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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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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기자.위만 [준왕 남천설은 허구다] 마한은 금주(金州) 금마군에 있었다.
구산(九山) 추천 0 조회 141 16.06.22 00:29 댓글 1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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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06.22 08:05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 ^

  • 16.06.22 08:31

    평소에 제가 궁금했던 부분들을 여쭈어 봐도 될런지요. 위지에서 한을 기록하면서 남쪽은 왜와 접하였고 그 지방은 사방 4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단에서 주장하는 한반도 남부를 지칭하면 , 어떻게 생각해도 이 지역을 사방 사천리라고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어르신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보는데요 문제는 남여왜접.. 남쪽으로 왜와 접한다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바다를 두고 경계를 삼은 것이 아니라 한반도 남쪽에서 한과 왜의 경계가 있었거나 아니면 열도에서 왜와 한의 경계가 있었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보는데 후자 쪽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고대 열도의 왜의 여왕 비미호 卑彌呼 의 이름이 마한의 나라 이름에

  • 작성자 16.06.22 10:48

    좋은 질문 하셨습니다.그 답은 조선반도를 요동반도로 옮겨 생각하시면 많은 사료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그리고 남쪽으로 왜와 접한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우선 중삼한의 위치와 분포를 알아야 합니다.1차로 <통전>의 변방전에서 삼한의 위치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 16.06.22 08:33

    자주 등장하는 비리 卑離 와 연결이 된다고 볼 여지는 없는 것인지요

  • 16.06.22 08:41

    삼국사기 태조왕 기록에 왕이 마한과 함께 요동을 정벌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신채호 선생님과 어르신이 이야기 하신 것처럼 한반도 남부의 금마산에 있던 마한이 요동을 정벌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마 한의 위치 비정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런지요..

    태조대왕 69년(서기 121년) 12월, 왕은 마한(馬韓), 예맥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싸웠으므로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출처] <삼국사기> 태조대왕조에 나오는 마한의 정체|작성자 위궁

  • 16.06.22 08:45

    70년(서기 122), 임금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부여왕이 병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격파하였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
    七十年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 滅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

    [네이버 지식백과] 태조대왕 [太祖大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 작성자 16.06.22 12:45

    /選自【古籍十八種】/通典/邊防典凡十六卷/卷一百八十五 邊防一/東夷上/序略

    秦并天下,其淮、泗夷皆散為人戶.其朝鮮歷千餘年,至漢高帝時滅.武帝元狩中,開其地,置樂浪等郡.至後漢末,為公孫康所有.魏晉又得其地.其三韓之地在海島之上,朝鮮之東南百濟、新羅,魏晉以後分三韓地 하략...

    중기 삼한은 바다위에 떠있는 섬이었습니다. 쉽게 이해가 되십니까? 당시는 요동반도를 조선으로 기준한 셈이지요.

    * 其三韓之地在海島之上,朝鮮之東南百濟、新羅,魏晉以後分三韓地
    뿐만이 아니라 《위지》<열전>에도 백제나 신라가 바다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16.06.22 13:30

    심증만 가고 확증이 없던 상태였는데.. 이제야 이 글을 봅니다. 공부가 부족함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 16.06.22 18:40

    @시민이쓰는역사 만약 님께서 임나일본부에 대한 새로운 출판계획을 추진중이시라면 지금 토론이 되고있는 삼한의 위치문제에 많은 신경을 쏟아야 될것입니다.새롭게 밝혀져야 할 임나일본부설은 중국의 동북공정 못지않게 중요한 쟁점입니다.

  • 16.06.22 20:24

    @구산(九山) 지금 그 말씀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 일본서기를 읽으면 일본의 문물은 마한 진한에서 시작되었으며, 변한의 것도 섞여 있음을 알 수 있음. 이를 깨닫지 않고 읽으면 이해하기 어려움. 예로부터 한韓에서 (일본의) 문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음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음. 이 나라(일본) 가 열리고 나서 무엇이든 생겼다고 생각하는 탓에 한 韓의 언어를 일본식 ( 和訓 ) 으로 읽고 여러가지 설을 내세움으로써 끝내 그 본뜻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음 "



    - 충구발 衝口發 소고 , 강석원 -

    이 사람 말이 사실이다. 라고 하는 것이 제 책의 주요 테마입니다..

  • 16.06.22 20:27

    @구산(九山) 에도시대 국학자 후지와라 사다모토가 한 말인데.. 진한의 경우, 7세기에 열도 방문한 중국 사신 배청이 열도에서 秦王國이 있다고 기록하여서 진한에 열도에 있었던 것은 사실로 확인되지만 마한의 경우는.. 마한도 열도에 있었을 것이다. 라고 추측만 하고 .. 후지와라 사다모토가 왜 일본이 마한에서 시작되었다. 라고 했는지 감을 못 잡았는데 지금 한탄중입니다.. 왜 이것을 이제 보았나 하고.. ㅜ_ㅜ

  • 16.06.22 20:36

    http://blog.daum.net/edustock/53

    http://blog.daum.net/edustock/52

    후지와라 사다모토가 어째서 일본이 마한 진한에서 시작한거 모르고 일본서기 읽으면 뻘짓이다. 라고 이야기 했는지 이제 정확히 알았습니다. 이 사람도 통전을 본 것 같네요... 나름대로 추정한다고 했는데.. 으음.. ㅜ_ㅜ

  • 16.06.22 20:35

    그림 다시 다 정리하고 일이 많아 지지만.. 이 부분 꼭 삽입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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