 묶여 돌고도는 생사윤회의 세계를 뜻한다.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꼼짝달싹할 수 없이 결정되어 있기에 적극적인 수행도 의미를 잃는다. 적극적인 수행마저 그렇게 되도록 인연따라 결정되어 있으니 수행을 하지 않은들 인연이 그런걸 본인에게 무슨책임이 있겠는가. 결정된 과보를 받도록 되어 있는데 누가 어떻게 그 인연과보를 끊을 수 있겠는가.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인과율이 절대적이라면 불교가 설 땅은 없다. 실제로 불교가 인도의 서쪽지방, 이란 아랍 그리스등에 알려졌지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고전역학은 객관적 실체를 인정하므로써 보는 것 듣는 것이 있는 그대로 질서정연하게 존재한다고 본다. 누가 거기에 그것이 있다고 인식하므로써 그것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는 상관없이 그것은 거기에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 일상적 경험으로 볼 때는 옳게 들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야심경은 오온개공이라고 설했다. 이제 현대물리학의 탄생과정을 살펴보고 어떻게 물리학자들이 일상적 경험의 세계를 뛰어 넘는지 반야심경의 내용과 비교하여 보기로 하자. 사건은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관찰하므로써 시작된다.
사람은 사물을 두가지 대립되는 개념으로 나누어 보려는 경향이 있다. 실체와 허상, 유와 무, 선과 악 등인데 물질세계에서 나타나는 입자와 파동도 이 대립되는 개념에 속한다. 미리 말해 둘 것은 현대물리학에서는 입자-파동의 이중성에서 말하는 파동을 사람이 입자를 발견할 확률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여 기이한 세계로 사람을 끌고 가지만 이중성이 논리적 모순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고전물리학에 길들여져 있던 물리학자들은 이 파동을 물질이 파동의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입자에 대립되는 개념인 물질파로 보았기에 논리적 모순을 가져왔다. 이중성이란 말도 그래서 생겨난 것이다. 물질파로 해석하여도 자연현상을 설명하는데 별 지장은 없으므로 먼저 물질파와 입자에 관해 설명하겠다.
고전물리학에서 입자의 개념은 단순하다. 질량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주위에 있는 물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 입자다. 입자는 실체를 뜻한다. 이에 반해 파동은 실체가 운동하므로써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을 뜻하므로 허상이다. 물결파를 예로 들면 실 체인 물이 진동하여 나타나는 현상이 물결파다. 존재하는 것은 물이다. 물결파는 물이 없으면 나타나지도 않지만 물은 물결파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존재한다. 실 체와 허상에 불과한 하나의 현상이 서로 명확히 구분되는 개념이라면 실체인 입자 가 파동처럼 행동할 수 없고 파동이 입자처럼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입자 는 일정한 공간내에 머물러 있을 수 있지만 파동은 머무른다는 법이 없다. 물결파 가 생기면 전체 수면으로 퍼져 나가듯이 파동은 반드시 퍼져나간다. 한곳에 머물 러 있을 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것이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면 자연현상에서 입자 -파동의 이중성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호수의 이쪽과 저쪽에서 돌을 던져 두군데서 물결파를 만들더라도 결국 합쳐서 하나가 되어 간섭현상(Interfernce)라 는 현상을 만든다. 입자는 하나, 둘 이렇게 떼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며 하나와 하나가 모이면 둘이 되는데 반해 파동은 둘이 합쳐 반드시 하나가 되지만 그것의 세기는 두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네배가 되기도 하고 아예 소멸해서 없어지기도 한다. 입자는 당구공끼리 부딪쳐서 서로 튕겨내는 것처럼 운동량(運動量)을 주고 받지만 파동은 운동량을 갖지 않으므로 물체를 튕겨낼 수 없다.
입자와 파동은 이렇게 다른 것인데 파동의 성질만 보여오던 빛이 입자인 전자를 때려 튕겨내는 현상을 물리학자들이 관찰하게 되고 실험적으로 빛의 이중성을 확 인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입자라고 생각했던 전자가 파동의 성질을 보이는 것을 관찰하게 되고 나아가 모든 입자가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갖는다는 것을 확인하 게 된다.
이 새로운 현상은 사물의 본질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것을 요구하며 실제로 새로 운 세계로 물리학자들을 이끈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5>오온개공
- 불교의 ‘공’ 이란 모든 창조의 근원-
- 현대과학도‘진공’복잡구조 밝혀내 -
물리학자들이 자연현상에서 이중성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사람이 분별지로 반야심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오직 반야지를 터득한 사람들만이 직관으로 그 무엇을 꿰뚫어 보고 반야심경이 말하는 공(空)을 이해하고 불조(佛祖)의 가르침을 받들고 따를 뿐 대부분의 불교도들에게 부처님은 단순한 경배의 대상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분별지에 관한한 세계 제일의 지혜자로 칭송받던 사리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리불에게 관자재보살은 오온개공을 풀어서 차근차근 “색불이공…”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풀어서 설하기 전에 반야심경은 먼저 오온개공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공(空)을 볼 수 있는 반야의 경지에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현대물리학은 나름대로의 관찰을 통해서 경전이 말한 내용과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와있다. 이해의 첫걸음이 바로 입자-파동의 이중성에 대한 물리학적 해석이다.
오관으로 사물을 볼 때 존재하는 것은 물질뿐이다. 그런데 이 물질들이 거기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사람이 거기서 그렇게 창조해서 보기 때문이라고 현대 물리학은 설명한다. 창조라는 말대신 그 무엇을 현재 사람이 보고 있는대로 변형시켜서 본다고 일반적으로 설명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창조라는 말이 더 적합한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여기에 무엇이 있다고 오관으로 파악하기 전에는 무엇이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이 원자의 구조를 설명할 때 원자는 대부분 텅텅비어 있고 작은 원자핵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지만 실제로 전자가 어떤 일정한궤도를 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전자가 구름처럼 원자핵 주의에 퍼져 있다고도 설명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퍼져 있는 것도 아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측정해서 볼 때까지 실체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다. 오직 갖가지 가능성만이 있는 것이다. 측정하면 어디에선가 전자를 볼 수 있지만 측정하기 전에도 사람이 몰라서 그렇지 어딘가에 있을 것아니냐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틀린 생각이다. 존재할 확율만 있고 어디에도 있지 않은데 사람이 어딘가에서 전자를 창조해서 본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이다.
존재할 확율만 있는 가운데서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공(空)이라는 말이 존재의 본질 또는 실상을 나타내는 가장 적합한 말인데, 갖가지 형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을 공이라 불렀기에 이것은 그냥 비어 있는 것이라고 하면 진실이 아니다. 실체라고 할 수도 없지만 갖가지를 창조해낼 수 있는 것이 공(空)이다. 이러한 공은 물리적 방법으로는 찾아낼 수도 없고 묘사할 수도 없다. 오직 가능한 여러가지 상태의 합(合)으로만 그려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보는 것만을 물리학에서는 물리적 실체라고 부르는데 이 물리적 실체는 실상 우리가 창조해낸 것이고 그 너머에서 무엇인가 진실을 찾으려고 해봐야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현대물리학에서는 상보성 원리(相褓性 原理)라고 부른다. 이 상보성 원리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시 자세한 설명을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공(空)의 또다른 물리적 측면에 관해서 설명하겠다.
일정한 공간(空間)에서 물질을 모두 제거하면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가 되는데 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물리학자들은 진공(眞空)이라고 부른다. 1930년까지는 모든 물리학자들이 진공은 그냥 비어 있기만 한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1930년 쯤에 영국의 디락(Dirae)이라는 물리학자가 이 진공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는 주장과 더불어 이 진공에 구멍을 뚫을 수 있고 진공에 뚫어진 구멍이 입자와 똑같은 행동을 한다는 이론을 세웠다. 진공에 뚫어진 구멍을 반입자(反粒子)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이 반입자를 1932년에 발견하였고 오늘날에는 진공이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든 물리학자들이 믿고 있다.
물리학이 밝힌 것만으로도 진리를 설명하기에 적합한 말이 있다면 오온개공밖에 없을 것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6>색불이공 공불이색
- ‘입자-반입자 생성소멸’은 색즉시공 세계 -
- ‘빈상자안엔 결합된 입자반입자 꽉 차있어 -
반야심경은 오온개공을 설한 후 바로 오온개공의 의미를 하나씩 풀어서 설명하는데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짧은 경전이어서 말을 아껴씀이 분명한데도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렇게 같은 뜻의 말을 네번 반복한다. 단순히 강조하기 위해서라면 오온개공 다음 색즉시공이라고 한마디만 덧붙여도 충분할텐데 같은 뜻처럼 들리는 말을 네번 반복한다. 그것도 비록 분별지이긴 하나 지혜제일이라고 불리우는 사리불에게 네번씩이나 같은 뜻의 말을 하고 있다. 이말외에 다른 말은 경전어디에도 반복되는 말이 없다. 색불이공과 공불이색, 색즉시공과 공즉시색은 분명히 다른 뜻이거나 꼭 그렇게 네번 반복할 필요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사실 물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렇게 구분해서 쓸 필요가 있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되므로 물즉 얼음이요 얼음즉 물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만일 물이 얼음이 되긴 하지만 얼음이 물이 되는 일이 결코 없다면 물즉 얼음이요 얼음즉 물이라고는 못할 것이다. 이 때는 고작해야 빙불이수(氷不異水) 즉 얼음은 물과 다르지않다는 말을 쓰거나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여 빙출어수(氷出於水)라고 하여 얼음은 물에서 나왔다고 말을 해야할 것이다.
반야심경은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고 설한다. 물질은 공에서 나왔으므로 물질은 공과 다르지 않으며 다시 물질은 공으로 돌아갈 수 있으므로 공은 물질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경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단언한다. 공에서 물질이 나오고 물질이 공으로 돌아가는 변화를 생각할 필요도 없이 물질이 그대로 공한 것이요 공한 것이 그대로 물질세계를 이룬다는 뜻이다. 실로 엄청난 선언이지만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의 뜻을 네 마디의 말이 갖는다면 경전은 꼭 그렇게 네 마디의 비슷한 말을 써야할 것이다. 이제 공의 의미를 축소시켜 물리적 진공(眞空) 상태만 생각하고 색과 공의 작용을 살펴보기로하자. 즉 색불이공 공불이색 이 두마디의 뜻만 살펴보기로 한다. 작용없이 그대로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다라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훨씬 긴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은 1932년에 반입자(反粒子)를 발견하였다. 물질의 기본을 이루는 입자를 소립자(素粒子)라고 부르는데 여러 종류의 소립자가 있다. 또 모든 종류의 소립자마다 정확히 대응되는 반입자가 있다. 반입자의 물리적 성질은 입자와 정확히 반대가 된다. 예를 들면 전자의 전기량(電氣量)을 “-1”이라고 한다면 반입자인 양전자(陽電子)의 전기량은 “+1”이다. 그리고 전자와 양전자의 질량은 꼭 같다. 물리적 진공을 일반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여러가지 비유를 들지만 여기서는 그대로 현대물리학적 설명만 하겠다. 물리적 진공이란 입자와 반입자가 결합하여 꽉차 있는 상태이다. 물질이 없는 빈상자를 생각하면 좋다. 아무 것도 없이 텅텅비어있는 그 상자는 사실 입자와 반입자가 서로 결합하여 빈틈없이 차있는 상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빈틈이 없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입자와 반입자가 결합한다고 해서 모두 진공이 되는 것이 아니다. 결합한 상태의 에너지가 영(零)보다 크면 관측이 되고 영보다 작으면 즉 에너지의 부호가 음(陰)인 ‘-’이면 관측되지 않고 진공상태로 보이게 된다. 왜 그렇게 되는가를 물리학이 설명할 수는 없다. 관측사실이 그럴 뿐이다. 입자와 반입자가 결합하여 음의 에너지를 갖고 빈틈없이 채워진 상자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 강한 양(陽)의 에너지를 진공에 가하면 진공에서 입자가 나오고 구멍이 뚫리는데 이 구멍이 바로 반입자다. 사실 구멍을 반입자라고 부른 것은 진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때의 얘기고 지금은 뚫어진 구멍을 그대로 반입자라고 부른다. 이렇게 쌍으로 나온 입자와 반입자가 서로 만나면 질량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방출하고 소멸하여 없어진다. 즉 다시 진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입자-반입자의 생성과 소멸을 쌍생성, 쌍소멸이라고 부른다.
쌍생성과 쌍소멸을 표현하기에 공불이색 색불이공이라는 말보다 더 적절한 말이 있을까?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7>색즉시공 공즉시색
- 물리적 진공, 복잡한 그물망으로 연결- <br> - 색계도 단면일뿐 …모든것 서로 이어져 - <br> <br> 물리적 진공에 에너지를 주었을 때 입자-반입자의 쌍이 생성되는 쌍생성, 입자와 반입자가 만나 에너지를 방출하고 자신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소멸되는 쌍소멸의 현상만으로도 반야심경이 표현한 공불이색 색불이공은 더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잘된 표현이지만 쌍생성과 쌍소멸은 물리적 진공의 성질을 나타내는 현상중 지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진공은 기술(記述)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상태에 있다. <p> 우주에 있는 모든 물질은 몇가지 종류의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소립자마다 짝이 되는 반입자가 있는데 입자-반입자가 결합하여 서로서로 끊임없는 상속작용을 하면서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는 것이 물리적 진공이다. 이 그물망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창조와 소멸을 되풀이 하고있다. 끝없이 쌍생성과 쌍소멸도 일어난다. 그뿐 아니라 갖가지 종류의 입자와 반입자가 제멋대로 생겨났다가 제멋대로 사라지는데 단지 인간에게 관측되지 않고 그물망 속에서 일어났다 없어지는 것이다. 이 그물망은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고 끊어진데도 없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물망으로 서로 연결된 것은 인간이 볼 수 없다. 강한 에너지를 주면 이 그물망의 한 곳을 절단할 수 있는데 절단면이 바로 우리가 보는 물질계를 이루는 입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철사줄로 된 그물망을 예로 들겠다. 철사망의 한곳을 잘라 철사를 구부리면 두개의 면이 나타난다. 한쪽면이 입자이고 다른 면이 반입자다. 실제의 그물망은 두곳을 잘라 철사조각 하나를 완전히 그물망에서 들어낼 수 있지만 진공의 그물망에서는 철사조각 하나를 완전히 들어낼 수가 없다. 철사조각 하나를 들어냈다고 가정하더라도 철사조각 중간부분이 다시 다른 철사줄로 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상상하면 된다. <p> 그물망을 이루고 있는 입자를 가상입자(假想粒子, Virtual Particl)라 부르고 우리가 보는 물질계 즉 색계(色界)를 이루는 입자를 그냥 입자라 부를뿐 가상입자나 실제입자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색계를 이루는 입자도 다른 입자와의 관계를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입자를 주고 받음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색계의 입자 모두는 다시 철사줄에 비유한 가상입자를 통해 진공의 그물망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실제의 입자는 단지 잘라진 철사줄의 절단면에 불과하다. 그리고 서로의 관계를 나타내는 가상입자는 철사줄이다. 실제로 물리학자들은 이와같은 그물망으로 물리현상을 다루며 계산하고 있다. 그러니 색계라고 해서 진공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그 무엇이 아니라 단지 그물망의 여러곳을 절단하여 철사를 구부려 그면이 보이게 했을 때 보이는 절단면에 불과하다. 중요하기에 한번 더 강조하지만 색계를 절단면으로 보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물리학자들이 실제 문제를 풀고 계산하는 방법이요 모델이다. <p> 그물망과 절단면은 자연에 대한 실제모델이니 즉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의 입자가 절단면에 불과하다면 연결되지 않고 존재하는 절단면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물망의 모델대로 입자는 가상입자를 주고받으면서 다른 입자와 연결되어 있고 이것들 즉 색계는 다시 진공과 가상입자를 주고받으면서 연결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 상호작용의 효과를 실제로 이론적으로 계산하고 실험적으로 측정한 것은 대략 50년전 쯤의 일이다. 이것을 최초로 계산한 사람은 램(Lamb)인데 색계와 진공과의 상호작용에 관해 램이 발견한 효과를 램-이동(Lamb Shift)이라 부른다. <p> 색계가 단순히 그물망의 절단면에 불과하고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이것을 색불이공이라 불러야 할까? 공불이색이라 불러야 할까? 이 두마디의 말은 어딘가 부족한데가 있다. 그대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닌가! <br> 그렇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그냥 진공에나 있는 하나의 절단된 자극에 불과하다. 그러니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일 수 밖에…. 물리학자들이 사용하는 그물망의 모델을 표현할 말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떠나 달리 찾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한눈에 꿰뚫어보는 반야지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p>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br> </font> </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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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과 물리학<8>적극적의미의 공
- 공은 상호작용하는 만물의 실상표현-
- 전체가 하나 이루며 제각각 역할달라-
입자와 입자 사이에 힘을 주고 받는 상호작용을 물리학자들은 수식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화인만 그래프(Feynman Graph)라는 그림으로 표시하기도 한다. 이 그래프를 그려보면 물리적 진공을 이루는 가상입자들과 우리의 경험세계에서 보는 입자들 모두가 또다른 가상입자들로 연결되어 색(色)이나 공(空)이나 구별없이 전체가 하나를 이룬다. 가상입자들이라 해서 보이는 입자와 다른 것이 아니다. 직접적으로 관측되지 않기에 그렇게 부를 뿐 보이는 입자나 보이지 않는 입자나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그러니 이 물질세계를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이겠는데 존재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모든 것이 환상이요 꿈이라는 뜻으로 이말을 해석한다. 색즉시공은 결코 그런 허무적인 뜻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 전체가 하나를 이룬다는 뜻이다. 바로 연기설을 뜻한다.
