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서성 오장원 전투
고사성어 - 死孔明 (能)走 生仲達
죽을 사
구멍 공
밝을 명
도망칠 주
날 생
버금 중
이를 달
가정전투
마속을 참하다
삼국지 연의 때문에 단순히 명령을 무시하고 패전한 책임으로 참수된 걸로 나오기에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정사 기록에는 마속은 패배하자 도주하다가 잡혀서 죽게되는데 기록이 서로 상충해서 옥에서 죽은 건지 잡혀와서 처형을 시켰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사건이 바로 사자성어인 읍참마속의 기원이 된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제갈량은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오자, 이후 병사와 장수의 수를 줄였고 군대를 훈련시키는 일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관도 대전
관도대전(官渡大戰)은 중국 후한 말의 군벌 조조와 원소가 시기에 관도(官渡)에서 벌인 전투다. 조조와 원소의 운명을 판가름 지은 전투이자 소설 《삼국지연의》 초반부의 하이라이트로, 규모로 치자면 적벽대전, 이릉대전에 필적한다.
적벽대전
적벽 대전은 중국의 삼국 시대, 통일을 목표로 세력을 계속 팽창하던 조조에, 손권과 유비가 연합해 대항하여 양자강에서 벌어진 큰 전투이다.
이릉 전투
夷陵之戰
촉·오 외교관계 파탄에 따른 유비의 친정(親征), 유비의 형주 탈환 전투
기간 : 221년 7월 ~ 222년 8월
장소 : 형주 이릉, 효정, 자귀, 백제에 이르는 범위
이릉지전, 서릉대전(西陵大戰), 혹은 서릉지전(西陵之戰)이라고도 일컬는 중국 삼국시대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이자 관도대전, 적벽대전과 함께 삼국지 3대 대전으로 평가받는 전투이다.
또한 촉한과 손오가 벌인 마지막 분쟁이다.
220년 촉은 오의 공격으로 형주방면의 책임자인 관우를 잃고 형주 또한 상실하였는데, 이에 221년 촉한의 황제 유비가 복수를 하기 위해 오나라를 침공해 발발하였다.
222년 오나라가 막아내고 승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전투를 끝으로 양국간 국경선이 확정되었으며, 두 나라는 다시는 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전쟁원인
관우의 죽음에 대한 유비의 분노가 가장 큰 이유다.
형주공방전이 촉의 형주 상실과 관우의 죽음으로 일단락되자, 여건이 불리하였음에도 유비는 전쟁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많은 세력을 거치며 속내를 숨기고 실리를 잘 챙겼던 유비는 오랜 전우이자 동업자였던 관우의 죽음만큼은 끝내 참지 못한 것이다.
이는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다른 객관적 사유를 찾지 못했다는 점으로 드러난다.
물론 동맹 측의 배신으로 넓은 영토와 세력의 2인자를 모두 잃었기에 유비 입장에서도 어떠한 군사적 액션 없이 참고만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릉대전은 시기적으로나 투입된 전력의 규모로나 무력 시위가 아닌 총력전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삼국지연의에서 등장하는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냈다.'는 이야기. 최초로 등장한 것은 사서인 한진춘추(漢晉春秋)이다.
민간에 퍼져 있던 이야기를 나관중이 더욱 극적으로 재창작한 것.
판본에 따라 밝을 명(明)과 달릴 주(走) 사이에 능할 능(能)을 넣어서 '사공명능주생중달'이라 읽기도 하며, 공명 대신 제갈(諸葛)로 바꾸기도 한다.
삼국지연의 내용
가을 바람이 몰아치던 오장원에서, 제갈량은 믿었던 오나라마저도 패배하여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걸 알자 지금까지 억눌렀던 피로를 모조리 느끼고 쓰러진다. 이에 제갈량은 쇠약해진 몸을 유지하기 위해 7일 동안 답강보두하며 수명을 연장시키는 기도를 올리지만, 천문에도 능했던 사마의는 제갈량을 상징하는 거성이 흔들리는 걸 보고 제갈량이 생명이 위중함을 깨닫고는 군사를 보내 정찰(겸 도발)을 시켰다. 그 결과 제갈량은 기도가 성공할 가능성을 엿보고 희망을 품었지만 적의 기습이라며 당황한 위연이 들어오다가 촛불을 넘어뜨려 꺼버리는 바람에 모조리 허사가 되고, 제갈량은 주위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런저런 당부를 한 후 죽는다.
사마의는 정탐을 나갔던 하후패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촉군이 군사를 물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마의는 무릎을 치며 말했다.
"과연 공명(제갈량)이 죽었구나. 이를 놓치지 않고 얼른 쫓아가서 격퇴해야 한다."
사마의는 몸소 군의 앞에 나서서 촉군을 추격했다. 그 순간, 도망치던 촉군이 피리와 징을 울리며 되돌아왔고, 거기엔 한 승상 무향후 제갈량(漢丞相武鄕侯諸葛亮)이라는 깃발이 보였다. 사마의가 속임수겠지 하고 촉군을 휘둘러보니 과연 제갈량이 수레에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그걸 보자 사마의는 크게 놀라며 외쳤다.
"너무 서두르다가 이런 화를 당했구나! 얼른 퇴각하라!"
그 소리에 위군이 혼란에 휩싸인 채 퇴각했다. 사마의가 너무 정신없이 도망치자 뒤따라온 하후패가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충분히 멀리 왔습니다."
그 때 사마의가 자기 목을 매만지며 말했다.
"내 목이 제대로 붙어 있느냐?"
오장원 전투에서 제갈량이 죽고 촉한군이 퇴각하자 사마의는 드디어 공명이 죽었으니 기회가 왔다고 판단, 추격하여 격퇴하려 했으나 위와 같이 제갈량이 죽기 전에 파놓은 계책으로 인해 놀라 퇴각하고 겁에 질려 영채에 틀어박혀 있다가 한참 후에야 제갈량이 정말로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 이 사마의의 대사 때문에 '내 목이 붙어 있느냐'로도 쓰이곤 한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기다.
제갈공명(諸葛孔明)과 사마중달(司馬仲達)이 한중(漢中)땅을 놓고 싸우며 제 각기 뛰어난 전술을 구사하는 대목
서촉(西蜀)으로 자리를 옮겨 천하 삼분지계(三分之計) 완성한 제갈공명은 우리가 대화중에 흔히 사용하는 출사표(出師表)를 유비 (劉備)의 아들 유선에게 바치고 전장으로 나선다.
조조군과 맞선 촉군은 제갈공명의 뛰어난 전략에 힘입어 연전연승을 거두지만 조조군에는 공명에 못지 않은 지략가 사마중달이 버티고 있어 항상 고비를 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버리기는 아깝지만 먹기는 쉽지 않은’ 계륵(鷄肋), ‘일벌백계를 위해 울면서 아끼는 부하의 목을 친다’는 읍참마속(泣斬馬謖) 등 고사성어도 탄생한다.
수 차례의 원정에도 번번이 물러서야 했던 공명은 결국 지금의 산시성(陜西省) 남서쪽 오장원(五丈原)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이를 눈치 챈 중달은 촉군을 섬멸할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전군을 휘몰아 추격전을 벌인다.
공명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은 바로 이때.
죽기 전 유언을 통해 나무로 깍은 자신의 인형을 진중에 배치함으로써 평소 의심이 많던 중달은 ‘또 속았구나’하면서 후퇴하고 촉군은 무사히 회군할 수 있었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겨버렸다.
죽은 이의 생전 활약상이 수만 대군을 사지에서 구해낸 것이다.