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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1. 10.
민주 사회에서 새로운 가치가 번성할 수 있도록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것은 기존 견해를 완고하게 붙들고 있는 이들의 사망이다. - 데이비드 싱클레어, ‘노화의 종말’에서
지난 8일 세계 코로나19 확진자가 5000만 명을 돌파했다. 사망자도 125만 명을 넘어섰다.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2차 확산이 시작되면서 불과 3주 만에 확진자가 1000만 명 더 늘어난 것이다. 이러다가는 연말에 1억 명 가까이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실제 감염자는 벌써 1억을 넘었을 것이고 심지어 세계 인구의 10%에 이른다는 추측도 있다. 사망자 역시 공식 집계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코로나19 대유행은 여러 측면에서 충격을 주고 있는데, 선망의 대상이었던 서구 사회가 바이러스에 무너지는 장면도 그 가운데 하나다. 최신 과학의 도움을 받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는커녕 세계 인구의 10%도 안 되는 미국과 유럽에서 세계 확진자의 거의 40%가 나왔다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집단주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선방
▲ 인구 10만 명 당 코로나19 확진자 수를 보여주는 지도로 색이 짙을수록 많다는 뜻이다. 동아시아가 적은 건 집단주의 민주주의 사회가 방역을 가장 잘 한다는 연구결과에 부합한다. 중부 아프리카 역시 꽤 적은데, 방역이 효과적으로 이뤄지고 있고 노인이 인구의 3% 미만으로 적고 기온이 높은 게 원인으로 보인다. / 위키피디아 제공
반면 동아시아나 심지어 방역 체계가 꽤 부실할 것 같은 중부 아프리카에서도 환자가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K방역’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이고 일본도 선전하고 있다. 확진자 10만여 명으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은 것 같지만 인구를 고려하면 1.6배 수준이다. 도쿄올림픽 개최 문제만 아니었다면 이보다 한참 적었을 것이다.
뜻밖에도 이런 경향은 스페인 독감과 성격이 비슷한 새로운 팬데믹이 등장했을 때 예상한 시나리오라고 한다. 다만 정도가 극단적일 뿐이다.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기 어려운, 개인주의가 만연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확산을 막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와 일본이 잘 하는 건 사람들이 말을 잘 듣는 집단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지난 5월 학술지 ‘코비드 경제학’(코로나19 유행 직후 창간된 학술지다)에는 각국의 정치와 문화가 코로나19 대응 효과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논문이 실렸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자들은 코로나19 방역에서 정치는 독재국가가 민주주의 국가보다, 문화는 집단주의 사회가 개인주의 사회보다 더 잘 해낼 것이라고 가정했다(중국의 방역 성공이 전형적인 예다).
이들은 각국 정부의 방역 정책과 국민의 이행 정도(이동 거리 변화)를 분석해 그 효과를 평가했다. 그 결과 정책 강도가 비슷할 경우 정치체제는 뜻밖에 독재국가의 방역 효과가 오히려 낮았고 문화 성향은 예상대로 집단주의가 더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집단주의 민주국가가 코로나19에 가장 잘 대처한다는 말이다.
연구자들은 논문에서 방역의 성패를 가른(아직 진행 중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서구의 개인주의 문화와 동아시아의 집단주의 문화의 기원을 다룬 한 학설을 언급했다. 지난 2014년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돼 화제가 된 ‘쌀의 문화 밀의 문화’ 이론이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벼농사
미국 버지니아대 심리학과 박사과정학생인 토머스 탈헬름(지금은 시카고대 교수)과 동료 연구자들은 서구인과 동아시아인 사이에 나타나는 심리적, 문화적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가설을 제안했다. 소위 ‘벼농사 이론(rice theory)’으로 불리는 이 가설에 따르면 동아시아인들이 관계지향적이고 통합적 사고를 하는 이유가 벼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반면 개인주의이고 분석적 사고를 하는 서구인은 밀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인주의 성향을 알아보는 인물 관계도 테스트를 보자. 나를 포함해 친구 몇 명의 관계를 그려보라고 하면 개인주의가 만연한 미국인들은 자신을 나타내는 동그라미를 6㎜ 정도 더 크게 그린다. 유럽인들도 3.5㎜ 정도 자신을 더 크게 그린다. 반면 집단주의가 강한 일본인들은 오히려 자신을 약간 더 작게 그린다.
