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바다를 향해 내려앉자 하늘색이 부드러워진다. 수평선 끝머리에 환한 불이 켜지고 중심부가 짙어지더니 노란색이 방사형으로 퍼져 나간다. 기대에 부풀어 눈을 크게 떴다. 태양 주위가 주황으로 변했으니 이제 더 붉어지면서 파란 하늘이 겹쳐지고 특이한 석양이 펼쳐지리라. 침까지 꼴깍 삼키면서 집중했지만 다른 색이 보태지지 않아 평범한 주황색 그대로다.
1년마다 생긴 슬픈 일로 가슴이 퍼렇게 멍들며 단단하게 굳었다. 소화가 되지 않아 무엇을 먹을 수 없으니 몸속의 힘이 모두 빠져나가 버렸다. 어떻게 내 가슴 데울까 하고 있는데 친구가 코타키나발루 석양을 보러 가잔다. 20여 년 전에 보았던 그곳 해변의 황홀한 석양이 떠오른다. 그 고운 색으로 마음을 좀 덥혀 봐야지.
오래전 이곳 여행에서 저녁 식사 후 누군가가 바닷가 숲으로 차를 몰았다. 해가 저무는 시간에 왜 이리로 올까 어리둥절했지만, 차에서 내려 고개를 들어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나무 사이로 드러난 하늘이 온통 물감을 풀어놓은 듯 발그레한 연분홍이었다. 세계 3대 석양이라는 이 황홀한 색이 마음속 깊이 들어앉았다. 땅 위의 공간에 어떻게 이런 색이 나올까 하고 놀랐지만, 환상적인 일몰을 보기만 하고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다. 미묘한 색의 하늘과 바다가 기억에서 지워져 버릴까 봐 불안했다.
저녁 식사 후 숙소 후원으로 나갔다. 건물이 바다와 맞닿아 있으니 뒤뜰이 모래사장과 연결되었다. 기대를 잔뜩 품은 채 휴대폰을 들고 나섰는데 하늘색이 그때와 전혀 다르다. 그저 평범하다. 저런 석양은 낙동강 둑에서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이 예상과 맞아떨어지지 않으니 세상이 내 뜻을 비켜선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기죽은 나에게 옆에서 내일 저녁의 선상 크루즈 참여를 권한다. 배를 타고 서쪽 바다 끝으로 가면 그때의 석양을 만날 수 있겠지.
최고로 멋진 옷으로 치장하라던 안내원의 주문으로 마땅한 옷을 고민하며 찾아 입었다. 배를 탓다.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선내 무대에 촌스러운 삼류가수 3명이 시끄럽게 떠들고 차려진 음식도 시원찮다. 그래도 내 목표는 화려한 분홍빛 석양을 보는 것이니 오묘한 하늘색을 기대하며 선상으로 나갔다.
갑판에는 세계 3대 석양을 보겠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1층 난간이 꽉 차서 2층 계단을 밟고 올랐다. 뱃전을 열심히 왔다 갔다 하며 기억 속의 하늘을 찾아보지만,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주황색이 하늘을 물들이며 바다로 뻗어 나갈 뿐이다. 휴대폰을 들고 3충 갑판까지 동분서주하며 카메라앵글을 맞춰 보아도 그 색이 그 색이다. 왜 이럴까.
뱃마루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앉았다.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석양이 구름을 잔뜩 품고 있다. 해가 떨어지는 바다 한쪽에 검은 것이 나지막하게 널려 있고 그 반대편은 큰 덩어리가 울퉁불퉁 솟아 있다. 저기가 별나라로 통하는 곳이고 동생들이 있을까. 세상을 살아오면서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잘잘못을 따지며 다투었다. 이제는 너무 멀리 떨어져 가 버려서 다시 볼 수 없는 사실이 슬프다. 그들의 세계에 평화가 찾아들지 않으면 어쩌나 두렵다.
분홍빛 석양을 못 본 채 여행이 끝나는가 하다 마지막 날의 반딧불이 투어에서 기대해 본다. 인생은 우여곡절이 많은데 여러 가지가 마음먹기에 달렸으니 포기하지 말 일이다. 뚜아이에 모여 이곳 문하와 식생활을 경험하며 시간을 보내다 때에 맞춰 서쪽 바다로 나갔다. 모래사장에서 온 마음을 한 곳으로 모은 채 일몰을 기다린다.
태양이 바다 쪽으로 기울어지자 수평선이 붉어진다. 발갛게 타던 중심이 꼭짓점 되어 퍼져 나가며 파란 하늘과 겹쳐졌다. 바다도 주변 산도 구름과 하늘까지 한 덩어리가 되었다. 하늘과 바다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온통 분홍으로 물들었다. 그래 이것이 코타키나발루의 석양이다. 분홍빛에 취한 가슴이 따뜻해진다.
다시 낙낙한 마음이 되어 하늘을 둘러본다. 저 끝에 설핏 어머니의 얼굴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안면 전체에 따뜻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그래 저세상에는 부모님이 계시는구나.
어느 책에서 읽은 문구가 떠오른다. ‘인생 말기에는 자기를 위해서 살아라. 사회와 인생에 대한 생각이나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자신의 안락을 위해 써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갈 준비를 할 여유를 줄 때 그 채비를 하자. 가혹한 속박에서 벗어나자. 이것저것 즐겨보며 자신을 위하고 다른 사물들이 우리 것이 되게 하자. 세상에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으로 있을 줄 아는 일이다.’
코타키나발루 석양은 매일 더 곱고 오묘한 색으로 자연의 신비함을 한껏 펼쳐내 주었다. 우주의 조화를 느끼고 경험한 마음이 시원시원하다. 딱딱하던 심장이 말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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