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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요십조 제8조에 대해서 말해 보고자 한다.
차현이남 공주강외 이북 지역은 충남 서북부,아산,홍성,천안,진천,청주,충주,제천,강원도 원주,횡성,춘천,
철원, 강릉까지 이어지는 지역을 말한다.
(초록색 안 사이 지역)
[훈요십조 제8조]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여덟째는 차현이남 공주강 외곽(금강이 북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흐르므로 외(外)란 외곽
즉, 금강의 이북을 말한다)은 산과 땅이 뻗어나가는 모양이 나란하게 (서해쪽으로) 내달려
등을 거꾸로 하고 있는 모양이라 인심 또한 그러하니,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銜統合之怨, 犯蹕生亂,
이곳에 포함된 주군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고, 왕이나 왕실의 인척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혹은 나라에 변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통합당한 원한을 품고
임금의 행차시에 난을 일으킬 것이다.
且其僧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奸巧言語, 弄權亂政, 以致灾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또한 일찍이 관청과 사찰의 노비와 진(津), 역(驛)의 잡척(雜尺)에 속하던 무리가
혹은 권세에 붙어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
혹은 왕실이나 궁원에 붙어 언어를 간교하게 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하고,
정사를 어지럽힘으로써 재변(災變)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관리의 지위를 주어 일을 보게 하지 말 것이니라.
[훈요십조 제8조]
훈요십조 제8조를 이해하는 법은
고려가 고구려를 이었으므로 고구려식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알아야 한다.
광개토대왕 비문과 왕릉은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세웠다.
그리고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보았을 때, 정복지를 향하여 우측 동쪽으로 약간 틀어서 세웠다.
즉, 고구려나 고려인의 세계관은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모든 기록을 저술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 고구려인의 세계관으로 들어가서,
훈요10조 제8조를 제대로 해석해 보자.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기팔왈 차현이남 공주강외 산형지세 병추배역 인심역연
여덟번째로 말하길, 차현이남에서 공주강 바깥 (공주강 이북)은 산과 땅의 지세가
등을 지고 역으로 나란히 내달리니, 인심 또한 그러하다.
남극에서 북극을 향하여 말하는 고구려, 고려인의 세계관으로 보면
금방 공주강외라는 말이 금강 이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그 증거를 대고자 한다.
왕건 즉위후 918년 5일째 되는 날에
공주 출신 환선길이 반란을 일으켰다.
9일째 되는 날에 청주의 임춘길 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14일째 되는 날에 공주의 마선대장군 이흔암이 반란을 일으켰다.
8월에 공주~홍성의 10주군현이 반란을 일으켜 왕건에 대항하였다.
904년 송악(송도)의 궁예는 청주 일대의 마진인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마진의 청주호족 1천여 가구를 제천 마진국(4년)에서 철원으로 이주시켜 태봉국으로 바꿨다.
궁예가 왕건에게 제거당하자 청주호족을 중심으로 반왕건 저항운동이 일어난다.
청주호족 임춘길, 배총규, 매곡인, 경종의 반란이 연이어 일어났다.
또 청주 호족 진선, 선장의 반란이 발생하였다.
홍성에서는 홍규의 난에 이어, 홍성 성주 긍준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쯤되면 차현이남 공주강외가 북에서 남으로 내려다보는 관점이 아니라,
남에서 북을 올려다보는 관점으로 언급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에서 북을 향하여 말하면,
공주강외는 금강 이북을 말하는 것이다.
차현(車峴)은 차령(차령산맥 줄기)이라는 지명이다.
차령은 진천군 차유령 고개를 말한다.(峴/고개현)
차유령 고개인 차현이남(車峴以南)에서 공주강 사이의 지역인 천안, 청주, 공주,
홍성일대 10주군현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것이 훈요 제8조이다.
이 지역이 바로 친 궁예 기반 세력이었던 곳이었다.
(여자 엉덩이 모양을 하고 돌아 앉아있는 배역 모습의 금강 공주강 지역을 분홍색으로 표시하였다.
공주강외 지역이라함은 분홍색의 금강 표시선 바깥지역으로 공주강 이북지역을 말한다.)
즉,車峴以南(차현이남),公州江外(공주강외), 山形地勢 (산형지세),並趨背逆(병추배역)은
천안의 차령이남에서 공주강 바깥(위/이북)의 산과 땅의 지세가 등을 지고 ,
역으로 나란히 내달리는 형국의 모습으로서,
금강의 형세가 여자 엉덩이 모습이며 돌아 앉아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배역수라 하였다.