진공이나 소립자를 떠나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만 생각하더라도 책상이 여기에 있고 벽이 저기에 있어 딱딱한 무엇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책상이나 벽을 이루는 물질의 입자들과 우리 몸의 입자들이 전자기적(電磁氣的)인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느끼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몸이 전자기적인 상호작용에 참여하지 않는 중성미자(中性微子, meutrino)라는 입자로 되어 있다면 우리몸은 만리장성이라도 텅빈 공간처럼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만리장성이 문제가 아니라 지구와 태양사이를 납으로 채워 놓더라도 우리몸은 텅빈 공간을 통과하듯 그것을 뚫고 나갈 것이다. 물론 중성미자도 약력(weak interaction)과 중력(重力)을 통해 다른 입자들과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니 전체와 연결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니 색즉시공은 환경보호를 뜻하기도 한다.
바다에 사는 산호는 값싼 보석으로나 소용될까 우리의 삶과 직접적으로 큰 관계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알고보면 우리가 살 수 있도록 공기중에서 탄산가스를 제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구상에 원시생물들만 살던 수십억년전의 지구대기중에는 탄산가스가 너무 많아 고등생물이 살 수 없었다. 이 지상에서 탄산가스를 제거하여 사람이 살수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산호다. 공기 중의 탄산가스와 바다속의 칼슘을 결합하여 석회석을 만든 것이 바로 산호고 이 석회석은 시멘트의 원료이니 산호와 사람의 삶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산호뿐 아니라 독사나 지네 거미 파리는 물론 박테리아 마저도 다 저마다 맡은 바 역할이 있어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색즉시공은 이것을 가리키는 적극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 중에는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니 모든 것이 꿈에 불과한 허무적인 뜻으로 색즉시공을 해석하기도 한다. 전체를 하나로 꿰뚫어 보는 반야지가 없으니 그런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을 나무랄 수는 없으나 분별지로써도 물리학은 전체가 하나임을 설명할 수 있으니 색즉시공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당부하고자 한다.
달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가 우리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연기설을 주장하느냐고 누군가가 불교를 공격했지만 이것은 머리털이 하나 빠진다고해서 무슨 큰일이냐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씩 둘씩 빠지면 분명히 대머리가 되니 머리세포를 건강하게 보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물(微物)이건 무생물이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니 어찌 함부로 생명있는 것을 죽일 수 있겠으며 생명없는 것이라고 해서 어찌 함부로 파괴할 수 있겠는가? 불교적 윤리의 핵심을 이루는 자비 보시는 바로 전체가 더불어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색즉시공의 공사상(空思想)을 깨달으면 저절로 우러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공(空), 이것은 모든 것의 실상을 표현하는 말이며 적극적인 윤리를 가르치는 말이다.
김성구<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9>일체즉 유심조
- 정신과 물질 하나…일체감각 공의세계 -
- 사물•현상은 의식이 만들어낸 창조물 -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설한후 바로 반야심경은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라 선언하고 있다. 관자재보살이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다 공하다는 것을 반야로 보았음을 선언하고 잇달아 그 내용을 설하는 것이니 물질계만 공한 것이 아니라 일체의 감각 지각과 사람의 감성및 이성을 포함하는 정신작용도 공하다고 설하는 것이 오온개공의 선언과 부합하지만 이렇게 수상행식 역부여시라 강조한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반야심경은 정신•물질의 일원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이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입자에서 발견한 것처럼 반야로 보면 정신과 물질도 하나임을 경은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입자와 파동이 하나의 입자가 갖는 이중성이듯이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정신•물질마저도 하나인 그 무엇이 갖는 이중성에 불과함을 사리자에게 설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물질계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정신계는 더더욱 모른다. 따라서 지금 정신•물질을 입자•파동의 이중성과 같은 수준에서 얘기하거나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일원론은 일찌기 대두되었고 그러한 일원론의 입장에서 정신-물질-생명을 하나로 보고 연구하는 사람이 있음도 사실이다. 특히 혼돈의 과학, 복잡계의 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인공생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인공생명과 실제 자연계에 존재하는 생명체 사이엔 개념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물질계를 다루는 학문이 물리학이지만 물질계를 다루고 관찰하는 것은 의식(意識)을 아낀 사람이기에 물리학도 의식문제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 사실 관찰자와 물질계를 나눌 수 없다는 원리가 물리학에 있는데 이 원리를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 原理) 또는 일반화시켜 상보성 원리(相補性 原理)라 부른다. 이 원리는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먼저 물질계든 정신계든 그 무엇을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는 사람들, 학자가 아니더라도 관찰하는 “나”와 대상인 사물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사람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분별지가 작용하여 주•객을 분리시킬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해 설명한 중국의 우화를 생각해 본다.
옛날에 수염이 아름다운 노인이 있어 소문이 널리 퍼졌기에 임금이 보고 싶어 불렀다. 과연 소문만치 아름답고 긴수염이기에 임금은 감탄하고 상을 내렸다. 그리고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 노인에게 물었다. 잘 때 수염을 이불속에 넣고 자는지 아니면 수염을 이불 밖에 내놓고 자는지에 관해 물었다. 평소에 의식치 않고 지냈던지라 노인은 대답을 못하고 집에 돌아왔다. 돌아와서 잘 때 자기가 이떻게 하고 자는지 살펴 보았더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수염을 이불 속에 넣어 보았더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고 그래서 이불 밖에 내놓았더니 이번엔 허전하고 무엇인가 빈 것 같아서 잠이 오지 않았다.
한 생각도 없이 이불과 나를 분리시키지 않았을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고 편안하던 것이 한 생각이 일어나 나와 이불을 분리시킨 그 순간부터 노인에겐 복잡한 생각이 일어나 불편했다는 얘기다. 편안함과 불편함은 노인이 갖는 하나의 느낌에 불과하여 다른 느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복잡한 생각이 일어나 마음속에 여러가지 사건이 일어났음을 생각해보기에는 어렵지 않다.
편안함을 느꼈던 불편을 느꼈던 노인이 만들었던 것이다. 물리학도 이 우화와 비슷한 설명을 자연계에 대해 하고 있다. 분리할 수 없던 하나, 즉 자연을 바라보는 관찰자와 관찰되는 자연은 하나인데 이 하나로부터 관찰자와 자연을 분리시켜 주•객으로 나누었기에 복잡하다면 복잡하다고 할 수 있는 현상이 생겼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현상은 모두 관찰하는 사람의 창조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 앞에 전개되는 사물과 현상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낸 창조물인 것이다. 일체 즉 유심조인 것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10> 유심조와 불확정성 원리
- “입자의 위치•속도 동시에 알수없어 ”-
- ‘본다’는 생각이 존재를 창조한다 -
색수상행식이 다 공한데도 불구하고 눈앞에 보이는 자연이 이렇게 전개되어 있는 것을 불교에서는 일체즉 유심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공한 가운데서 이렇게 생생하게 나타나 있는 자연을 설명하자면 물리학만으로는 부족하지만 현대물리학에서 설명하는 것도 일체즉 유심조와 비슷한 점이 많다. 물리학에서도 인간이 관측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관측자 자신이 창조하여 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불확정성 원리와 이 원리를 일반화시킨 상보성원리라는 것이 바로 일체즉 유심조를 뒷바침하는데 먼저 불확정성원리를 살펴보기로 하자.
일상적 경험의 세계에서는 사람이 사물을 관찰한다고 해서 사물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는다. 내가 북한산 꼭대기의 백운대를 쳐다본다고 해서 백운대의 모습이 바뀌거나 백운대가 어디 다른데로 옮겨가지 않는다. 누가 쳐다보든 말든 백운대가 항상 거기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다면 백운대는 객관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객관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자연의 본질이라면 이러한 자연에 일체즉 유심조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그러나 일상적 경험의 세계를 포함하여 모든 물질과 자연현상의 기본을 이루는 미시적 세계 즉 원자(原子)이하의 세계에 들어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한때 물리학자들은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알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알려진 고전역학의 입장에서 볼 때 어느 순간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알면 입자에 관한 모든 것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자의 세계에서는 어떤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알아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치를 알아내는 순간 속도가 크게 변해 다음순간 입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고 속도를 알아내면 이번엔 어느 위치에서 그런 속도를 갖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어머니가 밖에서 노는 어린아이가 어떻게 하고 있나를 알기 위해 살펴볼 때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을 보고서 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린아이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사라진 아이를 찾아 여기저기 살피다가 냇가에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또 사라지게 되는 것과 같이 관찰행위는 언제나 관찰대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된다.
관찰대상과 관찰자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기에 관찰자의 관찰행위는 관찰대상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물리적인 양으로 표시한것이 바로 불확정성 원리이다.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라는 것이 바로 불확정성 원리이다. 매우 간단하지만 이 표현속에 바로 일체즉 유심조에 이르는 원리가 있다. 사람이 입자의 위치를 알고자 하면 이 입자에 빛을 쪼여 빛이 입자에 부딪친 후에 나오는 빛을 보아야 하는데 입자에 부딪친 빛이 입자를 때려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마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때려 튕겨나가게 하는 것과 같이 빛이 입자를 때려 튕겨나가게 하는 것이다. 내가 입자의 위치를 아는 순간 입자의 속도가 크게 변하는 속도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속도를 재면 위치가 변하여 어디에 입자가 있는지 모르게 된다.
불확정성 원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입자의 위치를 관찰할 때는 입자와 사람사이를 강한 빛으로 묶어 놓아야 하는데 이 강한 빛이 입자의 속도를바꾸어 놓는다는 뜻이다. 관찰할 때마다 변화를 주게되니 ‘본다’는 것은 관찰자가 관찰하는 것을 창조해서 보는 것이다. 그러면 관찰하기 전에 입자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가? 있었기에 빛을 쪼여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빛을 쪼여 입자를 보기 전까지는 입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할 확률만이 전 공간에 파동처럼 퍼져 있었을 뿐이다. 빛을 쪼인 순간 확률파는 붕괴되어 버리고 어디선가 입자가 불쑥 튀어나올 뿐이다. 사람이 입자를 창조해서 보는 것이다.
관찰한다는 것은 의식한다는 뜻이다. 존재를 의식한다는 것은 창조하여 의식하는 것이다.
김성구<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11>유심조와 상보성 원리
-자연현상은 삶과 죽음처럼 대립의조화-
-창조해 보는게 관측 일체유심조와 같아 -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다 공하다고 사리불에게 설했지만 지혜제일이라 불리운 사리불일지라도 분별지에 바탕을 두고 사물을 인식하는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를 일반화시킨 상보성 원리를 살펴보면 사리불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현대물리학의 바탕이 되는 양자역학의 세계관을 확립한 보어에 의하면 자연은 상보적인 두가지 양(量)으로 기술된다. 상보적인 양이라는 것은 물리적학인 개념으로 입자와 속도와 같은 것인데 동시에 측정할 수 없는 두가지 물리량(物理量)을 말한다. 한가지 물리량으로 기술되는 자연현상은 결코 없다. 자연현상, 적어도 물리량으로 기술하는 현상은 그것이 무슨 현상이든 반드시 상보적인 두가지 양을 써서 기술한다.
상보적인 양은 물리적인 양을 말하지만 물리학을 떠나서 이해할 수도 있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음•양의 개념으로 이해해도 좋다. 실제로 보어는 상보적인 양을 음•양의 개념으로 보았다. 삶과 죽음,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 선과 악이 모두 상보적인 것이며 심지어는 유(有)와 무(無)도 상보적인 것이다. 일상적인 경험이나 단순논리로 보자면 이들은 모두 대립되고 모순되는 개념으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지만 입자-파동의 이중성에서 보듯이 자연은 이중성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물리현상에 국한시킨다면 이 이중성이 바로 상보적인 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물리현상은 상보적인 양으로 기술된다. 물론 상보적인 양이 아닌 물리량도 있지만 그러한 물리량은 기본적인 물리량이 아니고 다른 기본적인 상보적 물리량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중성을 나타내는 물리량을 보어가 상보적인 양이라고 부른데에는 이유가 있다. 관찰하는 자가 대립과 모순으로 파악하든 말든 자연은 서로 상보적인 두가지 양의 조화로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서로 보완해 준다는 뜻을 가진 상보적인 양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바로 음•양의 조화로 자연이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상보적인 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볼때 상보적이라는 말은 참으로 적절하게 붙인 이름이다. 상보적인 양이 있기에 변화하는 자연현상을 물리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고전 물리학적으로 기술하는 고전역학이든 현대물리학의 양자역학이든 자연현상의 변화를 기술하는 역학(力學)은 상보적인 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쉬운예를 들자면 입자의 위치나 속도중 하나만으로는 입자의 운동을 기술할 수 없고 위치와 속도를 나타내는 두가지 양이 있어야 입자 의 운동을 기술할 수 있다는 뜻이다. 꼭 두가지 양이 있어야 물리학적 기술이 가 능한 자연현상이지만 하나의 자연현상에 대해 상보적인 양 두가지를 함께 관측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상보성원리이다. 상보적인 양은 서로 대립되고 모순되는 양 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오관으로 관측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인간의 분별지(分別智)로써는 그렇다. 따라서 두가지 양 모두에 적당한 불확정성(不確定性)을 두고 관 측하거나 어느 한가지 양을 철저히 무시하고 나머지 한가지 양만을 확실하게 관측 할 수 밖에 없다. 어느 것을 어떻게 관측하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관측자의 선택 에 맡겨진 것이며 관측자가 선택하여 자연을 본다고 해도 자기가 보고싶은 것을 창조하여 본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관측한 것을 다른 사람이 관측하였더라면 다 른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그 사람식으로 창조했기 때문이다.
물리학에서는 이렇게 관측을 통하여 창조된 것만을 물리적 실체라고 한다. 이 물 리적 실체는 눈앞에 드러난 자연이라는 뜻에서 불교의 색(色)과 유사한 개념이라 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관측이전의 것은 무엇이라고 이름조차 붙이지 않는다. 그저 여러가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여러가지 상태가 뒤섞여 있는 것으로 묘사할 뿐 이다. 물리학적 이름조차없는 것에서 창조하여 보는 것이라면 바로 일체즉 유심조 를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12>제법공상과 물리학
- 色도 法도 공한 것이 자연의 본래모습-
- 현대 물리학도‘제법공상’원리 수긍-
‘색수상행식 역부여시’다음 반야심경은 ‘사리자 제법공상 불생불멸…’하고 어떻게 모든 것이 공(空)한지를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반야를 터득한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것의 근원은 그저 공할 뿐이며 생겨나는 것같이 보이지만 생겨난 것이 없으며, 없어지는 것같이 보이더라도 없어진 것이 없다고 설명한다. 물리학은 반야와는 상관없고 모든것을 오관으로 보고 분별지로 판단하지만 제법공상에 수긍한다. 또한 불생불멸은 물리학의 기본법칙이다.
지금까지 여러번 색과 공에 관해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얘기했지만 모두 물리적인 진공과 물질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생성소멸에 관해 얘기했을 뿐 물리적인 법칙이 공한 모습에 관해 논하거나 언급한 적은 없다. 이제 법에 관해 얘기하자면 물리학의 법칙마저 사실 공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제법공상은 여러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지만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일정한 법칙이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현대물리학은 이 글자그대로의 뜻을 뒷바침하고 있다.