▲ 나와 친구의 관계도를 그려보라는 과제로 개인주의 성향을 테스트할 수 있다. 개인주의 성향이 클수록 나(Me)를 크게 그리고 집단주의 성향이 클수록 차이가 없고 심지어 나를 약간 작게 그리기도 한다. / 사이언스 제공
충성도와 족벌주의를 알아보는 테스트도 흥미롭다. 친구와 모르는 사람이 부당한 일을 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는 상황에서, 모르는 사람일 경우는 벼농사권이나 밀농사권 모두 처벌 정도가 비슷했다. 그러나 친구일 경우 벼농사권은 밀농사권에 비해 처벌 정도가 훨씬 약했다. 결국 동아시아인과 서구인 사이에서 보이는 심리적 차이의 상당 부분은 어떤 작물을 재배했느냐로 설명할 수 있다는 얘기다.
벼농사는 물이 많이 필요해 관개시설이 있어야 하고 농사를 지을 때도 이웃 간에 물을 나눠 써야 한다. 또 피(잡초)를 뽑는 작업 등 밀농사에 비해 두 배 이상 손이 많이 간다. 벼농사는 개인(부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결과 벼농사권에서는 상부상조하는 관습이 이어져 왔고 ‘나보다는 우리’를 앞에 둘 수밖에 없었다.
반면 밀농사는 자연 강우에만 의존하면 되고 일이 고되기는 해도 나 혼자 힘으로 내가 먹을 걸 얻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 농사의 독립성이 컸고 그만큼 다른 사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다. 이런 생활 패턴이 수천 년 이어져 오면서 동아시아인과 서구인의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생겼고, 동아시아인 가운데서도 특히 논농사가 압도적인 한국인과 일본인에서 전형적인 동아시아적 사고 패턴이 보인다.
이제 대다수가 논농사를 짓지 않는 사회 구조로 바뀌었음에도 지난 수천 년에 걸쳐 이어져 온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있어 여전히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논문에서 “일본과 한국의 벼농사 전통은 왜 이 두 나라가 비슷하게 잘 사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개인주의가 훨씬 덜한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코로나19를 계기로 우리의 집단주의 민주주의가 서구의 개인주의 민주주의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의 짙은 그림자
최근 언론에는 자살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뉴스가 종종 나온다. 특히 20대 여성의 자살이 늘고 있어 걱정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살률이 높아 OECD 37개국 가운데 리투아니아에 이어 2위에 올라있다. 지난해 자살률은 10만 명 당 26.9명으로 OECD 평균인 14.2명의 2배 가까이 된다.
지난해 자살 사망자는 1만3799명으로 사망원인 5위를 차지하고 있고 10대~30대에서는 1위다. 특이한 점은 전년에 비해 남성의 자살률이 1.4% 낮아진 반면 여성은 6.7%나 높아졌다는 점이다. 다만 자살률은 여전히 남성이 38명으로 여성의 15.8명보다 훨씬 높다.
한편 일본도 자살률이 꽤 높은 나라로 10만 명 당 18.5명이다. 일본의 청년 자살률은 우리나라에 육박해 우리와 마찬가지로 10대~30대에서는 사망원인 1위다. 다만 노인 복지 체계가 잘 갖춰져 있어 노인 자살률은 우리보다 낮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꽤 잘 살면서도 왜 이렇게 자살률이 높을까. 혹시 집단주의 문화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K방역 덕분에 코로나 19 사망자를 세계 평균의 10분의 1 밑으로 유지했지만, 그 배경이 되는 집단주의적 민주주의가 ‘자살 팬데믹’에서는 세계 평균(10만 명 당 10.6명)의 2배가 넘는 사망자를 내는 배경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자살 팬데믹은 독감처럼 매년 유행한다.