고려인의 관점에서 이 모습의 형세는 남극에서 북극을 향해 보면서 공주강 이북지역을 말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고려가 나주, 승주, 영암, 곡성정권이고, 고려 인종부터는 장흥 임씨 정권이기 때문에,
이들이 개경 정부로 들어가서 활약했으므로, 전남 곡성 이남의 관점에서 봐야하는 것이다.
곡성, 나주이남의 사람들 관점에서 보면 공주강외는 금강 이북에 해당한다.
고려 개경 정부 관점에서 보려고 하지 말고,사람 중심으로 봐서 나주 이남의 고려인 관점에서
모든 역사를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왕건은 전라도 세력을 중용하였다.
신숭겸은 전남 곡성.
도선국사는 전남 영암.
오다련은 나주 대호족.
장화황후는 오다련의 딸.(혜종의 모친)
박영규는 전남 승주.
태사 최지몽은 전남 영암.
왕건이 말년을 보낸 동산원 부인과 문성황후는 전남 승주 출신.
그리고 훈요 10조를 받은 박술희는 충남 면천(당진) 사람이었으나,
전남 광산(광주)지방에 근거를 둔 호남 호족 세력이었다.
왕건은 측근 세력에게 점령지역을 맡겨 내려보내고 그지방의 호족세력으로 자리잡게 한다.
도선국사가 왕건에게 고려 왕조 창업의 비밀을 알려주는 도선비기를 전한 주인공이다.
그런 전라도를 왕건이 훈요 10조에 넣어 호남을 배척하라는 유지를 남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대표적으로 왕조를 창업하여 성공할 수 있는 정치, 군사, 경제, 지리적 요충지인 송악(개성)을 왕궁터로 정해줌.
궁예가 수도로 정할 곳을 찾을때 도선국사가 왕건의 아버지 왕융에게 알려준 송악을 왕건이 궁예에게
수도로 지정해주는 것임. 모든 정치, 군사,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는 송악의 왕융과 왕건에게 민심이 쏠리자,
왕융과 왕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궁예가 제천 마진국으로 천도하는 것임].
그리고 4대 광종~8대 현종 때 과거시험을 처음 실시하면서,
지공거를 두번이나 엮임하고 인재 등용권을 전담하도록 맡겨
권력을 손에 쥐게 했던 유방헌은 전북 전주 출신이었다.
광종 때 전남 공신 훈구파 숙청을 단행하여 전주 세력 유방헌 등이 출사하게 된다.
과거등 인재등용권과 인사권을 가진 지공거를 두번씩이나 역임한 유방헌은 전주 출신이었다.
고려로 귀부한 견훤의 전주 완산세력은 2진으로 물러나 있었다가 유방헌 때 전격 등용된다.
이로인해 993년 성종때 거란과의 서희담판으로 강동6주를 획득한다.
왕건은 홍성지역의 홍규의 난을 진압하고 홍규의 딸을 홍복원 부인으로 맞이하여
홍성 지역을 빼게 된다.
그리고 홍규를 죽이지 않고 삼중대광으로 추증하여 끌어 안는다.
견훤에게 망명하여 다시 저항하였던 홍성 성주 긍준에게는 대상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궁예가 죽고 저항하다가 패하자, 다시 견훤의 후백제로 가서 저항한 것을 경계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으로 거란 침입 때 현종이 충주, 청주에서 호족의 냉대로 죽을 뻔한 곤혹을 치루었으나,
공주 절도사 김은부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아 그의 맏딸을 원성황후로 맞아들이고,
사실상 훈요 8조는 사라지게 되었다.
태조 왕건에게 짐승의 성을 부여받았던 천안의 목천 사람들은
문종때 우(牛)는 우(于)로, 상(象)은 상(尙)으로, 돈(豚)은 돈(頓)으로, 장(獐)은 장(張)으로
성씨가 복귀되었다.
현종은 거란 침공을 피해 공주에서 전주를 거쳐 나주로 피신을 갔다.
전주로 피신했을 때는 박온기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이것은 전주에서 박온기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차현이남 공주강외가 금강 이남이었다면,
금강 이남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고 한 배역수인 배반의 지역으로 왜 피난을 갔을까?
그것은 호남이 배역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차령산맥 천안, 진천의 차현이남에 공주강, 금강 이남이라는 말은 애초에 말이 안된다.
진천의 차현이남에서 공주강외 사이의 이북 지역을 말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고려 중기 17대 인종은 전남 장흥 임씨를 중용하여 공예 왕후를 맞아들인 후,
몽골 간섭기를 제외하고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공예왕후가 낳은 왕들로 이어진다.