제법공상의 직접적인 뜻은 색즉시공과는 또다른 것이니 자세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일상적 경험의 세계에서 볼 때 우리 앞에 나타나 있는 자연은 질서정연하게 일정한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것같이 보인다. 달은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정해진 궤도를 돌며, 지구도 같은 법칙에 의해 정해진 궤도를 따라 태양주위를 돌고 있다. 지구와 달뿐만 아니라 모든 별과 모든 물체가 움직일 때는 일정한 법칙에 따라 정해진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빛도 한점에서 다른점으로 보내면 두점사이의 최단 거리를 따라 움직인다. 달이 지구를 떠나 여기저기 아무데로나 돌아다니다 돌아온다는 법도 없고 빛이 최단거리가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이리저리 꾸불꾸불 움직인다는 법도 없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미시적 세계에서 볼 때는 빛이 최단거리를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다. 빛은 제멋대로 움직인다. A라는 점에서 B라는 점까지 빛을 보내면 A와 B사이의 무한히 많은 모든 경로를 따라 일정한 확률을 가지고 움직인다. 아니 움직인다는 말도 적당한 표현이 아니다. 무한히 많은 경로중 어느 특정한 경로를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선거리를 따라 움직일 확률도 있고 빙둘러 다른 경로를 따라 움직일 가능성도 있고 또다른 경로를 따라 움직일 확률도 있을 뿐이다. 모든 경로마다 빛이 지나 올 가능성이 있을 뿐 빛은 이중 어느 하나의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가능한 모든 경로를 따라 움직인 것도 아니다. 빛입자 하나가 여러개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입자가 하나의 경로를 따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해서 동시에 여러 경로를 따르지도 않으면서 빛은 A에서 B까지 도달하는 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빛뿐만 아니라 모든 소립자가 그렇게 행동한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A라는 점을 출발한 빛이나 입자가 B라는 점에서 불쑥 나타났다고 해야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경로를 따라 왔다는 가능성을 합쳐 놓으면 일정한 궤도를 따라 움직인것처럼 보인다. 빛의 경우 직선거리를 따라 움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어느 특정한 경로를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닌데도 거시적으로 보면 일정한 법칙을 따라 정해진 경로나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 자연의 진정한 모습이다. 이러한 현상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어떤 물리학자는 “일정한 법칙이 없다는 것만이 진정한 법칙이다”라고 말했는데 적절한 표현이다. 이 말을 반야심경이 표현한 제법공상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인다고해서 무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법(法)마저 공한것이다. 제법공상은 분명히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지만 글자 그대로 해석 해도 물리학자들이 자연을 기술하는 방법과 일치한다.
색(色)도 공하고 법(法)마저 공한것이 자연의 모습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13>불생불멸과 물리학
- 모든 물질 흩어지고 모일 뿐 변함없어 -
- 심경의 ‘불생불멸’물리학의 기본법칙-
심경은 공을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하기를 ‘…불생불멸 불구부정…’이라고 한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겉으로는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생기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다는 뜻의 불생불멸이야 말로 물질세계에 관한한 핵심을 찌른 말이다. 고전물리학이건 현대물리학이건 가릴 것없이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이 보존의 법칙이다. 이 보존의 법칙이 말하는 바가 바로 에너지, 전기량(電氣量)등 기본적인 물리량은 결코 없어지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로 질량-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설명하겠다.
물체가 움직이면 거기에는 반드시 운동에너지가 따른다. 또한 지구상의 물체가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있으면 거기에는 위치에너지가 따른다. 높은 곳에 있는 물을 낮은 곳으로 떨어뜨리면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에너지의 모양이 바뀔 뿐 에너지의 양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높은 곳에서 떨어진 물이 발전기를 돌리면 전기에너지로 변하고 이 전기에너지로부터 사람들은 필요에따라 빛 에너지나 열 에너지 또는 운동에너지를 끌어 쓰는데 어떤 형태의 에너지로 쓰던 에너지의 양에는 변함이 없다. 에너지는 또한 질량으로 변하기도 하고 질량이 에너지로 변하기도 한다.
질량과 에너지의 상호변환은 반야심경이 말하는 불생불멸을 물질세계에서 이해하는데 더 없이 좋은 예이다. 자연계에는 어딘가에서 갑자기 질량이 생겨나기도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는데 질량-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있어 없어진 것도 없고 생겨난 것도 없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불쑥 질량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질량이 없는데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 잠재해 있던 에너지가 질량의 모습으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질량이 감소한 경우에도 질량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어떤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자연현상이 여러가지 형태로 바뀌는 것은 결국 에너지가 이 모습에서 저 모습으로 바뀐 것을 뜻하는 것이다. 나무를 태워 재가 되었다 하더라도 무엇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수소가 산소와 결합하면 다만 물이 되는데 이 경우에도 수소와 산소가 없어진 것도 아니고 물이 생겨난 것도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소도 없어지고 산소도 없어졌으며 물이 생겨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없어진 것이 없다. 타기전에는 산소분자와 수소분자가 서로 따로 따로 놀았던 것이며 타고난 후에는 수소분자와 산소분자가 서로 결합한 것 뿐이다. 산소-수소가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결합한 것을 사람이 물이라고 부를 뿐이다. 비유를 들자면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과 같다. 결혼전 한남자와 한여자가 있었는데 결혼하여 부부가 되면 남자와 여자가 없어지고 한 가정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과 꼭 같다. 모든 변화가 다 이런 식이다.
살아 움직이던 생물체가 죽어서 그 몸이 썩어 없어진 경우에도 원자(原子)의 세계에서 보면 변한 것이 없다. 단지 원자들 상호간의 결합상태가 바뀐것이다. 물질이 생겨났다 썩어 없어지는 것은 사람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과 꼭 같다. 어떤 모임이 있어 사람이 100명쯤 모였다면 100이라는 숫자의 사람 하나하나가 어딘가에서 없어지고 100명이 모인 어떤 모임이 생겨난 것이다. 이 모임을 사람들이 물질이 생겨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임이 해체되면 물질이 없어진 것이지만 모임을 구성했던 100이라는 숫자의 사람이 어디 다른 곳에 갔을 뿐 사람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물질이 생겼나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물질세계의 윤회를 뜻할뿐이다. 이렇게 모였다 흩어지고 저렇게 모였다 다시 흩어지고 새롭게 모일 뿐 무엇이 없어진 것도 없고 생겨난 것도 없다는 것이 바로 물리학에서 말하는 보존의 법칙이다. 결국 보존의법칙은 불생불멸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불생불멸! 그것은 물리학의 기본법칙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14>불구부정
반야심경과 물리학<14>
-전체를 하나로 볼 수 있는 반야의 경지-
-현대 물리학도 ‘일체 즉 유심조’해설-
반야심경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세계에 관해 설명한 글이 아니다. 관자재보살이 얻은 반야지로 볼 때 보이는 세계를 설명한 글이다. 따라서 오관으로 보고 느끼는 것을 분별지로 판단하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아니다.
현대물리학이 자연의 이중성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중성의 발견 덕분에 경전이 의미심장한 내용을 설하고 있다는 것을 물리학을 통해 짐작할 수는 있지만 경전이 설하고 있는 대부분의 내용은 물리학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넘어서있다. 심경이 말하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는 말중 불구부정은 물리학을 떠나 신앙이라는 새로운 각도에서 살펴보아야할 부분이다.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다는 것이 불구부정의 직접적인 뜻이라면 이말은 생명을 유지하려는 생명체의 본능과 어긋난다. 생명체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이를 얻고 알맞은 환경에 있어야 하는데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하거나 알맞은 것은 좋아하고 깨끗하게 보며 생명을 위협하거나 건강상 좋지 않은 것은 싫어하고 더러운 것으로 볼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구부정은 보통사람의 차원을 넘어선 반야의 차원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뜻이다. 반야의 차원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일체의 학문적 접근을 불허하는 신앙과 깨달음의 차원이지만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학문적 접근을 해볼 필요가 있다.
원자(原子)의 차원에서 볼 때 나고죽고 썩는 모든 것이 단지 원자들의 배열만 바뀌는 것일 뿐 변한 것이 없기에 생물 무생물을 통털어 물질계 전체를 놓고 보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는 말이 이상하지 않게 들릴 수도 있지만 생명체 하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불구부정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경전이 말하는 바는 전체를 하나로 보라는 뜻이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생명체 하나 하나는 분리될 수 없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아상에 집착하여 꿈을 꾸고 있다는 뜻이다. 불구부정은 일체즉 유심조의 입장에서 살펴보아야 할 말이다. 전체가 하나일 수밖에 없는 실험적인 증거가 실제로 있다.
사람이 보는 것은 결국 자기가 창조하여 보는 것이라는 현대물리학의 해설을 유명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죽을때까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현대물리학의 해설에 치명타를 가할 수도 있는 예를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PodlsKy)와 로젠(Rosem)과 함께 제시하였다. 이것을 EPR실험이라고 부르는데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먼저 결과를 얘기하겠다.
EPR이 제시한 실험은 여러가지로 까다로운 점이 있어 1982년에야 실제로 실험을 하였는데 아인슈타인이 틀렸다. 전체가 하나이며 사람은 자기가 보는 것을 창조해서 보는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해설의 옳은 것이다.
전체가 하나이며 일체즉 유심조가 옳다고 하더라도 전체를 하나로 볼 수 있는 눈이 있느냐 없느냐 또 그런 눈 반야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얻느냐하는 것은 물리학이 대답할 수는 없다. 아니다. 괴텔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하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분별지로는 결코 있는게 없는지도 알아낼 수 없고 있다하더라도 얻어낼 수 없다. 반야지가 있고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신앙의 차원이다. 반야지에 관한 것은 학자들이 논할 수 있는 영역 저편에 있다.
아(我)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전체를 하나로 보고 일체즉 유심조라는 사실을 궤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불구부정은 당연한 말이다.
생멸이 없고 아(我)가 없는 데 거기 무슨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있을 수 있겠으며 거기에 무슨 좋고 나쁜 분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로 할수 있는 일체의 경지를 넘어서는 눈이 있음을 믿는다면 불구부정을 글자그대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리학은 전체가 하나 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15>EPR 패러독스
- 보어의 상보성원리 반야심경 입증-
- 전체는 하나이나 관측이 분리창조-
색(色) 즉 물질계 전체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며 이 물질계를 관찰하는 관찰자마저 관찰대상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에서 나를 분리시켜 자연을 대상으로 놓고 관찰하게 됨으로써 관찰하는 행위가 바로 우리가 보는 것을 창조한다는 보어의 관점은 아인슈타인(Einstein)으로부터 반박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보어는 <반야심경>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심경을 부정하는 입장에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아인슈타인도 ‘불생불멸’과 ‘부증불감’이라는 말에는 동의 했겠지만 ‘불구부정’은 거부했을 것이다. 여러번에 걸친 논쟁에서 보어가 이겼지만 1935년 아인슈타인, 부돌스키, 로젠 세사람은 보어의 상보성원리에 입각한 자연관을 반박하는 사고실험(思考實驗)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EPR 패러독스라고 부르는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모든 물리량을 측정하여 그 상태를 완전히 알고 있는 입자가 붕괴하여 A와 B라는 입자 둘로 되었다고 하자. 기본적인 물리량은 보존되므로 즉 불생불멸이므로 A를 측정하면 B에 관한 물리량은 측정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스핀(Spin)이라는 물리량이 있는데 이것을 어떤 특정한 방향이 따라 측정하면 +1 또는 -1이라는 두개의 값중 하나만을 갖는다. 따라서 처음에 스핀이 0인 입자가 붕괴하여 A와 B로 나뉘어졌다면 A의 스핀을 측정하면 B의 스핀값은 B를 직접 측정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A가 +1이면 B는 -1 이런 식으로 B를 관측하지 않더라도 B에 관한 정보를 알 수 있으므로 관측행위가 관찰하는 것을 창조한다는 보어의 관점은 틀렸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A와 B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즉 몇 광년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A가 +1을 나타내면 B는 -1이어야 한다. 보어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A를 측정하기 이전에는 A가 +1인지 -1인지 알 수 없고 A를 측정하여 +1을 얻으면 그때 비로서 B가 -1임을 알 수 있어야 되는데 어떻게 몇광년이나 떨어진 B가 A의 값이 +1로 관찰되었는지 알 수 있겠느냐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지적이었다.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모든 정보는 빛보다 더 빨리 전달될 수 없기때문에 몇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B에서 A로부터 관측자가 +1이라는 값을 관측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물음에 대한 보어의 답은 아주 간단하다.
A와 B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관측되기 전까지는 하나의 물리계라는 것이 보어의 답이다. A를 관측함으로써 A와 B는 서로 분리된 것이라는 것이 보어의 관점이다. 즉 관측행위가 분리를 창조해낸 것이다. 관측하기 전까지 A와 B는 하나로써 전체의 스핀값이 0이었을 뿐 A가 +1인지 -1인지 알 수 없었으나 관측하는 행위 A는 +1 B는 -1 또는 A는 -1 B는 +1의 스핀값을 갖도록 창조해낸 것이다. 떨어져 있더라도 하나이기에 서로 정보를 주고 받을 필요가 없이 관측을 하자마자 모든 것이 즉각 결정되고 창조되는 것이다. 마치 이심전심으로 B가 A에서 일어난 일을 즉각 알아챈 것과 같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중에 누가 옳은가 하는 실험은 1982년에야 이루어졌는데 보어가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전체가 하나이고 관측행위가 창조한 것을 관찰자가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측자와 관측대상도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 분리되기 전에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이 남게 된다. 무엇인지 분석한다면 벌써 하나를 둘로 나눈 것이므로 올바른 답을 알아낼 수 없다. 무슨 답을 얻더라도 그것은 창조해낸 것일 뿐이다. 분리되기 이전의 것은 여러가지 가능성이 중첩되어 있는 허상일 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그 무엇이라고도 할수 있는 것으로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굳이 표현하자면 공(空)이라고까지는 하겠는데 더 이상 나아갈 수는 없다. 관자재보살만이 불구부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김성구<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16>쉬뢰딩거의 고양이
- 열기전 상자속 고양이 生死알수 없듯-
- 이것도 저것도 아닌 空의세계 표현-
둘이 아니고 하나인 그것을 공이라 부르고 공이 그대로 색이요 색이 그대로 공이라고 설명했지만 이 설명만으로 사리불이 공을 체득했을리가 없다. 사리불로 대표되는 보통사람들은 말로 차근차근 설명해야 알아 듣기 때문에 하나 하나 풀어서 설명하기 시작하는 첫마디가 ‘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인데 온통 부정하는 말 ‘부(不)’자를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물리학자들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그 이유를 찾았지만 아무튼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만큼은 정확히 알고 있다. 왜 심경에서 ‘부(不)’자를 반복하여 공을 설명할 수 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물리현상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지난번에 법칙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물체가 어떤 특정한 경로를 통해서 이동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얘기를 했는데 이말을 일반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 현대물리학의 기초를 다진 쉬뢰딩거(Schrodinger)는 ‘쉬뢰딩거의 고양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었다.
심경처럼 우주전체를 생각할 것없이 쉬뢰딩거는 상자 속에 고양이를 넣어두고 그 옆에 고양이가 먹으면 죽게 되는 독극물을 넣어둔 상황을 설정하였다. 벨을 누르면 독극물이 쏟아지고 고양이가 먹고 죽게 될 확율이 50% 죽지 않을 확율이 50%라면 벨을 누른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관찰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벨을 누른 후 상자를 열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것은 뻔하지만 벨을 누른 후 상자를 열어보지 않을 때 상자 속에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 흥미있는 일이다.
삶과 죽음은 양립할 수 없으므로 상자를 열면 사람은 죽은 고양이를 보거나 산 고양이를 보거나 둘 중에 하나 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을 물리학에서는 사람이 죽은 고양이를 창조해서 본다고 하거나 산 고양이를 창조해서 본다고 해석하는데 꼭 그렇게 설명해야 할 명확한 이유가 있다. 열기전에는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어 죽었다고 해도 틀리고 살았다고 해도 틀리는 상태가 물리학적 방정식의 답으로 나타나는데 이 방정식의 답에 해당하는 현상이 실제로 자연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상자를 열어 관찰하기 전에는 고양이는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다. 관찰하는 바로 그 순간 고양이는 살아있는 상태로 나타나거나 죽은 상태로 나타난다. 삶과 죽음은 관찰하는 사람이 창조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뜻대로 창조한 것은 아니지만 50:50%의 가능성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서 그것만을 보고 자기가 본 것만이 전체요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의 고양이는 거시적 세계의 존재이므로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을 수 없으니 쉬뢰딩거의 고양이는 비유에 불과하다. 그러나 원자 이하의 미시적 세계에서는 논리적으로 쉬뢰딩거의 고양이와 꼭 같은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다. 그러니 쉬뢰딩거의 고양이를 실제의 고양라고 생각해도 물리현상을 이해하는데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쉬뢰딩거의 고양이를 실제의 고양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니 실제의 고양이라고 하자. 그러면 창조하기전 또는 선택하기 전의 상자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해야 되겠는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알음알이 지식으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따지는 것은 고양이가 든 상자를 열어보는 것에 해당하 이므로 반야심경에서는 알음알이 지식으로 따지기 이전의 그 무엇을 가리켜 공이라 부르고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말로 공을 설명한 것이다.
선승(禪僧)들은 “이것이다”해도 틀렸다 하고 “이것이 아니다”라고 해도 틀렸다고 했는데 이중성이 자연의 본질인 이상 자연현상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선승들이 옳은 것을 알 수 있다. 선승들이 가리키는 것이나 반야심경이 설명하는 것은 같은 태도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로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물리학이 그것을 뒷바침하고 있다.