지난 4월 학술지 ‘정신의학의 경계’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와 일본의 높은 자살률에는 정말 집단주의 문화가 일정 부분 역할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터키와 오스트리아 연구자들이 주축이 된 다국적 공동연구자들은 ‘개인주의가 자살을 부추기는가?’라는 해묵은 논쟁에 대한 답을 구하기로 했다.
서구 나라가 다수인 OECD의 자살률이 세계 자살률보다 꽤 높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서구의 개인주의 만연이 자살을 부른다’는 학설이 이미 40년 전에 나왔고 지금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율성, 고유성, 독립성을 중요시하는 성향으로 잘 나갈 때는 좋지만 일이 틀어지면 자신을 탓하며 분노와 불행, 절망에 빠져 결국 자살할 마음을 품기 쉽다.
반면 집단주의는 남과의 관계나 상호의존성, 내가 집단의 일부라는 의식을 중요시한다. 평생 남 눈치를 보며 살지만, 문제가 생겨도 남을 탓할 수 있고 위로도 받으므로 자살 같은 극단적인 상황까지 갈 가능성은 작다.
실제 집단주의 문화인 나라들의 자살률은 꽤 낮아 사우디아라비아는 3.2명, 터키는 7.3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나 일본처럼 집단주의 문화이면서도 자살률은 오히려 더 높은 나라의 존재가 이 학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개인 성향과 사회 문화의 갈등
▲ 각국의 자살률을 보여주는 지도로 붉은 톤이 짙을수록 높다는 뜻이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나라들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많은 영역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자살률이 치솟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리투아니아 1위, 러시아 2위, 벨라루스 5위 등). 반면 한국(4위)과 일본(14위)의 높은 자살률에는 서구 개인주의 성향과 전통 집단주의 문화의 충돌이 일정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 위키피디아 제공
연구자들은 12개 나라 대학생 5572명을 대상으로 개인의 성향과 사회의 문화가 자살 경향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12개 나라는 4개 그룹으로 나뉜다. 먼저 유교 집단주의 문화로 중국과 일본이다(아쉽게도 우리나라는 없다). 다음은 이슬람 집단주의 문화로 터키 등 6개 국이다. 세 번째는 영어권 개인주의 문화로 영국과 미국이다. 네 번째는 가톨릭 개인주의 문화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다.
연구자들은 먼저 설문을 통해 개별 학생들의 개인주의 및 집단주의 성향을 조사한 뒤 자살과 관련된 다양한 항목을 조사했다. 그 결과 학생들의 성향이 자살 행동에 일관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동아시아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개인주의 성향이 높은 게 자살할 마음을 품게 하는 위험 요인으로 밝혀졌다.
논문에서 저자들은 동아시아에서 나타난 현상이 ‘성향-문화 충돌 가설’의 한 예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성향-문화 충돌 가설(personality-culture clash hypothesis)은 개인의 성향과 사회의 문화가 맞지 않을 때 개인의 정신건강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이론으로 2006년 발표됐다.
개인주의 문화의 끝판왕인 미국의 보스턴에서 사는 집단주의 성향 대학생은 우울과 불안, 강박장애, 의존성 성격장애와 높은 상관관계를 보였다. 반면 개인주의 성향 대학생은 그 반대였다. 한편 집단주의 문화인 터키의 이스탄불에 사는 개인주의 성향 대학생은 편집증, 분열증, 자기애성 성격장애, 경계선 성격장애, 반사회적 성격장애에 취약했다. 반면 집단주의 성향 대학생은 역시 그 반대였다.
내가 개인주의 성향이건 집단주의 성향이건 또는 내가 속한 사회가 개인주의 문화이건 집단주의 문화이건 그 자체가 정신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다. 문제는 궁합이 맞지 않을 때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이 집단주의 문화인 사회에 살 때나 그 반대일 때 정신질환에 걸릴 위험성이 높아지고 아울러 자살할 마음을 품게 될 가능성도 커진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라는 말이다.