공예왕후로 인하여 신라파들이 처음으로 정계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바람에 조선 개국초 개성 왕씨와 장흥 임씨들이 대거 학살당하였다.
[실제로 나주 오다련의 딸 제2 장화황후의 아들 혜종을 몰아내고 충주유씨 청주 호족부인
제3 신명순성황후(유긍달의 딸)의 아들 정종가문이 정권을 잡게되기 때문에 이를 경계한 것임.
충주출신의 유긍달은 궁예의 명령으로 왕건과 함께 청주의 청길, 괴산의 신훤세력을 평정하고
청주의 호족 세력으로 자리잡음.
또한 청주 유씨 가문인 광종이 전남 공신훈구파 숙청을 단행하고 왕건에 귀부하여
제2진으로 내려 앉아있었던 후백제의 견훤 세력을 중용하면서 반란을 우려하여
전주의 유방헌 등을 출사시키며 인사권을 장악하게 하고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서게 한다].
거란의 조상이 연나라인이고, 그들의 조상이 모용 선비족이다.
전연의 모용황, 후연의 모용수를 말한다.
모용 선비족의 조상은 비려/패려국으로 알려진 비려 거란이다.
비려 거란의 조상은 광개토 비문에 나오는 부산적이다.
부산적은 두 부류가 있었다.
副山(부산)과 負山(부산)적(賊)이 있었다.
이 둘을 합하여 부산적이라 불렀다. (광개토 비문)
이들은 고려 왕건을 개경 송도 북방에서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건은 고려 땅에서 적대 세력에게 대대적인 유화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주 오다련 세력과 연합하여 전주 완산 견훤의 후백제와 충청, 강원도 궁예의 후고구려를
동시에 견제하였다.
고려 무신시대 이전 당시 거란은 몽골을 식민지배 하였다가,
몽골 실위족 (몽올실위족)의 대대적인 토벌을 받고 반도 충주목으로 남하한다.
충주목 일대에서 거란황가 10여만 명이 1년간을 웅거하며 항거하자, 무신정권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가
고려 장수 김취려가 거란 황제와 승상이 이끄는 10여 만의 거란국인을
평양 동북방으로 충주에서부터 토끼몰이 하듯 내몰아간다.
이때 진짜 승상이 5만을 이끌고 우회하여 내륙으로 흩어져
성남, 부산 등으로 흩어져 들어가게 된다.
거란 황제가 이끄는 5만은 평양 동북방 강동성으로 들어가 점령하고,
고려와 3년간을 대치한다.
몽골은 대련반도의 동진국(심양)을 점령하고 이들을 내세워 동맹군을 결성하고,
고려 국경을 무단으로 넘어 강제로 고려와의 동맹을 요구하였다.
몽고 장수 합진, 동진국 장수 완안자연, 고려 장수 김취려 등이 연합하여
김취려 장군이 성으로 들어가는 식수 지맥을 끊어 거란 황제를 항복시키고,
황제와 가짜 승상등 800여 명을 참수한 후 대도(하남성 개봉시>북경)로 5만의 거란 포로를 끌고가서
노예로 삼았다.
거란인이 반도에 남긴 풍속으로는 5일장과 풍물놀이, 광대, 매매춘, 기생 등이
고려에 남게 되었다. (성남의 모란장)
이 결과로 몽골이 고려를 알게 되어 고려를 침공하게 되며 살례탑 [살리타이]에 의해
1231년 몽고 제1차 침략이 시작되는 원인이 되었다. [몽고사신 저고여 압록강 살해사건은 협의의 원인)
몽골의 징키스칸에게 쫓긴 거란의 비주류는 내몽골 동북부 임황시, 적봉시 등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흑룡강성 제제합이(치치하얼), 합이빈(하얼빈), 서란시(수란시)등으로 달아나 정착하였다.
훈요십조 제8조는 호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차령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주요산으로는
평창군의 계방산(桂芳山:1,577m), 횡성군의 태기산(泰岐山:1,261m), 영월군의 백운산(白雲山:1,426m),
원주시의 치악산(雉岳山:1,288m), 안성시의 칠현산(516m), 아산시의 광덕산(699m), 청양군의 칠갑산(561m),
보령시의 성주산(680m)등이 있다.
이 정맥을 중심으로 궁예 세력과 왕건 세력이 나뉘어져 있었던 것이다.