김성구<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17>불생불멸의 실상
- ‘ 있다-없다’‘살았다-죽었다’지어낸 생각 -
- ‘깃발 펄럭이는’ 원인 바람 •깃발 아닌 마음-
상자속에 고양이를 넣어두고 이 고양이가 죽었느냐 살았느냐를 따지거나 상자를 열어서 관찰하면 반드시 죽은 고양이를 보거나 산 고양이를 보게 될 뿐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고양이를 볼 수는 없다. 이 고양이에 관한 문제는 반야심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므로 계속해서 자세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삶과 죽음은 거시적 세계에서 나타나는 생물학적인 현상이므로 직접 고양이를 갖고 실험하면 언제나 삶과 죽음의 둘 중 하나만 나타난다.
그러나 미시적 세계에 들어가서 실험하면 논리적으로 삶과 죽음이 공존해야만 하는 현상이 실제로 나타난다.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나타내는 실험이 바로 논리적으로는 삶과 죽음의 이중성을 나타내는 것과 구별할 수 없는데 비유를 들어 설명하겠다.
앞문과 뒷문, 꼭 두개의 문을 가진 방(房)이 있고 이방에 사람이 들어간다면 사람은 앞문으로 들어가거나 뒷문으로 들어가거나 둘중 하나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작은 입자(粒子)를 쏘아 방에 들어가게 하더라도 입자는 앞문으로 들어가거나 뒷문으로 들어가거나 둘중의 하나일 수 밖에 없다. 사람이건 입자이건 하나라면 하나가 동시에 두개의 문을 통과할 수는 없기때문이다. 실제로 입자를 쏘아 실험을 해보면 입자는 반드시 앞문이거나 뒷문이거나 둘 중 하나만 통과하지 두개의 문을 하나의 입자가 동시에 통과한다는 법은 없다. 입자하나가 하나의 문만 통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고양이가 삶과 죽음 중 어느 하나의 상태에 있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꼭 같음을 지적하고 싶다.
이제 관심을 돌려 입자가 어느쪽 문을 통과 하는지에 관해서는 생각하거나 관찰하지 말고 방안에서 무슨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해서만 생각하고 관찰해보기로 하자.
방안에 들어온 입자의 경우 앞문이나 뒷문 어느 한쪽으로 들어온 입자의 행동은 두개의 문을 통과해 들어온 입자의 행동과는 확연히 다르다. 아니 입자라면 두개의 문으로 들어올 수 없기에 두개의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파동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입자와 파동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초기의 물리학자들은 생각하였다. 그런데 관찰 결과는 입자라고 생각하든 파동이라고 생각하든 사람이 관찰하면 두개의 문중 어느 한쪽으로만 들어오고 어느쪽 문으로 오는지 관찰하지 않 으면 하나의 입자가 동시에 두개의 문으로 들어온 것처럼 행동한다.
빛을 쪼인 경우에 어느 쪽 문으로 들어왔는지 관찰하지 않으면 방안에 들어온 빛 은 밝고 어두운 무늬가 교대로 반복하는 띠를 만드는데 이 띠는 하나의 빛이 두개 의 문으로 동시에 들어왔을 때만 나타날 수 있는 무늬이다. 빛대신 다른 입자를 써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입자가 앞문으로도 들어오고 뒷문으로도 들어왔다고 해야 설명되는 무늬를 만들다. 둘로 나뉘어질 수 없는 입자가 동시에 두개의 문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입자가 어느쪽 문으로 들어오는지 관찰해보면 입자는 반드시 한쪽 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동시에 두개의 문을 지난다는 법은 없다. 그리고 이렇게 한 쪽문을 통해 들어온 것이 확인된 빛이나 입자는 결코 밝음과 어두움이 교차되는 띠를 만들지 않는다.
어느 쪽으로 오는지 관찰하지 않으면 띠를 만들고 어느쪽으로 오는지 관찰하면 띠 를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양이에 적용시켜 보면 고양이가 든 상자를 열어보면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법이 없고 열어보지 않으면 삶과 죽음이 반반씩 섞인 고양 이가 상자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고양이가 죽었던 살았던 그것은 모두 사람이 창조해서 본 것이다. 그래서 육조 혜 능스님은 깃발이 바람에 날리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움직이는 원인이 아니라 사람 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실상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인데 사람이 갖가지를 지어내는 것이다.
김성구<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19>무색과 상대성의 세계
空은 허무아닌 정신•물질 모든것 근원
“…시제법공상 불구부정 불생불멸 부증불감…”이라고 설한후 경전은 바로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이라고 설한다. 공한 상을 애써 설명한 후 곧바로 공(空) 가운데는 아무 것도 없다고 선언한다.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은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와 다른 뜻인가?
물질계만을 생각할 때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공(空)이 물질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가지 물리현상을 예로 들어 이미 설명하였다. 물리적 진공에서 입자와 반입자가 생성되기도 하고 입자와 반입자가 만나 에너지를 내놓고 소멸되기도 하며 또한 물리현상은 진공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니 공에서 색이 나왔다고 하는 것을 현대물리학이 뒷받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뜻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은 공이란 결코 허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경전은 모든 것의 공한 모습이 생기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하는 것이라 풀이한 후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이라고 선언한다. 이예 처음부터 공에는 색도 없고 지각•감각•의지•인식작용도 없다고 한다. 물질도 없고 그것을 인식하는 정신작용도 없다면 경전은 다시 허무를 주장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분별지로 인식하는 일체의 객관적 실체가 꿈과 같은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일단 물리현상에 국한시켜 보자면 물리적 진공은 입자와 반입자가 서로 결합하여 끝없는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상태이니 이런 상태를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무색 무수상행식이란 물질이 공에서 나왔지만 이렇게 나온 물질이라고 해서 객관적 실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분별지를 떠나서 참을 보라는 뜻이다. 또한 무수상행식은 정신-물질의 이중성을 뜻하는 것이다. 입자-반입자의 이중성에서 보듯이 이것은 물질 저것은 정신이라고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어 놓고서 하나를 정신이라 부르고 이 정신이 물질이라고 하는 것을 보는 것이 분별지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니 보는 자도 보이는 세상도 다 꿈과 같다는 뜻이다.
물리학이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의 개념을 그대로 설명할 수는 없고 물질계만 생각하여 물리적 진공의 구도를 살펴보고서 오관으로 관측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 이만 있을 뿐 물리적 진공의 구조와 오관으로 감지하고 인식하는 물질계의 구조에 차이가 없고 또 물질이 진공에서 나오고 들어갈 수 있다는 뜻에서 공즉시색 색즉 시공이라고 했지만 처음부터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생기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기에 진공을 생각할 것도 없이 무색이라고 하는 말은 공즉시색이라고 하는 것과 다른 의미를 가지므로 “시고 공중무색…”이라는 말은 우리가 불교에서 말 하는 공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말이므로 물질의 의미를 지금까 지 설명해 온 양자역학과는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지금까지 설명해 온 양자역학적 물질관은 미시적 세계를 설명하는데 우리가 보는 색계(色界), 거시적 세계를 설명하는 물리학의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다. 색계를 완전히 학문적으로 기술하려면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결합하여야 하는데 아직까지 물리학자들은 이 두 이론을 완전히 결합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결합하여 우주론에서 이용하고 있는데 우주론은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상대성 이론부터 살펴보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가 보는 물질계는 관측자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다르게 보인다고 해서 그중에 누구의 것이 옳다는 것이 없고 다르게 보이는 것이 그대로 다 옳다는 것이다. 시간•공간의 길이나 의미도 다 객관적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며 시공간과 물질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물질없이 시공간이 없고 시공 간을 떠나 물질을 생각할 수도 없다. 물질이 형체없는 에너지로 바뀌고 형체없는 에너지가 물질로도 바뀐다.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20>시간과 공간
- 추상적 관념이지만 물질처럼 변화무쌍 -
- ‘절대시공간 없다’ 상대성이론 출발점-
사람들은 우주와 물질에 관해 얘기할 때 보통 시공간(時空間)은 생각지 않는다. 물리학자들도 아인슈타인이 나와서 상대성이론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시공간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한데 묶어 시공간이라고 부르는데 일상적 경험의 세계에서 볼 때 시간과 공간은 서로 관련이 없고 물질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은 공간이 어떻게 되었던 아득한 과거에서부터 미래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고 시간을 측정하는 사람의 상태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동시성(同時性)도 의심없이 우주 어디에나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이순간 미국에 있는 내 아버지는 무얼하고 계실까? 누구도 이런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의심하지 않는다. 이순간이라는 것이 나에게나 아버지에게나 또다른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정의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주어지고 흘러가며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상의 한점인 어떤 한 순간마저도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고 경험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일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나에게 100m인 거리는 다른 사람에게도 100m이며 물질과 상관없이 무한히 넓게 퍼져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시공간은 물질이 있건 없건 무한히 펼쳐져 있는 관념적인 것이다. 공간이 비어 있어도 거기에서 공간의 길이를 생각할 수 있고 물질로 꽉 차 있어도 똑같은 길이를 생각할 수 있는 하나의 추상적인 관념이 시공간인 것처럼 보인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시공간을 절대시공간이라고 부른다. 시공간은 길이를 잴 수 있다는 뜻에서 물리학적인 개념이지만 ‘사랑’이나 ‘슬픔’같은 비물리학적인 추상적 개념보다 더 추상적인 개념이 절대시공간의 개념이다. 사랑이나 슬픔은 물질처럼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실체가 아니지만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슬픔과 기쁨을 느낌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뜻에서 비록 추상적이긴 하지만 공허한 것은 아닌데 절대시공간은 물질에 아무런 영향을 주고 받지 않는다는 뜻에서 공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무런 형체도 없고 물질과 영향을 주고 받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공간이 형 체도 있고 물질과 영향을 주고 받을뿐 아니라 물질처럼 태어나기도 하고 없어질 수도 있으며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의 운동상태에 따라 시간이나 공간의 길이도 달 라진다는 것을 밝힌 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속담이 있는데 까마귀가 날고 배가 떨어졌다는 사 건이 있다면 세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까마귀가 먼저 날고 그 다음 배가 떨 어지는 것, 까마귀가 날고 배가 떨어지는 것이 동시에 일어난 것, 배가 먼저 떨어 지고 다음에 까마귀가 난 것 세가지 경우이다. 절대시공간의 개념이 옳다면 세가 지 경우 중 하나만 옳겠지만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세가지 모두 옳다. 배나무 과 수원의 동쪽 끝에 있던 까마귀가 날 때 서쪽 끝에 있는 배가 떨어지는 것을 과수 원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고서 “까마귀가 나는 것과 배가 떨어지는 것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주장한다면 분명이 그 사람에게는 동시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그러 나 동쪽에서 서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이 본다면 배가 먼저 떨어지고 까마귀 가 나중에 날은 것처럼 보인다.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본다면 까마귀가 먼저 날고 배가 나중에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셋중에 누가 옳다는 법이 없다. 셋 다 옳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에 대해 세가지 해석이 다 옳다는 것을 분석한 것 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출발점이 된다. 절대시공간이 붕괴되고 시공간이 물질과 똑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상대성이론이 보여준다.
시공간은 정말 공(空)한 것처럼 보이므로 무색이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물질과 똑같은 의미를 갖는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21>시공간의 상대성
- 시공간도 시작과 끝 있는 물리적 실체 -
- 색•무색 사람이 지어낸 분별지에 불과 -
상대성이론이 나온 후 물리학자들은 시공간(時空間)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시간과 공간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기에 시간과 공간을 합하여 시공간이라고 하는데 이 시공간은 사람의 오관으로 보고 듣거나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실체(實體)라고는 할 수 없으나 시공간의 존재를 전제하여야 물리현상을 논할 수 있다. 물리현상 뿐만 아니라 죽고 사는 것을 포함하여 우주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시공간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생각하고 느끼며 싫어하고 좋아하는 정신작용도 다 두뇌라는 공간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적어도 오관으로 보고 느끼는 모든 현상은 다 시공간내에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시공간은 시공간내에서 존재하는 여러가지 현상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뉴턴의 고전역학에서는 절대시공간을 가정하였는데 이 절대시공간이 잘못된 개념이라는 것을 보인 것이 상대성이론이다.
물질은 우리가 직접 오관으로 보고 느낄 수 있으나 시공간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없으므로 물질은 실체라 부르고 시공간은 실체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시공간에도 모양이 있고 시작과 끝이 있으며 물질에 여러가지 물리적인 특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공간에도 여러가지 물리적인 성질이 있다.
경에 이르기를 ‘…시고공중 무색…’이라고 하였는데 색(色)이라고 느끼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으로 보이는 시공간의 성질을 살펴보면 우리가 색이라 부르고 무색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은 우리가 편의상 그렇게 나누어 생각할 뿐 색이 따로 있고 무색이 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정도 짐작해낼 수 있다. 무색과 관련지어 당분간 이 시공간의 성질에 대해 살펴보겠다. 동시성(同時性)이라는 것도 사람마다 다 자기의 기준계(基準係)가 있어 기준계마다 다 시간의 기준이 달라 내가 보기엔 동시에 일어난 두 사건도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시간에 일어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이지만 동시성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길이 공간의 길이도 사람의 운동상태, 물체의 운동상태에 따라 다 달라진다.
지상에 있는 사람과 빠르게 달리는 로케트에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로케트에 있는 사람과 지상에 있는 사람은 서로 상대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므로 시공간에 대한 기준계가 다르다. 로케트에 있는 사람에게 흘러간 시간과 지상에 있는 사람에게 흘러간 시간의 길이가 우선 다르게 나타난다. 로케트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이 시간차이는 더욱 크게 벌어진다. 로케트의 속력이 충분히 빠르면, 로케트에 탄 사람이 일주일간 여행하고 지구에 돌아와 보니 지구에는 백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는 일도 가능하다. 이것은 공상과학 영화나 소설에 가끔 나오는 얘기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수명이 백만분의 일초 밖에 안되는 입자가 빠르게 움직이면 2~3초동안 붕괴되지 않고 살아있는 일은 실험실안에서나 우주공간내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다.
시간의 길이 뿐만 아니라 공간적인 길이도 달라진다. 로케트에 있는 사람이 로케트의 길이를 30m라고 측정하였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지구상에 있는 사람이 빨리 날아가는 로케트의 길이를 측정한다면 30m가되지 않는다. 로케트의 속력에 따라 20m도 될 수 있고 더 짧아질 수도 있다.
“…시고공중 무색…”이라는 말에서 색(色)은 물질계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 물질계라는 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일상적 경험에서 보고 판단하는 물질계와는 크게 다르다. 위에서 잠깐 설명한 바와같이 시간이나 공간의 길이도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차츰 설명해나가겠지만 물질이 실체라면 시공간도 실체일 수 밖에 없다. 역으로 물체라는 것도 실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색•무색이라는 것은 분별지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
김성구<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22>색수상행식
심경의 관점 “我란 객관적 실체는 없다”
상대성이론 “我떠나 현상 논할 수 없다”
‘…시고공중 무색 무수상행식…’이라고 설함으로써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다 없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눈앞에는 삼라만상이 보는 바와 같이 전개되어 있는데 경전은 이 모든 것이 없다고 말한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루 같은 것이요 이 신기루를 보고 느끼는 정신작용도 모두 신기루같은 것이라고 한다. 수상행식의 정신작용에 대한 주체는 아(我)다. 그런데 경전은 수상행식의 정신작용이 다 신기루같은 헛것이라고 한다. 경전은 ‘아’를 객관적 실체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무색이고 ‘아’가 헛것이니 우리가 일상의 경험적 세계에서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은 결국 존재하지도 않는 ‘나’가 존재하지도 않는 세상을 보고 느끼는 것이 된다. 경전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다.
경전이 말하는 것, ‘색도 없는 것’, ‘아도 없는 것’이라는 말의 뜻은 허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지로 보는 물질계와 분별지로 판단한 ‘아’가 없다는 것임은 물론이다. 주와객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을 ‘아(我)’에 집착하여 아를 내세우다보니 아에 대하여 객이 나타나 삼라만상을 전개한 것이 우리가 보는 물질계인데 이 물질계의 본질이 무엇인지 따지고 있는 것이 물리학이다. 따져 본 결과 현대물리학의 토대가 되는 양자역학에서는 객관적 실체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렇게 보도록 창조해서 보는 것이라고 양자역학은 설명하는 것이다. 물리학은 분별지로 판단하는 것이므로 공(空)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색(色)이라고 할만한 실체가 따로 없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심경의 내용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시공간의 성질에 관해서는 특별한 연구를 하지 않았다. 시공간의 성질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상대성이론이다.
동시성, 시간의 길이, 공간의 길이 이 모든 것이 그것들을 측정하는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다 다르게 나타나고 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다 옳은 것이라는 것은 이미 설명하였다. 이 사실, 모든 것이 다 상대성을 갖는다는 사실은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색이 무엇인지 무색이 무엇인지를 논하기 전에 우리가 관찰하고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켓을 타고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는 사 람과 지구상에 남아 있는 사람이 측정한 시간이 다르다고 지난번에 설명하였는데 언뜻 생각하면 여기엔 모순이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소위 쌍둥이의 역설이라는 것이다.
