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구(1876-1949)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령·주석 등을 역임했다.
한인애국단 의거를 주도하고 한국광복군을 창군하였다.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김좌진(1889-1930)
대한광복회 부사령관으로 활약하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지도했다.
북로군정서 사령관으로서 1920년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쓸어버릴 길 없구나"
베델(1872-1909)
1904년 영국 기자로 내한하여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했다.
언론으로 일본의 경제침탈을 비판하고 국내외 독립운동을 보도했다.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민족을 구하게 하시오"
송진우(1890-1945)
일본 유학 후 1921년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언론운동을
전개하고,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지원했다.
"옥중에 갇힌 몸이 밤마다 잠 못 이루니 나라 근심에 상한 마음
몇몇해나 쌓였던고"
안중근(1879-1910)
교육사업과 의병운동을 전개하고 단지(斷指)동맹을 결성했다.
1909년 10월 26일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성공하였다.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안창호(1878-1938)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선출되었고 청년단체 흥사단을 조직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노동국 총판 및 내무총장 등으로 활동했다.
"낙망(落望)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유관순(1902-1920)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윤동주(1917-1945)
연희전문학교에서 <서시> 등 민족시를 발표하였다.
1942년 징병제 반대 시를 집필하는 등 민족문학 활동을 지속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봉길(1908-1932)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에서 일본 수뇌부들에게 폭탄을
던져 독립의지를 드높였다.
"사나이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라"
이회영(1867-1932)
1911년 만주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과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
조소앙(1887-1958)
1913년 동제사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임시정부의 정당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삼균주의 강령을 기초했다.
"三均主義 -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제도와 개인과 개인, 민족과민족,
국가와 국가간의 호혜평등으로 민주국가 건설하자"
최재형(1860-1920)
러시아 한인들을 보호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08년 항일단체 동의회를 조직하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선출되었다.
"러시아 추위보다 나라를 잃은 나의 심장이 더 차갑다"
한용운(1879-1944)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참여하였다.
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고, 신간회 경성지회장으로 활동했다.
"참된 평화는 반드시 자유를 함께 해야 한다"
헐버트(1863-1949)
잡지 <한국평론>을 창간하여 일제 침략을 비판했다.
1907년 고종의 헤이그밀사 파견을 지원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