차령정맥, 소백정맥 사이의 공주~천안 일대는 청주, 공주 일대의 마진인들이 마진 제천, 태봉 철원으로 옮겨가
마진국의 중요 기반이 되면서 궁예를 위해 활동하였던 것이다.
청주, 공주, 홍성일대는 모두 마진인들이었다.
국호에서도 이미 모두 드러나고 있다.
궁예는 국호를 후고구려>마진국>태봉국으로 바꾼다.
태봉국은 태백산맥 줄기인을 말하는 것으로 설악산 대청봉 넘어 강릉인을 포함하는 말이다.
궁예는 원주 [북원/아슬라주]의 양길밑에서 도움을 받고 독립하여 명주[강릉/하슬라주]로 가서
명주 호족 김순식 등을 제압하고 수하로 두면서 세력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다.
마진인의 선조는 직산 중마한인, 익산 마한인과 백제의 진씨가문의 융합에서 나왔다.
직산 목지국 [천안, 목천]인 중마한국이 망하고 익산 금마로 내려와 익산 금마 연립마한국(하한/하마한)을
세운 적이 있었고,백제에 망하자 다시 공주강 이북지역으로 흩어져 마진인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이당시는 역으로 도망가는 것이 사는 길이었다.
국가간의 전쟁시 수성전에서 패전했을 때 역으로 도망가는 역사가 수없이 나온다.
온조백제/구태백제에 멸망당하여 흡수되면서도 마진인은 그대로 이름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는 금강이남 지방으로 밀려난 마진인들을 고구려의 남진정책 방패막이로 쓰기 위해
다시 금강(공주강)이북 지역으로 강제이주시킨다.
백제,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는 신라에 의해 안승(후고구려)의 익산 금마 보덕국이 세워졌다.
대문의 난이 발생하여 익산 영등동과 군산 영흥동. 완주군 삼례 등으로 고구려인들은 흩어지게 된다.
마진인은 직산 중마한국과 익산 금마 연립마한국(하마한)을 포함한다.
익산 금마 연립마한국(하한)은 익산 금마, 왕궁, 황등, 여산 일대 지방까지였다.
이제 호남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차현이남이라 함은 홍성, 공주, 청주, 진천, 천안, 충주, 제천, 원주, 횡성, 철원, 춘천, 강릉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왕건에 대항하는 반란세력은 궁예를 죽인 왕건에게 대항하고자
싸웠기 때문이었다. [공주 이북 충청, 강원지역]
특히 임춘길 등은 궁궐대전 안 집무실에 앉아 있었던 왕건을 죽이려 진격하였다.
왕건 코앞에까지 다가갔으나, 왕건이 죽음을 감지하고 체념한 상태에서
미동을 하지않자, 복병이 숨어있는 줄 알고 임춘길 일당이 병력미달로 후퇴를 해버리게 된다.
왕건은 이 당시 삶을 체념하고 의연함을 보인 덕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이때의 심정을 담아 훈요십조 제8조에 넣은 것이었다.
고려 개경 정권은 전남 곡성, 나주이남의 관점에서 금강을 바라다 봐야 하기 때문에,
공주강외는 금강이북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차령산맥의 차현이남에서 공주강 바깥인 금강 이북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차현이남, 금강이남이라는 말은 없기 때문이다.
차령산맥 천안, 진천의 차현이남에서 공주강, 금강이남이라는 말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차현이남이면 차현이남이라고 말하면 될 것이지, 왜 공주강외를 다시 써서 공주강이남이라고
또다시 두번씩이나 표현하면서 금강이남이라고 표현하느냐 이말이다.
그래서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천안에서 공주이북 사이를 말하는 것이다.
彼下州郡人(피하주군인)이라 하였으므로 그 아래 사는 사람들인
공주지역까지 해당한다는 말이었다.
역으로 彼上州郡人(피상주군인)이라고하면 진천 차유령 고개 이북인 천안 목천읍까지 해당한다는 말이다.
車峴以南(차현이남),公州江外(공주강외),彼下州郡人(피하주군인)은
전체 문맥상 공주강외 바로 이남지역 공주뿐만 아니라, 차현이북 천안의 그위에 사는 차령산맥 줄기 사람들도
해당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차현이남[車峴以南] 공주강외[公州江外]에서 외[外]는 바깥이라는 뜻이고,
앞 문장에 차현이남[車峴以南]이라는 전제가 있으므로, 뒷 문장의 바깥(외곽)은 위[上/윗상]를
뜻한다는 것은 한자[漢字]해석의 기본 상식과 같다.