일란성 쌍둥이가 하나는 A라는 로켓을 타고 다른 하나는 B라는 로켓타고 일정한 속도로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A는 B가 움직이고 있으므로 B에 있는 시 계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으로 관측할 것이다. 그러나 B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는 정지해 있고 A가 움직이는 것이므로 A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으로 관측할 것 이다. 상대성이론은 둘다 옳다고 하였으므로 둘이 만났을 때 서로의 시간을 비교 하면 어떻게 될까?
여기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관측자의 운동상태를 알아야 한다. 서로 만나서 비교 하려면 누군가가 가속운동을 하여 상대방의 로켓에 대해 정지하여야 한다. 이때 서로의 시간을 비교하면 가속운동을 한 사람의 시간이 느리게 흐른것으로 판명된 다. 가속운동을 하지 않고 서로를 관측하면 서로 상대방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으로 보이고 이것도 옳다. 물론 이 경우엔 쌍둥이가 서로 만나 누가 더 늙어 있 고 누가 더 젊어져 있는지 비교할 수는 없다.
상대성이론이 말하는 것은 ‘아’를 떠나서 현상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물리학의 법칙마저 ‘아’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색은 아를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색을 떠나 수상행식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상대성 이론이 말하는 내용이다. 색이 따로 없다면 아는 따로 있는 것일까? 이것은 분별지를 바탕으로 하는 물리학이 답할 수 있는 성질의 물음은 아니나 경 전은 그렇다고 말한다. 그것을 알려면 반야지를 얻으라고 한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23>실(實)과 허(虛)
- ‘물질-에너지’같은성질 표현만 달라-
- 오관으로 보는것 ‘我’의 집착일뿐 -
지금까지 현대물리학의 근본이 되는 양자역학적 물질관에 덧붙여 우주•물질에 대한 물리학의 또다른 관점인 상대성이론의 일부분을 설명하였다. 경전이 설하는 무색 무수상행식에 대해 상대성 이론은 색과 아(我)는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리학은 수상행식의 주체인 아(我)에 대해 직접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아가 보는 색이 아를 떠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색을 보는 아도 결국은 하나의 집착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뒷바침하고 있다. 색(色)이란 결국 아(我)가 만들어 낸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사람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을 실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체가 운동하고 변하여 생기는 여러가지 현상은 실체가 아닌 신기루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실체와 현상은 실(實)과 허(虛)일까? 상대성이론은 허와 실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 E=mc2이 바로 허즉실이요 실즉허를 뜻한다. 차근차근 따져보기로 하자.
E=mc2은 질량이 있는 입자가 사라지는 대신 에너지가 생겨나고 에너지가 변하여 질량을 가진 입자로 나타날 수 있음을 뜻한다. 아니 그것보다 모두 질량을 가진 입자가 에너지의 특수한 형태임을 뜻한다.
물리학에서 에너지라고 할 때 여기에는 어떤 특정한 형태가 없다. 물체가 운동하면 거기엔 운동에너지가 있다고 말할 뿐이다. 질량을 가진 물체를 실체라고 할 때 이 물체가 빠르게 움직이면 보다 많은 운동에너지를 갖는다하고 느리게 움직이면 보다 적은 운동에너지를 갖는다할 뿐 빨리 움직이든 느리게 움직이든 실체에 무슨 변동이 있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저 운동상태가 바뀌었다고 말할 뿐이다. 즉 실체가 나타내 보이는 현상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에너지란 단순히 현상이 바뀌는 정도에 대한 척도일 뿐이다. 또한 지상에서 물체의 높이를 바꾸어 주면 낮은 곳에 있을 때는 실체가 갖는 위치에너지가 적으며 보다 놓은 곳에 있을 때는 보다 많은 위치에너지를 갖는다고 말한다. 이 경우에도 위치에너지는 실체인 물체의 위치가 변한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척도일 뿐 실체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일상경험의 세계에서 보고 느끼는대로 물질을 실체라고 하는한 에너지는 허상일 뿐 실체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의 성질을 연구한 결과 에너지가 물질로 나타날 수 있음을 보였다. 바로 E=mc2은 상대성이론에서 유도한 것이다.
현상에 따른 허상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는 에너지와 실체라고 생각해 오던 물질이 사실은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상대성이론이 말해주고 있으며, 이 사실은 실험적으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검증된다. 우리가 일상적 경험의 세계에서 허와 실로 나눈 것이 ‘아(我)’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 중 어느 것이 옳다는 법이 없고 다 옳다는 것이 상대성 이론이 뜻하는 내용이다.
사람이 오관으로 보고 느끼며 분별지로 판단한 것은 결국 ‘아’의 고집에 불과한 것이다. 한꺼풀 벗기면 새로운 것이 나타나고 또 한꺼풀 벗기면 또 다른 것이 나타난다. 반야심경은 사리불에게 이것을 가르키는 것이다. 네가 보는 모든 것은 네 고집에 불과할 뿐 그것이 그대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시고공중 무색 무수상행식…’은 네가 오관으로 보는 모든 것은 네가 그렇다고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진리는 주와 객을 초월하여 반야지로 비출때만 나타난다는 것을 심경이 설하는 것이다.
물리학은 반야지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말할 수 없으나 분별지로 판단해 본 결과는, 적어도 분별지 내에서는 심경이 말하는 내용이 옳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24>색(色)의 의미
- 색은 실재하지 않는 ‘관찰자의 아집’-
“…색즉시공 …무색…”이라고 경전이 설할 때 분별지로 경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我)’에 집착한 나머지 객관적 실체를 인정하고 “이것이 색(色)이요”하고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를 얻고자하면 상(相)을 버리라고 <금강경>은 설하고 <반야심경>은 오온이 공한 것을 반야로 비추라고 설하는 것이다. 색(色)의 의미가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고 사람의 아집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절대시공간을 부정하고서 사람마다 즉 ‘아(我)’마다 자기가 처한 상태에 따라 물질과 시공간을 보게 되고 이렇게 본 물질과 시공간중 누가 본 것이 더 옳다는 것이 없고 다 옳다는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 상대성이론이다. 객관적 시공간도 없고 객관적인 물리현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 보는 시공간과 물질이 존재할 뿐이다. 상대성이론이 나오기 전까지 물리학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시공간을 ‘색’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질이 존재하든 말든 텅빈 공간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이 공간중에 별들이 점점히 흩어져 있고 물질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물질이 실체이고 이 실체에 모양이 있고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시공간에도 모양이 있고 물질과 연결되어 있다. 물질을 떠나 시공간을 생각할 수 없고 시공간을 떠나 물질을 생각할 수도 없다. 또한 시공간 중에서 일어나는 물질의 운동과 변화는 그것을 경험하는 ‘아’를 떠나 생각할 수도 없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은 태양이 지구를 잡아당기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설명하는 것이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물론 만유인력의 법칙은 잘 맞는다. 한때 완벽한 이론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을 정도로 잘 맞는다.
그러나 상대성이론의 설명은 다르다. 누가 지구를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다. 공간의 모양이 생긴대로 지구는 자유롭게 운동한다. 공간의 모양이 그렇게 생겼기에 지구는 태양주위를 돌 뿐이다. 그리고 공간의 모양을 그렇게 만든 것은 태양이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평평하게 잘 닦여진 바닥에서 공을 굴리면 공은 똑바로 나간다. 이 바닥에 불룩 솟아나온 산이 있다면 공은 산주위를 돌아서 굴러갈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면 무슨 힘이 있어 공을 산의 중심에서 밀어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반대로 오목한 골이 있다면 공은 오목한 쪽으로 굴리는 것처럼 굴러갈 것이다. 공은 자유롭게 진 행하지만 공이 운동하는 공간의 모양에 따라 여러가지 모습으로 운동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지만 시공간은 모양을 갖고 있다. 이 모양은 물 질이 만든다. 태양정도의 질량을 가진 별이라면 빛이 지나가는 길도 휘어지게 만 든다. 지구상에서 빛을 쏘아 보내면 직진한다. 그것은 지구주위의 공간이 평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양이나 그보다 더 큰 질량을 가진 별주위로 빛이 진행할 때는 진로가 휘어진다. 그것은 태양이나 별들이 주위의 공간을 휘어놓았기 때문에 빛을 자유롭게 진행하지만 그 진로가 휘어지는 것이다. 또 한 시간의 길이도 중력이 강 한 곳과 약한 곳 사이에는 다르게 나타난다. 질량이 큰 별주변에서 진행하는 시간 의 길이는 질량이 작은 지상에서 진행하는 시간의 길이와 크게 다르다. 별에서 진 행된 시간이 1초라할지라도 지구상에서는 몇년에 해당할 수도 있다. 시간과 공간 을 합쳐서 말하는 시공간이 휘어졌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물질이 시공간의 모양을 만들고 시공간의 모양에 따라 물질의 운동이 결정 되기에 물질과 시공간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질만을 색이라 고 보는 것은 그렇게 보는 사람의 아집에 불과한 것이다. “…색즉시공…무색…” 이라고 경전이 설할 때 이것은 일차적으로 “사리자야, 너는 무엇을 색이라고 하 느냐? 그것은 네가 만든 것이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하고 말하는 것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25>시공간의 탄생
- 150년전 우주 하나의 점서 탄생 -
- 진공서 물질 출현 …‘시고공중 무색’증명 -
경전에서 말하는 색과 공을 물리학적으로 살펴볼 때 공을 물리적 진공으로 생각하면 진공중에서 입자-반입
자의 쌍이 생겨나고 입자-반입자의 쌍이 소멸되어 진공으로 돌아가니 이 사건만으로도 색과 공은 서로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경전은 아예 공 가운데 색이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즉 ‘…시고공중 무색…’을 우주 전체에 적용시켜 보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양자론이건 상대이론이건 모두 색과 아(我)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가 ‘아(我)’에 집착하는 한 아도 있고 색도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이 비록 집착이 만들어낸 헛것이라고 하더라도…. 아상은 탄생을 갖는다. 전생이 있던 없던 ‘아’는 시작과 끝을 갖는다. 그렇다면 색에도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일까? ‘…시고공중 무색…’이라는 말을 역으로 해석하면 공(空)중에는 색이라 할만 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색을 본다면 그렇게 보이는 색은 ‘아’가 공 가운데서 만들어낸 것이라는 뜻이 된다. 물리학적으로 풀이하면 물질과 시공간이 함께 진공중에서 나왔다는 뜻이 된다. 물리학자들은 실제로 물질과 시공간이 함께 진공중에서 홀연히 출현하였다고 믿는다. 물질과 시공간 모두가 어느 순간 탄생한 것이라는 학설이 있다. 이른바 우주의 탄생과 기원에 관한 대폭발 모형이다. 살펴보기로 하자.
일반상대성 이론이 발표된지 몇년 후 프리드만(Friedman)이라는 물리학자가 우주의 모형을 나타내는 방정식을 풀어 답을 얻었더니 우주는 풍선이 팽창하듯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별과 별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으며 거리가 멀수록 비례하여 더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는 답이 나왔다. 이 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우주는 결코 안정된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안정된 우주를 물리학에서는 정상상태(stationary state)의 우주라고 부르는데 당시의 물리학자들은 정상우주를 믿고 있었다. 우주의 크기는 일정하고 이 일정한 크기 내에서 질서있게 별들이 움직인다고 믿었던 것이다. 상대성이론의 창시자인 아인슈타인마저도 정상우주를 믿고 있었다. 자신의 이론으로부터 정상우주에 관한 답을 얻을 수 없게되자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방정식을 수정하여 정상우주에 관한 답을 이끌어 낼 정도로 당시의 물리학자들은 모두 정상우주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프리드만의 이론이 맞는다면 이 이론을 거꾸로 생각할 때 우주는 150억년전 쯤에 는 우주가 하나의 점에 불과하였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우주란 물질 뿐만 아니라 시공간 전체를 뜻하는 것이므로 150억년 전 어느 순간 하나의 점(點)으로부터 시 공간과 물질이 나타났다는 뜻이 된다. 이 점의 크기는 원자(原子)의 크기를 일억분 의 일로 쪼갠 것을 다시 일억분의 일로 세번쯤 쪼갠 것만큼 작은 것이므로 크기가 없는 글자 그대로의 점이라고 생각해도 큰 잘못은 없다.
프리드만의 이론이 나온 후 7년쯤 되었을 때 허블(Hubble)이라는 천문학자가 은하 계들이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관측하였다. 은하계는 실제로 거리가 멀면 멀수록 비례하여 더 빨리 멀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측사실이 있는한 우주가 팽 창하고 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우주가 한점으로부터 폭발하여 그 때 비로소 시간과 공간의 시작이 있었고 물질이 생겨났느냐에 대한 물음에는 더 많은 관측사실을 필요로 한다. 실제로 더 많은 관측사실이 있다. 프리드만의 수학 적 모형을 바탕으로 하여 우주의 팽창을 설명하고 나아가 우주가 한점으로부터 출 발하였다면 예견될 수 있는 물리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적 모델이 앞서 말한대로 대 폭발 모형인데 이 모형에는 여러가지 모델이 있고 세부적인 차이가 있어 아직까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나 이론과 실험 모두에 걸쳐 우주는 대락 150년전 쯤 시 간도 공간도 물질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탄생하였다는 사실에는 많은 물리학자들 이 동의하고 있다.
“…시고공중 무색…”이므로 진공에서 색이 출현할 수도 있으나 이 색도 결국엔 무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26>진공•우주의 탄생
-‘+ -’에너지가 시공간을 낳았다. -
- 모든 點은 우주의 중심이며 출발점-
우주의 탄생은 단순한 물질의 탄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과 물질의 탄생을 뜻하는데 이것은 <반야심경>의 내용을 물질적인 입장에서 그대로 뒷바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텅텅빈 공간을 생각한다. 그래서 우주가 탄생하였다고 하면 텅텅빈 공간 가운데서 에너지가 뭉친 하나의 점이 생겨나서 팽창한 것이 오늘날의 우주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우주는 빈 공간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물질도 없었다. 그러니 물리적 법칙도 없었다. 색(色)이라고 이름붙일 것도 없었고 색을 인식하는 수상행식의 정신작용도 없었다. 그렇다고해서 아무것도 없는 이것을 허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없긴하되 온갖 것을 창조해내기도 하니 이것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불렀다. 이 공(空)을 물질적 측면에서 볼 때는 오늘날 물리학에서 말하는 진공(眞空)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우주의 탄생이란 아무 것도 없는 진공에서 작은 거품이 솟아난 후 계속 이 거품이 커지는 것이라고 비유하여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풍선을 불면 그것이 계속 부풀어 올라 팽창하듯, 진공에서 생겨난 거품이 팽창하는 것이 바로 우주이다.
그러나 시공간 가운데서 팽창하는 것이 아니다. 이 거품 또는 풍선의 크기가 바로 시공간의 크기이고 물질은 이 풍선 속에 있다. 풍선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물음은 물음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풍선바깥에 빈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풍선의 바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풍선이 그대로 우주의 모든 것이다. 우주의 크기가 유한하든 무한하든 우주의 밖이란 없는 것이다. 현재까지 물리학자들이 갖고 있는 정보로써는 우주의 크기가 유한할 가능성이 다른 가능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크다. 150억년전에 우주가 하나의 점으로부터 출발하여 오늘의 우주가 되었다면 우주의 크기는 유한할 수 밖에 없다. 우주의 크기가 유한하다는 것은 시공간의 크기가 유한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도 없다. 시공간내에 즉 우주내에 있는 모든 점이 다 우주의 중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생기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음으로 “…시고공중 무색…”이라고 반야심경 은 설하고 또 물리학에서도 보존의법칙에 의해 물질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 지는 것도 아니며 단지 그 모양만 바꾼다는 것을 밝혔는데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서 어떻게 시공간이 나오고 물질이 나올 수 있을까? 현재로선 100%의 확신을 가 지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많은 물리학자들이 믿고 있는 것은 이렇다.