▲ 서구 개인주의가 어느 정도 침투했음에도 이슬람 집단주의 사회는 여전히 자살률이 꽤 낮다. 자살을 죄악시하는 종교의 가르침이 사람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구에서도 가톨릭(역시 자살을 죄악시한다) 신도가 많은 나라가 상대적으로 자살률이 낮다. 반면 현생을 중요시하는(죽으면 끝) 유교 문화에는 ‘자살을 하면 영혼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관념이 없다. / 위키피디아 제공
한국의 자살률 변화 추이를 봐도 이 해석이 일리가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10명 내외였다. 그런데 그 뒤 급격히 증가해 어느 순간 자살공화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이 사이 개인주의 성향인 사람의 비율이 높아진 게 그 배경이 아닐까.
1987년 군부 독재가 종식되고 이듬해 서울올림픽이 열리며 우리 사회에 서구의 개인주의 문화가 급격히 유입됐다. 이해 서울 압구정동에 맥도날드 1호점이 문을 열었고 11년 뒤인 1999년 이화여대 앞에 스타벅스 1호점이 오픈했다.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했고 인터넷과 SNS에 매료됐다.
불과 한 세대 사이에 이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따라서 개인주의 성향도 크게 늘었을 것이다(특히 젊은 층에서).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유교 집단주의 문화가 버티고 있어 개인의 튀는 행동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 결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갈등하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이르는 것이 아닐까.
20년 전 필자가 프랑스에 출장 갔을 때 겪은 ‘문화충격’ 떠오른다. 당시 회사에 독일인 여직원이 있었는데, 20살쯤으로 보이는 앳된 외모에 키도 작고 눈과 머리카락도 갈색이라 이질감이 덜했다. 하루는 이 친구가 필자 일행을 집으로 초대했다. 우리로 치면 원룸에서 살았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웬 청년이 앉아 있었다. 얼마 전 만나 동거하고 있는 남친이라며 소개했다. 그때 당혹스러움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쓴 기억이 난다.
▲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남성 중심의 한국 사회를 비판하고 있지만, 내조와 육아만으로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개인주의 성향인 주인공이 유교(남존여비) 집단주의 문화에 부딪혀 좌절을 거듭하다 정신질환까지 얻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개인주의 성향 비율이 더 높을 것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지금 우리 사회가 많이 서구화돼 개인주의가 팽배하다고 하지만 동거 중인 젊은 여성이 20년 전 독일 여성처럼 그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까. 열에 아홉은 직장 동료는 물론 가족에게까지 숨기고 있을 것이다. 매춘처럼 처벌받을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유교 기반 집단주의 문화는 이런 ‘일탈’을 여전히 용납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최근 유럽에서 코로나19 2차 유행이 시작되면서 저녁 영업 금지 조치를 재개하기로 하자 그 전날 많은 젊은이들이 술집에 모여 밤새도록 술 파티를 벌이는 장면을 보여주는 외신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행동이 용인되는 게 서구 개인주의 사회다.
반면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묵묵히 보건 당국의 지침을 따르며 방역에 협조하고 있다. 때로 지나친 사생활 침해를 당해도 참고 넘어가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코로나19가 아주 위협적인 질병은 아닌 걸 생각하면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코로나19 방역 성공을 계기로 앞으로도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개인이 사회(집단)에 양보하는 것이 당연시돼 강요하는 문화가 정착되면 곤란하지 않을까. 개인주의 성향인 사람이 무늬만 개인주의이고 사실상 집단주의가 굳건한 우리 사회의 장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결국 정신건강이 나빠지고 그 결과 정신질환이나 자살 충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앞으로도 개인주의 성향인 사람의 비율이 늘면 늘었지 줄 것 같지는 않은 현실에서 이제는 사회가 바뀌어야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평균 수준까지라도 내려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강석기 /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동아사이언스
*강석기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8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