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 팩 (Gregory Peck,1916~2003)
'그레고리 팩'은 미국 캘리포니아 '라 졸라' 출생으로 '샌디에고'에서 약제사를
하던 부친과 평범한 주부였던 모친은 그의 나이 5살 때 이혼했고,
그는 조모(祖母)의 손에 맡겨져 성장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버클리 대학' 의예과에 입학했으나, 연극에 심취하여 전공(專攻)을
문학과 연극으로 바꾸었다.
1939년 '버클리'를 졸업한 '그레고리 팩'은 Nwe York으로 가서 박람회 안내원
노릇과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 라는 연기 학교에
등록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장학생으로 졸업한 그는 '카스린 코넬' 극단에
들어가 배우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1942년 '에밀린 윌리암스의 연극' 에 첫
주연(主演)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그는 1942년 '그레타 라이스'와 결혼했다.
'브로드웨이'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그는 '헐리웃'으로 진출, RKO 스튜디오와
계약하여 <영광의 나날>로 데뷔했지만,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두번째 작품 <왕국의 열쇠>로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이후 '히치콕'의 <Spellbound>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되고 '골든 글로브'를
수상한 <Earing>, 서부극 <백주의 결투(Duel In The Sun)>, <황색 하늘>,
<Gun Fighter>,그리고 세번째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신사협정> 등에 출연했다.
1952년 파리를 여행하던 '그레고리 팩'은 여기자 '베로니크 파사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1954년 아내와 이혼했다. 그는 위자료로 7만 달러를 내주고
파리로 돌아가 1955년 '베로니크 파사니'와 재혼하게 된다.
1961년작 <나바론>의 성공에 이어 <앵무새 죽이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함으로써 영화 인생의 절정에 오른다.
이후 TV 영화 쪽으로 눈을 돌리며, 노배우로서 쇠락의 길을 걷다가 1976년 공포
영화 <오멘>으로 다시 재기하였고, <맥아더>의 눈부신 열연으로 극찬받았다.
훤칠한 키, 조각처럼 수려한 용모에 도덕적이며 성실한 이미지를 가졌던 '팩'은
<천국의 열쇠>의 사려깊은 사제(司祭), <로마의 휴일>의 기자에서부터
<Moby Dick>의 '에이허브' 선장, <The Boys from Brazil> 속의 나치 전범
'멩겔레' (Mengele)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 속에서 폭넓은 연기력을
과시한 성공적인 배우였다.
40여년의 연기 생활동안 6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그 중 10여편의 영화를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려놓았던 그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5회
노미네이트되어 1회 수상했으며 2번의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등 16차례의
각종 상을 수상했다. 또한, 미국 영화연구소 초대 의장, 미국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협회 회장, 미국 암협회 회장 등을 지내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정치적으로 리버럴한 입장이었던 '그레고리 팩'은 베트남 전 당시에는 反戰
시위에 앞장섰고, 말년엔 미국 각지를 돌며 자신의 삶에 대한 강연을 주로 했다.
1967년 예술과학협회가 주는 '진 허쇼트' 인도주의상을, 1969년에는 대통령
자유 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상했다.
1942년 결혼한 '그레타 라이스'와 1955년 이혼한 후, 프랑스 여성이며 기자
출신의 '베로니크 파사니'와 재혼해 여생을 함께했다. '베로니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앤서니'와 '시실리아'는 모두 배우로 활약 중이다. '그레고리 팩'은
2003년 6월 12일 미국 L.A 자택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8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