물리적 진공은 모든 물리량의 합(合)이 영(零)인 상태이지만 이 영(零)은 허무가 아니고 불확정성원리에 의한 어떤 작용이 있어서 이 작용이 영을 ‘남는 것’과 ‘모자라는 것’으로 자연스레 나누게 된다. 비유하자면 평지의 한쪽이 솟아나 높 은 산이 되고 솟아오른 산만큼의 부분이 꺼져서 골짜기가 되는 것과 같다. 편의상 ‘남는 것’은 ‘+’의 에너지를 갖는다하고 ‘모자라는 것’은 ‘-’의 에너지 를 가진 것들이 시공간의 배경에 숨어서 시공간의 모양을 결정하게 된다. 즉 시공 간도 물질과 함께 없는 것에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우주에 있는 모든 물리량을 합쳐 놓으면 영(零)이 된다. 적어도 많은 물리학자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니 통털어 보면 색(色)도 색이다 할 수 업고 무색이라고 부 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도 어떤 순간 만들어진 것이고 공간도 같은 순간 물 질과 더불어 만들어진 것이고 이것들을 만든 것은 물리적 진공이다. 경전은 분명 히 이것을 가리킨다. 그렇기에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꿈과 같다고 하며 모든 것의 근원은 공(空)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시고공중 무색…”은 많은 물리학자들이 믿고 있는 것과 일치한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27>물리적 진공과 아공
태초의 진공’‘오늘날 물리법칙’다르듯
‘我空’도 인간의 분별지 벗어난 자리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다 함께 모든 물리현상은 그 현상을 관찰하는 관찰자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음은 이미 설명한 바다. 또한 일상적 경험의 세계에서는 실체로 보이는 물질이 본질적으로는 실체라고 할만한 알맹이가 따로 없다는 것도 설명한 바다. 그러니 ‘무색’이라면 ‘무수상행식’일 것이다. 수상행식의 정신작용에 대한 주체는 우리가 ‘아(我)’라고 부르는 것인데 ‘무수상행식’이라면 ‘아’도 없어야할 것이다. 실제로 불교에서는 ‘아공(我空)’이라고 하여 ‘아’를 부정하고 ‘법공(法空)’이라고 하여 분별지로 보는 모든 법칙과 현상을 부정하고 있다. 색에 국한시켜 말한다면 물리학도 법공을 주장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물리학자들은 ‘법칙이 없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법칙이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그런데 ‘아공(我空)’이라는 말을 하는 물리학자는 하나도 없다. 이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아’는 물리학의 연구대상이 현재로선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현상과 법칙을 조사한 결과 무색이라는 말에 수긍할 수 있고 또한 색이라고 할만 것이 없거나 색의 실체라고 할만한 것이 따로 없다면 색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도 하나의 꿈과 같은 것이기에 무수상행식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여전히 ‘아’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모든 것이 꿈과 같고 실체가 없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꿈을 꾸기에 ‘꿈’이 있는 것이 아닌가? 꿈꾸는 자를 ‘아’라 부르면 어떤가? ‘아’마저 꿈과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이 ‘아’를 꿈이라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해보면 끝이 없다. 언제나 ‘나’를 생각하는 ‘나’라는 것이 생각밖에 존재하게 된다. 생각밖에 존재하는 ‘나’를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나’가 생각밖에 존재하게 된다. 생각만으로는 결코 ‘나’의 끝을 볼 수가 없다.
우리의 생각밖에 존재하는 ‘나’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는 ‘아공’을 말한다. 반야심경에서 설하는 ‘공’이 ‘아공’을 포함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경전은 언제나 ‘…무색 무수상행식…’하는 식으로 언제나 물질과 정신을 함께 얘기한다. ‘아공(我空)’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별지로 추론하기 전에 먼저 앞서 말한 ‘아’의 구조를 물질세계의 구조와 비교해 보기로 하자.
‘아’와 ‘아’를 생각하는 ‘나’도 끝없이 이어지는 ‘아’의 구조가 물질세계 에서 발견된 것은 20세기 중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울을 마주보도록 세워 놓고 가운데 촛불을 켜두면 거울에 비친 그림자의 그림자가 다른 거울에 생겨나서 무한 히 많은 촛불의 그림자가 생겨난다. 간단한 구조가 계속 반복하여 나타나면 전체 적으로는 굉장히 복잡하고 불규칙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구조를 쪽거리구 조(Fractal Structure)라고 부른다. 눈송이는 간단한 기하학적 구조가 반복되어 전 체적으로 육각형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지구상에 떨어진 눈송이중 똑같이 생긴 것은 하나도 없다. 급하게 소용돌이치며 불규칙하게 흐르는 물결, 제멋대로 생긴 바위나 해안선도 간단한 기하학적 구조가 반복해서 나타난 것이다. 이런 뜻에서 ‘아’의 구조도 기하학적인 쪽거리 구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물리학이 ‘아공’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할 수 없지만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로 이루어진 아의 구조구조를 물리적 진공과 비교할 수 는 있다.
복잡하고 커다란 우주가 시공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탄생했듯이 생각하 는 ‘나’를 끝없이 만들어내는 생각밖의 ‘아’에서 온것이라면 이 생각밖의 ‘아’를 ‘아공’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우주를 탄생시킨 태초의 물리적 진공 이 오늘날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물리법칙을 벗어나 있듯이 ‘아공’도 인간의 분 별지를 벗어나 있다.
경전에서 말하는 ‘공’은 물리법칙에 벗어나 있고 분별지도 벗어난 그자리를 가 리킨다. 그래서 오온개공이라고 선언하고 ‘…무색 무수상행식…’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28>모든 것의 근원
물리적 진공에서 우주 나왔듯이
마음의 진공에서 ‘我 ’ ‘수상행식’생겨
물리학은 ‘색(色)’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이기에 눈에 보이는 ‘색’과 ‘물리적 진공’과의 관계를 밝히므로서 반야심경의 내용을 물리적인 측면에서 뒷바침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공’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이것만으로는 미흡한데가 있다. 경전의 첫머리에서 말하기를 반야로 비추어 볼 때 ‘오온이 개공’이라 하였으니 깨닫기 전에는 ‘공’을 관해 아무리 분별지로 이해 한다고 하더라도 ‘공’을 체득할 수 없겠지만 ‘공’을 이해한다는 것은 길을 걷는 사람이 지도(地圖)를 갖고 있는 것만큼 ‘공’을 깨닫는데 도움은 될 것이다. 적어도 잘못된 길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연구대상이 아닐지라도 ‘물리적 진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아’에 관해 계속 접근해 보기로 하자. ‘아’도 어떤 기하학적 구조를 갖고 있음은 지난번에 설명했지만 이번엔 ‘아’의 바탕이 되는 마음 구조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 마음은 의식(意識)과 무의식(無意識)의 이중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보고 듣고 느끼는 ‘의식’과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지만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끊임없이 간여하는 ‘무의식’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은 불교에서 말하는 제6식을 뜻하고 무의식은 제7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불교에서 말하는 제8식과 그것을 넘어선 일체 마음을 모두 포함하여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기로 하자.
사람의 의식구조는 컴퓨터와 너무나 흡사하다. 사람은 자유의지에 의해 스스로 판단한 것에 따라 자신의 뜻을 결정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 그렇지 않다. 과거의 경험과 주위환경및 받은 교육에 의해 의식구조가 거의 결정된다. 마치 컴퓨터가 미리 입력된 명령체계에 따라 일체의 작업을 수행하듯이 사람도 무의식에 기록된 기억을 바탕으로 판단과 행동을 하게된다.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인격과 습성을 지니게 된다. 버터와 치즈에 맛들린 사람과 된장과 김치에 맛들린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다르기 마련이다. 컴퓨터에 입력된 정보가 다르면 다른 답을 주듯이 무의식에 깔린 정보가 다르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은 악한 행동을 하도록 선한 사람은 선한 행동을 하도록 환경과 교육에 의해 무의식속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환경에서 자랐어도 타고난 유전형질에 따라 성격과 행동이 다를 수 있지만 그것도 DNA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컴퓨터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사람은 정밀한 컴퓨터에 불과할까? 유전자와 무의식에 기록된 정보가 다르면 다르게 행동한다는 점에서 사람도 컴퓨터와 마찬가지임에 틀림이 없다.
한 사람에게서 그가 받은 교육의 내용을 하나씩 지워나가면 어떻게 될까? 의식과 무의식속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 지워진다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 마치 일정한 공간에서 물질을 다 없애면 물리적 진공이 남듯이 사람에게서도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면 정신적 진공이 남지 않을까? ‘아’가 기억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뜻에서 ‘아’는 실체가 아니다. 그런 뜻으로 불교에서는 ‘아공’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것을 벗어던진 이 ‘아’는 허무한 존재가 아니다. 일체의 욕망, 환경과 교육및 경험에 의해 물들어진 것을 벗어난 ‘아’는 물리적 진공에 비유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벗어난다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구별도 없이 글자 그대로 마음이 비었다는 뜻이다. 텅비었으니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눌 것도 없다. 마음이 비었다는 것은 ‘빈 마음’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마음도 없다는 뜻이다.
시공간도 없고 물질도 없는 ‘물리적 진공’에서 우주가 나왔듯이 마음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는 ‘마음의 진공’에서 ‘아’가 나와서 마음과 수상행식이 생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도 마음도 없다면 그것을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주’와 ‘아’의 근본은 분별지로 헤아릴 때는 아무것도 없는 ‘공’인 것이다. 적어도 반야심경이 말하는 ‘공’은 그러한 뜻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29>돈오와 양자도약
양자도약 발견후 불연속적 변화 인정
돈오믿어야 분별지 초월 속박 벗게돼
반야심경이 설하는 것은 ‘공’에 관한 것인데 이것을 사리분별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이하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까지 설한 내용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일체의 모든 것이 다 꿈에 불과하다는 내용인데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체득하지 못하는 이상 한마디 한마디를 다 말로써 풀이하여 수긍하더라도 ‘공’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사실 시공간과 물질 모두가 물리적 진공에서 생겨났고 ‘아’라는 것마저 단순한 집착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꿈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수긍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일체가 헛것이니 무슨 밝고 어두움이 있겠으며 생노병사가 있겠는가? ‘고집멸도’도 결국 집착에 불과한 ‘아’가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 지혜라는 것도 허망한 것을 풀이하는 허깨비 장난에 불과할 뿐이다. ‘시고공중…’이하 ‘…이무소득’까지를 말로써 풀이하고 이해하려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별지의 차원에서 불교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별지로 이해하고 그친다면 남은 것은 허무밖에 없다. 허무를 뛰어넘으려면 분별지를 뛰어넘어야한다. 어떻게 분별지를 뛰어 넘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말과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기에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뛰어넘는 현상이 있다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다.
선승들은 돈오와 점수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점수란 점차 닦아나가는 것이고 돈오란 일시에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차원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을 뜻하는데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돈오이다. 속박상태에서 점수란 없다. 물론 정신적인 현상을 물리적 현상으로부터 추론하여 결론을 끌어내는 것에 무리가 있지만 정신-물질의 일원론을 받아들인다면 물리적 현상에서 돈오와 점수를 추론해 보는 것도 뜻있는 일일 것이다.
현대물리학이 탄생하기전 물리학자들이 자연의 변화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변화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일지도 그렇게 변화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았다는 것이지 하나의 현상이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고 갑작스럽게 다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정지해 있던 자동차가 갑작스레 가속되어 속력이 시속 0에서 100㎞로 변했다 하더라도 그 중간값인 10, 20, 50㎞ 등을 다 거친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 경험에서 보는 것은 다 이렇게 점진적인 것이다. 그런데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발견한 후 물리학자들은 양자도약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모든 물질은 92가지의 원자가 결합하여 이루어졌는데 이를 속박상태라고 부른다. 원자도 원자핵과 전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전자와 원자핵은 모두 속박되어 있다. 이 속박상태에 있는 원자는 여러가지 상태를 갖고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변하므로서 생명의 활동을 포함하여 모든 물질의 변환을 나투고 있다. 그런데 이 속박상태에서 일어나는 변환은 모두 불연속적이다. 갑자기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변하는 것이다. 에너지를 예로 들면 1이라는 값이 중간값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100이라는 상태로 변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과거의 경험 받은 교육등으로 인해 속박되어 있다. 불교적인 표현으로 집착에 의해 속박되어 있다. 사람의 마음속으로부터 집착시키는 요인을 제거하더라도 사람은 시공간내에 존재하면서 시공간적 변화를 바탕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한다. 분별지란 시공간적 존재가 갖는 한정된 지혜이다. 따라서 분별지로 <반야심경>을 이해하는 것은 사물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선승들은 돈오를 말했다.
반야심경을 이해하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물리적 진공의 묘한 작용으로부터 ‘공’을 짐작하고 양자도약으로부터 속박된 마음에서 벗어나는 길은 돈오뿐이라는 믿음이다. 돈오후 반야지를 갖게 된다는 믿음이 있어야 경전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지 않고 ‘시고공중… 이무소득’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 이전 믿음이 중요하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30>절대無와 믿음
30>절대無와 믿음
-‘無我’‘空’깨달음으로 체득하는 경지 -
- 믿음없이 머리로만 심경 풀면 오류 범해 -
반야심경은 진리를 ‘공’이라 표현하면서 ‘공’을 설할 뿐 ‘믿음’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야지가 없는 범부한테는 ‘믿음’이 중요하다. 알음알이로써는 알 수 없는 진리가 있음을 믿어야 반야심경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다. 믿음없이 반야심경을 읽으면 ‘불교는 허무를 주장한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머리로만 생각하고 믿음없이 ‘공’이나 ‘무’를 풀이할 때 범부가 범하는 오류는 이런 것이다.
진공에서 우주가 탄생했다라고 말할때 사람들은 ‘진공’이나 ‘무’를 자기식으로 먼저 그려낸다. 대부분 텅빈 공간을 먼저 생각한다. 텅빈 공간 가운데서 하나의 점과 같은 우주가 생겨나 팽창하는 것을 생각한다.
시공간도 없고 물질도 없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을 그려낼 수 없는 것이다. 시공간도 없고 물질도 없는 곳에서 우주가 생겨났다는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일지라도 보통 사람들은 시공간마저 없는 상태를 상상해내지 못한다. 이것은 ‘아’나 ‘마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교육이나 환경들에서 벗어나 일체의 집착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무아지경’이라고 표현하지만 이 상태를 자기식으로 그려낸다. 욕심도 없고 악한 마음이 없는 깨끗한 마음을 그려낸다. 욕심이 나쁜 것이 아니다. 욕심이란 인간의 활성(活性)이 나타난 것이니 근본적으로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옳다거나 그르다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활성은 활성일 뿐이다. 활성이 없다면 삶의 의미를 잃를 것이다. 문제는 잘못된 집착에 의해 활성이 이기적으로 나타나 타인을 해치는 것이 나쁜 것이다. 즉 집착때문에 본질을 보지 못하고 어리석은 생각과 행위를 하게 되므로 경전은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집착가운데 가장 끈질긴 것은 아집이다. 아집마저 벗어버린 마음이라야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공간과 물질도 없는 상태를 상상할 수 없듯이 ‘아’마저 벗어버린 마음을 보통사람들은 상상할 수가 없다. ‘아’를 벗어난 마음은 마음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어의 상보성원리에서 설명하듯이 자연은 본질적으로 이중성으로 되어 있다. 분별지로 보는한 이중성을 이루는 전체를 볼 수 없고 어느 한쪽을 포기 하고 한쪽만 보게 된다. 분별지로 보는한 항상 주와 객으로 나누어 ‘아’를 주장하고 나머지를 ‘객’이라 하여 나눌 수 없는 하나를 억지로 둘로 나누 어 보기에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물질도 없고 시공간도 없고 아도 없 는 그것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도 없고 그려낼 수도 없어서 경전이 ‘무’ 또 는 ‘공’이라고 표현한 것을 ‘허무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 게 되는 것이다.
경전이 ‘시고공중 … 이무소득’이라고 설한 내용은 모든 것에서 벗어나 ‘아’도 없는 상태, 즉 주•객이 일체로 된 상태에서 본 내용을 설하는 것 이다. ‘공’이 이러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진대 거기에 무슨 수상행식이 있겠으며 의식경계가 있겠는가? 거기에 무슨 밝고 어두움의 상대적 구별이 있겠는가 시공간을 초월한 상태에 무슨 늙고 죽는 것이 있겠으며 고집멸도가 있겠는가? 모든 것이 일체가 되어 ‘아’가 따로 없는 상태에 무슨 지혜라는 것이 따로 있겠는가? ‘공’에 관해서는 분별지로 판단하여 이렇다 저렇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다해도 틀리고 저렇다해도 틀릴 수밖에 없는 것이 다. 오직 깨달음만으로 체득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믿어야하는 것이다. 믿 을 수 없다면 경전을 버려야 한다.
물리학은 ‘공’을 기술할 수 없고 이중성을 발견하고 자연의 성질을 설명해 도 물리학자들도 ‘공’을 체득한 것이 아니지만 물질과 시공간의 성질을 여 러모로 자세하게 따져 자연이 단순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심오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심경이 말하는 내용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따라서 물 리학은 보통 사람들에게 믿음의 바탕을 마련해 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김성구<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31>이해와 믿음
“주•객으로 나누기 이전의 세계에서는
매개없이 빛보다 빠르게 이심전심”
‘…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라고 설한 후 경전은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라고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설한다.