차현이남 공주강외[車峴以南 公州江外]는 차령정맥의 차현에서 공주강 위라는 뜻이며,
공주가 금강[공주강]이남에 있으므로 피하주군인[彼下州郡人-그 아래 사는 주군인들]을 포함한다고
말했던 것이다.[from~to/から~まで ~에서 ~까지/ 차현에서 공주까지].
或銜統合之怨, 犯蹕生亂(혹 함 통합지원, 범필생란)
(혹은 통합당한 원한을 품고 임금의 행차시에 난을 일으킬 것이다).
或을 쓴것은 주어 다음에 동사(銜)가 와야하기 때문에 주어 대신으로 或을 써서 미래를 뜻하고
銜(재갈함=재갈, 입에 재갈을 채움)은 명사이고 동사로 전환하려면 앞에 주어가 있어야 하므로
或을 주어로 대신하고 銜(재갈함)을 동사로 전환하면 "마음에 품다. 원망함을 품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或銜 統合之怨은 "혹은 통합당한 원망을 마음에 품다" 라고 해석한다.
犯蹕生亂(범필생란)에서 蹕(길치울필)은 "임금의 행차"를 말하는데 어가가 행차할때 호위꾼들이
길앞을 트는 일을 뜻하며, 임금의 나들이나 행차를 뜻한다.
犯蹕生亂에서 犯蹕(범필)은 임금의 행차시에 범하다.
生亂(생란)은 난을 일으키다, 난을 일으킬것이다. 라는 미래를 뜻하고, 또 맨 앞의 주어 或이 미래를 뜻하므로
"틀림없이 임금의 행차시 범하여 난을 일으킬것이다" 라고 해석하여 마무리한다.[단정]
-[或銜 統合之怨, 犯蹕生亂(혹함 통합지원, 범필생란)에서 백제라는 명사가 들어올 그 어떤 자리도 없으며
한자해석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기만하고 일부의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끼워넣기를 한것임].
或銜 統合之怨, 犯蹕生亂 문장에서 어느 지역인지 모두 말해주고 있다.
왕건에 통합당한 지역은 충청과 강원도 지역이지 후백제(호남) 지역이 아니다.
후백제는 국가 vs 국가간의 전쟁으로 통일한 합병(병합)지역이고 견훤이 김제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다가
왕건에 귀부하여 우대를 받았지만 마지막까지 광주의 신검과 전쟁으로 합병한 지역이지,
통합당한 지역이 아니다.
[후백제는 전주(견훤), 광주(신검), 나주(오다련/왕건)세력으로 갈라져
미니 후삼국으로 분열하여 패하는 것임].
삼국시대 때 대전의 인구는 거의 없었고 대덕에만 인구가 있었음.
대전은 전북, 충남, 충북, 경북 낙동강 서안의 인구가 권력이 느슨한 곳으로 모여 들어서 형성되는 곳임.
(통합이라는 말은 같은 편으로 살다가 틀어져 싸우다 하나가 되었을때 어느 한쪽이 통합당했다고 하는 것임.
제천 마진국은 충청인, 철원 태봉국은 강원도인을 중용했는데 송도(개경>개성)의 왕건이 장악하자
경기도인이 장악해서 다툰 것임).-견훤이 수군으로 왕건의 개경 황궁을 점령하여 불태우고 철군하기도함.
[해상왕 장보고가 완도 청해진에서 신라의 이간질로 수하였던 염장(또는 정년)에게 죽자, 청해진을 폐쇄하고
중국, 일본과의 직항로를 최초로 개척하여 활동하던 청해진의 가솔 해상무역세력이 신라에 의해
장보고의 식솔들과 함께 김제 벽골군(부량면 벽골제)으로 옮겨짐.
-이로 인해 국제무역이 삼국시대 이전의 고대기로 다시 회귀함.
견훤이 김제에서 장보고(785~846)의 가솔 해상무역세력과 그 후예의 도움으로 수군을 증강시켜
개경 황궁을 점령하는 것임].
-장보고가 일본(왜)에 중국과의 직항로와 선박 수리기술, 돛 이용기술, 조수간만의 차와 바람이용기술,
선박 제조기술과 불교를 전파하여 중국과의 왕래길[왜의 엔닌(원인)대사/입당구법 순례행기/
산동성(山東省) 등주시(登州市)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 법화원(法華院)]을 터주었고,
이로인해 남해안과 동해안에 왜구의 해적질이 줄어드는 것임.
훈요십조(訓要十條)-2.
우주를 재패하는 그날까지. | 훈요십조[訓要十條]-2.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