‘공’중에는 ‘지혜’라 할 것도 없고 ‘얻는다’는 것도 없으며 얻은바가 없으므로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는 고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집착하는 마음에 ‘아’를 만들고 ‘아’를 만들자 모든 것이 주와 객으로 나뉘니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집착이 만든 꿈이다. 보통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어 보고 있다. 심지어 ‘아’마저 분열되어 있다. 두뇌의 한쪽에서는 이것을 행하겠다고 작정하고 있는데 두뇌의 다른 쪽에서는 저것을 행하려고 작정한다. 이렇게 해서 보통사람들은 갈등속에 괴로와 한다. 반면에 ‘조견오온개공’을 한 사람 즉 견성을 한사람에게는 즉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된 사람에게는 갈등이 있을 수 없다. 꿈을 깨어 모든 것이 하나임을 체득하니 지혜라 이름붙일 것도 없다. 저것이 이것이고 이것이 저것인데 거기에 무엇을 따져 얻을 것이 있겠는가? 저것과 내가 남일 때 따지고 얻을 것이 있는 것이지 그대로 하나인데 무엇을 얻겠는가? 그저 꿈을 깨면 그만인 것이다. 그래서 꿈을 깬 보살은 반야에 의해 걸림이 없어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나 즉 대아(大我)인 것이다.
수학과 물리학의 재미있는 점은 이 두 학문 모두가 사람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데에 있다. 물리학의 불확정성 원리가 인식의 한계 즉 인식의 불확실성을, 수학의 불완전성 정리가 이성의 불완전성을 밝히므로써 사람이 알음알이 지식으로 본 것이 사실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므로써, 수학과 물리학은 반야심경의 내용중 절반을 지지하고 있다.
‘오온개공’으로부터 ‘…이무소득고’까지를 수학과 물리학이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의반야바라밀다…’부터는 수학과 물리학으로 따질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얘기다.
견성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제부터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없이 ‘…의반야바라밀다…’
는 허망한 얘기이다.
수학과 물리학은 철저하게 분별지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학문이기에 종교적 신앙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반야지를 가정한다면 무슨 일이 일 어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추론을 해볼 수는 있다. 대표적인 예로 ‘텔레파 시’ 또는 ‘이심전심’을 들 수 있다.
‘이심전심’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생각하는 바를 전한다는 뜻인데 정보 를 전달하는 수단이 없이도 정보가 전달되고 정보가 전달되는 데에 시간이 걸 리지 않는다고 흔히들 얘기한다. 주•객으로 나뉘어진 세계에서만 본다면 ‘이 심전심’은 물리학의 기본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모든 정보는 반드시 매개체 를 필요로 하고 모든 정보는 빛보다 빨리 전달될 수도 없다. 그러나 주•객으 로 나뉘어지기 이전의 세계라면 정보전달이 반드시 매개체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 정보전달이 빛의 속도보다 빠르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미 설명한대로(15회) EPR의 패러독스는 이 정보전달이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남을 설명해 주고 있다. 아인슈타인처럼 세상을 주와 객으로 나누 어 본다면 이심전심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보아처럼 세상을 하나로 보고 설명한 다면 이심전심은 물리학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너와 내가 그대로 하나인데 거기에 무슨 매개체가 필요하고 정보전달에 무슨 시간이 필요하겠는가?
물론 실험결과는 보아가 옳다는 것을 밝히고 있지만 이미 ‘아’에 집착되어 있 는 보통사람들은 ‘공’으로 합일된 경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견성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맹신과는 다르다. 사 물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얻은 수학과 물리학의 내용을 이해하고 이 이해를 바 탕으로 믿음을 갖는 것이기에 이 믿음은 수행의 밑거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을 갖고 경전의 후반을 읽기로 하자.
김성구<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32>불교속의 과학
반야와 열반
있는 그대로 보며 욕망불길 꺼진 상태
‘空’을 비추어 볼수 있는 둘 아닌 한 경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공부하는 보살은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이라고 경전은 설한다. 분별지에 의해 사리판단을 하는 보통사람들은 이치를 거꾸로 보기도 하며 진리를 모르기에 쓸데없이 애를 끓이며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으나 분별지를 넘어서 반야로 비추어 보는 보살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며 진리를 알기에 열반에 든다는 뜻이다.
분별지로 보는 세계는 이중성으로 나타나며 이 이중성 중 우리는 일부만 볼 수 있다는 것을 여러번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열반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나타나는 불교의 특징은 ‘공’사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공’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것이 반야이고 공을 체득한 인간이 가지는 궁극적인 자리가 열반이라는 뜻에서 반야와 열반이 불교의 특징을 나타낸다고 하더라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불교도 믿음을 중요시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초월적인 신에 대한 신앙을 주장하지도 않고 신의 은총으로 얻게 되는 천당이나 극락을 최고의 은혜나 복락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반야로 비추어 견성성불하고 열반에 들 것만을 주장한다. 부처를 최고의 자리로 말하면서도 부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선업의 결과로 얻게 되는 극락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극락마저 선업 다하면 없어지고 말 한 때의 꿈으로 여긴다. 반야가 없으면 올바로 살필 수 없기에 전도몽상이 일어나 얻은 것도 곧 잃게 된다는 뜻에서다. 사실 너와 내가 하나로 된 자리에서 얻을 것이 따로 없다는 ‘공’사상에서 볼 때 천당과 극락도 별것이 아닐 수 밖에 없지만 지혜 즉 반야를 최고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볼 때 불교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 수 없기도 할 것이다.
열반이란 불교적 성인이 육체적 삶을 마감할 때 보통 쓰는 말이지만 불에 탄 재와 같이 다시는 욕망의 불길이 일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욕망이란 그 자체로서 나쁘거나 좋다거나 하는 성질의 것은 물론 아니다. 반야지가 없어 모두가 연결된 하나임을 모르고 너와 나를 나누어 나만을 위해 그릇된 욕망을 불태울 수밖에 없는 마음의 상태가 나를 불행케 하기에 그릇된 욕망의 불 길이 꺼진 상태가 행복의 핵심적 요소가 된다는 것이 열반의 참된 의미다. 그래 서 반야와 열반을 분리시켜 말할 수는 없다. 반야로 보는 마음의 상태가 곧 열반이요, 열반에 든 마음이 보는 지혜가 곧 반야다.
반야와 열반은 분별지로 보는 사람이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반야나 열반의 상태가 어떻다하는 것을 그려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깨달으라고만 말한다.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 천당과 극락을 그려낸 다 하더라도 결국엔 전도몽상하는 마음이 추구하는 그릇된 욕망이 충족된 상태 를 그려낼 뿐이다. 새들이 지저귀는 낙원에 빈곤을 모르고 아프지도 않으며 죽는법도 없다는 식으로 세속적인 충족의 극치를 생각해낼 뿐이다. 그릇된 욕 망이 꺼져버린 마음이 찾은 그 자리 곧 ‘공’에서 볼 때 처음부터 생노병사 는 없는 것인데 무엇을 더 찾겠는가. 이중성을 뛰어넘어 정신과 물질을 따로 나누지 않는 너와 나를 나누지 않고 그저 모든 것과 하나로 된 ‘공’의 자리 거기에서 무엇을 더 찾겠는가? 찾을 것이 없다.
찾는다는 마음도 없다기에 사람들은 열반과 죽음을 비교하기도 하지만 열반이 란 그런 죽음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과 열반을 함께 비교하는 것 은 분별지가 만들어낸 착각이다. 분별지로 판단하는 한 반드시 이런 종류의 착각이나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 현대물리학의 양자론이다. 전도몽상을 멀리 벗어난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을 깨달으라는 것이 반야심경 이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것을 얻지 못했으면 즉 깨닫지 못했으면 믿고 수행하 라는 것이 경전이 뜻하는 바다. 그것은 다음에 ‘크게 신비한 주문’을 말할때 다시 한번 논하기로 하겠다.
김성구<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33>시대신주
바른믿음과 말은 밝고 신비한 진언
의식과 무의식 벽 허문 ‘空’ 체득한 경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털어 진리를 깨우친 모든 부처님은 반야에 의해 궁극적인 지혜를 얻었다고 설한 후 경전은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라고 설한다. 반야바라밀다는 크게 신비한 주문이요 밝은 주문이며 더 이상 비할 데 없는 높은 주문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말하는 주문은 마술사가 마술을 부릴 때 중얼거리는 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중성을 뛰어 넘는 지혜가 있음을 믿고 마음에 확신을 심으라는 뜻이다. 그리고 믿음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물론 이때의 믿음은 맹신이나 미신과는 다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최고로 치고 말로써 따지는 알음알이를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여 ‘직지인심 견성성불 불립문자 언어도단’이라는 말을 쓰면서 문자를 모르고도 깨우친 육조 혜능선사의 예를 들면서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을 하늘같이 떠 받든다. 이것은 단순논리와 일상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분별지의 한계를 가리키고 분별지로써는 보리에 이를 수 없음을 가르치는 것이지 논리에 맞지도 않는 것을 주장하거나 터무니없는 것을 믿으라는 뜻이 아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이 올바른 믿음을 갖고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분별지에 의한 판단이 꼭 필요하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이 필요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없이 달을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알음알이 지식을 경계하는 것은 손가락을 달인줄 알고 머무르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지 분별지에 의한 사리판단이 무조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분별지로 따지고 따져 분별지의 한계에 이르렀을 때 이것을 뛰어 넘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경전이 말하는 것은 이때 바른 믿음을 갖고 마음속에 신념을 확고하게 심으라는 뜻이다.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가 뜻하는 것은 ‘이제 내가 분별지의 한계를 알았으니 이에 머물지 않고 이 한계를 넘어 반야의 세계가 있음을 믿고 이를 달성하리라’하는 신념을 깊은 마음속에 심어두라는 뜻이다.
‘말이 옥(玉)이라’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말한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인데 깊은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우리가 믿고 생각한 것은 마음 속 깊은 곳에 기록되어 인격의 바탕을 이루고 다음의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바르게 믿고 행할 때 믿음이 깊을수록 큰힘을 발휘하게 된다.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들이 가끔 사용하는 죄면요법에서 나쁜 습관을 없애거나 무의식속에 감추어진 사실을 알아내는 것도 말로써 암시를 주므로써 이루어진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마음을 다스리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은 반야바라밀다는 신비한 주문이라고 한 것이다.
인간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은 이 주문을 받아들이는 창과 같다. 사람에겐 수의근과 불수의근이 있어서 수의근은 의식으로 통제하고 내장의 운동은 무의식이 통제하게 되어 있지만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있는 것이 호흡이다. 아무 생각없이도 호흡을 할 수 있지만 생각으로 조절할 수도 있다. 불교의 선승들은 일찌기 이것을 깨닫고 호흡을 조절하므로써 마음을 통제하는 법을 알아내었다. 그것이 좌선이요 참선이다. 가늘고 긴 호흡으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평안하게 한 가운데서 화두를 들거나 염불을 함으로써 의식과 무의식의 벽을 허문 것이다.
‘악’하는 한소리로 얻은 것은 바로 의식과 무의식의 벽이 허물어진 한 마음을 얻는 것이다. 즉 마음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이제는 ‘아’가 무의식의 통제를 받는 허수아비가 아니라 ‘아’가 마음의 주인인 것이다. 이때의 ‘아’는 집착이 만든 허수아비가 아니라 이중성을 초월해 ‘공’을 체득한 마음인 것이다. 이것은 반야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이기에 경전은 반야바라밀다를 신비한 주문이라고 한것이다. 그렇다!
바른 믿음과 말은 신비한 주문이다. 이중성을 초월하여 ‘공’에 이르게 하는 신비한 주문이다.
김성구<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34>아제아제 바라아제
“가자 더높이 영원한 깨달음의 길로”
진리의 세계 이르는 실천적 주문
경전은 설하기를 반야바라밀다는 크게 신비한 주문으로서 일체의 고(苦)를 제거하며 진실하여 거짓이 없다고 한 후 바로 주문을 설하여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 사바하’라고 가르친다. 주문의 뜻은 ‘가자 가자 더 높이가자 영원한 깨달음의 길로’이다. 경전은 색즉시공으로부터 시작하여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를 설한 후 그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영원한 깨달음의 길이 있음을 믿고 그 길로 나가겠다는 의지를 마음에 심는 것,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길로 떠나는 첫 걸음이라는 뜻이다.
현대물리학에서 기술하는 물리적 상태와 사람의 심리상태는 너무나 유사한 점이 많다. 물리적 상태를 현대물리학에서는 상태함수로 표현하는데 이 상태함수는 갖가지 상태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기술한다. 이미 설명한대로 이 가능성중에서 어느 한가지만을 나타나게 하는 것은 사람이 그 상태를 골라서 보았기 때문이다. 쉬뢰딩거의 고양이에서 설명한대로 관찰하기 전까지 고양이의 상태는 삶과 죽음이 섞여 있는 것으로 기술된다. 살아있는 고양이를 본다는 것은 삶을 창조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도 물리적 상태와 닮았다. 무엇을 결정하고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는 모든 가능성이 뒤섞여 있다.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다. 부처를 생각하고 불도의 길을 갈 수도 있고 마를 생각하고 마사(魔事)를 지을 수도 있다. 불도 마도 다 마음을 쓰기에 달린 것이다. 마음은 물질과 달라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어 잡을 수 없는 것 같지만 물질을 다듬어 모양을 만들듯이 마음을 다듬어 길들일 수가 있다. 마음을 길들이는 좋은 방법이 마음에다 말로써 암시(暗示)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염불독경을 하며 반야심경에서는 신비한 주문 ‘아제아제 … 사바하’를 즉 ‘… 저 영원한 깨달음에의 길로’라는 말을 불자의 마음에 심어주는 것이다. 염불이나 주문을 염하는 것은 다 마음을 길들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도 버리고 조사도 버리고 일체의 것에 매달리지 않는 무애를 얘기한다.
일체의 계율마저 사람의 마음을 묶어두는 장애로 취급하여 계율마저 뛰어넘는 무애자재행을 얘기한다.
궁극적으로는 그래야 한다. 삶도 죽음도 옳고 그른 것도 뛰어넘는 ‘공’에 이른 마음이라면 거기에 무슨 부처라거나 마라거나 하는 구별이 있겠는가. 그 마음에 무슨 계율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무애자재한 마음에 이른 다음에라야 부처를 버리고 계율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무애자재한 마음에 이르기 전 즉 ‘조견오온 개공’을 하기 전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고 계율도 지켜야 한다. 반야심경의 가치는 바로 주문을 설한데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공’이고 근심 걱정도 다 집착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헛것일지라도 거기에 매달려 울고 웃는 범부에게 깨달음을 설해봤자 그것을 얻을 방법이 없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길에 이르기 위해 믿음과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문이 가리키는 것이다. 헛된 믿음이 안되도록 경전은 먼저 이치를 설하고 그 이치를 체득하기 위해 마음 속에 먼저 ‘… 영원한 깨달음의 길’이 있음을 믿는 마음이 있어야함을 설한 것이다.
물리적 상태는 관찰을 행하기 전까지는 무엇이 결정된 것이 아니다라고 여러번 말했다.
그러나 한번 무엇인가가 결정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결정된 것만 나타난다. 마음도 그렇다. 한번 결정되면 그길로 움직인다. 이렇게 결정된 마음이 바로 업식이다. 우리에겐 두터운 업식이 있어 진리를 가리우고 있다. 깨달음이란 바로 이 업식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헛된 믿음’이요 집착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경전은 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헛된 꿈에서 깨는 방법이 신비한 주문 ‘… 영원한 깨달음의 길’에 있음을 설한 것이다. 물론 신비한 주문도 새로운 업식을 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은 후에나 벗어날 것이지 범부에겐 꼭 필요한 것이다.
김성구<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반야심경과 물리학<35>마치는글
반야심경과 물리학<55>-마치는 글
물리학적 ‘심경’ 접근 경전이해 도와
‘반야의 세계’ 이해차원 넘어 ‘믿음’중요
반야심경은 부처의 차원에서 본 진리를 설한 것이다. 반면에 물리학은 오관으로 인식하고 분별지로 판단하는 보통사람들이 물질계를 탐구하여 이룩한 학문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물리학으로 경전이 말하는 세계를 설한다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의 입장에서 경전이 말하는 내용을 살펴볼 필요는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각도에서 심경의 내용을 물리학적 입장에서 접근할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수학과 물리학을 통하여 우리는 분별지의 한계에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한계에 접한 후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거나 없다고 믿는 것은 완전히 믿음의 문제에 속하므로 말로써 논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시도한 글이 지금까지 말해온 ‘반야심경의 물리학적 해석’인데 졸열하여 경전의 내용을 훼손치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 일상적 경험의 세계에서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하나의 예로 윤회의 문제를 들 수가 있다. 이글의 첫회에서 ‘사람과 돼지는 같은 것인가’하는 물음을 던졌는데 글을 마치면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모색해 보기로 하자. 같은 것과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연필을 예로 들겠다. 책상위에 놓여있는 연필과 이 연필이 학생의 손안에 들려 글을 쓰고 있을때 두 연필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하고 있는 일은 다르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은 다르지만 이것을 책상위에 놓으면 저것이요 저것을 들면 이것이다. 즉 저것이 변하여 이것이 되는 과정을 다 살펴서 알 수 있으면 저것과 이것이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 변하는 과정을 모를 때 우리는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고 한다. 변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더 합쳐지거나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는 불생불멸의 원리에 의해 생긴것도 없고 없어진 것도 없다. <미란다왕문경>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한 방화범이 작은 불씨를 가져와 어느집의 지붕위에 불을 질렀다. 이 불씨가 자라나 마을을 다 태운 후 방화범이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되는데 이 방화범은 무죄를 주장한다. 자기가 가져온 것은 작은 불씨이고 마을을 태운 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작은 불씨가 자라나서 즉 변하여 마을을 태운 불이 된 것이니 이 사람이 범인이라는 판결을 경전은 내리고 있다. 옳은 판결이다. 물리학에서도 이 판결과 같은 방식으로 ‘같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으로 판별한다.
물질의 기본을 이루는 소립자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고 소립자가 다른 소립자와 힘을 주고 받는 기본 상호작용이 네가지가 있지만 물리학자들은 한가지 종류의 소립자가 여러가지 상태로 나타난 것이 사람의 인식능력에 따라 여러가지 소립자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 물리학자들은 네가지 기본상호작용도 한가지가 여러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 물리학자들의 이런 생각은 완전히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는 확인되었고 물리학의 목표란 진공에서 나온 한가지 종류의 소립자와 반입자가 삼라만상을 이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돼지와 사람이 같다고 말할 수 없지만 사람이 변하여 온갖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리고 원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윤회란 항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물리학과 반야심경은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기에 물리학적으로 경전의 내용을 증명하거나 부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물질세계만 본다면 물리학이 경전의 내용을 뒷바침 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진공이 물질에 영향을 미치고 입자와 반입자가 만나 소멸하며 진공에서 우주가 탄생할 수 있다면 이것을 가리켜 색즉시공이라고 말할 수 없겠는가? 이것을 이해한다면 남은 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믿는다면 신비한 주문을 깊이 새겨담는 것 뿐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 사바하.
김성구<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문> 부처님 법과 인연이 닿기 전에만해도 저의 생활은 매우 암담해 보였습니다. 저는 가진 것도 없고 학교라곤 국민학교 문턱밖에 못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하루 감사한 생각으로 살아 가고 있습니다. 이 기쁨을 어떻게 갚아야 할는지요. (서울 중랑구 면목동•구영순)
답> 그렇습니다. 불교를 알게 되면 그 순간부터 누구나 살아가는 이치가 즐겁게 보이고 평범한 생활 속에서 환희심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이 법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다’고 하셨고 ‘누구든지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법’이라고 하셨습니다. 불법 공부엔 자격증도 필요없고 학력도 필요없습니다. 세간의 높디 높다는 지식처럼 누구에게는 이해되고 누구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면 진리일 수 없을 것입니다. 열심히 믿고 정진하십시오. 그것이 불은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문> 사람의 몸을 받기까지엔 기막힌 인연이 개재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업•습때문에 사람마다 괴로움에 시달립니다. 그것을 녹일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요.
(부산시 동래구 거제동 •정달행)
답> 아버지의 뼈를 빌고 어머니의 살을 빌어 이 몸뚱이 가지고 나올 때 수억겁의 선업,악업 다 짊어지고 나왔으니 현실의 고통을 누구에게 탓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컴퓨터에 입력된 자료가 키보드를 누를때마다 솔솔 풀려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업이 있다면 지금의 내 안에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풀려 나오는 족족 몰락 되놓는다면 마치 녹음 테이프를 지워 빈 테이프로 만드는 것처럼 업은 점차 가벼워지고 마침내 깨끗이 지워지는 도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구멍에다 되놓아라, 어머니 자궁 속으로 들어가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닥치는대로 놓고 자유롭게 활보해 보십시오. 답은 거기에있습니다.
문> 저는 공부하는 과정에서 무어라 말하기는 어려워도 가슴으로 아련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과연 이것이 공부와 관계 있는 것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괜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요.
(광주직할시 송정동•김문원)
답> 불법공부와 관계없는 것은 없습니다. 일체 만물 유정무정이 그대로 다 불법인데 그 아련한 느낌이 확실치 못하대서 공부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잘하든 못하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실로 믿고, 나의 생활 일체가 다 근본자리로 나고 든다는 것을 잊지 않는데 있습니다. 내 근본자리의 나툼은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것이고 지금도 그렇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믿지 못해 ‘나’라는 관념을 굳게 세워 놓고 거기에 매달려 개었다 흐렸다 하니까 싱그러운 샘물맛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 얼마전에 땅문서 사기사건에 휘말려 자칫하면 곤욕을 치를뻔 했었는데 다행히 잘 해결이 되었습니다. 주변에서 운이 좋았다고들 합니다. 정해진 팔자운명이 있는지요. (울산시 남구 옥동•박영출)
답> 자기의 팔자운명은 자기가 지어 가는 것이지 어디서 정해 주거나 미리 결정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마음이 지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마음이 중요하다, 오직 마음 뿐이다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나고 그것이 호수의 파문처럼 전 우주로 번져가고, 마음과 마음이 서로 전달되기에 빙글빙글 돌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우연이란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밝으면 그대로 밝은 것이지 운명때문이 아니며, 마음이 어두우면 그대로 어두워지는 것이지 팔자 때문은 아닙니다. 부처님 법에는 팔자운명이란 없습니다. 삼재니 팔난이니 하는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 법은 시원한 법입니다
문> 소위 마음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안다는 것과 마음을 본다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서울 동작구 신길동 •차인광)
답> 안다는 것도 아니고 본다는 것도 아닙니다. 아는 것과 보는 것이 별개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하는 중에 배고프면 밥 찾아 먹고 졸리면 잠자는데, 그때 먹어야 하나 안먹어야 하나 잠 자야하나 자지말아야 하나 하고 따지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마음이 내키는 대로 먹고 자고 보고 듣고 그냥 그렇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우리의 일상생활, 일거수일투족이 그렇게 자연스러운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모르니까 네 마음을 보아라, 마음을 찾아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묻고 대답하는 중에 마음을 안다, 마음을 본다는 그런 군더더기가 소용에 닿는지요. 보는게 아는 것이요 아는게 보는 것입니다.
문> 가까운 이웃으로 부터 절에 다니며 함께 공부하자는 권유를 받고 있습니다. 불법을 공부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경기도 의왕시•권남희)
답> 불교란 다른 종교와 비교하는 뜻에서의 특별한 가르침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라 함은 이름일 뿐입니다. 참으로 불교를 배우고자 하면 종교로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가르침으로서의 불교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를 배우는 궁극의 목표는 나 자신도 석가모니처럼 부처가 되려는데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 못합니다. 우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불법공부란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여태껏 ‘나로소이다’하며 살아온 그 ‘나’가 아니라 ‘참나’, 즉 나의 진정한 실체를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될 때 누구나 부처되는 길을 알게 됩니다.
문) 제나름대로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살짜리 손녀가 구개열이라고 입천장이 갈라져 언어장애가 올지도 모른다고 하는데요, 그 원인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가요.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강춘금)
답) 그것은 누가 갖다준 것도 아니고 누가 뺏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현실에서 내게 다가오는 고통이란 모두 수억겁을 두고 쌓이고 뭉쳐 온 업이 과보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현실의 과보가 갖가지로 다가오는 것이지요. 그러나 고통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고(苦)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고집멸도 사성제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그 장본인 즉 ‘참나’ 또는 주인공을 굳게 믿고 그 자리에 일체를 놓을 수 있는 강한 믿음을 갖는다면 녹음테이프에 앞서 입력된 것을 되지울 수 있는 도리와 마찬가지로 고가 녹아내리는 도리도 있습니다. 살아가다가 나쁜 일이 닥쳤을 때 그것을 ‘업보다’ ‘죄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으나 사실은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일(경계)은 자성 부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과정입니다.
그러기에 내게 닥치는 어떤 일도 긍정 아닌 게 없습니다. 나무가 뿌리를 믿듯이 자성 부처님을 굳게 믿으십시요. 믿으면서 언어장애가 오지 않도록 자신의 뿌리를 관하세요.
부처님께서 우유죽을 받아 잡수신 도리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문) 얼마 전에 단풍구경에 나섰다가 먼산에 산불이 난 것을 보았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끄고 싶었지만 달리는 차속에 있었기에 안타까운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럴 때 스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광주시 북구 운암동•박대환)
답) 그것은 그것대로 마음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록 파괴처럼 보일지라도 한번씩 그렇게 해 줌으로써 살 수 있는 기반이 서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설령 모든 나무가 타 죽는다 하더라도 겉보기처럼 단지 타 죽는 것만이 아니고 거기에 진화의 도리도 있습니다. 껍데기가 죽었다고 해서 속의 씨까지 죽는 게 아닙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태워서 안될 게 있고 반대로 태워야 할 게 있고, 꺼서 될 일이 있고 안 꺼도 괜찮은 일이 있겠지요.
부처님 말씀따라 공부하는 분이라면 그러할 때에 믿음 속에서 일어난 한 생각의 힘을 확인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 얼마 전에 단풍구경에 나섰다가 먼산에 산불이 난 것을 보았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끄고 싶었지만 달리는 차속에 있었기에 안타까운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럴 때 스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광주시 북구 운암동•박대환)
답) 그것은 그것대로 마음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록 파괴처럼 보일지라도 한번씩 그렇게 해 줌으로써 살 수 있는 기반이 서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설령 모든 나무가 타 죽는다 하더라도 겉보기처럼 단지 타 죽는 것만이 아니고 거기에 진화의 도리도 있습니다. 껍데기가 죽었다고 해서 속의 씨까지 죽는 게 아닙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태워서 안될 게 있고 반대로 태워야 할 게 있고, 꺼서 될 일이 있고 안 꺼도 괜찮은 일이 있겠지요.
부처님 말씀따라 공부하는 분이라면 그러할 때에 믿음 속에서 일어난 한 생각의 힘을 확인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 「공부가 된 사람이 고기를 한 점 먹는 것은 천도다」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맞는 말인지요.
(서울 성동구 용두동•최연택)
답) 여러분들이 고기를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신의 피와 살의 일부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 고기 한 점은 벌써 사람 몸의 일부로 인도환생한 셈이 되지 않습니까? 간편하게 생각하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만 쇠고기 한 점이 곧 소 한마리와 다르지 않은데 그것을 먹을 줄 아는 사람에게서는 소가 무명을 벗는 게 되고, 먹을 줄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살생이 되는 것입니다.
먹을 줄 알면 그 살은 내 살이 되고, 그 마음은 내 마음이 되고, 그 생명도 내 생명이 되는 살생이라는 이름조차 붙을 자리가 없게 됩니다. 고기 한 점 씹어 삼키는 그 찰라에 소의 무명은 벗겨지고 사람으로 화현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도리를 투철히 모르면서 함부로 희롱 삼아서는 안됩니다.
문) 저는 불교에 관련된 책만 대략 5백권 가량 독파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게 되질 않습니다. 이른바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산시 금정구 남산동•정완모)
답) 부처님 법이 아무리 어마어마하고 광대무변하다 해도 생활 속에서 체험하지 못하면 그림의 떡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열 번, 백 번 읽고 또 읽어 줄줄 욀 지경에 이르렀다해도 단 한 말씀 내가 집어 먹을 줄 모른다면 그런 공부는 헛공부입니다. 세월을 낭비하는 짓 밖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행함이 없는 공부, 실천이 따르지 않는 공부는 생명없는 지식을 쌓는 데 불과합니다. 백 번 보는 것이 한 번 실천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것은 내 앞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서 집어 먹을 생각은 아니하고 음식 이름만 외어대는 꼴이나 다름없습니다.
맛을 보아야 맛을 압니다. 가령 올챙이가 개구리한테 땅냄새가 어떻더냐고 물었을 때 개구리가 수많은 말을 해주었다 해도 나중에 올챙이가 개구리되어 뭍에 올라가 보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 저는 불교에 관련된 책만 대략 5백권 가량 독파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게 되질 않습니다. 이른바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산시 금정구 남산동•정완모)
답) 부처님 법이 아무리 어마어마하고 광대무변하다 해도 생활 속에서 체험하지 못하면 그림의 떡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열 번, 백 번 읽고 또 읽어 줄줄 욀 지경에 이르렀다해도 단 한 말씀 내가 집어 먹을 줄 모른다면 그런 공부는 헛공부입니다. 세월을 낭비하는 짓 밖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행함이 없는 공부, 실천이 따르지 않는 공부는 생명없는 지식을 쌓는 데 불과합니다. 백 번 보는 것이 한 번 실천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것은 내 앞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서 집어 먹을 생각은 아니하고 음식 이름만 외어대는 꼴이나 다름없습니다.
맛을 보아야 맛을 압니다. 가령 올챙이가 개구리한테 땅냄새가 어떻더냐고 물었을 때 개구리가 수많은 말을 해주었다 해도 나중에 올챙이가 개구리되어 뭍에 올라가 보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 저는 일년에 한 두 차례씩 단식을 여러해 동안 계속 해 왔습니다. 나름대로 효과를 느끼고 있는데 계속해도 되겠는지요.
(서울 성북구 성북동•장호순)
답) 효과를 보고 계시다니 어떤 효과인지는 몰라도 방법에 잘못이 있는 것 같지는 않군요. 그러나 몸으로 하는 단식은 좋은 선생의 지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권하고 싶은 것은 굳이 몸 단식을 하기보다 마음으로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끊는 것은 몸을 비워서 탈 난 곳을 고치겠다는 시도겠지만 음식을 먹으면서도 먹는 사이없이 먹었다면 그대로 단식이겠지요. 음식을 내가 먹었지만 몸 속의 모든 생명체가 같이 먹었으니 내가 먹었다고 할 게 없습니다.
문> 스님께서는 ‘일체를 주인공 자리에 믿고 맡겨라. 그리고 관하라’하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도리입니까? (강원도 원주시 학성동•김종호)
답> 우리가 밥을 먹으려면 쌀을 깨끗하게 씻어 밥 지어놓고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하겠지요. 그래야 밥 맛도 알고 배도 부를 겁니다. 그런데 해 놓지도 않고 먹으려고만 한다면 어찌 먹어지겠습니까? 그래서 먼저 나를 있게 한 근본자리에 모든 걸 믿고 맡기는 작업부터 해야만이 정말 청정하고 신선한 도리를 알게 된다는 것 입니다. 주인공을 말하자면 나를 형성시킨 주체, 즉 나무로 치면 뿌리에 해당됩니다.
부모미생전의 자리, 나의 근본이 주인공인데 옛날 어느 선사께서 하루 중의 하찮은 일까지도 주인공에게 묻고 대답하며 행동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흔히 ‘나’라고 하면 내 육신과 의식작용을 ‘나’인 줄로 알지만 찰나로 변하는 그 ‘나’가운데 어느 때의 ‘나’를 진짜 ‘나’라고 하겠습니까. 또한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말하고 생각하는데 그때마다 ‘나’를 인식하고 있는지요.
그래서 ‘나’를 세우기 이전의 근본자리, 주인공을 믿고 모든 것을 거기에 되돌려 놓아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오래 떨어져 지내던 아비와 자식이 상봉하듯이 참나를 상봉케 됩니다.
문> 스님, 귀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서울 강남구 도곡동•권순심)
답>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아주 용하다는 사람이 올해는 물에 빠져 죽을 운세니 물 가에 가지 말라’고 했다면서 걱정을 한 일이 있는데 이렇게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마음속으로 물귀신을 겁낸다면 물귀신한테 봉변을 당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그랬는데 얼마 뒤에 찾아와서 하는 말이 물가에 가지않고 조심했는데도, 그만 물 뿌린 계단에서 미끄러져 허리를 못 쓰게되어 여러 달을 누워서 지냈다고 했습니다.
한 생각 일어난 거기에 얽매여 노예처럼 지냈으니 얼마나 딱한 노릇입니까.
부처님 공부는 자유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야 어찌 부처님 제자라고 하겠습니까.
문> 현대불교신문 창간호에 실린 생활속의 불교①에 ‘억만장자가 끼니를 걱정한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무슨 뜻인지요. (서울 은평구 갈현동•최세경)
답> 마음 속의 보화에 관한 귀절인 것같습니다. 자기 마음 속에 엄청난 보배가 있습니다. 흙 속에 진주가 묻혀 있듯이 그렇게 누구에게나 엄연히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금통장에 수십억원을 넣어 둔 것과 같은 셈이지요. 그런데도 다들 가난하다, 없다고 합니다.
내 마음에 엄청난 보배가 있음을 믿고 그것을 발견하려는 것이 불법 공부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가 세상에서 가장 큰 공부입니다. 제 마음 속에 무궁한 보화가 있는 줄 모르고 전전긍긍 하면서 살고 있으니 억만장자가 끼니 걱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